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들으며


라디오 광고에 공익광고가 나오는데 자동차 운전을 할 때 우회전에 관한 것이다. 2022년 1월 1일부터 우선 멈춤을 하지 않으면 과태료가 붙는다. 우회전 멈춤 광고를 그때부터 지금까지 라디오서 한다. 라디오를 매일 듣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데, 늘 할 때마다 '오늘부터' 지키지 않으면 과태료가 붙는다고 한다. 오늘은 5월 27일이라고.




Necessary Evil


광고의 미학은 영화를 뛰어넘었다. 15초의 광고 속에는 15시간이 가지는 마력이 숨어 있다. 그래서 광고에 현혹이 되어 지갑을 열고 안 돌렸던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한다. 광고를 만드는 이들은 광고 한 편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경우도 있다. 뮤직비디오 보다, 영화보다, 다큐보다 더 멋지고 혼을 빼놓는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광고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마케팅의 본질을 일깨워준다. 이런 멋지고 아름다운 광고가 우리는 싫다.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는 늘 광고가 있다. 광고가 붙지 않으면 프로그램은 망하고 만다. 오죽하면 유튜브 영상에는 영상이 돌아가는 중에도 광고가 나온다. 유료로 전환하면 이런 보기 싫은 광고를 보지 않게 해준다고 한다. 지들도 사람들이 광고를 싫어한다는 걸 안다. 누구보다 잘 안다. 광고는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건 절대적이다. 어떤 노력을 해도 광고는 없어지는 일은 없다. 그런 광고를 보기 싫어 광고가 길어지면 채널을 돌리고 만다. 광고의 홍수 속에서 광고는 쓰레기가 되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왜 수고롭게 미학적인 광고를 찾아야 할까. 프로그램의 수장들은 광고를 따내기 위해, 광고를 받기 위해 광고주들에게 굽신 굽신이다. 광고는 거대 빅브라더이며 몹들은 그 안에서 조밀하게 움직일 뿐이다. 그런 광고를 우리는 거부한다. 그러나 나에게 광고가 들어온다면 지금까지의 얼굴을 지우고 호의적으로 바뀐다. 광고란 그런 것이다. 어쨌거나 마릴린 맨슨의 뮤직비디오를 죽 보는데 광고가 튀어나오는 건 어떻게든 싫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며칠 전 검색을 하다가 네이버 한 페이지에 동시에 뜬 두 기사를 보게 되었다. 하나는 코로나가 풀려 해외에 여행을 가는 행복한 기사였고, 또 하나는 죽음을 일주일 남긴 이십 대 유튜버의 작별 인사에 관한 기사였다. 한 페이지에 이렇게 동시에 뜬 두 기사를 보니 인간의 삶이라는 게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다른 삶을 한 시간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불안하면서 두렵기도 하지만 신기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두 기사는 상반된 내용이었는데 의미도 달랐다. 해외에 여행을 가는 가족의 기사에는 코로나 때문에 여행경비가 너무 들어서 행복하지 않다는 내용이었고, 이제 죽음을 앞둔 23살의 유튜버는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을 받고 눈을 감을 수 있어서 불행하지 않다고 했다. 도대체 인간의 행복이란 뭘까. 어떤 삶을 살아야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일까. 행복이라는 건 멋진 몸매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날씬하고 근육이 좋은 멋진 몸매는 그걸 유지하기 위해 매일 몇 시간식 운동을 한다.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이 신기루는 도망가고 만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을 유지하기란 행복에 도달하는 것보다 훨씬 노력을 많이 해야 하고 에너지 소모가 많고 어렵다. 행복은 측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난 행복보다 이번 행복이 훨씬 크고 넓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어제 기사에 난소암 4기 판정을 받았던 23세 그 유튜버가 세상을 떠난 기사가 났다. 그녀는 자신에게 관심을 준 모든 이들 덕분에 행복하다고 하며 눈을 감았다. 행복이란 뭘까. 23살에,, 너무하지 않은가.




기쿠지로의 여름을 보면서


마음의 한구석이 아직 아이로 남아있으려는 어른들과 이미 어른이 되어 버린 9살의 점잖은 소년의 우정을 그렸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다시 보니 예전만큼 감흥은 없다. 철없는 어른과 철이 들어버린 소년의 이유는 비슷했다. 왜 철이 없는지, 왜 철들어 버렸는지, 그 이유는 같았다. 두 사람은 마사오의 엄마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며 아직 아이로 남으려는 마음이 많은 어른들과 함께 어울린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만났는데 마음이 통하고 노는 게 재미있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기적이다. 요즘 공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하는 취준생을 보면 공부는 너무 힘들지만 친구들을 만나면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나의 어려움을 알아준다. 작은 선물에 크게 기뻐하고 아프면 챙겨주는 친구들. 이런 친구들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막막한 취업 문턱 때문에 늘 불안하다. 그러나 인고의 노력 끝에 시험에 합격해서 취업이 되면 그런 불안은 사라진다. 그렇지만 반나절 이상 마음이 맞지 않고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매일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불안이 있던 공백의 자리에 다른 것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게 된다. 운이 나빠 성적인 희롱을 당하고 나면 더 이상 여기는 내가 바라던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되고 만다. 기적은 그렇게 현실에서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마사오는 과묵하고 어른 같은 9살이지만 생판 모르는 형들을 만나서 실컷 웃는다. 어른들이지만 말도 잘 통하고 노는 것도 비슷한 사람과 어울리는 건 기적에 가깝다. 그러나 때가 되면 각자의 길을 가야 할 시간이 온다. 그때는 과감하게 사요나라 할 수밖에 없다.




