얼마 전에 몇 해 전 결혼한 후배가 이혼을 하게 되었다. 나의 주위에는 선배, 친구, 후배 –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들 중에서 이혼을 한 사람들이 여러 명이다. 결혼이라는 게 헤어지기 싫어서 하게 되는데 살면서 다시 보기 싫어서 이혼하게 된다. 절대 떨어지기 싫어서 결혼했다가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이혼을 하게 되니 결혼과 이혼은 동전의 앞뒤와 비슷한 것 같다. 그래서 후배가 이혼에 관해서 속마음을 털어놓듯 이야기를 해도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세계를 알 수가 없다. 예전에는 온 마음을 다해서 선후배님들과 친구님들의 이혼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제 나도 시들해졌다. 왜냐하면 이혼에 대한 상처와 앙금은 남아있을지언정 일 년 후 오늘이 되면 전부 하하호호 너무나 잘 지낸다. 그래서 나의 속에 좀 못 된 구석이 실금실금 자라나서 그런지 이혼 이야기를 하면 귀로는 듣고 눈은 상대방을 보며 손은 아, 그렇군, 하는 손짓을 하지만 생각은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덱스터처럼 그런 표정을 하고 가면을 쓴 채 완벽한 또 다른 자아를 이용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듣고 있게끔 시킨다.


그럼 나는 무엇을 상상하는가. 이혼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무서울 정도로 떠오르는 생각은 어제 먹은 맥주와 가자미구이다. 후배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글을 볼일도 없다. 후배는 글을 너무나 싫어하고 글을 읽는 건 정말 끔찍하게 생각한다. 어제는 작은 가자미구이와 함께 시원한 버드와이저를 마셨다. 커피는 미지근해도 괜찮다. 물도 시원하지 않아도 잘 마시지만 맥주는 시원해야 한다. 맥주를 가장 맛없게 먹는 것이 큰 페트병에 든 맥주를 시간이 지나 미지근해져 있는데 쭈글 해진 종이컵에 부어서 마시는 거다. 동네 어르신들은 꼭 이렇게 드신다. 괜히 맥주 사러 나왔다가 아는 척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그 맛도 없는 미지근한 맥주를 종이컵으로 마셔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맥주는 시원하게 마시는 거다. 특히 조깅을 하고 땀을 있는 대로 흘린 다음에는. 만약 생맥주 잔에 부어서 마신다면 겉면에 살얼음이 옅게 꽃처럼 피어난 생맥주 잔에 부은 맥주가 정말 맛있다. 시원한 버드와이저에 가자미구이. 작은 가자미구이는 젓가락으로 발라서 먹기보다 들고 뜯어먹는 맛이 있다. 가시도 작아서 젓가락으로 발라 먹다가는 울화통이 치밀어 오를 수 있다. 그냥 원시인이다 생각하고 와작와작 씹어 먹는 것이다. 물론 몸통의 뼈까지 그렇게 먹을 필요는 없다. 이렇게 와사비와 겨자를 뿌려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면 정신이 나른하니 몸을 이어주는 나사가 막 풀려버리는 기분이 든다.


나사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요즘은 아이패드나 아이폰에서 작은 나사를 잘 볼 수 없지만 아이폰4에 박힌 작은 나사는 아주 예쁘다. 그리고 안정감을 준다. 디자인적으로 그 나사 덕분에 기기보다는 어떤 작품을 손안에 가지고 있는 느낌이다. 나사 덕에 탄탄해 보이면서 예쁜, 그 어려운 길을 아주 작은 나사가 해내고 있다. 카시오 지샥 손목 세계도 그렇다. 나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시계도 있지만 이 화면의 폰트 같은 작은 나사가 양 사방에 딱 박혀 있으면 시계가 아주 예뻐 보인다. 무엇보다 나사 때문에 시계가 주는 견고함이 아주 마음에 든다.


