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린 그림


만약 거짓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진실만 이야기한다면 과연 살기 좋을까. 진실만 있는 세상에서 진실의 가치는 똥과 같다. 우리가 진실을 바라고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건 도처에 거짓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매일 거짓말을 수십 번은 할 것이다. 거짓말이라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의 대척점에 있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거짓이란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에서 확대되거나 축소된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진과 글을 거짓이라는 양념이 묻어있다. 모임에 나갔는데 돈 잘 번다며 얼마 벌어?라고 물었을 때 똑바로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광고에는 거짓이라는 양념이 다 묻어 있다. 먹으면 다 낫고, 먹으면 다 좋다고 하지 별로 안 좋다고 말하는 광고는 없다. 장사하는 사람들 역시 손님을 향해 대부분 거짓의 양념이 묻는 말을 한다.

살면서 하는 선의의 거짓말도 거짓의 범주에 속한다. 우리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배우지만 얼굴을 보며 못 생겼다, 뚱뚱하다, 재수 없다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건 어린이들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어린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어린이들이 내뱉는 말은 진실에 가깝다. 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똥인 경우가 많다. 어린이들은 진실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진실을 말하여 가장 가까이 있는 엄마와 아빠에게 상처를 주는 빈도가 높다.

부모 역시 아이들에게 매일 거짓말을 한다. 이제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은 많은 친구들을 만나면서 수많은 이야기가 생각 속으로 밀려들어온다. 딸은 집으로 와서 친구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확인받고 싶어 아이는 어떻게 생기냐고 물어 온다. 부모는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축소하거나 확대해서 이야기를 해준다. 또는 완전한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하는 거짓말은 진실을 돋보이게 한다. 빛을 발하게 만든다. 일상의 거짓말은 일탈 같은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정치인들이다. 국민의 입이자 국민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니까. 무엇보다 서민들을 위하는 정치지인들이기에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들이 서민을 대표하기에는 일단 보유한 재산의 차이가 너무 크다. 추운 곳에서 벌벌 떨며 일하거나 장사해보지 않은 엘리트가 정치인이 되어서 무슨 서민을 대표하는 발언을 할 것인가. 그저 거짓말을 할 뿐이다. 월급도 굉장히 많이 받는다. 나라가 어렵거나 곤경에 빠져도 정치인들의 월급은 내려갈 줄 모른다. 그들의 사무실에는 보좌관이 6명에서 9명까지 있다.

이 세상에 [절대]라는 말은 거의 사용이 불가능하다. 절대적인 건 없기 때문이다. [영원]과 결이 비슷하다. 영원히 사랑할게 하는 말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절대가 그렇다. 그러나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정치인이다. 아쉽게도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정치인이다. 사회에서 촉망받고 명망 높은 학자, 변호사. 교수들이 정치지인이 되면 어째서 아이큐 50처럼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정치인이 되어서 그 생활이 일상이 되어 시간이 흐르면 권력의 맛을 한 번 보고 빠져버려 헤어 나올 수가 없다. 관료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는 국민에게 관심이 없다.

정부는 국민에게 간섭만 한다.

