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전인가, 회사에서 좀 늦게 집에 와서 TV를 켰더니 안드레 아가시가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모 연예인은 지난 올림픽 때 “왜 새벽에 축구를 하냐. 잠도 안자냐”고 했다지만, 나같이 회사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밤늦게 하는 경기가 아니면 볼 수가 없는지라, 미국과 우리 사이의 시차가 고맙기만 하다. 다음날 회사에서 졸릴 것에 대한 걱정은 뒤로 미룬 채, 난 블레이크와 아가시의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샘프라스를 비롯한 동년배 선수들이 모조리 은퇴하고 강서브를 가진 20대 초반 선수들이 코트를 장악한 마당에, 아가시가 8강에 올랐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도 강한 적수를 만났다. 1세트를 아깝게 빼앗긴 뒤 2세트에서는 블레이크의 강력한 공격에 힘도 제대로 못써보고 세트를 내주고 만다. 더 볼 필요가 있냐는 생각이 들면서 “내일 일도 해야하니까” TV를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혹시나 해서 다음날 인터넷으로 경기 결과를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아가시가 3-2로 역전승을 한 것이다.

안타까운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올림픽 축구 때 우리 대표팀이 세골을 먹자 TV를 꺼버렸던 일(결국 3-3으로 비겼다), 롯데가 엘지한테 5회까지 8-0으로 지기에 TV를 끄고 잤던 일(롯데가 13-11로 역전한 그 경기는 올 시즌 가장 재미있는 경기로 기록될 법하다)... 나보다 인내심이 더 강한 사람들은 네이버스포츠에 “정말 대단한 경기였다” “이 경기를 못본 사람은 US 오픈을 봤다고 할 수 없다”는 식의 댓글을 남겨 날 속쓰리게 했다. 월등한 경기를 펼치던 블레이크를 아가시는 어떻게 물리친 걸까?

4강에 오른 아가시는 어제 지네프리와 벌인 준결승에서도 3-2로 승리, 결승에 오른다. 아가시의 스트로크는 젊디젊은 지네프리와 맞서서도 전혀 떨어지지 않았고, 절묘한 코스선택은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게 바로 체력. 이틀 연속 5세트 경기를 하면서도 아가시는 마지막까지 전혀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도 한 살이 많은 그가 어떻게 그런 강인한 체력을 보유할 수 있는 걸까? 머리를 빡빡 깎은 게 그 비결일까? 아니면 부인인 슈테피 그라프가 비싼 보약을 지어주는 것일까.

이제 아가시는 딱 한경기만을 남기고 있다. 잠시 뒤에 벌어질 로저 페더러와의 결승전. 경기가 9시에 시작하고 난 곧 출근해야 하니 아쉽게 보지 못한다. 난 페더러의 예술 테니스를 좋아하지만, 이번만큼은 아가시가 우승하기를 바란다. 아가시의 마지막 투혼이 나를 감동시킨 탓이다. 하지만 아가시가 우승하는 건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세계랭킹 1위 페더러가 너무도 강해 보이기 때문.

페더러를 폄하할 마음은 없지만, 그는 마치 테니스 기계 같다. 자로 잰듯한 스트로크는 그야말로 예술 그 자체지만, 더 놀라운 것은 경기 내내 표정의 변화가 없다는 거다. 옛날의 존 매켄로는 성질나면 라켓을 부러뜨렸고, 이바니세비치는 심판 판정이 맘에 안들면 공을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 다혈질의 사핀은 뻑하면 심판에게 항의를 하고, 온순하게 생긴 지네프리 역시 심판을 향해 큰소리로 고함을 지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페더러는 심판 판정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내려졌다 해도 얼굴 표정이 그대로다. 멋진 샷을 날리고 나면 주먹을 불끈 쥐면서 기쁨을 표현해야 하건만, 그는 칼날같은 스트로크를 성공시켜도 무표정이다. 그가 웃을 때는 딱 한번, 경기에서 이기고 난 뒤 희미한 미소를 짓는 것 뿐. 자기를 통제하는 선수가 가장 무섭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를 이기는 게 어려운가보다.

사람들은 샘프라스와 그를 비교한다. 샘프라스는 열네번의 그랜드슬램 타이틀로 이 부문 기록을 가지고 있는 선수. 하지만 로저 페더러는 윔블던 3연패를 포함, 벌써 다섯 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그가 힘을 필요로 하는 강서버가 아니라 아가시처럼 롱런할 수 있는 그라운드 스트로커이고, 그의 나이가 이제 스물넷에 불과하다는 걸 감안하면 샘프라스의 기록을 무난히 깨지 않을까 싶다 (작년 시즌에는 무려 세 개를 차지했고, 오늘 이긴다면 올해도 두 개다). 올시즌 70번이 넘는 경기 중 그가 진 건 딱 세 번, 한번은 호주오픈에서 사핀과 혈투를 벌인 끝에 졌고-그날 사핀은 여러차례 흥분했지만 페더러는 시종 냉정했다-프랑스오픈에는 10대 스타 나달에게 졌다. 이런 그에게 맞서 아가시는 얼마나 잘 싸울 수 있을까? 지던 이기든 이번 US 오픈에서 보여준 아가시의 투혼은 내 기억에 길이 남을 것이다. 49세의 나이에 여자복식 4강에 오른 나브라틸로바의 투혼과 더불어서.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5-09-12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5-09-12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샘프라스, 아가시, 마이클 창, 에드베리, 베커가 활약하던 90년대 초반이 가장 재미있었던것 같네요. 전 샘프라스로 인해 테니스를 보다가 그의 은퇴로 저도 시청은퇴를 하고 말았죠. 몇년이더라 US 오픈에서 신예 마라트 샤핀에게 진 걸 보고 그의 전성시대도 끝났구나 싶더군요. 그도 아가시처럼 장수했으면 좋았을텐데 서브앤발리 스타일인 그에게는 좀 힘든일이겠구나 싶네요.

니콜키크더만 2005-09-13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저도 보리스 베커 좋아했어요. 그래도 샘프라스가 가장 잘했죠. 자기 서브게임은 거의 빼앗기지 않는 선수였던 기억이 나요. 사핀한테 US오픈서 질 때 일방적으로 졌었지요. 저도 그때 이 선수 끝났구나 싶었어요. 강서버들은 장수하기가 힘이 드는가봅니다.
속삭이신 분/존트럭에 불타, 정말 재치있는 닉네임이군요. 전 다른 분이 지은 거 따라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