맥주와 가자미구이를 먹고 있으면 아이고 이 나사 풀린 놈아, 가 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후배의 넋두리는 끝이 난다. 대부분(나도 속한다) 관계에 힘들어한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고 상처를 준다. 그리고 상처를 받는다. 이 별거 아닌 관계라는 것이 이렇게도 힘들 줄 몰랐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나는 이런 경우를 겪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깊어지면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요즘 김영하 소설가의 ‘작별인사’를 읽고 있는데 거기서도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 소설 속에 또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그 영화 역시 휴머노이드와 인간과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소설 작별인사도, 영화 블레이드 러너도 인간이 정말 인간이 만든 휴머노이드보다 더 우월하고 인간적이며 모든 게 나은 존재인가 대해서 의문점을 던진다. 과연 인간이 휴머노이드와의 관계에서 더 높은 곳에 있다고 말을 할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누가 더 우월하고 더 높고 더 나은지가 왜 중요할까. 게다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는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 김영하 소설가도 말했지만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걸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하는 경우는 없다. 대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잘못을 한다. 그걸 나는 구치소에서 2년 동안 근무하면서 많이 봤다. 사기나 폭력, 강간 미수 같은 더러운 범죄를 지은 사람들은 전부 타인의 잘못으로 인해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만약 너무 힘들어서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나는 관계를 망치고 있는 걸까,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논리적이지 못하고 범우주적인 생각이 많고 성격이 급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혼하게 된 나의 후배, 내지는 친구가 설령 바람을 피워서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탓하기는 싫다. 나는 그저 팔이 안쪽으로 굽는 그런 하찮은 인간이다. 뭘 어떻게 살아도 관계는 힘들다. 관계를 쉽게 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그건 인간관계를 축소하고 또 축소하는 수밖에 없다. 죽고 못 사는 친구가 많아서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분명하게 돌처럼 콱 박혀있다. 힘들어도 내년 오늘이 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다. 누군가는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그런 뻔한 소리인가요?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1년 동안 지내면서 보는 시선, 만나는 사람, 듣는 이야기, 의식과 구조가 조금씩 바둑판처럼 정리가 된다는 말이다. 여름이니까 시원한 맥주나 마시는 거다. 어떻든 겨울보다는 차가운 맥주가 맛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5월 내내 무더운 날이 지속되다가 6월에 접어들어 오늘까지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 많아졌다. 오늘도 흐린 가운데 그 사이의 틈을 벌리고 해가 바닥으로 내려오고 싶어 했다. 어제는 오랜만에 놀랄 정도로 큰 천둥소리에 차렷 자세로 가만히 있기도 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천둥이 콰쾅하고 치면 놀라고 무섭다. 특히 고립된 지역에서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면 그야말로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어이없을 정도로 초라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5월부터 강변의 조깅코스에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별거 아니지만 매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겨울 내내 집 안에서 꽁꽁 들어앉아있던 사람들이 날이 풀리면 야외로 쏟아져 나온다. 또 3개월 정도면? 하던 코로나가 3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야외로 흘러나왔다. 이번 5월은 얼마나 찬란할까. 그러나 달리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뭐랄까, 코로나가 덮친 지구는 인간은 활동량이 줄어들었지만 그 외의 존재들, 동물들이나 곤충이나 날벌레들은 엄청나게 많아졌다. 강변의 수풀이 있는 곳을 지나치려다 놀라게 되는데 그건 정말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날벌레떼가 부우웅하며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서로 누가 누가 빨리 가나 식으로 달리다가 그 수풀 쪽으로 갔는데 전부 욕이란 욕을 다 하면서 으악 이게 뭐야! 팔을 휘젓고, 자전거가 넘어지고, 방망이 같은 것으로 마구 휘두르지만 대략 10만 마리의 벌레 떼가 윙윙 붕붕 하며 코웃음을 칠 뿐이다. 정말 전기 벌레 퇴치기 하나 구입해서 등에 울러 매고 여기까지 달려와서 타다다닥 타 다다다 다다다닥 하며 휘두르고 싶다. 그러면 속이 정말 뻥 뚫릴 것 같다. 10만 마리의 벌레를 죽이는 재미를 알게 되면 다음부터 그 재미를 보기 위해 매일 여기까지 영차영차 달려오는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 가량 타다다닥 타 다다다 다닥하며 벌레들을 죽이다가 어느 날 벌레 퇴치기 사이사이에 벌레들이 가득 끼면서 틱 하며 꺼지는 것이다. 그때 벌레들이 부우 우우 우웅 하며 하늘을 검게 만들어서 나에게 확 덮친다. 나의 온몸에 벌레들이 가득 붙어서 나는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숨을 쉬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 벌레들이 날개를 펴 들고 입 안으로 가득 들어와서,,,