우리는 현 대통령이 창피하다.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건 우리 편의 장점과 잘하는 것을 진실되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잘못된 점을 거짓으로 욕을 하는 게 훨씬 낫다. 나쁜 거짓말이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이는 하루키의 단편 [침묵]을 보면 잘 나온다. 소설 '침묵'은 주인공에게 회사 동료인 오자와가 고등학교 때의 일을 들려주는 이야기다. 오자와는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이고 책을 좋아했다. 아이가 집에만 있는 것이 걱정이 된 부모님이 친척이 운영하는 복싱장에 보내게 된다. 복싱을 배우면서 오자와는 권투라는 운동은 상당히 고독하고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게 되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복싱을 배우는 사람은 링 밖에서는 사람을 때려서는 안 된다는 철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복싱을 배우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오자와가 다른 사람을 때리는 일이 발생한다. 바로 동급생인 아오키라는 친구를 때리게 된다. 아오키는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은 아이였다. 하지만 친해지기 전에도 오자와는 아오키에게 느껴지는 부담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건 아오키가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은 것이 딱 집어낼 수 없지만 거짓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아오키는 진짜로 하지 않고 허울과 껍데기뿐인 위선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오자와는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복싱을 하면서 학교의 어떤 시험이든 일등을 하면 무엇인가를 사주겠다는 부모님의 약속 때문에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영어시험에서 오자와는 일등을 한다. 영어 시험은 아오키가 늘 일등을 하던 과목이었다. 일등을 빼앗긴 아오키는 그 뒤로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오자와가 커닝을 한 것이라고. 소문은 돌고 돌아 오자와의 귀에 들어왔다. 화가 난 오자와는 사람을 때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아직 수련이 덜 된 오자와는 아오키와 말다툼을 하던 끝에 때리는 일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 뒤로 생활은 조용하게 흘러갔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떨어져 있다가 다시 같은 반이 된 아오키와 오자와. 어느 날 같은 반의 마쓰모토라는 친구가 지하철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게 되었다. 학교의 분위기도 안 좋아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오키는 오자와에게 맞았던 그 일을 잊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아오키는 몇 가지 ‘사실’만을 이야기한다.

첫째, 마쓰모토는 왕따를 당했고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다.

둘째, 오자와는 오랫동안 복싱을 배워왔다.

셋째, 나는(아오키는) 중학교 때 오자와에게 맞은 적이 있다.

이런 몇 가지 사실을 흘리게 된다. 그 뒤로 사실이 진실에서 벗어나게 된다. 마치 복싱을 배운 오자와가 마쓰모토를 때리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차가운 시선과 냉대, 집단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오자와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 날 오자와는 아오키를 같은 지하철에서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친다. 오자와는 제대로 아오키의 눈을 쳐다봤다. 후에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내가 정말 무섭다고 생각하는 건, 아오키 같은 인간이 내세우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믿어버리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입맛에 맞고 받아들이기 쉬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놀아나 집단으로 행동하는 무리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한 무의미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결적정인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고는 짐작도 못하는 무리들이지요.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정말 무서운 건 그런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진실이란 늘 모호하고 진실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실이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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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잡는다는 건 그 사람의 온기를 나눠 갖는다는 것인데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그냥 수족냉증인 걸까.



잘 시간은 지났고, 잠도 쏟아지는데 잠들기 싫은 밤이다.

눈이 감기고 졸다 깨고 잠들었다가 놀라서 깬다.

이렇게 아침을 맞이하면 너무 피곤하겠지.

나는 왜 이 밤을 잠으로 채우지 못하는 걸까 – 새벽 3시에.



그는 밤일이 시원찮아서 아내에게 꽉 잡혀 산다. 안 그래도 화가 많은 아내가

근래에 더 화가 났다. 아내는 그를 벌레 보듯 밤일도 시원찮은 놈아 나가서 

빨리 어떻게 좀 해봐.라고 해서 추워서 나가기 싫어 죽겠는데, 눈까지 펑펑 

내려서 너무 나가기 싫은데 결국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좀 더 나이 들어 아내에게 버려지지 않을까 오직 그 생각뿐이라 아내가 하는 

말은 다 들어야 했다. 아내가 회사에 늦게 나가라고 하면 개처럼 바짝 엎드려 

그렇게 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회사 직원들에게는 강압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덕분에 그의 옆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말았다.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 이건 그냥 이야기야.



저녁 8시가 예전 같지 않다.

붐벼야 할 시간인데 다운타운이 썰렁하고 허전했다.

모두가 잠들어야 할 새벽 한 시 sns 세상은 너무나 떠들썩하고 활발하다.



진지하고 진지해서 너무 진지해도 괜찮아.

심각하지만 않으면 돼.

진지한 건 환영이지만 심각해지면 답이 없어.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술병이 있잖아.

그런 술병이 있어.

아무리 부어도 채워지지 않지.

계속 부어도 누군가 자꾸 마셔 버려.

채워지지 않는 술병은 매일 밤 추위에 내몰리는 거야.

추위에 떨다 떨다 참지 못하면 몸을 던져 깨지는 수밖에 없어.



하루키가 그런 말을 했는데 사람에게는 자신의 분수령이 있다고.

