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 박찬호의 경기를 보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 일어난 보람도 없이 박찬호는 최악의 투구를 한 끝에 2회 원아웃만 잡은 채로 강판되었다. 아웃카운트 4개를 잡는 동안 안타 3개, 볼넷 두 개에다 몸맞는 공까지 두 개를 내줬으니, 인내심이 별로 없는 샌디에고 감독이 강판시킬 만도 했다.

그런 안타까움과 별개로, 이런 생각을 했다. 저 멀리 미국 땅에서 벌어지는 경기를 볼 수 있게 된 게 얼마나 신기한 일이냐고. 그 옛날, 바다를 건너 전해지는 메이져리그 소식에 굶주렸던 나는 스포츠신문에 나오는 얼마 안되는 기사들을 반복해서 읽었고, 전설적인 선수들의 플레이는 얼마나 멋질까를 상상하곤 했었다.

야구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중3이던 86년, 한국이 몇십년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그때만해도 우리나라 경기가 아니면 중계를 안해줘서 난 스포츠뉴스와 신문기사만 가지고 경기내용을 상상했는데, 어쩐 일인지 TV에서 월드컵 준결승 한경기를 생중계해준다고 한다. 새벽 3시로 예정된 그 경기를 보기 위해 난 10시쯤 잠자리에 들었고, 알람에 맞춰 칼같이 일어났다. 하지만 TV는 지직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화면도 내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한시간을 분노에 떨다가 잠이 들면서 “비가 많이 오거나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준결승이 예정대로 열렸고, 독일이 프랑스에게 2-0으로 이겼다는 뉴스를 보니까 분노가 다시 되살아났다. 왜 KBS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 의문은 지금도 풀리지 않는다.

90년대 중반 케이블TV 시대가 열렸을 때만 해도 그게 그렇게 좋은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난 ‘정규방송 관계로 야구중계를 마칩니다’는 자막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었고, 전설적인 농구스타 마이클 조던의 화려한 플레이를 안방에서 감상하는 행운도 누렸다. 그러다 박찬호가 메이져리거가 된 이후부터는 맥과이어나 배리본즈같이 꿈에 그리던 선수들을 가슴벅차하면서 볼 수 있었다. 요즘에는 선발로 뛰는 선수가 4명이나 되니 정신이 없지만, 그래도 꿈에 그리던 미국야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예전의 나는 퍽 심심했었다. 별로 친구도 없고, 스포츠 이외에 다른 취미도 없었던 탓에 주말이면 늘 집에 들어앉아 하는일 없이 허송세월만 했었다. 하지만 직장에 다니는 요즘엔 그때 넘쳐나던 시간이 그립다. 새벽에 경기를 해야 겨우 볼 수 있고, 그게 아니면 스포츠에서는 무의미한 재방송을 보면서 만족해야 하니까 말이다. 좀더 일찍 케이블 TV가 있었고 선동렬이 일본이 아닌 미국을 선택했다면 내 젊은 시절이 그렇게 심심하진 않았을텐데. 하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시대가 온 게 어디냐면서 스스로를 위안해 본다. 점점 테돌이가 되어가는 내 자신이 가끔은 한심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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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전인가, 회사에서 좀 늦게 집에 와서 TV를 켰더니 안드레 아가시가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모 연예인은 지난 올림픽 때 “왜 새벽에 축구를 하냐. 잠도 안자냐”고 했다지만, 나같이 회사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밤늦게 하는 경기가 아니면 볼 수가 없는지라, 미국과 우리 사이의 시차가 고맙기만 하다. 다음날 회사에서 졸릴 것에 대한 걱정은 뒤로 미룬 채, 난 블레이크와 아가시의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샘프라스를 비롯한 동년배 선수들이 모조리 은퇴하고 강서브를 가진 20대 초반 선수들이 코트를 장악한 마당에, 아가시가 8강에 올랐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도 강한 적수를 만났다. 1세트를 아깝게 빼앗긴 뒤 2세트에서는 블레이크의 강력한 공격에 힘도 제대로 못써보고 세트를 내주고 만다. 더 볼 필요가 있냐는 생각이 들면서 “내일 일도 해야하니까” TV를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혹시나 해서 다음날 인터넷으로 경기 결과를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아가시가 3-2로 역전승을 한 것이다.