마릴린 맨슨


위에서 잠깐 마릴린 맨슨을 언급해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마릴린 맨슨의 노래를 좋아한다. 특히 이런 목소리, 목을 긁어서 내는 이런 소리를 아주 좋아한다. 록에 미치도록 딱 맞게 장착되는 강렬한 소리다. 그러니까 인간의 목에서 이런 소리가 난다는 건 너무나 멋진 일인 것이다. 이렇게 목을 긁는 소리를 낼 수 있는 시기는 한정적이다. 20 초반에서 중반 그 언저리다. 그리고 연습과 피나는 노력을 하면 30대까지 이어지지만 더 이상 하게 되면 본인에게는 물론이고 밴드에게도 타격이 오게 될 수도 있다. 엑스제팬의 히데가 이런 목소리였다. 굉장했다. 특히 다우트 리믹스 록 버전에서 첫 인트로 부분은 마릴린 맨슨의 더 돕쇼에서도 들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서태지도 울트라맨이야 앨범을 들고 나왔을 때 이런 목소리였다. 강력했다. 서태지가 강력하게 목소리를 긁어서 노래를 부르다니! 우리는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드래곤 역시 목소리를 긁어서 노래를 부른다. 역시 멋지다. 지디의 무대를 보면 록적이다. 록 스피릿이 외국의 록밴드만큼 강렬하다. 지디를 뒷받침하는 밴드들 역시 드럼과 일렉 기타로 록 사운드를 뿜어낸다. 마이클 잭슨의 음악적 뿌리가 록인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여하튼 지드래곤은 음악도 스타일도 멋지다. 잘 다듬어진 화초 같은 아이돌이 쏟아지는 한국에서 나올 수 없는 드문 케이스다.  아무튼 마릴린 맨슨의 맨 얼굴은 아마도 텍사스 주 어디 시골에서 아버지 차에 올라서 멍하게 노을을 바라보는 미국 소년의 얼굴 같을지도 모른다. 이런 마릴린 맨슨이 성폭행 범죄에 휘말렸다. 마릴린 맨슨을 고소한 사람은 ‘왕좌의 게임’에서 조프리에게 벽에 과녁처럼 화살이 몸 여기저기에 꽂혀 죽은 시녀 역이었던 에스미 비앤코. 2월에 성범죄 고소가 이루어졌고 그 내용만을 보자면 마를린 맨슨은, 본명이 브라이언 워너는 그녀를 10대 때부터 그루밍하고 몇 년씩이나 끔찍하게 학대를 했다고 했다. 지금 현재 마릴린 맨슨은 자신의 개인비서, 예술가 등 여섯 명이나 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며 sns에 그런 사실을 공유했다. 재판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브라이언의 변호사는 터무니없는 비앙코의 재정적 요구가 있었다고 한다. 비앙코 측의 변호사는 브라이언 워너가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 잠도 재우지 않고 술과 마약만 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마릴린 맨슨 하면 예전에 괴기하고 강렬한 록을 하지만 모친에게는 아주 잘하는 효자라는 말이 있었다. 또 비앙코를 만나기 전에는 지구에서 가장 예쁘다는 디타 본 티즈와 2006년에 결혼을 했었다. 헤어질만해서 헤어졌겠지만 아니 왜. 디타 본 티즈는 패션계가 가장 사랑하는 인물 중 한 명인데 스타일이 끊임없이 아주 확고하다. 무대 위나 일상이나 거의 변화가 없는 스타일이다. 또 너무 늙지 않아서 오히려 더 무섭기까지 하다는 그녀가 마릴린 맨슨의 어떤 점을 봤을까. 하지만 그건 두 사람만 아는 사실이고 이 사실이라는 것도 시간이 지나서 진실에 다가가려고 하면 진실이란 사실과 점점 멀어지는 경우가 짙다. 마릴린 맨슨은 뮤직 비디오 보는 재미가 있다. 그의 뮤비는 광고보다 영화보다 더 재미있고, 충격적이고, 시사하는 바가 크다.




눈치 보지 말고 글을 쓰자


여기서 말하는 눈치는 타인에게서 느끼는 눈치 보다 자기 자신의 눈치를 말한다. 자신이 자기에게 보는 눈치, 자기만의 눈치, 자신이 검열을 통해 눈치는 보는 것을 말한다. 6월 1일까지 공모전 마감인데 두 달 전에 와서 아직 처음을 시작하지 못했다고 하는 녀석의 말을 들었는데 아직도 몇 줄 적지 못하고 고민만 한다고 했다. 속으로 때려치워라. 쓰기 전에 왜 생각만 많이 하는지 모르겠다. 일단 적고 보면 글이라는 건 어떻게든 써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내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글은 알아서 써진다. 다 쓰고 난 뒤에는 공모전 마지막 날까지 고쳐 쓰고, 또 고쳐 쓰면 된다. 머릿속에 써야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싶을 때 바로 적지 않으면 어느새 다른 생각이 그 생각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들어온다. 그것의 반복적 순환이 계속된다. 왜 자꾸 잘 쓰려고 할까. 물론 잘 써야 하겠지만 잘 쓴 글은 이미 다 출판되어서 세상에 나와있다. 사람들은 이름도 없는 무명의 잘 쓴 글보다 유명한 작가들의 글을 읽을 뿐이다. 그러니 미리 그런 생각을 하지 말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 된다. 누가 보던 말든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쓰면 된다. 타인이 보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자신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볼 수 있게 되면, 자신과 마주하면 꼭 타인이 나의 창작물에 크게 관심이 없더라도 나 자신이 나의 글을 통해서 기쁨에 도달할 수 있다. 하루에도 인터넷에는 수천 개의 글이 올라온다. 아니다, 수만 건의 글은 올라올 것이다. 그중에 중앙매체의 기고 란에 제대로 편집이 되어 제대로 실린 제대로의 칼럼도 수두룩하다. 그런 좋은 글도, 잘 쓴 글도 사람들은 대부분 읽지 않는다. 끊임없이 쓰고 버티면서 조금씩 나아가는 글을 발견하는 자신만의 기쁨을 느껴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일상의 한계를 느꼈을 때 글쓰기를 함으로 나의 일부가 모든 것으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굉장한 일이다.