하지만 그 분수령이라는 게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

10대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고 60대에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분수령에 도달하면 내려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직 나의 분수령이 아니라도 

생각되면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기보다 오늘 하루 그냥 존나게 열심히 살자.



창에 부딪히는 바람소리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랫소리보다 더 크게 들린다.

바람소리는 꼭 억울하게 죽은 마녀의 울음소리처럼 들린다.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라는 말은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말은 정말 무책임한 말이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그 사람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하는 

말은, 한국이 망할 때까지 듣지 못하겠지.



우리가 세상에 드러내고 싶은 건 우리 음악이지 허벅지가 아니잖아 – 더 런어웨이즈



상처가 다 낫지 않고 흉터가 생기더니 흉터는 꺼끌꺼끌 심술이 되어 나를 

찌르곤 한다.

상처가 다 낫지 않은 이유는 상처를 받았을 때 제대로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피하려고 했기 때문에 흉터가 깊게 상흔을 남기고 

결국 심술이 되어 버렸다.



어제 외계침공 영화를 또 봤다.

지구에 머틀리 크루가 살아 있는 한 침공한 외계인들이 두 손 두 발 다 들고 

떠날 거야.



포근하더니 제주도에는 벌써 매화가 피었다고 한다.

이렇게 어수선해도,

이렇게 시끄러워도,

이렇게 지랄 맞아도 봄은 오고 있다.



오늘을 어제에게 반납하고 내일을 오늘로 받아들이는 시간.

지나간 하루의 미련을 버리고 꿈속으로 들어도 좋을 시간.

너는 너의 세계를 살고 나는 나의 세계를 살아야 할 시간.

받았던 상처는 조금씩 흉터로 남아도 되는 시간.

우리는 전부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시간.

이제 격렬한 결락으로 떨어져도 괜찮을 시간 – 밤 열두 시(밤 열한 시 오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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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에 먹기 참 좋은 음식이다. 시래기와 동태의 콜라보. 집에서 거의 해 먹지 않기 때문에 주로 얻어먹는다. 음식 잘하는 옆집에서 겨울이 어울리는 이런 음식을 하면 먹어보라고 준다. 어떻든 이런 음식은 겨울에 잘 어울린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여 계절에 맞는 음식이 있다. 제철음식이라고 해서 그 철에 나는 식재료는 신선하고 몸에 좋다고 한다. 당연히 제철에 나기 때문에 수확이 많이 되어서 가격도 저렴하다. 그래서 이래저래 제철음식을 먹는 건 이득이다. 손해 보는 일이 아니다. 사계절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정수라의 노래 중에도 ‘뚜렷한 사계절이 있기에, 볼수록 정이 드는 산과 들’라는 가사도 있다. 그리고 사계절이 있어서 우리는 복 받은 곳에 살고 있다는 말을 어른들 또는 뉴스 앵커나 여러 곳에서 늘 들어왔다.


    그런데 정말 사계절이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뚜렷하면 살기 좋은 게 맞나? 하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들었지만, 근래에는 더 들었다. 나는 여름이 아주 좋다. 그래서 여름만 있는 나라가 부럽다. 그냥 일 년 열두 달 반바지 하나만으로 보낼 수 있다. 춥다고 난리 떨면서 패딩을 꺼내서 입을 필요도 없다.


    여름에는 기온이 30도를 넘어 올라간다. 겨울에는 추운 곳은 기온이 영하 30도까지 떨어진다. 이렇게 기온차가 심하게 나는 곳이 과연 살기가 좋은 곳이냐 한다면 글쎄다. 겨울에 한파만 오면 얼어 죽는 사람이 생겨난다. 세상에!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얼어서 죽는 사람이 생기다니. 한파가 오니 주의하세요.라는 뉴스가 뜨면 공무원들부터 해서 잠도 자지 못하고 비상근무다.