안타까운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올림픽 축구 때 우리 대표팀이 세골을 먹자 TV를 꺼버렸던 일(결국 3-3으로 비겼다), 롯데가 엘지한테 5회까지 8-0으로 지기에 TV를 끄고 잤던 일(롯데가 13-11로 역전한 그 경기는 올 시즌 가장 재미있는 경기로 기록될 법하다)... 나보다 인내심이 더 강한 사람들은 네이버스포츠에 “정말 대단한 경기였다” “이 경기를 못본 사람은 US 오픈을 봤다고 할 수 없다”는 식의 댓글을 남겨 날 속쓰리게 했다. 월등한 경기를 펼치던 블레이크를 아가시는 어떻게 물리친 걸까?

4강에 오른 아가시는 어제 지네프리와 벌인 준결승에서도 3-2로 승리, 결승에 오른다. 아가시의 스트로크는 젊디젊은 지네프리와 맞서서도 전혀 떨어지지 않았고, 절묘한 코스선택은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게 바로 체력. 이틀 연속 5세트 경기를 하면서도 아가시는 마지막까지 전혀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도 한 살이 많은 그가 어떻게 그런 강인한 체력을 보유할 수 있는 걸까? 머리를 빡빡 깎은 게 그 비결일까? 아니면 부인인 슈테피 그라프가 비싼 보약을 지어주는 것일까.

이제 아가시는 딱 한경기만을 남기고 있다. 잠시 뒤에 벌어질 로저 페더러와의 결승전. 경기가 9시에 시작하고 난 곧 출근해야 하니 아쉽게 보지 못한다. 난 페더러의 예술 테니스를 좋아하지만, 이번만큼은 아가시가 우승하기를 바란다. 아가시의 마지막 투혼이 나를 감동시킨 탓이다. 하지만 아가시가 우승하는 건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세계랭킹 1위 페더러가 너무도 강해 보이기 때문.

페더러를 폄하할 마음은 없지만, 그는 마치 테니스 기계 같다. 자로 잰듯한 스트로크는 그야말로 예술 그 자체지만, 더 놀라운 것은 경기 내내 표정의 변화가 없다는 거다. 옛날의 존 매켄로는 성질나면 라켓을 부러뜨렸고, 이바니세비치는 심판 판정이 맘에 안들면 공을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 다혈질의 사핀은 뻑하면 심판에게 항의를 하고, 온순하게 생긴 지네프리 역시 심판을 향해 큰소리로 고함을 지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페더러는 심판 판정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내려졌다 해도 얼굴 표정이 그대로다. 멋진 샷을 날리고 나면 주먹을 불끈 쥐면서 기쁨을 표현해야 하건만, 그는 칼날같은 스트로크를 성공시켜도 무표정이다. 그가 웃을 때는 딱 한번, 경기에서 이기고 난 뒤 희미한 미소를 짓는 것 뿐. 자기를 통제하는 선수가 가장 무섭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를 이기는 게 어려운가보다.

사람들은 샘프라스와 그를 비교한다. 샘프라스는 열네번의 그랜드슬램 타이틀로 이 부문 기록을 가지고 있는 선수. 하지만 로저 페더러는 윔블던 3연패를 포함, 벌써 다섯 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그가 힘을 필요로 하는 강서버가 아니라 아가시처럼 롱런할 수 있는 그라운드 스트로커이고, 그의 나이가 이제 스물넷에 불과하다는 걸 감안하면 샘프라스의 기록을 무난히 깨지 않을까 싶다 (작년 시즌에는 무려 세 개를 차지했고, 오늘 이긴다면 올해도 두 개다). 올시즌 70번이 넘는 경기 중 그가 진 건 딱 세 번, 한번은 호주오픈에서 사핀과 혈투를 벌인 끝에 졌고-그날 사핀은 여러차례 흥분했지만 페더러는 시종 냉정했다-프랑스오픈에는 10대 스타 나달에게 졌다. 이런 그에게 맞서 아가시는 얼마나 잘 싸울 수 있을까? 지던 이기든 이번 US 오픈에서 보여준 아가시의 투혼은 내 기억에 길이 남을 것이다. 49세의 나이에 여자복식 4강에 오른 나브라틸로바의 투혼과 더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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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12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5-09-12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샘프라스, 아가시, 마이클 창, 에드베리, 베커가 활약하던 90년대 초반이 가장 재미있었던것 같네요. 전 샘프라스로 인해 테니스를 보다가 그의 은퇴로 저도 시청은퇴를 하고 말았죠. 몇년이더라 US 오픈에서 신예 마라트 샤핀에게 진 걸 보고 그의 전성시대도 끝났구나 싶더군요. 그도 아가시처럼 장수했으면 좋았을텐데 서브앤발리 스타일인 그에게는 좀 힘든일이겠구나 싶네요.