이렇게 달리다 보면, 강변을 따라 조깅을 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 시청이나 구청에서 나와서 강변에 많이 자란 풀을 벤다. 마치 브라질리언 왁싱을 해 놓은 것처럼 싹 베어 버린다. 이렇게 때가 되면 매년 풀을 싹 잘라 버리면 굉장히 많은 벌레도 덜 일고. 풀을 베고 난 다음 바로 지나가면 풀냄새가 확 나는데 이 냄새가 아주 좋다. 꼭 녹차밭에서 맡았던 냄새와 비슷하다. 바람이 없고 낮동안 해가 쨍쨍한 날이라면 냄새가 머물러서 서서 냄새를 한동안 맡았을 텐데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풀냄새가 바람에 따라다닌다.


야외에서 조깅을 하면 좋은 점 중에 하나라면 이런 것이다. 평소에 잘 맡지 못하는 자연의 냄새를 확 맡을 수 있다는 것. 생활 속에서 자연의 냄새는 썩 맡지 못한다. 만약 아직 오래된 골목길이 있는 동네에 산다면 하천을 따라 흐르는 하천의 냄새를 맡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냄새는 인상을 쓰게 만든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맡을 수 있는 좋은 냄새는 죄다 인공적인 냄새다. 샴푸 향, 비누향, 방향제, 조리하는 음식 냄새 그리고 향수 냄새 등이다.


그 와중에 이렇게 풀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건 행운이다. 엄마를 따라 나온 아이들이 와아 이거 무슨 냄새야?라고 엄마에게 묻고 엄마는 풀냄새라고 말을 해준다. 그러한 정경은 어떻게든 보기 좋다. 주말에는 아이들이 엄마나 아빠를 따라 강변으로 나온다. 아이들은 주위에 엄마나 아빠가 있기만 해도 마냥 신나고 좋다. 나도 그런 어릴 때가 가끔 생각이 난다. 아버지를 따라 나와서 아버지는 볼일 본다고 어딘가 상점 안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사장님과 이야기를 하고 나는 상점 안에 가만히 있기가 따분해서 상점 밖 로비에서 혼자 놀아도 그냥 재미있었다.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고 아버지를 따라 나왔기 때문에 친구도 없지만 혼자서 팔만 벌리고 빙글빙글 돌아도 아빠가 저기 상점 안에 있다는 그것 하나만으로 그저 신나고 재미있었다. 강변에 아빠를 따라 나온 아이들이 아빠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훌라후프를 돌리는 배 나온 아빠를 보면서 얼마나 재미있고 좋을까.


그런 아이들이 엄마에게 이거 무슨 냄새야?라고 묻는다. 그 아이들이 커서 언젠가 모든 냄새가 인공적으로 바뀌었을 때 이 풀냄새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아빠와 엄마의 희미한 냄새도 기억한다. 엄마 아빠의 냄새는 그 기억 속에서 좋은 냄새로 남을 것이다.

저 구름 너머에는 맑은 하늘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산양의 뇌를 잘라서 기름을 살짝 발라 따뜻할 때 혀끝으로 그 부드러움을 느끼는 맛이 가지의 속살이다.라고 '무라카미 류'라면 그러지 않았을까. 채소 중에서 몹시 야하고 야들야들한 속살을 입으로 맛보는 기분이 드는 건 가지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가지 요리 중에서 으뜸은 중국 집의 가지 튀김이다. 중국집에서 만드는 수많은 튀김요리 중에서 가지 튀김을 이길 수 있는 건 잘 없다. 씹었을 때 바삭하면서 기름이 죽 나와서 온 입안을 다 마비시킨다. 이토록 황홀한 맛일 수가 있나 할 정도다.