    도시에 눈이 쌓이면 심각한 상황이다. 교통난에, 자동차 사고에, 동파에, 낙상 사고에. 겨울이니까 두꺼운 옷을 꺼내 입어야 한다. 도대체 옷장에 옷이 얼마나 들어있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작년까지 잘 입던 그 비싸게 주고 산 롱패딩을 이제 입지 않는다며 숏패딩을 아이들은 사달라고 한다. 난방을 해야 하지만 가스비와 전기세는 계속 오르기만 한다. 옛날처럼 혹독한 추위가 몰아쳐도 으쌰으쌰 하며 그냥저냥 넘어갈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인구의 노령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장마기간에 늘 흘러넘치는 하수구는 어김없이 그 자리에 또 흘러넘친다. 온열질환자 역시 매년 속출한다. 그렇다고 은행이나 건물이 시원하게 해 놓고 있을 수도 없다. 전기세 폭탄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폭우에 시장상인들이 전부 물폭탄을 맞기라도 하면 어디서 어떻게 보내야 할지 깜깜하기만 하다.


    마찬가지로 눈에 내리는 폭설에 불이라도 시장에 나서 전부 홀라당 타버리고 나면 어디에서 어떻게 손을 대야 하는지 너무나 깜깜하다. 그 과정에 추운 곳에 그저 내몰리게 된다. 추위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된 상태로 그저 기다리고만 있어야 한다. 손과 발이 얼마나 시리고 추울까. 여름에도 물 폭탄으로 모든 것이 떠내려가 간 사람들은 에어컨도 없는 곳에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잠들어야 한다.


    하나의 계절만 있다면 열심히 그 계절에 맞는 피해복구를 하고 경계를 해서 또 영차영차 재발방지는 될지도 모른다. 요즘은 겨울에 살기 좋다고 말하는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초딩 때에는 학교에 가면 재미있고 좋았는데, 학교도 요즘은 전부 힘들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얼마 없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우울하고 춥다. 게다가 교사와 학생들의 경계가 허물어져서 장점도 있지만 단점들이 더욱 부각되는 시대가 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예전부터 여름만 있는 나라에 가서 살고 싶었다. 더운 건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추운 건 참을 수가 없다. 추운 건 정말 싫다. 지금까지 여름에 더우면 더울수록 밖에서 한 시간 열심히 조깅을 하면서 땀을 있는 대로 뺀다. 그러면서 태양의 빛을 받는다. 그러고 나서 샤워를 하고 나면 어지간한 더위는 더위 같지도 않다. 그러면 에어컨 바람보다 선풍기 바람이 훨씬 시원하고 야들야들해서 선풍기 바람만으로 잠을 잤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이번 여름에는 또 모르겠지만 아마 이번 여름에도 그렇겠지. 여름은 옷도 여러 겹 입을 필요도 없고, 겨울보다 마시는 물도 몸속으로 잘 들어가고.


    마블리가 나오는 이번 영화 황야에서 이희준 같은 미친 박사가 라면 나는 기후를 바꾸는 연구를 해서 우리나라 사계절을 없애고 여름만 있는 나라로 만들어 버리겠다. 하늘에 여름을 만드는 위성을 띄워서 겨울을 밀어내 버리고 오직 여름만 가득한 나라. 아니, 여름 보다 봄, 가을이 좋잖아요.라고 하는데 나는 봄, 가을도 싫다. 봄은 죽음의 계절이고 가을은 늙은 계절이다. 만고 나의 생각이지만 나는 그렇다. 그냥 해가 쨍 한 더운 여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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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벅 카스텔라를 누가 사줬다. 스벅 카스텔라는 맛있다. 이 카스텔라는 십 년 전에 스벅에서 먹었을 때의 맛과 모양에서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맛이라는 건 시간과 장소, 먹는 이의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저 카스텔라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맛이겠지만 지금 먹는 나의 입맛에는 그때의 맛보다 훨씬 맛있다고 느끼고 있다. 단맛을 더욱 많이 느껴버리는 신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학창 시절에 나를 괴롭히던 녀석이 시간이 훌쩍 지나 나를 찾아와서 그때 내가 너무 했어, 미안하다. 정말 사죄한다. 라며 사과를 받아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 잊고 지내고 있었지만 그 녀석을 보면 그때의 일이 또 떠오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시간이 너무 흘러 가물가물해져서 늦게라도 일부러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한다면 사과를 받아야 할까.