문학은 태생적으로 개인주의적이며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도 모두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세계입니다. [중략] 잘 느끼자. 감성 근육을 키우자. 그리하여 함부로 침범당하지 않는 견고한 내면을 가진 고독한 개인들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자. 이것이 제가 오늘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 김영하 [말하다]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게에 자주 오는 사람이 있다. 많고 많은 죽 중에 늘, 언제나 호박죽만 먹는다. 그 사람은 작가라고 한다. 말수가 없고 매일 비슷한 시간에 와서 호박죽을 주문해서 천천히 먹고 간다. 작가는 60대 정도로 보인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작가라고 해도 남자는 20년 전에 단편 소설집을 한 권 발표했을 뿐이다. 그 뒤로는 전혀 글을 쓰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아니 글을 쓰고 있을지는 모르나 그 이후 발표된 글은 없다고 한다. 작가는 호박죽을 먹는다는 느낌보다 조용하게 배 안에 그 음식을 채운다는 기분이 들게 먹었다. 작가는 내가 가게에서 일하기 훨씬 전부터 왔다고 했다. 나는 언젠가부터 그 작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그 작가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작가는 늘 앉는 자리가 있다. 그 자리가 마음에 드는지 꼭 그 자리가 비어 있으면 거기에 앉았다. 그 자리에 누군가가 앉아 있으면 밖의 의자에 앉아서 그 자리가 빌 때까지 기다렸다. 사장님은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작가가 오는 시간에는 될 수 있으면 그 자리를 비워두려 했다. 하지만 작가는 자주 왔지만 매일 오지는 않았기에 그 자리에 손님이 앉는 다고 하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작가는 그 자리 때문인지 언젠가부터는 이른 오전에 오기 시작했다. 가게가 문을 여는 시간에 오기도 했다. 와서는 느긋하게 앉아서 호박죽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작가는 음식을 재촉하지 않았다. 작가가 늘 앉는 자리는 비워두기는 공간이 남아 돌아서 2인용 작은 테이블을 두었는데 작은 창이 있어서 밖으로 바다의 수평선이 보였다. 이곳은 작은 해안이 있는 바닷가로 밤이 되면 해안의 가로등에 불빛이 들어왔고 이른 오전까지 불을 밝혔다. 작가는 호박죽이 나오기 전까지 그 광경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작가는 늘 호박죽만 먹었는데 질릴 만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다른 죽은 본사에서 재료를 받아서 죽을 만들었지만 호박죽은 사장님이 재배한 호박으로 호박죽을 만들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다고 사장님이 말했다. 그렇지만 작가는 그 호박죽만을 먹는다고 했다. 어느 날은 소주를 시킬 때가 있었다. 소주를 마실 때에는 꼭 두 병을 마시는데 한 병은 약 3분의 2 정도를 남기고 갔다. 소주를 마시면서 크으 하는 추임새 같은 건 내지 않았다. 술도 취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시간을 들여 마셨기 때문이다. 작가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인사를 건넨 사람 중에는 작가의 맞은편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가는 이도 있었다. 작가는 거의 표정이 없었다. 또 어떤 사람은 작가의 팬이라며 작가의 책을 꺼내 사인을 부탁한다고 했다. 작가는 난처해하는 표정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하더니 책에 사인을 해주었다.

 

 “호박죽의 색을 좋아해요.”


 어느 날 작가는 사장님에게 그렇게 말했다. 사장님은 그 말을 듣고 미소를 한 번 지었다. 단골들은 주로 오전에 온다. 작가도 이른 아침에 와서 호박죽을 먹고 갔다. 나는 작가를 보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이른 오전으로 바꾸었다. 저녁보다 손님도 많고 일도 많아서 더 힘들었지만 작가를 보기 위해서는 이른 오전에 올 수밖에 없었다. 사장님도 작가와 비슷한 연배로 어린 시절 작가가 되기 위해 습작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가게에는 사장님이 살뜰하게 써 놓은 죽에 대한 설명이 문학적이었다. 사장님은 작가의 소설집을 읽었다고 했다. 나도 그 소설집을 읽고 싶었지만 절판이어서 더 이상 구할 수 없었다. 사장님은 나에게 그 소설집을 빌려 주었다. 나는 단편소설집을 읽고 더 작가에게 관심이 생겼다. 5편으로 된 단편소설은 주인공들은 전부 다르지만 모두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이야기는 작가와 작가의 부인, 그리고 작가의 자식의 이야기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작가가 궁금해서 작가에게 다가가려고 해도 알 수 없는 어떤 결계를 쳐 놓은 것처럼 호박죽만 갖다 주고 나면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작가는 호박죽을 즐긴다는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작가의 소설 중에 ‘슬픔에 기대어 위로받는 건 아무 인간이나 할 수 있다’는 말은 나의 내부 속 어떤 부분을 계속 두드렸다. 작가는 어디에 살까. 이 근처에 살까. 자주 혼자서 호박죽을 먹으러 이른 아침에 오는 것을 보니 독신자 아파트에 사는 게 아닐까. 부인은 어디 갔을까. 첫 소설집이 나온 후 더 이상 작품이 발간되지 않은 걸로 보아 다른 일을 하며 지내는 것일까. 그건 알 수 없다. 나는 작가의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소설 중에 두 번째 소설을 여러 번 읽었다. 거기에는 아내가 좋아했던 음식에 대해서 나왔다. 물론 소설에서는 아내라는 칭호는 없었다. 여자와 남자가 나왔다. 남자가 그 음식을 먹고 있으면 여자의 창자와 간 따위를 잘 갈아서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 음식은 죽처럼 숟가락으로 떠먹을 수 있을 정도로 흐물흐물한 것이며 색은 노랗다고 했다. 정확하게 호박죽이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그건 호박죽에 가까웠다.


 소설 속 여자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서로 사랑을 했고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서로 생각했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 회사에서 일을 열심히 했다. 아내에게 예쁜 집을 선물하는 게 남자의 목표였다. 아내는 남자를 위해 식사를 했다. 남자는 아내에게 음식에 대해서 일절 맛없다고 하지 않았다. 음식을 먹고 짜네, 맵네, 밍밍하네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맛있게 먹었다. 그런 남편이 좋아서 아내는 매일 열심히 장을 봐서 남편의 식사를 만들었다. 남편은 미소로 아내와 식사를 했다. 매일 맛있는 표정으로 음식에 대해서 맛없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남자는 회사, 집, 회사, 집이었다. 주말에도 회사에서 일을 했다. 아내가 같이 보내자 하면 음식을 맛있게 먹던 표정으로 집을 장만해서 아내에게 줄 거라며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어느 날 여자의 어머니가 집으로 왔다. 사위에게 줄 거라며 닭을 삶을 거라고 했다. 닭을 삶는 동안 여자는 남편에게 내놓은 식사를 어머니에게 내주었다. 어머니는 그 음식을 맛보고는 아니 이렇게 간이 안 되어 있어서 어떻게 먹었니?라고 했다. 그녀가 만든 음식은 전부 너무 짜거나, 너무 간이 안 되어 있어서 먹을 수 없는 음식들뿐이었다. 여자는 어릴 때 식이장애를 한 번 겪었다. 다 이겨냈다고 생각했지만 미각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 뒤로 남편이 늘 짓는 그 미소가 이상하게 보였다. 맛없는 음식을 맛있다고 억지로 웃으며 먹는 그 표정. 쉬지 않고 회사를 나가버리는 이유가 자신의 음식 솜씨가 없어서 그렇다고 믿게 되었다. 그 뒤로 아내는 사라졌던 식이장애가 심해졌다. 아내는 아무 음식도 먹지 못하게 되었다. 점점 퀭해지고 말라가는 자신의 모습도 보기 싫어서 아내는 구석진 곳으로 숨기만 했다. 남자는 그럼에도 그 미소를 지으며 밖에서 사 온 음식을 아내에게 먹였다. 아내는 남편의 그 미소를 보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다. 그 이상하고 일그러진 미소, 늘 괜찮다고 하는 미소, 남편이 사 온 음식을 먹고 아내는 구토를 하고 오바이트를 했다. 남편은 아내의 구토물을 그릇에 담았다. 그날도 아내는 씻지 못해 냄새나는 몸으로 어두운 방구석에서 쭈그리고 있었다. 남편은 말없이 들어와 노란색의 흐물렁 거리는 음식을 숟가락으로 떠서 아내의 입으로 넣어 주었다. 그 음식을 먹는 아내는 더 이상 구토를 하지 않았다. 아내는 그 노란색의 음식을 다 먹으며 소설은 끝이 났다. 나는 이 소설을 여러 번 읽었다. 재미있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지만 섬뜩했다.