그런데 집에서 가지무침을 해놓으면 젓가락이 가지 않는다. 무도 뜨겁게 조리해 놓으면 정말 맛있는데 차갑게 해 놓으면 젓가락이 의외로 자주 가지 않는다. 무는 고등어조림에 들어가거나, 어묵과 함께 삶기면 오히려 무만 찾아서 먹게 된다. 그러나 늘 보던 무가 밥상에 오르면 손이 가지 않는다. 가지도 그렇다. 가지는 참 맛있는데 무쳐 놓으면 막 먹게 되지는 않는다.


가지볶음이나 가지무침으로 검색을 하면 이미지가 다 비슷하다. 가지볶음과 가지무침은 반찬으로 많이 먹는다. 그러나 튀김으로 먹을 때만큼 맛있지는 않다. 요즘은 물가가 말도 못 할 정도로 상승을 해서 무서운 하루하루지만 가지 정도가 아직 먹거리 중에 저렴한 편에 속한다. 물론 조리를 해야 한다. 조리를 하려면 다른 식재료가 필요하고 불과 물의 사용도 해야 하니 따지고 보면 물가 대비 또 야호라고 할 수만은 없다.


중국집 가지 튀김을 자주 먹지 못하니 가지를 구입해서 조리하는 것도 이것저것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이 들어서 그냥 생으로 먹기도 한다. 가지는 생으로 먹는 맛이 좋다. 근래에는 가지를 그냥 생으로 먹는 맛이 제일 좋은 축에 속한다. 거기에 마요네즈를 뿌리면 야호가 절로 나오는 맛이다. 생으로 먹기 시작한 것도 최근이고 귀찮은 조리도 할 필요가 없고 그냥 와작 씹어 먹으면 속살을 건드리는 맛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조리를 해야 하고, 무침이나 볶음은 싫다면 이렇게 해서 먹으면 가지가 아주 맛있다. 물론 나의 경우다. 집에 양배추와 피망이 있다면 같이 반쯤 조리해도 맛있다. 반쯤 조리한다는 건 덜 익힌다는 말이다. 생으로 먹는 맛과 조리가 된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피망은 생으로 먹는 것보다 불에 굽고 익힌 맛이 훨씬 좋다. 개인적인 입맛이지만 그렇다. 아마 피망은 대부분 생으로 먹는 것보다 아주, 몹시, 굉장히 익혀서 먹는 맛이 더 좋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반 정도 익혀 조리를 잔뜩 해 놓으면 맥주를 홀짝이며 아삭아삭 씹어 먹으면 된다. 맥주는 병으로 먹기 좋은 버드와이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더운 날인데 뜨거운 카푸치노를 한 잔 마셨다. 순전히 감성이 나를 카푸치노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하면 거창할까. '이성'이라는 건 이 더운 날에 무슨 뜨거운 카푸치노야, 할지도 모르지만 가끔 뜨거운 날에도 뜨거운 카푸치노가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이렇게 마시는 카푸치노를 감성적인 카푸치노라고 하고 싶다. 감성적인 카푸치노는 겨울에 마시는 아아와는 다르다. 차가운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건 습관이 개입을 한 것이고, 실내에는 따뜻하다. 그래서 추운 겨울에도 아아를 마시는 것은 감성적인 카푸치노와는 다르다. 감성적인 카푸치노를 건물과 건물 사이, 또는 바닷가의 그늘이 있는 벤치에 앉아서 홀짝이면 감성에 젖어든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감성은 무엇일까.