니콜키크더만 2005-09-13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저도 보리스 베커 좋아했어요. 그래도 샘프라스가 가장 잘했죠. 자기 서브게임은 거의 빼앗기지 않는 선수였던 기억이 나요. 사핀한테 US오픈서 질 때 일방적으로 졌었지요. 저도 그때 이 선수 끝났구나 싶었어요. 강서버들은 장수하기가 힘이 드는가봅니다.
속삭이신 분/존트럭에 불타, 정말 재치있는 닉네임이군요. 전 다른 분이 지은 거 따라했어요...
 

 

가을에도 야구하자’라는 멋지면서 가슴 뭉클하게 와닿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롯데가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되었다. 4년간 해오던 꼴찌를 면한 게 약간의 위안은 될 수 있겠지만, 3위를 달리던 시즌 초반 경기장을 꽉꽉 메우던 롯데 팬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닌 듯, 최근 사직구장의 관중수는 다른 구장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다. 과연 롯데는 이대로 주저앉아야 할까? 플레이오프에서 떨어졌는데 이겨봤자 뭐할 거냐고 생각하겠지만, 다른 팀은 몰라도 롯데는 그러면 안된다는 게 내 주장이다. 왜? 롯데는 세계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열성 팬들을 거느린 구단이니까. 뭘 해야 할지에 대해 미국 애들의 사례를 들어본다.


2001년 116승을 거두며 메이져리그 최고의 팀으로 군림하던 시애틀은 세대교체 실패와 더불어 2004년 시즌이 절반도 가기 전에 리그 꼴찌를 확정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애틀 팬들은 홈구장인 Safeco 필드를 매경기 가득 채웠다. 일본야구에 이어 미국야구까지 평정한 스즈키 이치로의 타격을 보기 위해서. 4월을 제외하고는 줄곧 4할대가 넘는 월별타율을 기록중인 이치로는 조지 시슬러가 세운 257rodlm 단일시즌 최다안타 기록에 도전 중이었다. 60년 이상 묵은 그 기록을 깨는 게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았지만, 이치로는 신들린 듯 안타를 생산하며 기록에 한발한발 다가갔다. 그가 5타수 5안타를 치던 날, 경기장에 온 시애틀 팬들은 열렬한 기립박수로 그에게 화답했다. 결국 그는 시즌 막판 시슬러의 기록을 넘어섰고, 마지막 경기에서도 안타를 치며 262개라는, 당분간 깨지기 힘든 기록을 수립한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올해, 시애틀의 성적은 작년과 별 차이가 없는 꼴찌다. 이치로는 작년에 무리한 탓인지 타율이 3할도 안되는 (.297) 극도의 부진을 보이고 있는 중. 그런데도 시애틀 팬들은 흥분해 있다. 왜? ‘킹 펠릭스’라 불리는 펠릭스 에르난데스가 등장했기 때문. 98마일(158킬로)의 광속구와 140을 훨씬 넘는 슬라이더로 무장한 이 19세 신인은 데뷔전부터 믿기지 않는 호투를 거듭, 이제 메이져리그가 주목하는 스타가 되었다. 지난번에는 양키스의 대투수 랜디 존슨과 인상적인 투수전을 펼친데 이어 오늘은 지구선두를 노리는 오클랜드 타선을 7회 동안 무실점으로 봉쇄했다. 51이닝을 던지면서 삼진 50개에 자책점은 단 9점, 방어율이 무려 1.59다. 내년 시즌을 고대하는 시애틀 팬들이 절로 미소짓지 않겠는가. 그러니 팀이 꼴찌임에도 불구하고 쌔피코필드를 찾은 관중수가 양키스전 4만6천명, 화이트삭스전 4만1천명에 달한다.


자, 다시 우리나라로 눈을 돌려보자. 올시즌에도 가을에 야구를 못하게 된 롯데에게 팬들의 눈길을 잡아끌 이벤트는 없을까? 손민한의 20승이 그 중 하나겠지만 최근 승수를 추가하지 못하면서 물건너간 것 같다. 남은 경기에서 기적적인 12연승을 한다면 한줄기 위안이 되겠지만, 전력상 힘이 들 뿐 아니라 요즘도 지는 경기가 더 많다. 그렇다면 2군에서 올라온 고졸신인이 27이닝 무실점의 경이적인 피칭을 한다면? 혹시 타자가 8할대의 맹타를 휘두른다면? 아쉽게도 그건 어렵다. 그럴 선수라면 이미 1군에 올라왔을 테니까. 마이너리그 자원이 풍부한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1군에 올라와 일을 낼만한 숨은 진주가 너무도 드물다. 에이, 그렇다면 추억의 스타는 어떨까? 전에 못했던 박정태의 은퇴경기를 벌여준다든지, 95년 에이스였던 주형광이 재활에 성공해 ‘선데이 주’(아래 주석 참조)로 거듭난다든지 한다면 좋지 않을까?