 더 섬뜩한 소설이 있었다. 5편의 소설 모두가 노랗고 흐물렁거리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였다. 호박죽이라고 대 놓고 말을 하지 않았지만 호박죽이라는 건 읽어보면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소설이었는데 끔찍했지만 너무나 아름다워서 빨려 들어간 소설이었다. 한 비빔밥 식당의 이야기였다. 비빔밥 식당은 치료를 목적으로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주 외전 곳에 위치한 식당은 주택풍 건물을 개조한 식당이었다. 중 2층까지 있고 음식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와서 이 식당의 비빔밥을 먹고 조금씩 식사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갔다. 그런 소식이 알음알음 처져 외진 곳이지만 차를 몰고 일부러 이곳까지 왔다. 깊은 산속에 위치한 식당은 경치가 좋아서 사람들은 밥만 먹고 돌아가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고 마음의 안정도 취했다. 식당의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물이 맑아서 산천어도 살고 있었다. 3층짜리 식당은, 2, 3층은 숙박이 가능했다. 물론 비용이 꽤 들었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부유층들이었다. 그들이 이곳에 오는 이유는 엄선된 재료를 가지고 만든 신선한 비빔밥을 먹으러 오는 것이지만 비빔밥을 먹고 나오는 후식 때문이었다. 후식이 노란색의 물컹한 음식으로 숟가락으로 떠먹는 것이었다. 그 음식을 먹는 순간 우황청심환을 먹은 것처럼 마음의 안정이 되었다. 무엇보다 대외적으로는 괜찮지만 가정적으로 불안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이 상태라면 무엇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돈은 있을 만큼 가지고 있었다. 다 쓰지 못하고 죽을 부유층들은 속사정은 그만큼 따라주질 못했다. 아이들 중에서 신경이나 정신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끌어안고 있는 집이 많았다. 대마를 넘어 약을 하고 자동차로 질주하여 사람을 치어 받기도 했고 그대로 아무 집이나 들어가 칼을 휘두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음식에 대한 장애가 깊었다. 사람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데 음식을 거부한다. 그러니 약을 해서 그 모든 것을 해소하려는 부유층 자제들이 많았다. 이 식당을 알게 된 후에는 몸도 균형이 잡히고 체력이나 체격도 좋아졌다. 부모들은 이 비빔밥 식당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돈을 더 지불하고서라고 후식을 악착같이 먹었다. 하지만 이 후식에는 비밀이 있었다. 후식의 주 재료가 되는 호박은 인간의 몸에서 딴 호박이었다. 사람을 땅에 밤쯤 묻고 거름과 물을 주어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고 묻어 놓은 사람의 몸과 얼굴에서 호박에 자랐다. 주로 집을 나온 아이들이나 자살을 하려는 젊은 사람을 잡아와서 땅에 묻고 채소화 시켰다. 반은 식물상태로 반은 인간의 상태로 있었다. 묻어 놓은 사람은 미미하지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생각을 하는 건 힘들었다. 거름만 잘 주면 사시사철 끊임없이 호박을 자라게 했다. 비빔밥의 재료 역시 그랬다. 거기에서 한 손님으로 온 부유층의 아들이 노란색의 음식에 매료되어 자신이 땅속으로 들어가 몸이 점점 채소화 되어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내용이 이어졌다. 그 과정이 몹시 끔찍하면서도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인간과 식물과의 혼합이었다.


 첫 번째 소설에는 음식 맛을 못 느끼는 주인공이 나온다. 주인공은 아무래도 젊은 시절의 작가 자신은 것 같았다. 주인공은 전혀 음식의 맛에 접근할 수 없었다. 미각을 상실한 것이다. 그런 주인공이 노란색의 액체에 가까운 음식을 먹기까지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네 번째 소설에는 밥을 먹지 않아서 마른 체형을 하고 있던 여고생은 오히려 그 몸매 때문에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수학여행을 가게 된 날, 여고생들을 미워하던 반 친구들이 마시는 음료에 수면제를 탔다. 경주까지 가서 불국사를 돌아보던 중에 여고생은 몸이 나른하고 잠이 자꾸 오는 것을 느끼며 어딘가에 앉아서 그만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아무도 없고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여고생은 한 사찰의 방에서 일어났는데 몸을 일으키려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여고생은 무서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쓰러진 여고생을 안고 온 사람은 스님이었다. 스님은 여고생의 몸에 독이 있으니 그 독을 다 빼내야 한다고 했다. 여고생은 스님의 말을 믿지 못했지만 몸에서 기운이라는 것이 몽땅 빠져나가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스님의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받은 덕에 다음 날 새벽에는 일어날 수 있었다. 맑은 공기를 마셨다. 공기가 맛있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 알았다. 스님은 아침식사 시간에 여고생에게 노란색의 숟가락으로 떠먹을 수 있는 죽을 주었다. 그 죽에는 냄새라는 것이 소거되어 있었다. 여고생은 음식을 먹는 것이 고욕이었다. 음식을 먹으면 먹을수록 몸이 아주 더러워지는 것 같았다. 점점 음식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것은 세속의 음식이기 때문이었다. 여고생은 스님이 만들어준 노란색의 죽을 먹고 이 세계가 더 이상 허무한 세상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만 눈물이 죽 흘러내렸다. 여고생은 그곳에 남아 비구니가 되기로 했다.

