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질라 영화를 좋아한다. 어릴 때에도 고질라 프라모델이 몇 개나 있을 정도로 좋아했다.

 

이번에 나온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는 영화적인 이야기를 소거하고 산업적으로 이야기를 해보면 이 영화는 일본, 미국, 중국의 합작품이다. 일본의 신화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할리우드 배우들이 중국의 거대 제작사의 자본력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고질라 이야기는 영화로 나올 때마다 욕을 듣지만 그것이 새로운 고질라 영화를 만들어내는 동력원이 되는 것 같다

 

그래? 그럼 이번에는 내가 고질라 영화를 한 번 만들어보겠습니다! 라며 감독들이 나타나는 것 같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수? 좀 하 면 어때? 같은 분위기가 그간의 고질라 영화에 가득하다. 처음의 한 사람이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고 고질라를 영화로 만들기로 작정을 한 다음 부터는 새로운 감독들이 끊임없이 고질라의 메가폰을 잡는다. 그리고 그 한 사람 덕분에 시간이 훌쩍 지나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 결과물을 보며 즐기고 있다

 

좀 벗어난 이야기로 우리나라 록 페스티벌이 이렇게 활성화되어 정착한 것도 한 사람 덕분이었다.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지만(좀 알려주세요) 그 사람은 공연기획자이자 무대감독으로 인천에서 1999년 7월의 마지막 날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의 전신인 것이다. 그날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운동장에는 물이 무릎까지 차올랐고 그 대비를 위해 무대감독이었던 그 사람은 인근 학교를 미리 수배해 놓기도 했다

 

록 정신은 비가 오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지만 비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내렸다. 그날 세계적인 밴드인 딥 퍼플이 왔는데 이렇게 비가 와서는 도저히 공연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모두가 위험하기 때문에 공연을 중단하려고 했는데 비를 쫄딱 맞은 그 무대감독이 딥 퍼플의 부스로 들어간다. 그리고 딥 퍼플에게 말했다. 저기 오직 당신들의 공연을 보기위해 비를 맞으며 기다리고 있는 한국 팬들을 생각해 달라, 그들에게는 어쩌면 평생이 한 번 뿐인 기회일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 위험하다면 공연을 중단하겠다, 하지만 지금은 공연을 할 수는 있다, 제발 연주를 해달라.라며 딥 퍼플에게 매달렸다. 기획사측의 손해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이루어졌고 비를 엄청나게 맞으며 딥 퍼플을 비롯해서 한국의 팬들은 열광을 했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으로 한국록페의 역사가 되었다. 이후 국내에 록 페스티벌의 문화를 정착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단지 공연기획자였던 그 한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 록 페스티벌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고질라를 보면서 한국의 용가리나 불가사리도 해낼 수 있었지만 맥이 끊겨 버렸다. 불가사리는 북한에서 만들어내고 있지만 안타깝고 용가리의 이야기도 심형래가 만들어내면 공격을 하기 바빴기에 그 명맥이 끊어졌다.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 이전의 고질라 이야기는 꽤 좋았다. 그 영화에서 고질라를 소거하고 핵공격으로 바꾸면 이야기가 아주 쉬워진다. 핵공격을 받은 일본이 서방세계와 국민들을 대하는 정부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든 분야에서 이미 이렇게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홍빈이 없었다면 한국에 이렇게 하루키의 붐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닥치고 정치의 김어준이 아니었다면 정치가 이렇게 재미있다고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봉준호가 아니었다면 쉬르리얼리즘 적인 영화가 멋지다고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 영화 속에서도 연구 욕이 불타는 한 사람이 지구를 곤경에 빠트리고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미친 한 사람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위험을 주는지, 한 사람의 의지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의지가 되는지, 우리는 알게 모르게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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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시는 노예제도를 폐지한다. 노예제도를 폐지했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었다. 노예들은 그동안 억압된 자유를 누렸기에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자유인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유는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지만 그건 이념을 바꾸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권력을 가진 자가 탄생하고 권력을 거뭐 쥔 자가 나머지를 착취하고 목숨을 앗아간다. 그런 모습에 왕은 고뇌를 한다. 위대한 왕은 나라를 구하지만 진정한 왕은 국민을 구하는 것이다

 

실제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을 때 대부분의 노예들이 기뻐했지만 모든 노예가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영화 장고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대저택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노예 중에 권력을 쥔 노예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생활을 했다. 주인과 노예들 중간에서 노예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며 그날그날 주인에게 그 정보를 전달해주기만 하면 된다. 주인과 대등한 음식을 먹고 단체 생활을 하는 노예들과는 달리 자신 만의 방을 가지고 여자들도 거느릴 수 있다