문제는 의지일 것이다. 실력이 안되면 돈으로 떼우면 되는 것, 관심을 끌 선수자원이 없다면 각종 이벤트를 벌여서라도 팬들의 사랑에 보은하는 자리를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적은 숫자지만 지금도 관중들은 사직구장을 찾는다. 그들에게 제발 기쁨을 선사하자.


* 선데이 조지: 옛날 일본프로야구의 무라다 조지라는 선수가 어깨를 다쳐서 오랜 기간을 쉬었다. 부상을 치료하고 나온 무라다 조지는 무리를 피하기 위해 5일간격이 아닌 7일 간격으로, 그것도 일요일에만 등판했는데 신기하게도 매번 이겼다. 그래서 별명이 선데이 조지였고, 그가 등판하는 일요일만 되면 관중들이 미어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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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09-07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목이 전문가 수준이십니다.
롯데는 준족 전준호, 호랑나비 김응국. 자갈치 김민호가 날리던 소총부대 시절이 아직은 꿈만같은 모양이네요. 아, 그리고 요즘은 꼬추가루팀들이 사라져 영 재미가 덜하네요.^^

니콜키크더만 2005-09-12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너무 늦게 댓글을 남기네요. 전문가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아는 게 이런 거밖에 없어서 끄적거리는 겁니다...김응국 선수, 참 잘했지요. 저도 이선수 정말 좋아했었는데... 호랑나비라고 불렸지만 이름을 빼곤 김흥국과 어떤 공통점도 없었는데. 그리고 전준호, 야구를 악으로 하는 선수였어요. 박정태와 더불어 롯데 정신의 수호자였습니다. 그들이 그립네요.
 

옛날에 해태라는 구단이 있었다. 프로에 참여한 구단들 중 가장 가난했던 해태는 하지만 선동열을 비롯한 알짜배기 선수들을 데리고 우승을 무려 9번이나 한다. 그때는 트레이드가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아서 그렇지, 그런 제도가 있었으면 선수들을 무진장 팔아넘겼을 거다. 우승을 자주 했음에도 해태가 양키스나 요미우리같은 명문구단이 되지 못했던 이유도 짠돌이라는 데 있지 않을까.

그와 대조되는 팀이 바로 삼성이다. 원래부터 우수한 선수들로 이루어진 삼성은 재일교포 선수나 외국인 선수를 데려올 때도 무진장 비싼 선수들만 뽑았고, 그래서 메이져리그에서 지금도 뛰는 훌리오 프랑코 같은 애가 삼성 유니폼을 입곤 했다. 트레이드가 활성화되니까 각 팀에서 뛰던 주전 선수들을 모조리, 엄청나게 비싼 값에 사들여 초호화군단을 이루었다. 그래서? 삼성은 하지만 지독한 불운으로 한국시리즈에서 번번히 패했고, 2002년 마해영의 활약 덕분에 딱 한번 우승했을 뿐이다. 우승을 밥먹듯이 하는 팀과 맨날 지는 팀, 사람들은 당연히 후자를 응원할 것 같지만, 삼성을 싫어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엘지팬도 삼성을 싫어하고 두산팬은 당연히 삼성을 가장 싫어한다. 한마디로 삼성팬 말고는 삼성이 가장 싫은 팀이다. 그러니까 삼성이 명문구단이 되지 못한 이유는 돈에 걸맞는 성적을 내지 못함이고, 거기에 더해서 지나치게 돈질을 해서다.