 

 또 다른 소설은 삶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는 주인공이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믿음을 가지려 하지만 죽음의 손은 주인공에게 점점 다가왔다. 믿음이 종교나 사람이 아니라 노란색의 음식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 사람들은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살려고 하는지, 왜 사람들은 사람들을 납득시키려고만 하는지 주인공은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가 다른 사람을 납득시키려고만 하는지 주인공은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가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는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아내는 납득시키고, 남편을 납득시키고, 아이들을 납득시키고, 선생님을, 학생을, 사장을, 직원을, 동료를 납득시키는데만 시간을 소비했다. 주인공은 자신에게 죽음의 손이 다가온다는 두려움에 떨던 어느 날 노숙자가 밥퍼에서 얻은 노란색의 액체에 가까운 음식을 내밀었을 때 그걸 먹고 알게 되었다. 어떤 믿음이라는 것이 그 노란색의 음식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노란색의 음식을 한 숟가락 떠먹을 때 ‘혼자다 아니야’라고 말해주었다.


 또 한 편의 소설은 음식 맛 자체를 못 느끼는 주인공이 나온다. 주인공은 아무래도 작가 자신인 것 같았다. 주인공은 전혀 맛이라는 것에 접근이 불가능했다. 미각을 상실한 채 태어난 것이다. 그런 주인공이 노란색의 액체에 가까운 음식을 먹기까지의 이야기가 있었다. 다섯 편의 소설들은 전부 허무와 그 허무에게 둘러 쌓인 주인공과 주변인들의 이야기였다. 인간은 마치 태어나면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관념이 축복이라고 부여받았다. 이 세상의 누군가는 식사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와 섞여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간혹 그들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나는 작가의 삶이 궁금했다. 작가의 얼굴은 어떠한 결락을 한껏 그려놓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간혹 사장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슬쩍 미소를 짓기도 했는데 그럴 때 더 얼굴이 안돼 보였다. 작가의 삶을 글로 써보고 싶었다. 나도 소설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욕망처럼 들끓었다. 왜냐하면 작가는 호박죽을 깨끗하게 비웠지만 점점 생에 대한 애착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작가는 왜 이후 소설을 발표하지 않고 있는 걸까. 인간의 허무란 무엇일까. 나는 허무에 대해서 생각을 자주 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허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허무는 우울과 다르겠지, 그리고 슬픔과도 다를 거야. 그 정도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게 나의 한계다. 허무라는 건 그저 텅 빈 공동 같은 마음일 거라는 모호한 상상만 할 뿐이다. 작가에게 허무에 대해 묻고 싶었다.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 허무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어째서 그런 소설을 썼을까. 어째서 거의 매일 같이 호박죽만 먹을까. 어째서 호박죽을 먹는다, 라는 느낌보다 위장에 그저 넣어 둔다, 라는 느낌으로 보일까. 60대 작가에게 묻고 싶었다. 작가는 사장님이 가끔 말을 시키면 짤막하게 대답을 했다. 그는 주로 예, 아니오, 로 대답을 할 뿐 길게 말을 하지는 않았다.

 작가가 호박죽을 먹는 모습은 카메라가 확대를 한 것처럼 크게 보였다. 숟가락으로 호박죽을 떠서 수염이 군데군데 잡초처럼 난 입을 움직여 호박죽을 먹는 장면이 꼭 티브이 화면 속에서 확대한 그림처럼 눈에 들어왔다. 부드럽고 달콤한 노란색 호박죽이 작가의 입으로 들어가서 혀 위에서 사라지는 그 모습까지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멍하게 보고 있다가 사장님에게 혼나기도 했다. 작가만 오면 나는 딴 사람이 된 것 마냥 멍하게 작가가 호박죽을 먹는 모습을 봤다. 마치 그래야 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작가의 몸에는 상처가 많았다. 거친 무엇인가로 피부를 많이 문지른 것 같았다. 아니다, 그 정도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벽돌로 몸을 갉아 버린 것 같았다. 그 자리에 딱지가 앉고 또 괜찮아질 만하면 벽돌로 피부의 그 자리를 문질러 버린 것처럼 형편없었다. 피부는 나이 듦을 피해 갈 수 없어서 늘어져 탄력도 이미 잃고 있었다. “작가님, 몸은 왜 이런 거죠?” 작가는 나의 물음이 한참 말이 없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천장을 보며 누웠다. 나는 말이 없는 작가가 순간 너무 미웠다. 이루 말도 못 할 정도로 미웠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왜 그랬냐고. 왜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몸을 이렇게나 방치를 하느냐고 왜! 왜! 왜! 나는 소리를 지르며 울고 말았다. 눈물이 이렇게나 많이 나올 줄 몰랐다. 눈물은 흘러 가슴으로 떨어졌다. 작가는 내가 울도록 가만히 내버려 주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작가가 미웠지만 그래서 고마웠다. 작가는 나의 가슴을 안아준다든가, 어깨를 두드려주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나의 몸을 더듬고 탐닉하고 사정까지 해버린 주제에. 나는 엉엉 울었다. 우리는 왜 이토록 허무를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할까.


그때 작가가 호박죽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

호박죽을 먹다 떠오른 글을 적어 보았다. 잘 다듬어서 중편소설로 써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밥에 올려 먹기에 좋은 오징어무침


안주하기에 좋은 오징어 초무침




오징어무침이 더 맛있을까, 오징어 초무침이 더 맛있을까. 그전에 남자의 경우 만약 공중화장실, 정확하게는 공공장소에 있는 화장실이 아니라 주상복합건물에 있는 화장실-공중 화장실은 아니나 건물 내 입점한 가게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소변을 볼 때 소변을 보기 전에 손을 씻는 게 나을까. 소변을 본 후에 손을 씻는 게 나을까. 손은 한 번만 씻을 수 있다면 말이다. 공중화장실이 아니라서 비번을 누르고 화장실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다 보니 코로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비번을 눌렀기 때문에 남자의 경우 들어가서 소변을 보려면,,,, 아무튼 손을 한 번 씻는다면 소변을 누기 전에 씻는 게 나을까.  


