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몇 해 전 결혼한 후배가 이혼을 하게 되었다. 나의 주위에는 선배, 친구, 후배 –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들 중에서 이혼을 한 사람들이 여러 명이다. 결혼이라는 게 헤어지기 싫어서 하게 되는데 살면서 다시 보기 싫어서 이혼하게 된다. 절대 떨어지기 싫어서 결혼했다가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이혼을 하게 되니 결혼과 이혼은 동전의 앞뒤와 비슷한 것 같다. 그래서 후배가 이혼에 관해서 속마음을 털어놓듯 이야기를 해도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세계를 알 수가 없다. 예전에는 온 마음을 다해서 선후배님들과 친구님들의 이혼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제 나도 시들해졌다. 왜냐하면 이혼에 대한 상처와 앙금은 남아있을지언정 일 년 후 오늘이 되면 전부 하하호호 너무나 잘 지낸다. 그래서 나의 속에 좀 못 된 구석이 실금실금 자라나서 그런지 이혼 이야기를 하면 귀로는 듣고 눈은 상대방을 보며 손은 아, 그렇군, 하는 손짓을 하지만 생각은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덱스터처럼 그런 표정을 하고 가면을 쓴 채 완벽한 또 다른 자아를 이용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듣고 있게끔 시킨다.


그럼 나는 무엇을 상상하는가. 이혼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무서울 정도로 떠오르는 생각은 어제 먹은 맥주와 가자미구이다. 후배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글을 볼일도 없다. 후배는 글을 너무나 싫어하고 글을 읽는 건 정말 끔찍하게 생각한다. 어제는 작은 가자미구이와 함께 시원한 버드와이저를 마셨다. 커피는 미지근해도 괜찮다. 물도 시원하지 않아도 잘 마시지만 맥주는 시원해야 한다. 맥주를 가장 맛없게 먹는 것이 큰 페트병에 든 맥주를 시간이 지나 미지근해져 있는데 쭈글 해진 종이컵에 부어서 마시는 거다. 동네 어르신들은 꼭 이렇게 드신다. 괜히 맥주 사러 나왔다가 아는 척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그 맛도 없는 미지근한 맥주를 종이컵으로 마셔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맥주는 시원하게 마시는 거다. 특히 조깅을 하고 땀을 있는 대로 흘린 다음에는. 만약 생맥주 잔에 부어서 마신다면 겉면에 살얼음이 옅게 꽃처럼 피어난 생맥주 잔에 부은 맥주가 정말 맛있다. 시원한 버드와이저에 가자미구이. 작은 가자미구이는 젓가락으로 발라서 먹기보다 들고 뜯어먹는 맛이 있다. 가시도 작아서 젓가락으로 발라 먹다가는 울화통이 치밀어 오를 수 있다. 그냥 원시인이다 생각하고 와작와작 씹어 먹는 것이다. 물론 몸통의 뼈까지 그렇게 먹을 필요는 없다. 이렇게 와사비와 겨자를 뿌려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면 정신이 나른하니 몸을 이어주는 나사가 막 풀려버리는 기분이 든다.


나사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요즘은 아이패드나 아이폰에서 작은 나사를 잘 볼 수 없지만 아이폰4에 박힌 작은 나사는 아주 예쁘다. 그리고 안정감을 준다. 디자인적으로 그 나사 덕분에 기기보다는 어떤 작품을 손안에 가지고 있는 느낌이다. 나사 덕에 탄탄해 보이면서 예쁜, 그 어려운 길을 아주 작은 나사가 해내고 있다. 카시오 지샥 손목 세계도 그렇다. 나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시계도 있지만 이 화면의 폰트 같은 작은 나사가 양 사방에 딱 박혀 있으면 시계가 아주 예뻐 보인다. 무엇보다 나사 때문에 시계가 주는 견고함이 아주 마음에 든다.


맥주와 가자미구이를 먹고 있으면 아이고 이 나사 풀린 놈아, 가 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후배의 넋두리는 끝이 난다. 대부분(나도 속한다) 관계에 힘들어한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고 상처를 준다. 그리고 상처를 받는다. 이 별거 아닌 관계라는 것이 이렇게도 힘들 줄 몰랐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나는 이런 경우를 겪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깊어지면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요즘 김영하 소설가의 ‘작별인사’를 읽고 있는데 거기서도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 소설 속에 또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그 영화 역시 휴머노이드와 인간과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소설 작별인사도, 영화 블레이드 러너도 인간이 정말 인간이 만든 휴머노이드보다 더 우월하고 인간적이며 모든 게 나은 존재인가 대해서 의문점을 던진다. 과연 인간이 휴머노이드와의 관계에서 더 높은 곳에 있다고 말을 할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누가 더 우월하고 더 높고 더 나은지가 왜 중요할까. 게다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는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 김영하 소설가도 말했지만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걸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하는 경우는 없다. 대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잘못을 한다. 그걸 나는 구치소에서 2년 동안 근무하면서 많이 봤다. 사기나 폭력, 강간 미수 같은 더러운 범죄를 지은 사람들은 전부 타인의 잘못으로 인해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만약 너무 힘들어서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나는 관계를 망치고 있는 걸까,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논리적이지 못하고 범우주적인 생각이 많고 성격이 급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혼하게 된 나의 후배, 내지는 친구가 설령 바람을 피워서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탓하기는 싫다. 나는 그저 팔이 안쪽으로 굽는 그런 하찮은 인간이다. 뭘 어떻게 살아도 관계는 힘들다. 관계를 쉽게 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그건 인간관계를 축소하고 또 축소하는 수밖에 없다. 죽고 못 사는 친구가 많아서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분명하게 돌처럼 콱 박혀있다. 힘들어도 내년 오늘이 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다. 누군가는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그런 뻔한 소리인가요?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1년 동안 지내면서 보는 시선, 만나는 사람, 듣는 이야기, 의식과 구조가 조금씩 바둑판처럼 정리가 된다는 말이다. 여름이니까 시원한 맥주나 마시는 거다. 어떻든 겨울보다는 차가운 맥주가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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