 

대저택을 가지고 노예를 많이 거느릴수록 불안한 농장주가 많았다. 요즘의 직원들이 많은 사장의 심정과 비슷할 것이다. 경쟁회사들은 늘어나지 지난달보다 이번 달 매출이 줄어들면 벌어들이는 수익이 줄었으니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져가는 돈도 지난달보다 적어야 마땅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모든 것이 수치로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는 사장의 입장에서는 직원들이 늘어날수록 불안한 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에 비에 노예들 중에서 관리를 하는 노예는 그저 편안하고 편리한 생활을 했다. 채찍을 맞아가며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매의 눈으로 반항을 하려는, 또는 게으름을 피우는 노예를 주인에게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돈은 계속 굴러 들어와 주인과 비슷한 좋은 옷도 입을 수 있고 마차도 끌 수 있다. 그러니 노예제도를 폐지했다고 해서 구속에서의 해방구가 되는 건 아니다. 자유는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은 노예가 없어졌을까. 2012년 라디오 정희의 사연이었는데, 요코셔테리어 나나가 가출을 한 지 2주째로 미친 듯이 나나를 찾아다니는 남자가 있었다. 가축병원과 애견샵 그리고 동사무소의 민원실에 모두 신고를 한 상태였다. 경찰서에 까지 매일 가서 혹시라도 들어온 소식이 있는지 확인했다. 늘 울상인 그에게 강아지를 찾았다는 소식이 왔다. 일하다말고 달려가서 보니 나나가 맞았다. 그는 바로 전화를 걸어 “사장님, 드디어 사장님의 개님을 찾았습니다“라고 했다

 

1865년 겨울에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현재 이름이 ‘구속’으로 바뀌었을 뿐 노예는 유전자처럼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닌다. 우리는 결국 누군가의 노예다. 가족의 노예, 상사의 노예, 자식의 노예, 애인의 노예다. 이도 저도 아니면 시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자유는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왕좌의 게임에는 그런 모습이 잘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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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랄한 빌런이었던 조프리가 죽으면서 통쾌함과 동시에 허무를 가져다주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지독한 인간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건 편견이었다. 조프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조프리보다 더 무참히, 비참하게 무차별로 인간을 유린하는 지독한 인간이 계속 등장한다

 

조프리의 모친인 서세이가 그렇다. 서세이는 지독하게 독하고 처절하게 악한 악녀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허영심과 자존심과 죄를 숨긴 얼굴을 하고 있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주위 사람들을 야금야금 먹어 치운다. 한 번 잡은 권력은 절대 놓지 않는다. 서세이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그 무엇도 알 수 없다. 웃고 있는데 서늘한 냉기가 흐르는 모습이 서세이의 모습이다

 

서세이는 정말 웃고 있는 것일까? 마치 나는 다 알아, 하는 무의미의 표정으로 점점 주위를 조여온다. 부탁을 거절할 수 없게 만들고 주위 사람들의 인간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삶의 목적처럼 보이는 사람이다. 사람을 결국 미치게 하여 자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는 못 배기게 한다. 칼리시가 통치자에게 헌신하는 자를 죽이는 통치자는 헌신을 이끌어내는 통치자가 아니라는 조언을 듣는다면 서세이는 자신에게 훈계를 하는 조력자를 저런 웃음을 보이며 파멸로 이끈다. 악마가 있다면 악마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이런 모습은 아베의 모습과 비슷하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입에 담지 못하게 하며 그 진실을 숨기고 황당한 발언으로 사람들을 선동한다. 자신의 말에 거역하는 신하들이 나오지 못하게 한다. 얼굴을 한 대 때리고 싶게 만드는 아베는 딱 서세이의 모습이다. 하지만 서세이도 국민들 앞에 심판을 받는다. 머리를 깎이고 발가벗겨져 똥을 맞고 침을 맞으며 국민들에게 ‘수치’라는 말을 듣는다. 아베도 일본 국민들 앞에 그렇게 되지 않을까

 

서세이는 한 번 권력에서 내려왔지만 다시 그 자리에 오른다. 그런 모습까지 아베를 닮았다. 권력을 목숨보다 더 가지려는 자들은 총리도 두 번하게 된다. 아베는 총리를 한 번 했었다. 시간이 지나 다시 총리를 거머쥔, 권력에 눈이 먼 사람이다

 