소변을 본 후에 씻는 게 나을까. 그리고 한 번만 씻어야 한다는 규칙이 없어도 남자들의 경우 들어갈 때 손을 씻고, 나올 때 씻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마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래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요즘은 남자 소변기가 자동이라 앞에 서면 물이 자동으로 나오지만 예전에는 손으로 눌러야 하는 소변기가 많았다. 고속도로 휴게소 남자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며 눌러서 물을 내린 다음 자신의 것을 턴 다음 바지를 끌어올렸다. 그런데 그 남자가 매독균에 걸린 것이다. 남자는 사창가에 간 적도 없고 콘돔을 사용했는데 매독균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유를 알고 보니 그 남자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소변기를 사용하기 바로 전 매독이 걸린 남자가 사용을 하면서 버튼을 눌러서 물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매독균은 이 세상에 창궐한 모든 세균 바이러스 중에서 유일하게 도시에서 섬으로 간 바이러스라고 한다. 모든 바이러스는 섬에서, 섬에 있는 동물에 의해서 도시로 들어오게 된다.  


그렇다면 세균과 바이러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냥 대중적으로는 세균은 더운 날에 창궐하고, 바이러스는 차가운 날에 창궐‘했다’. 그랬었다. 요즘처럼 날이 더워지는 날에 세균이 번식을 많이 해서 어패류 같은 음식을 조심해서 먹어야 했다. 세균은 독립해서 살아가는 완전한 생명체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뱃속에서 꾸물꾸물 알아서 움직이면서 식중독일 일으키고 그 외에도 공격적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폐를 공략해서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자연산 너무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회를 먹을 때 꼭 자연산을 부르짖는 아버님들이 있다. 이렇게 자연산만 찾는 아버님에게 양식을 내놓아도 맛을 보면 잘 모를 가망이 많다. 특히 자연에 앉아서 회를 먹을 때 된장, 초장, 같은 양념이 있고 그에 곁들여 먹는 음식재료가 많으면 이게 자연산인지 양식인지 전혀 모른다. 자연산은 잡아서 바로 먹는다면 괜찮지만 수족관에 넣어두고 3시간 이상 지나면 자연산 물고기는 스트레스를 받아서 똥을 싸고 그걸 먹고 다시 뱉어내거나 똥을 싼다. 게다가 수족관의 특성 때문에 소포제를 사용을 해야 한다. 약품 같은 걸 넣으니 그게 좋을 리가 없다. 그에 비해 양식은 세균이 자연산보다 훨씬 없다. 항생제도 적당하게 사용하고 좋은 사료를 먹이며 키우기 때문이다. 값도 자연산보다 저렴하다. 또 제주도에서 양식하는 광어는 양식장이 커서 운동량도 많아서 씹었을 때 회의 물성도 자연산 못지않다고 한다. 그러니 어설프게 비싼 돈 주고 자연산 찾지 말고 양식도 좋다. 회는 일본처럼 싱싱회가 더 맛있다. 맛으로만 따지면 그렇다. 우리는 활어회를 먹는 것을 선호하지만 숙성시킨 싱싱회는 회 그 자체에서 아미노산이 죽죽 나오기 때문에 활어회보다는  맛은 더 좋다. 노무현 정부 때 회를 저렴한 가격에 맛있게 국민들에게 먹게 할 요량으로 대대적인 사업을 벌여 편의점에서 이 싱싱회를 5000천 원에 팔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싹 없어졌다. 중요한 건 자연산이 양식보다 세균은 훨씬 더 많다.


바이러스는 추운 겨울에 많았었다. 감기 바이러스는 늘 겨울에 사람들에게 들러붙어서 겨울만 되면 “감기 조심하세요~”가 인사가 되었다. 바이러스는 웃기지만 독립된 생명체가 아니니까 어딘가, 숙주를 만들어서 거기에 기생을 한다. 바이러스는 숙주인 사람과 사람에게 잘 옮겨 다닌다. 겨울에 유독 감기 바이러스가 많이 걸린 이유는 목욕탕이었다. 꽉 막혔지, 수증기 많지, 침이 탕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지, 예전에는 손톱깎이도 다 같이 썼지. 뭐 이런 이유 때문에 겨울에 감기 나으려고 목욕탕에 한 번 갔다 오면 오히려 더 붙어서 기침을 콜록콜록했었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바이러스가 여름에도 인간에게 들러붙는다는 걸 알았다. 마찬가지로 세균 역시 추운 겨울에도 활동하는 세계가 되었다. 이제 그런 경계가 무너졌다. [휘발유와 경유의 경계도 무너졌다. 짜파게티와 너구리의 경계도 무너져 짜파구리가 나왔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도 무너졌다] 바이러스는 너무 많고, 또 아주 많아서 바이러스 종류마다 백신이 다 있지도 않고 치료제도 다 없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백신의 부작용이나 후유증을 앓고 있는 나를 보더라도 아직 안전하게 완벽 차단하지는 못한다. 백신을 3차례나 맞아도 바이러스에 걸리기도 하지만 걸려서 그저 넘어가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거의 반 죽음 상태까지 간 사람들도 많은 걸 보면 그렇다는 걸 알 수 있다.


섬에서 한 두 마리나 몇 마리 안 되는 동물이 걸린 바이러스가 도시로 들어오게 되면 그 여파는 실로 엄청나다. 특히 서울처럼 인구밀집이 과포화 상태인 도시는 바이러스가 침투하게 되면 감당이 어려워진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2년 동안 혹독하게 경험했다. 영화 ‘아웃 브레이크’를 보면 섬에서 원숭이 한 마리가 바이러스를 인간 세계에 어떻게 옮기는가에 대해서 잘 나온다. 그 영화보다 더 다큐 같았던 ‘컨테이젼’을 보면 바이러스의 전염성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다. 21년에는 같은 제목의 영화 ‘아웃브레이크’가 나왔다. 이 영화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염에 관한 영화다. 하지만 매독균은 순전히 인간이 창궐시켜 도시에서 섬으로 옮겨간 유일한 균이라고 한다. 여러 모아 보아 인간은 참 대단한 존재다.