    그러나 지금의 나는 사과를 받는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게, 사과를 하려면 그때의 나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 그래야 그 녀석이 하는 사과를 제대로 받을 수 있다. 이미 시간이 지나 상처가 되고 흉터가 된 나에게 사과를 한다고 해도 그 흉터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기에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래, 이렇게라도 찾아와서 사과를 하니 받아줄게,라고 말을 할지는 몰라도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을 수 있다.


    그 당시, 그때 괴롭힘을 당해 죽고 싶었던 나를 찾아가서 사과를 해야 한다. 사과도 시기가 있고 방법이 있겠지. 비록 진심이지만 사과를 하는 시기가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과는 진정한 사과가 될까.


    우리는 별반 다를 게 없는 비슷하게 생긴 인간이지만 똑같은 인간은 없다. 복잡하게 변한 만큼 그만큼 인간은 단순해졌다. 나와 다르면 항상 경계하고 공격심을 가지게 되고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설령 그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일지라도 나와 다르면 공격을 한다. 그 사람의 약점을 부풀려서, 그 점을 파고들어 공격을 하면 같이 공격하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한 명일 때 하는 공격보다 여러 명이 공격을 하면 분명 사실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의심하게 된다. 진실을 알고 싶어요.라고 사람들은 말을 하나. 하지만 진실이라는 게 반드시 사실이지도 않다. 아니 진실은 사실에서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진지하고 진지해서 너무 진지해도 괜찮아, 심각하지만 않으면 돼. 진지한 건 환영이지만 심각해지면 답이 없어.


    여름에 조깅을 하다 보면 하늘에 금을 긋고 사라져 버린 저 선을 보면 김중식의 [이탈한 자가 문득]이 떠오른다.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삶과 생활의 사이에서 비어 가는 주머니로 하늘을 보았을 때,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곳만 알지라도 안전한 궤도 속에서 수많은 별 들 중에 하나로 살아가도 좋으련만 저 별은 궤도를 이탈해 다시는 궤도 속으로 진입을 하지 못할지라도 자유롭게 하늘에 한 번의 금을 긋는다.


    안전한 삶을 거부한,

    완전하기보다 불완전한 자유를 선택한,

    굳건한 진실보다 흔들림이 많은 가능성을 믿는,

    금방 사라질지라도,

    짧지만,

    저기 저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하찮지만 소중한.


    김중식은 말했다.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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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자연적 현상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알겠지만 놀라거나 경이로움에 충격을 받기도 한다. 초자연적인 현상은 주로 자연에서 일어난다. 거대한 낙뢰라든가, 그 낙회 중 번개를 맞는 장면을 본다든가. 주로 해외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이 많이 일어난다. 태풍의 질이나 규모도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니까.


    그다음에 동물들에게서 볼 수 있다. 곰이 물에 빠진 새를 구해준다거나, 개가 고양이를 구한다거나. 육식동물이 작은 동물을 구해주고 가버린다거나. 그런 모습은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상식을 거둬내고 마음의 눈으로 보면 받아들이게 된다. 이 역시 초자연적인 현상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초자연적 현상이 인간에게서 나타난다.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은 초자연적 능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가끔 접하는 장면은 몽유병에 걸린 사람들의 모습은 꼭 초자연적인 모습처럼 보인다.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은 공포에 가깝다. 무서운 모습이다. 인간에게서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면 그건 그것대로 낭패가 될 수 있다. 아무리 옳은 일에 그 능력을 사용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존재처럼 여겨지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인간이란 아무리 옳은 일을 한다고 해도 분노하거나 화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논리적으로 판단을 할 수는 없다. 만약 초자연적인 능력을 내는 사람이 화가 나 있을 때 그 옆에 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두려운 존재로 여길지도 모른다.


