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날인데 뜨거운 카푸치노를 한 잔 마셨다. 순전히 감성이 나를 카푸치노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하면 거창할까. '이성'이라는 건 이 더운 날에 무슨 뜨거운 카푸치노야, 할지도 모르지만 가끔 뜨거운 날에도 뜨거운 카푸치노가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이렇게 마시는 카푸치노를 감성적인 카푸치노라고 하고 싶다. 감성적인 카푸치노는 겨울에 마시는 아아와는 다르다. 차가운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건 습관이 개입을 한 것이고, 실내에는 따뜻하다. 그래서 추운 겨울에도 아아를 마시는 것은 감성적인 카푸치노와는 다르다. 감성적인 카푸치노를 건물과 건물 사이, 또는 바닷가의 그늘이 있는 벤치에 앉아서 홀짝이면 감성에 젖어든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감성은 무엇일까.
가끔 시라는 것을 적고 있으면 감성이 남다르네, 같은 말을 듣는다. 하지만 시는 감성으로 적는 게 아니라 고통으로 써내는 것이라 생각이 든다. 감성으로는, 감성만으로는 시를 적을 수 없다고 본다. 고통 없이 시를 적어내는 것 또한 없다고 생각한다. 시에는 그 시인의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는 시인의 고통으로 태어나지만, 태어나는 순간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라 읽는 이의 것이 된다. 시라는 건 감성이라든가 재능이나 의지만으로 써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몸속에 있는 세포, 온몸 구석구석 끝까지 퍼져 있는 말초신경 전부가 시를 향해서 발현의 태동이 가득한 사람이 그것을 형태로 표현하지 못했을 때, 학습으로 시를 적을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시는 완전한 자신의 세계를 훈련으로 통해 밖으로 드러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감성은 어디에서 발현할까. 오히려 감성은 아이러니 하지만 메탈 기기에, 기기 속에서 감성을 더 찾을 수 있다. 손에서 떨어질 수 없는 휴대폰이 어쩌면 이 시대의 가장 최고의 과학의 산물이자 감성에 가장 가까이 근접한 물건일지도 모른다. 특히 태블릿의 직관적인 멀티태스팅의 실행에 있어서 감성적인 모션이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드레그를 했을 때 인터페이스의 움직임이 기기적이고 딱딱하게 느껴지면 사람들은 외면한다.
이는 애플이나 삼성 같은 기업이 사람들은 어떤 것을 좋아하고 무엇에 미치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굉장한 작업을 할 수 있어서 기기가 사람들에게 많이 팔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 하찮은 것 – 즉 사람들이 어떤 감성을 가지고 이 기기를 대하는지, 그리고 그런 감성에 맞게 기기가 감성적인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는지 회사가 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윈도우에서 창을 하나 띄우고 또 다른 하나의 창을 띄우면 밑의 창이 다 가려진다. 같은 크기의 창이라고 했을 때 밑의 창은 당연히 위의 레이어 창에 의해 가려진다. 그런데 아이패드의 이번 멀티태스팅의 팝업 창은 위의 창이 밑의 창을 가리려고 하면 ‘아아, 나 가리지 마’라며 옆으로 살짝 비켜가서 어떤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계속 알려준다. 그러니까 기기가 주인에게 저 방금까지 이 작업을 하고 있었어, 그러니 잊어버리지 마,라고 말하는 것 같다. ios 16에서 실행된다고 하니 기대해보자. 이 감성을.
그래서 오히려 감성적인 부분은 자동차나 태블릿 기기에 더 깊숙하게 들어가서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리고 있다. 아마도 그 시작은 직관적으로 휠을 돌리며 음악을 듣던 아이팟 때부터이지 싶다. 아이팟 클래식의 직관적인 휠을 돌리면 또가닥 소리를 내며 화면이 움직인다. 아주 감성적이다. 이 감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끌어당긴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러한 노력을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고개를 든 것은 그때부터이지 싶다. 영화로 치면 ‘월-E’가 바로 그것이다. 감성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마우스와 깡통로봇이 영화를 보는 이들의 감성을 한 없이 건드렸다.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꼭 보기 바람. 흔히 말하는 죽기 전에 봐야 하는 영화이지 싶다.
그에 비해 문학은 감성보다는 그 외의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경향이 많다. 게다가 요즘은 칼럼이나 비평이 문학의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사람들은 소설보다 인문학이나 칼럼 읽기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해서 비문학이 감성을 잔뜩 장착해서 사람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고 있다.
좀 다른 얘기로, 요즘 팥빙수의 계절이 되었다. 그래서 여러 곳에서 팥빙수가 많이 팔리고 있다. 종류가 눈이 확장될 정도로 많아졌다. 이 이게 팥빙수야? 할 정도다. 짜장 빙수부터 망고빙수, 첵스초코 딸기빙수, 그린티, 인절미까지. 정말 다양한 팥빙수, 아니 빙수가 널렸다. 그렇지만 꼭 옛날 팥빙수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가 찬 사람들이다. 팥빙수는 기본적인 아이덴티티가 있는 그 팥빙수가 최고라고 한다. 그건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 팥빙수가 그 팥빙수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그 감성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처음 빙수를 먹어보는 아이들은 지금 먹는 빙수가 팥빙수의 아이덴티티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맛도 옛날 맛보다 지금의 맛이 훨씬 좋다. 화려하고 가격이 비싸고 카페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팥빙수에는 감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이 감성으로 팥빙수를 대한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달은 그대론데 달을 대하는 사람의 감성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달
자연은 감성을 말하고 공사현장은,,,
책을 읽다가 시계를 보니 문득 색감이 깔맞춤이라
아 감성적인 하루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