 

오늘 앵무새 종류 중에 한 종류를 키우는 사람을 만났는데 앵무새가 거의 사람처럼 주인을 따르고 분리불안을 일으키고 애교 떠는 모습에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애견카페처럼 버드 카페가 있어서 그곳에서 새의 발톱도 깎아주고 장난감도 있어서 자주 간다고 했다. 그 앵무새의 이름이 초록인데 초록이는 한 20년 정도 산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앵무새가 자연 상태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자란다면 몇 년 살지 못한다. 고양이와 개도 마찬가지다. 고양이 같은 경우 집에서 인간의 손을 타면 10년 정도는 사는데 자연 상태의 고양이들은 3, 4년 정도 산다고 한다. 인간의 곁에서 사람의 손을 타고 간식과 음식을 가려가면서 먹으면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다. 그러니 인간이란 정말 대단한 존재다. 인스턴트 제품이 쏟아져 사람들이 빨리 죽을 것 같지만 예전에 비해서 체격과 체력도 크고 좋아졌고 수명이 훨씬 늘어났다. 물론 늙는 것도 예전의 시간에 비해 방해를 덜 받고 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다 이렇게,,, 음식을 먹기 전에는 손을 씻고 먹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22-05-26 1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반적으로 자연산과 양식 맛 구분이 쉽지 않죠. 횟집 주인이나 미식가 외에는 잘 몰라요. 솔직히 알아도 돈 아깝죠. ㅎㅎ 자연산 고집하는 심리는 명품 구매 심리랑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요.

교관 2022-05-27 11:20   좋아요 0 | URL
정말로 그런 심리일 거 같아요 ㅎㅎ. 보여주고 싶어 하는 욕구가 이제 우리 인간의 기본 욕구 속에 집어 넣어야할까 봅니다
 

아직 새것 같아



매일 조깅을 하면서 아이팟 클래식으로 음악을 듣는다. 주머니가 있는 옷을 입지 못하는, 땀이 무지막지하게 나는 한 여름인 7, 8월에는 아이팟 셔플로 음악을 들으며 달린다. 셔플은 소매나 어딘가에 꼽아서 다니면 된다. 너문 가볍기 때문에 어디에서인지 없어지면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다. 카세트테이프가 많은 나는 한 겨울에는 가끔씩 미니 카세트를 들고 조깅을 하는데 오토리버스 기능이 없어서 A면이 끝나면 벌벌 떨면서 뒤집어 줘야 한다.


어떻든 주로 아이팟 클래식으로 음악을 들으며 조깅을 한다. 하루에 보통 1시간 30분이나 2시간 정도 뛰거나 걷는데 그동안 들을 수 있는 음악이 그렇게 많지 않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팟은 160기가인가? 제일 큰 용량의 아이팟 클래식이다. 그 안에 노래만 한 2000곡 들어있다. 저장용량에 비해서는 적은 양이다. 그래도 2000곡을 다 들으려면 꽤나 시간이 걸린다.


하드 디스크가 들어있어서 침수나 물리적인 힘에 약한데 나는 막 쓰고 있는 데도 아직 고장은 없는 것이 신기하다. 단지 오래되어서 배터리가 초기만큼 오래가지 않는다. 그래서 3일에 한 번씩은 충전을 시켜준다. 구입했을 때 케이스를 씌워놓고 계속 다니다가 가끔 닦을 때나 분리를 해서 그런지 케이스를 빼버리면 아이팟 클래식 본체는 새것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매일 들고 다니며 아무 곳에나 넣어두고 막 꺼내서 휙휙 사용하는데 이상하다면 이상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들고 다니는 60년 된 올림푸스 필름 카메라도 그저 딱 보면 완전 새것처럼 보인다. 또 루믹스 렉삼이도 거의 새것과 다름없다. 심지어는 운동화도(조깅을 할 때 신는 운동화가 아닌) 7년씩 신고 다니고 있다. 특히 금방 닳아 없어질 것만 같은 컨버스화는 2015년에 구입을 했는데 아직도 신고 있다. 아이패드에는 보호필름 따위 붙이지도 않고 사용하는데, 벌써 6년이나 됐는데도 스크래치가 가거나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도, 아이팟도, 패드도 운동화도 조심조심 사용하지도 않는데 그런 것을 보면 그건 개인에 붙어 있는 특성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특성이라는 것이 물품에게 까지 스며들어 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카메라는 사진을 찍는 용도이기에 사진을 찍지 않을 때는 그저 어딘가에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고, 운동화도 조깅을 할 때 빼고는 나는 거의 앉아 있기 때문에 딱히 운동화가 재빨리 닳을 기회가 적다. 아이패드 역시 늘 사용하고 있지만 내가 이 기기로 주로 하는 건 그저 키보드를 블루투스로 연결해서 공모전에 보내는 소설을 적는 데 사용할 뿐이다. 양손에 들고 과격하게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입했을 때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지 않았나 싶다. 아이팟 클래식도 마찬가지다. 매일 조깅을 하는, 한두 시간 정도 사용을 할 뿐이다. 게다가 한 여름에는 셔플에게 양보하니 케이스 속에 보호받는 아이팟이 그렇게 닳을 이유도 없다.


아이팟 클래식 이야기를 하기로 했으니 아이팟 클래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노래가 2천 곡 정도가 들어있는데 팝이 천곡, 가요가 천곡 정도로 반반씩 들어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인도 노래가 몇 곡이 있어서 왜? 하는 생각을 했다. 노래를 보통 내가 집어넣었는데 예전에 후배에게 부탁을 해서 마돈나 노래를 넣어 달라고 했는데 시크릿에 마돈나를 넣어놔서 뭐뭐야;; 했던 적도 있었다. 또 내가 그러진 않았을 텐데 마이큐의 노래가 거의 10곡 정도가 들어 있었다. 종교적인 색감이 있는 노래들인데 또 듣다 보면 리듬이 좋다. 팝은 주로 시끄럽고 강렬한 메틀이 많을 줄 알았는데 또 생각 외로 조용한 노래들이 많았다. 특히 사진에서처럼 조니 미첼의 노래가 많았고, 제니스 조플린이 노래도 꽤나 있었다. 또는 빠르고 파괴적인 음악을 했던 핼러윈의 캐논 변주곡 록 버전이나(조깅할 때 들으면 주체할 수 없음) 마이클 잭슨 노래가 엄청 있어서 좋다.


무엇보다 좋은 건 데이라이트의 노래가 많이 있었다. 데이라이트의 데이라이트, 엔젤 송, 아는 여자부터 머리를 자르고 등 데이라이트의 노래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데이라이트의 love present는 가사도 좋고, 이때의 데이라이트 목소리가 정말 좋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데이라이트의 이때 목소리를 요즘의 볼빨간사춘기에서 느껴진다. 라디오에서도 데이라이트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아직 길거리에 레코드 가게가 있어서 스피커를 통해서 데이라이트의 노래가 나왔다.