미국에도 삼성과 비슷한 팀이 있다. 26번이나 우승을 했던 뉴욕 양키스. 그 팀은 다른 팀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이는 선수들만 모아서 야구를 한다. 너무 우수한 선수들만 모인 탓일까. 20승 투수 다섯명이 모이면 100승은 쉽게 할 것 같고, 3할 타자로 1번부터 9번을 채우면 매경기 10점씩은 너끈히 낼 것 같지만, 실제 경기에서 이들은 시너지는커녕 자기 실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랜디 존슨과 작년 시즌 18승을 올린 파바노, 에이스 중 에이스 케빈 브라운 등이 뛴 올해도 뭐 제대로 던지는 선수는 드물었고, 양키스는 결국 시즌 중 계속 투수를 영입해야 했다. 그러고도 성적이 2등이니 돈을 물쓰듯한 구단주는 미칠 노릇이다. 신기한 것은 양키스에서 빌빌대던 선수들이 다른 팀에 가면 펄펄 난다는 것. 양키스를 떠난 제프 위버도 그렇고, 로아이자도 지금 잘하고 있다. 돈으로 매사를 해결하려는 양키스는 당연히 야구팬들의 공적이라, 월드시리즈가 되면 양키스 팬이 아닌 사람 중 양키스를 응원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키스가 최고의 명문구단인 이유는 돈을 쓰는만큼 우승을 많이 해주기 때문.

이와 비교되는 팀이 바로 오클랜드다. 돈이 별로 없는 이 구단은 선수를 키워서 부지런히 팔아치우며 구단 운영을 한다. 신기한 것은 그러면서도 성적은 언제나 좋다는 거다. 젊은 에이스 3인방 중 멀더와 하든을 내보낸 올시즌, 오클랜드는 3인방의 마지막 선수인 지토에다 살루스와 블란톤, 리치 하든을 내세워 와일드카드 2위를 달리고 있다. 1위는 물론 양키스지만, 게임차는 겨우 한게임밖에 안난다. 돈을 들인 걸 따지면 양키스는 거의 2억불, 오클랜드는 5천만불도 안되는데 승수가 비슷하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는가. 물론 지역적 특성상, 그리고 이렇다할 프랜차이즈 스타가 없는 탓에 오클랜드는 그다지 인기있는 구단은 아니다. 하지만 좋은 선수를 키우고 다른 팀에서 눈여겨보지 않는 진주를 캐내는 능력 하나만큼은 정말 존경스러울 정도.

이와는 별도로 보스톤이라는 구단이 있다. 86년 동안 우승을 못해서 밤비노의 저주니 어쩌니 해가지고 무지하게 동정을 받았던 구단으로, 작년 시즌 우승을 함으로써 한을 풀었다. 양키스와 더불어 최고 인기구단인 보스톤은 그러나 금전적인 면에서 양키스와 많이 닮았다. 보스톤 역시 무한대로 돈을 쏟아부으며 좋은 선수들을 영입하는데, 커트 쉴링과 연봉이 2천만불인 매니 라미레즈, 한때 마운드의 중심이었던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작년 보스톤 우승의 주역이었다. 보스톤의 구장인 펜웨이 파크는 연중무휴로 매진이 되는 구장. 하지만 돈을 그렇게 쓰고도 우승을 못하는 보스톤을 팬들은 사랑한다. 돈을 쓰고 우승을 못하는 삼성을 우리 팬들이 싫어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결론;
-돈을 웬만큼 쓰고 우승을 많이하는 구단은 명문구단.
-돈을 지나치게 많이 쓰면 우승을 많이해도 사람들이 싫어한다.
-돈을 아껴가며 성적이 좋으면 역시 사람들이 싫어한다. 야구는 스포츠지, 장사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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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09-06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의 돈질로 인하여 완전히 하락한 스포츠가 바로 배구죠. 김세진에 이어 현대로 향할것이라는 신진식을 싹쓸이하면서 무패행진의 신화를 썼지만 그것은 곧 배구의 하락신화와 맥을 같이 해버리고 말았죠.
그나마 야구는 아직까지 돈질만큼 효과를 보여주지 못하네요. 삼성의 무방비한 독주체재가 이루어진다면 야구의 하락세도 하루아침이겠죠. 돈을 쓰고 우승못하는 삼성이 보스턴과 비슷하다면 무명을 발굴하고 선수를 되팔아 운영하는 현대는 오클랜드와 비슷하네요. 참, 전 현대팬입니다. 근데 좋아하는 선수는 양준혁인지라 언젠가 양준혁이 현대에서 뛸 가능성없는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다.

니콜키크더만 2005-09-06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님은 배구 좋아하시는군요. 신진식, 김세진 좀 심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언젠가 '삼성으로 인해 배구가 조종을 울렸다'고 썼었는데...
 