참고로 서세이가 국민 앞에서 발가벗고 걸어가는 장면은 당시 레나 헤디가 임신으로 대역이 했다고 한다. 대역의 몸에 레나 헤디의 얼굴을 합성한 것이라고 한다. 이 죽일 듯한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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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딸 대너리스, 불타지 않는 자, 미련의 여왕, 안달족, 로이나, 최초인의 여왕이며 속박의 해방자이자 용의 어머니, 대초원의 칼리시가 칼리시를 소개하는 말이다. 마치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같다. 칼리시는 용들을 대동하여 노예를 풀어주고 노예재도를 없애가면서 노예상이 판을 치는 나라를 하나씩 잠식한다. 한낱 팔려가는 여자의 몸이었던 칼리시는 사람들의 추앙을 받으며 나라의 왕으로 우뚝 선다. 칼리시에게 구원을 얻은 노예들이 칼리시를 왕으로 받아들이는 장면은 짜릿했다

 

왕좌의 게임은 남성주의, 남성우월이 가득한데 그 속에서 칼리시는 자신의 입지를 하나씩 굳혀 나간다. 그 사이에서 자신에게 반하는 남자들이나 내 편이라 생각했어도 배신을 하면 가차 없이 목을 내리치고 용의 먹으로 던져버린다. 왕좌의 게임 시즌4까지 보면서 놀라운 것은 이 영화에는 주연이 없고 조연도 없다. 주연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몇 회가 거듭하는 과정에서 여지없이 몸이 반동가리 나거나 목이 날아간다. 조연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상상을 뒤엎고 어떻게든 살아서 다음 회에 얼굴을 내민다. 영화적 작법에서 벗어났다. 주인공이 없는 영화는 사람을 끌어당길 수 없다는 것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다. 왕좌의 게임에서 주연은 사람들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하나의 모멘텀이라는 것이 소름끼치고 놀랍다

 

어떤 조직을 사람들이 만든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늙어서 하나씩 죽게 되면서 조직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온다. 앞서 조직을 만든 사람이 사라지면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조직의 규율을 하나씩 바꾼다. 나중에는 처음에 만들었던 조직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변이된 조직의 모습을 하고 있고 사람들은 계속 들어오고 죽어서 나가지만 조직은 하나의 세계를 계속 만들어간다. 사람은 그저 하나의 소품에 지나지 않는다. 조직만이 살아서 세계를 이끌어 갈 뿐이다. 왕좌의 게임은 그런 느낌이다.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면 끔찍하고 무섭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강철은행이 그런 모습을 지니고 있다

 

악질적이고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할 인간성이 소거된 채 그저 여자들을 노리개감으로 여기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 죽여버리고 사악하고 인간군상에서 제일 쓰레기 같은 모습의 인간인 왕 조프리도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독극물에 체내가 뒤틀리며 죽어가는 모습이 이리도 리얼하고 통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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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좌의 게임에는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 시즌3까지 잘 나오던 여자도 엉망진창인 왕 조프리가 가지고 놀다가 활을 쏘아 그대로 죽여 버리고 아이가 칼로 목을 찌르는 장면도 여과 없이 나온다. 영화에서는 무엇보다 초경이 지나면 여자들은 아이를 낳는 도구로 이용되거나 그렇지 못하면 남자의 노리개로 전락하다가 죽음을 당하고 도로의 표지판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런 장면은 사실 잔인하다기 보다 끔찍한 장면이다. 영화에서 잔인한 장면은 언어로 상대방의 아픈 부분을 여지없이 건드리는 대사다. 난쟁이로 태어났기에 그의 아버지는 너를 버리려 했는데 가문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살려뒀다거나, 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목을 자른 너의 아버지의 머리를 가지고 축제 때 테이블에 놓겠다거나, 너의 엄마는 아버지가 잠시 외도를 하던 창녀를 덮쳐 너를 낳았으니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이야기를 웃으며 한다. 참 잔인하다. 왕좌의 게임을 보면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인간의 잔인함은 요즘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이 기사는 올해 초의 기사다. 청소년들에게 어떤 콘돔은 팔지 못하게 하는 것이 2011년에 지정이 되었는데 아직도 바뀌지 않고 있고 콘돔을 구입하는 것도 쉽게 구할 수도 없다. 기사를 보면 2012년도에 15살의 여학생이 남자친구와 관계를 맺었는데 남자친구가 콘돔대신 비닐봉지를 사용해서 관계를 맺어서 걱정이 된다는 커뮤니티 글도 있다. 청소년들이 관계를 맺는 이유는 아이를 가지기 위해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콘돔이 필요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부관계자들은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이렇게 사람이 사람에게 잔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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