운명의 이끌림만을 그냥 믿어보는 걸

한차례 쏟아지는 소나기라 생각해 괜찮을 것 같은데

느낌이 좋아 아늑한 떨림 따뜻하고 포근한 인형 같아

주문을 걸어 묶어버릴 거야 부드러운 한숨으로 느껴봐

달콤한 환상이 좋아 말해줘 사랑한다고


가사가 정말 한 편의 달콤한 러브러브 일본 영화 같다. 요즘처럼 힘들고 지치고 쓰러지고 막막함이 없는, 그저 맑고 깨끗한 첫눈에 반한 사랑 같은 노래 가사다. 그러다가 데이라이트의 목소리가 확 변했다. 좀 더 깊어졌고 좀 더 성숙해졌지만 데이라이트의 색이 옅어진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시간에 두들겨 맞듯이 2022년이 되어서 보니 모두가 사라졌다. 데이라이트를 검색해봐도 이젠 더 이상 뭔가를 알 수가 없다. 유튜브의 근황 올림픽은 어서 데이라이트를 찾아보길. 여하튼 요즘 아이팟 클래식에 눈독 들이는 사람이 생겼다. 귀찮다. 정말.

셔플과 카세트 플레이어


케이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매일 비슷한 곳을 조깅을 하면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면서 든 생각은 같은 날이 단 하루도 없다는 것이다. 자연은 이렇게 매일 다른 그림을 그려 놓는다. 색감도 매일 다르다, 때론 강렬하게 때론 부드럽게 하늘과 강에 수놓는다.


나는 인성이 그렇게 썩 좋지 못하다. 그런 소리를 간혹 듣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반론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인성이 좋은 사람, 두루두루 모든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 인성이 좋은 사람 중에 그 관계를 깊이 있게 이어가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인성이 좋다. 나쁘다를 누가 구분을 할 수 있을까.


조깅을 하면 그룹으로 조깅을 하는 사람들을 본다. 지난번 겨울에도 한 번 이야기를 했지만 그들은 주로 아주머니들로 이 힘든 조깅을 하면서 헤헤 호호하며 즐겁게 이야기까지 한다. 대단하다 정녕. 리스펙이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고독하게 홀로 조깅을 하는 것이 좋다. 무릇 조깅이란 혼자서 숨을 헐떡거리며 땀을 있는 대로 쏟으며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혼자서 조깅을 하면 평소에 듣지 못한 음악을 들을 수 있고, 평소에 하지 못한 상상을 할 수 있어서이다.


김갑수 평론가도 그랬지만 아마도 개인적으로 무엇인가 남기고 싶은 욕망이 강한 사람들이 있는데, 요컨대 문학을 한다든지, 미술을 한다든지- 소설을 쓰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설치 미술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인성이 좋으면 꽝이다. 인성이 좋아서 사람들하고 두루두루 잘 지내면 무엇인가 남기고 싶어도 시간이 없어서 못하게 된다. 한 인간이 만들어내는 작품은 고립의 산물이다. 친구도 없고, 선후배도 없고, 부모 하고도 사이가 좋지 못하고, 여자 하고도 맨날 틀어지는 그 고립된 자아가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괴로움이 응축되어서 그 응축된 덩어리가 뭐가 됐든 간에 어떤 형태로 탄생하게 된다. 그게 문학작품이 되었든 간에, 그림이 되었든 간에, 노래가 되었든 간에.


니체가 성격이 운명이라고 했다. 니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성격에 의해서 어떤 사람이 살아지는지가 주어진다. 이 성격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이 스타일은 혼자일 때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누군가가 앞에 있으면 이 스타일은 나타난다. 가령 너는 왜 걔만 나오면 꼭 그렇게 말을 하더라, 같이 된다. 그래서 넓게 보면 성격은 조금씩 바뀔 수 있지만 그 속의 스타일은 잘 바뀌지 않는다.


영화 컨텍트를 보면 지구 밖 이종의 언어를 지구의 언어학자가 해석을 한다. 영화가 너무 느린데 너무 심오하고 무엇보다 너무 빠져든다. 지구 밖의 이종, 외계인들은 그들의 언어를 통해 시간의 개념이 우리, 인류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인간에게 시간이란 흐름을 말한다. 1살의 시간이 있고, 25살의 시간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1살이나 25살이나 89살이나 같은 시간대를 살아간다. '거의 없다' 말을 빌리면, 그러니까 1살이 되면 89살의 시간까지 알 수 있는 것이다. 89살의 시간대에 놓인 자신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그 미래의 시간에 내가 잘못된다 할지라도 그 시간을 지키는 이유는 아마도,,, 이 영화는 테드 창의 소설이 원작이다. 테드 창의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를 읽으며 든 생각은 테드 창은 홀로 외롭게 고립된 세계를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고립되지 않으면 이런 소설을 쓸 수 없다. 그리고 컨텍트의 원작인 ‘네 인생의 이야기’ 역시 외롭지 않으면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예민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에 약하고 인성이 좋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조깅을 하면서 보는 달과 나무는 늘 외롭게 보인다. 전 우주의 고독을 잔뜩 지니고 있다. 나무는 외롭지만 뿌리를 통해 서로 사랑을 확인한다. 그렇지만 저 달은 잠깐 발광함으로 자신의 존재를 잊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 어쩌면 세상이 온통 형형색색의 컬러라서 더 외로울지도 모른다. 흑백이라면 덜 외로울지 몰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전부 거리로 나와 흑백이 된 몸으로 춤을 출지도 모른다. 영화 ‘오버 더 펜스’에서 사토시가 새가 되어 몸짓을 하듯 춤을 출지도 모른다. 이상하지만 아름다운 춤. 그게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그나저나 극한직업에서 창식이는 왜 테드 창이었을까. 잘 보면 실제 테드 창의 모습과 조금 닮으려고 안경이나 표정이나,,,, 창식이가 정말 테드 창이 아닌 테드 창이 되려고 했을까. 이병헌은 정녕 천재라는 말일까.  아무튼 채널 돌리다가 극한직업 나오면 그냥 멈춤 해서 보게 되는 이상한 영화.

이 미묘한 색감을 어찌하리


이 경계의 컬ㄹ러를 보라


고요한 색감과 컬러와 또


달은 분명 하나지만 사람들을 다 따라다니는 능력이 있다


노랑노랑노랑노랑노랑붉


아휴 다정해라


나무는 아무튼 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