가끔 시라는 것을 적고 있으면 감성이 남다르네, 같은 말을 듣는다. 하지만 시는 감성으로 적는 게 아니라 고통으로 써내는 것이라 생각이 든다. 감성으로는, 감성만으로는 시를 적을 수 없다고 본다. 고통 없이 시를 적어내는 것 또한 없다고 생각한다. 시에는 그 시인의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는 시인의 고통으로 태어나지만, 태어나는 순간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라 읽는 이의 것이 된다. 시라는 건 감성이라든가 재능이나 의지만으로 써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몸속에 있는 세포, 온몸 구석구석 끝까지 퍼져 있는 말초신경 전부가 시를 향해서 발현의 태동이 가득한 사람이 그것을 형태로 표현하지 못했을 때, 학습으로 시를 적을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시는 완전한 자신의 세계를 훈련으로 통해 밖으로 드러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감성은 어디에서 발현할까. 오히려 감성은 아이러니 하지만 메탈 기기에, 기기 속에서 감성을 더 찾을 수 있다. 손에서 떨어질 수 없는 휴대폰이 어쩌면 이 시대의 가장 최고의 과학의 산물이자 감성에 가장 가까이 근접한 물건일지도 모른다. 특히 태블릿의 직관적인 멀티태스팅의 실행에 있어서 감성적인 모션이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드레그를 했을 때 인터페이스의 움직임이 기기적이고 딱딱하게 느껴지면 사람들은 외면한다.


이는 애플이나 삼성 같은 기업이 사람들은 어떤 것을 좋아하고 무엇에 미치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굉장한 작업을 할 수 있어서 기기가 사람들에게 많이 팔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 하찮은 것 – 즉 사람들이 어떤 감성을 가지고 이 기기를 대하는지, 그리고 그런 감성에 맞게 기기가 감성적인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는지 회사가 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윈도우에서 창을 하나 띄우고 또 다른 하나의 창을 띄우면 밑의 창이 다 가려진다. 같은 크기의 창이라고 했을 때 밑의 창은 당연히 위의 레이어 창에 의해 가려진다. 그런데 아이패드의 이번 멀티태스팅의 팝업 창은 위의 창이 밑의 창을 가리려고 하면 ‘아아, 나 가리지 마’라며 옆으로 살짝 비켜가서 어떤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계속 알려준다. 그러니까 기기가 주인에게 저 방금까지 이 작업을 하고 있었어, 그러니 잊어버리지 마,라고 말하는 것 같다. ios 16에서 실행된다고 하니 기대해보자. 이 감성을.


그래서 오히려 감성적인 부분은 자동차나 태블릿 기기에 더 깊숙하게 들어가서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리고 있다. 아마도 그 시작은 직관적으로 휠을 돌리며 음악을 듣던 아이팟 때부터이지 싶다. 아이팟 클래식의 직관적인 휠을 돌리면 또가닥 소리를 내며 화면이 움직인다. 아주 감성적이다. 이 감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끌어당긴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러한 노력을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고개를 든 것은 그때부터이지 싶다. 영화로 치면 ‘월-E’가 바로 그것이다. 감성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마우스와 깡통로봇이 영화를 보는 이들의 감성을 한 없이 건드렸다.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꼭 보기 바람. 흔히 말하는 죽기 전에 봐야 하는 영화이지 싶다.


그에 비해 문학은 감성보다는 그 외의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경향이 많다. 게다가 요즘은 칼럼이나 비평이 문학의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사람들은 소설보다 인문학이나 칼럼 읽기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해서 비문학이 감성을 잔뜩 장착해서 사람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고 있다.


좀 다른 얘기로, 요즘 팥빙수의 계절이 되었다. 그래서 여러 곳에서 팥빙수가 많이 팔리고 있다. 종류가 눈이 확장될 정도로 많아졌다. 이 이게 팥빙수야? 할 정도다. 짜장 빙수부터 망고빙수, 첵스초코 딸기빙수, 그린티, 인절미까지. 정말 다양한 팥빙수, 아니 빙수가 널렸다. 그렇지만 꼭 옛날 팥빙수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가 찬 사람들이다. 팥빙수는 기본적인 아이덴티티가 있는 그 팥빙수가 최고라고 한다. 그건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 팥빙수가 그 팥빙수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그 감성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처음 빙수를 먹어보는 아이들은 지금 먹는 빙수가 팥빙수의 아이덴티티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맛도 옛날 맛보다 지금의 맛이 훨씬 좋다. 화려하고 가격이 비싸고 카페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팥빙수에는 감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이 감성으로 팥빙수를 대한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달은 그대론데 달을 대하는 사람의 감성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달