미국야구에서 마무리투수는 1이닝을 던진다. 9회에 나와 3점차 이하의 경기를 지켜내면 1세이브가 주어진다. 그런 경기가 많을까? 10점차로 승패가 갈리는 경기도 있지만, 근소한 차이로 경기가 끝나는 일은 아주 흔하다. 예컨대 9월 3일 벌어진 15경기에서 마무리투수가 등판해야 하는, 즉 3점차 이하로 끝난 경기는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7경기다. 좋은 마무리투수가 없으면 우승을 하기 힘든 까닭도 거기에 있는데, 양키스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마리아노 리베라는 말할 것도 없고, 작년 시즌 오랜 저주를 풀었던 보스톤에도 키스 폴크라는 대단한 마무리투수가 있었다. 1이닝만 던지니 연봉은 적게 받을 것 같지만, 마무리 투수의 가치가 점점 높게 평가되면서 리베라 같은 선수는 거의 1천만불에 달하는 돈을 연봉으로 받는다. 그렇다고 마무리투수가 특급선발보다 많이받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현역 최고의 마무리는 LA 다저스의 에릭 가니에다. 박찬호가 다저스에서 활약할 당시만 해도 4승6패, 6승7패의 평이한 성적에 방어율은 5점대를 오르락내리락하던 평범한 투수였던 가니에는 찬호가 팀을 떠난 2002년 마무리투수로 변신하면서 3년간 천하를 호령한다. 2003년에는 마무리투수로는 드물게 사이영 상까지 받았는데, 55번의 세이브 기회에서 모조리 성공을 하는 대단한 기록을 남겼으니 그야말로 몸만 풀면 상대방이 의욕을 상실할 만했다. 상의를 풀어헤친 단정치 못한 옷차림에 두꺼운 안경이 트레이드마크인 그는 성격도 더러워 자기가 잘못해서 점수를 내줘놓고 덕아웃에서 의자를 발로 차고 집어던지는 등 공포분위기를 연출하곤 했다. 중간계투이던 시절 컨트롤도 불안하고 구속도 92마일 정도에 머무르던 이 캐나다인은 마무리투수가 되자 거의 98마일에 이르는 직구와 슬라이더, 체인지업이 기가 막히게 컨트롤되면서 타자들을 말 그대로 압도하며 성공시대를 연다. 오랜 이닝을 던지는 중간계투에서 1이닝만 던지는 마무리투수가 되면 구속이 증가하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 내가 신기한 것은 어느 정도 선천적이기 마련인 제구력이 더 빠른 공을 던지면서 어쩜 그렇게 좋아질 수 있느냐는 거다. 박찬호의 경기를 보면 아직도 불안하고, 일본인투수 이시이가 맨날 욕을 먹는 것도 제구력이라는 건 어느 정도 선천적임을 말해주는데, 가니에란 선수는 그런 점에서 미스테리다.

1이닝만 던지면 편할 거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매년 200이닝 이상을 던지는 선발에 비해 마무리투수의 평균 이닝수는 70-80이닝에 불과하다. 하지만 매번 던질 때마다 1점차 내외의 급박한 상황에서 던져야 하므로 긴장도가 높고, 그래서 어깨가 빠지도록 던져야 하니 부상은 더 자주 찾아온다. 작년에 엄청난 활약을 했던 키스 폴크도 그랬던 것처럼, 전설에 남을 마무리투수 가니에도 지난 3년간의 활약을 뒤로한 채 올시즌 내내 부상자명단에 들어가 있다.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LA 다저스는 가니에 대신 뒷문을 책임진 브라조반이  막판에 승리를 날리는 일이 잦아지면서 1위 샌디에고에 크게 뒤지면서 올시즌을 접어야 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애리조나 시절 불같은 강속구를 뿌려대며 36세이브를 기록하기도 했던 김병현이 선발투수로 전환한 건 탁월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김병현의 말이다.
"선발이 편하다. 마무리투수는 1점도 주면 안되지만, 선발투수는 한 2-3점 줘도 잘던졌다고 한다"

선발로 전환해 성공가도를 걷고있는 김병현이 내일 등판한다. 지난번 경기 때 90마일 이상의 직구스피드를 내면서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했음을 말해준 그의 호투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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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04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5-09-04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승리투수 되었나요? 6회까지 6-1인가 앞선 상황까지 보고 말았는데...
김병현...버릇없다고 자주 입방아에 오르내리지만 그 당당함이 좋아 보이지 않나요?

니콜키크더만 2005-09-05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분/감사합니다^^
잉크냄새님/저도 그래요. 그 당당함과 자신감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