    이런 두려움은 반드시 사람이 아니더라도, 꼭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더라도 주위에서 종종 느낄 수 있다. 늘 곁에 있는 것들, 방안의 불을 밝혀주는 전등이나 변기, 샤워기 같은 물품들. 어제와 별 다를 바 없는 물건이 오늘 갑자기 안 된다거나 전기 스파크가 튄다거나 가열로 인해 녹아내린다거나 하면 겁이 나고 무섭다. 늘 다니던 골목길의 계단이 내 앞에서 갑자기 무너지거나 도로가 내 앞에서 싱크홀이 생겨 앞에서 가던 사람이 빠진다거나 하면 충격을 받는다. 인간이란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며 비행기나 거대한 배도 만들지만 개개인은 지극히 연약하고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눈에 뾰족한 무엇인가가 들어갈까 봐 불안해서 길거리를 마음껏 다니지 못하지는 않는다. 모험심이 강해서 깊은 바다 밑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며 절벽을 기어오르기도 한다. 그만큼 무모하고 강력한 존재가 인간이기도 하다.


    인간이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날 때는 무의식 중에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식을 가지고 그런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요컨대 물에 빠진 자신의 어린 자식을 구하러 물에 뛰어들어 구해 오는 엄마의 경우다. 엄마는 전혀 헤엄이라고는 칠 줄 모르지만 아이가 물에 빠지는 순간 무의식의 발현으로 이루어진다. 아이가 자동차에 치이려고 할 때 번개만큼 빠른 속도로 아이를 낚아채서 자동차에 부딪히는 걸 막는다. 이런 엄마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영상으로 많이 봤다.


    무의식에서는 그럴 리 없는 것들이 가능하다.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가 우리 뇌에 동시에 존재하며 무의식은 아직 뇌과학자들도 몇십 년 동안 연구를 해도 뇌의 몇 퍼센트밖에 파헤치지 못했다.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능력이 자연발생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현상을 한 번 경험했다. 초자연적인 현상. 무의식에 가까워졌을 때 초자연적인 능력을 경험을 했었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집에서 보냈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무더운 날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 집에 들어와 샤워 후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시간은 저녁 10시경이었다. 부모님은 외출을 하시고 나 혼자 집에 있었다.


    시원하게 티브이를 보는데 정전이 되었다. 티브이도 꺼지고 돌아가던 냉장고도 멈추고 에어컨도 그대로 스톱되었다. 아파트 방송이 나왔다. 정전인데 방송은 어떻게 나올까. 전력수요가 과다해져서 이 일대가 몽땅 정전이 되었다고 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는 자체 발전기가 있으니 곧 전기가 들어올 것이다. 어떻든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각자 알아서 있어야 했다. 정전이라는 것도 오랜만이다. 어린 시절에는 정전이 종종 되었던 것 같은데. 어린이들은 정전이 되어도 재미있었다. 모든 곳이 똑같아져 버리니까 아이들은 그 속에서도 재미를 찾았다.


    나도 어두운 거실에서 벗어나고파서 분주하게 움직여 초를 찾아서 불을 밝혔다. 촛불은 촛불 그 밑으로는 어둡다. 촛불은 바람도 없는데 공기의 흐름 때문인지 하늘하늘 움직이며 타올랐다. 그런 촛불에 그만 매료가 되었다. 촛불을 자세하게 보기는 처음이었다. 매력적이었다. 촛불의 중간을 그대로 꼼작 않고 보고 있었다. 나는 촛불의 세계로 들어갔다.


    김춘수 시인의 [어둠]이 있다. [촛불을 켜면 면경의 유리알, 의롱의 나전, 어린 거들의 눈망울과 입 언저리, 이런 것들이 하나씩 살아난다 차차 촉심이 서고 불에 제자리를 정하게 되면, 불빛은 방 안에 그득히 원을 그리며 윤곽을 선명히 한다 그러나 아직도 이 윤곽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있다 들여다보면 한바다의 수심과 같다. 고요하다. 너무 고요할 따름이다]