자연은 감성을 말하고 공사현장은,,,


책을 읽다가 시계를 보니 문득 색감이 깔맞춤이라


아 감성적인 하루하루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lanca 2022-06-14 1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푸치노를 부르는 글이네요. 내일 카푸치노를 마셔야겠습니다.^^

교관 2022-06-15 11:34   좋아요 0 | URL
카푸치노 한 잔 마셨습니까 ㅎㅎ. 오늘도 카푸치노 처럼 부드럽고 좋은 하루 되세요!
 


초여름이었다. 지금처럼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하고 낮동안은 더운 날이었다. 초여름의 새벽하늘은 저녁 하늘보다 좀 더 회화적이었다. 유리 막으로 본다면 초현실 영화에나 나올법한 하늘 같았다. 구름이 기묘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노을이 다 사라지지 않고 여운을 남겨놓고 여지를 두는 것 같았다. 새벽하늘에서 해 질 녘의 노을을 느꼈다.


초여름이지만 새벽은 긴팔을 입지 않으면 피부가 도돌도돌 반응이 올 정도로 서늘했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밤을 꼴딱 새우고 새벽에 작업이 끝나서 사무실을 나섰다. 새벽 4시의 길거리는 오후 4시의 길거리와는 달랐다. 새벽 3시까지 수북이 쌓인 곳곳의 쓰레기들이 새벽 4시부터 깨끗하게 치워지고 있었다. 공기의 밀도도, 흐름도, 시야도 오후 4시와 다른 새벽 4시의 모습이었다.


나는 집으로 오는데 전통시장의 통닭집 골목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었다. 시장의 통닭집들은 전부 꿰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보였다. 50년 이상 된 통닭집들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고치고, 세우고, 다시 벽지를 바르고 해서 지금까지 버텼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닭을 튀기고 아직까지는 그런 맛이 그리워 사람들이 통째로 튀긴 닭을 먹으러 시장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세상을 차지한 치킨 전문점 앞에서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겨우 견디고 있는 것이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통닭집들은 지치고 힘들어 잠이 들어 보였다. 불은 다 꺼지고 정작만이 골목을 이루고 있었다.


천천히 걷고 있는데 골목의 귀퉁이 부분 기둥 뒤에서 일상에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신음소리는 기이했고 조금은 불안했고 어딘가 닿지 못하는 연약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벽에 부딪혀 힘을 잃고 새벽의 공간 속에서 소멸했다. 조금 겁이 났지만 나는 그 기둥 쪽으로 조용하게 다가갔다. 그 기둥 앞에는 머리가 떡 진 사내가 서서 수음을 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나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가느다란 신음을 내며 수음에 열중했다. 나는 기둥에 몸을 숨긴 채 그의 수음하는 장면을 지켜봤다. 호기심도 아니었고 그에게 난처함을 주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그 풍광이 목가적으로 보였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랬다. 아주 자연스러웠고 프로테우스적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작 은 골 목 의 여 인 숙 입 간 판 이 세 워 진, 건 물 기 둥 에 서 머 리 가 떡 진 사 내 가, 서 서 수 음 하 는 장 면 은, 목. 가. 적. 이 었 다.