    정전이 30분이 넘어가니 덥기 시작했다. 그러나 촛불의 세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세계 안에는 한바다의 깊은 심연이 들어 있다. 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땀으로 등이 다 젖었다. 관자를 타고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러나 나는 미동 없이 타오르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얼마동안 들리던 아파트 밑의 소음도 이젠 들리지 않았다. 아파트는 그야말로 적요한 상태였다. 아무리 고요해도 집 안에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는 늘 도사리고 있었다. 냉장고의 모터는 인간의 심장과 비슷하다. 한 번 태어나서 숨을 쉬기 시작하면 절대 멈추지 않는다. 냉장고가 멈추는 순간 냉장고 안의 음식들이 상하기 때문이다. 쉰 음식은 먹을 수 있지만 상한 음식은 먹으면 안 된다. 냉장고는 마치 인간의 심장 같은 역할을 한다. 냉장고가 멈추는 일은 없다. 그러나 정전은 그런 냉장고를 숨죽였다. 이토록 적요함 속에서 촛불의 세계는 더욱 확장했다. 발을 바닥에서 전혀 떼지 않았다. 쥐가 났지만 나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옷은 땀으로 전부 젖었다.


    촛불의 세계는 매혹적이며 위험하다. 그 세계에서 나는 날 수 있고 심지어는 파괴력을 지닌 능력자가 될 수도 있다. 촛불의 뒤 거실 벽에 파리가 한 마리 붙었다. 파리는 더위를 타지 않을 것이다. 파리는 더워 보이지 않았다. 파리는 이렇게 높은 아파트 안으로 어떻게 들어왔을까. 파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왔던지, 날개가 있으니 날아서 왔던지 어떻게든 사람이 살고 있는 높은 아파트 안으로 들어왔다. 벽에 붙은 파리는 집파리 치고는 컸다.


    파리는 정전에 반응을 하는지, 촛불에 반응을 하는지 아니면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벽에 붙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파리와 나는 마치 누가 누가 더 꼼짝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나,를 내기하는 것 같은 형국이 되었다. 파리와 나는 그대로 돌이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정적이 공간을 파고들었다. 공간의 모든 곳에 적막이 채워졌다. 소리가 멈추었다는 건 마치 시산이 정지한 것 같은 느낌이다. 시간이란 언제나 흐르고 있다. 멈추거나 잠시 정지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소리가 소거된 공간에서는 시간마저 멈춰 버리는 착각이 든다. 파리의 모습이 눈에 크게 들어왔다. 파리는 벽에 붙어서 다리를 비비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발바닥이 마치 거실바닥에 붙어 버리는 것 같았지만 꼼지락 거리지 않았다. 파리와 나의 다른 점이라면 나는 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이다. 땀이 흘러서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흐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촛불의 세계에서는 빛의 굴절이 없었다. 빛은 초를 타올라 형태를 유지했다. 아주 미약한 바람에도 촛불은 흔들린다. 촛불은 나에게 변하지 않는 굳건한 진실보다 불안하지만 흔들림이 많은 가능성을 믿어보라고 말했다. 나는 촛불을 통해 반대편 벽에 붙어 있는 파리를 보고 있었다. 파리와 나와의 거리는 고작 1미터 정도였다.


    촛불을 통해 파리를 보는 동안 나는 땀을 많이 흘렸다. 정전으로 인해 그야말로 집 안은 찜통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파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의 존재가 몸에서 분리되어 우주로 떠내려가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미동 없이.


    다리에 난 쥐는 발바닥까지 내려갔지만 나는 더 이상 감각을 느끼지 않았다. 몸을 30분 이상 미동 없이 가만히 꼼짝하지 않고 있으면 몸과 정신이 분리되는 착각이 든다. 마치 내가 돌이 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심장만 미약하게 뛰었다. 그러나 나의 모든 세포는 멈추었다. 나는 눈에 힘도 주지 않고 그렇다고 눈에 힘을 빼지도 않고 무념무상의 상태로 파리를 보았다.


    그때 파리에 불이 붙으면서 밑으로 툭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냄장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순간 너무 커서 나도 모르게 두 귀를 손으로 막았다. 파리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나의 무의식이 발현되어서 나는 직접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으켰다. 파리는 냄새까지 내며 깨끗하게 탔다. 나는 경이롭다는 기분보다 무서웠다. 하지만 그 뒤로 그런 능력이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지만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제는 마음이 편해져서 나는 그때 경험한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비밀댓글로 누군가가 내가 경험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듣고 싶다며 만나자고 했다. 그래서 지금 그 자리에 나와 있다. 그 사람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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