어딘지 어울리지 않고 일그러진 것 같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수음을 하던 사내는 초등학교 나와 같은 반 친구였다. 알고 지내다가 친하게 지내게 된 녀석이었다. 녀석의 이름은 혁민이다. 어릴 적 그 녀석은 탁구부였다. 작은 체구의 초등학생이 가슴께까지 오는 테이블 위에서 작은 세계의 탁구공을 재빠르게 받아넘기고 하는 장면은 우리들에게 부러움을 가지게 만들었다. 아직 변성기를 지나지 않는, 물소리 같은 소리로 악악하며 작은 세계를 받아서 저쪽으로 넘겨냈다. 혁민이는 학교 내에서 탁구를 제일 잘했으며 학교 배 대회나 시대회에 나가서 학교의 이름을 전국에 알리는 주역이었다. 혁민이는 우리 집에도 자주 놀러 와서는 밥을 먹고 가기도 했다.


초등학생이라지만 운동부라는 활동과 어머니가 안 계시고 여동생과 아버지와 살고 있던 혁민이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한 탓에 또래에 비해 훨씬 성숙했다. 아버지의 구타 때문에 혁민이의 얼굴에는 어두운 구석이 많았다. 늘 술에 취해있던 아버지는 엄마가 집을 나간 이유를 혁민이에게 돌렸다. 혁민이는 가난했지만 단란했던 나의 집을 부러워했고 놀러 와서 밥을 먹고 실컷 놀다가 나의 아머니가 싸준 반찬을 들고 집으로 가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기억의 공백이 크고, 시간이 비행기처럼 지나가버렸다. 혁민이는 아버지를 따라 타 지역으로 간다며 마지막을 눈물이 고인 눈으로 눈물은 끝끝내 흘리지 않고 떠났다. 그 뒤로 연락이 끊겼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변변찮은 사무실에 다니던 무렵 새벽의 이곳 전통시장의 통닭 골목에서 우연히 혁민이와 마주했다. 하지만 그 녀석은 오래전 혁민이가 아니었다. 얼굴은 조금 커버린 얼굴이었지만 노숙자 같은 모습으로 양손에는 하얀 목장갑을 끼고, 머리를 며칠 동안 감지 못했는지 머리카락은 방향성을 잃은 어린 강아지처럼 볼품없었다.


나는 다가가서 반갑게 아는 척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혁민이가 수음을 다 할 동안 기둥 뒤편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렸다.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다. 바지를 올리는 소리가 났고 나는 조용히 혁민에게 가서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하지만 그 녀석은 나를 알아보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 녀석의 눈은 처음으로 코뿔소를 대하는 모습의 눈빛이었다. 나를 적대시하면서 묘하고 깊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잠시 동안 바라보더니 “백 원만”라고 말을 했다. 다른 말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백 원만, 백 원만, 백 원만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오백 원짜리 하나를 건넸다. 혁민이는 목장갑을 낀 손바닥 위의 오백 원을 쳐다보더니 바닥에 버리고는 어딘가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백 원만 백 원만 하는 소리만 했다. 혁민이는 걸을 때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쳐져 걸었다. 나중에 시장 상인들에게 들은 이야기로 아버지에게 얼마나 심하게 구타를 당했던지 뇌를 다쳐서 그렇다고 했다. 압제, 강압에 뇌가 파괴당하고 나를 비롯한 어린 시절의 기억과 자신의 과거를 몽땅 봉인해버렸다. 후에 시장의 통닭 골목에서는 혁민이가 행인들을 상대로 백 원만을 쫓는 앵벌이 장면을 왕왕 볼 수 있었다. 그 녀석이 나오는 날은 산발적이라고 상인들은 말했다.


혁민이가 통닭 골목에 나타나는 날이면 거리의 아이들이 나무 꼬챙이 같은 걸 들고 혁민이의 다리나 엉덩이를 찌르며 백 원만 백 원만 따라 하며 놀려댔다. 왼쪽 뇌가 파괴된 그 녀석을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상인들에게 퍼진 소문은 허다했다. 방파제 근처에서 앵벌이를 하다가 파도가 삼켰다는 소문도 있었고, 자동차에 치여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 소문에는 자동차에 치여 바닥에 머리가 갈려 피를 흘리면서도 백 원만을 소리 냈다고 했다.


초여름 새벽녘의 기둥에서 수음을 진심으로 하던 그 녀석은 지극히 목가적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