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야구에서 마무리투수는 1이닝을 던진다. 9회에 나와 3점차 이하의 경기를 지켜내면 1세이브가 주어진다. 그런 경기가 많을까? 10점차로 승패가 갈리는 경기도 있지만, 근소한 차이로 경기가 끝나는 일은 아주 흔하다. 예컨대 9월 3일 벌어진 15경기에서 마무리투수가 등판해야 하는, 즉 3점차 이하로 끝난 경기는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7경기다. 좋은 마무리투수가 없으면 우승을 하기 힘든 까닭도 거기에 있는데, 양키스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마리아노 리베라는 말할 것도 없고, 작년 시즌 오랜 저주를 풀었던 보스톤에도 키스 폴크라는 대단한 마무리투수가 있었다. 1이닝만 던지니 연봉은 적게 받을 것 같지만, 마무리 투수의 가치가 점점 높게 평가되면서 리베라 같은 선수는 거의 1천만불에 달하는 돈을 연봉으로 받는다. 그렇다고 마무리투수가 특급선발보다 많이받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현역 최고의 마무리는 LA 다저스의 에릭 가니에다. 박찬호가 다저스에서 활약할 당시만 해도 4승6패, 6승7패의 평이한 성적에 방어율은 5점대를 오르락내리락하던 평범한 투수였던 가니에는 찬호가 팀을 떠난 2002년 마무리투수로 변신하면서 3년간 천하를 호령한다. 2003년에는 마무리투수로는 드물게 사이영 상까지 받았는데, 55번의 세이브 기회에서 모조리 성공을 하는 대단한 기록을 남겼으니 그야말로 몸만 풀면 상대방이 의욕을 상실할 만했다. 상의를 풀어헤친 단정치 못한 옷차림에 두꺼운 안경이 트레이드마크인 그는 성격도 더러워 자기가 잘못해서 점수를 내줘놓고 덕아웃에서 의자를 발로 차고 집어던지는 등 공포분위기를 연출하곤 했다. 중간계투이던 시절 컨트롤도 불안하고 구속도 92마일 정도에 머무르던 이 캐나다인은 마무리투수가 되자 거의 98마일에 이르는 직구와 슬라이더, 체인지업이 기가 막히게 컨트롤되면서 타자들을 말 그대로 압도하며 성공시대를 연다. 오랜 이닝을 던지는 중간계투에서 1이닝만 던지는 마무리투수가 되면 구속이 증가하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 내가 신기한 것은 어느 정도 선천적이기 마련인 제구력이 더 빠른 공을 던지면서 어쩜 그렇게 좋아질 수 있느냐는 거다. 박찬호의 경기를 보면 아직도 불안하고, 일본인투수 이시이가 맨날 욕을 먹는 것도 제구력이라는 건 어느 정도 선천적임을 말해주는데, 가니에란 선수는 그런 점에서 미스테리다.
1이닝만 던지면 편할 거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매년 200이닝 이상을 던지는 선발에 비해 마무리투수의 평균 이닝수는 70-80이닝에 불과하다. 하지만 매번 던질 때마다 1점차 내외의 급박한 상황에서 던져야 하므로 긴장도가 높고, 그래서 어깨가 빠지도록 던져야 하니 부상은 더 자주 찾아온다. 작년에 엄청난 활약을 했던 키스 폴크도 그랬던 것처럼, 전설에 남을 마무리투수 가니에도 지난 3년간의 활약을 뒤로한 채 올시즌 내내 부상자명단에 들어가 있다.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LA 다저스는 가니에 대신 뒷문을 책임진 브라조반이 막판에 승리를 날리는 일이 잦아지면서 1위 샌디에고에 크게 뒤지면서 올시즌을 접어야 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애리조나 시절 불같은 강속구를 뿌려대며 36세이브를 기록하기도 했던 김병현이 선발투수로 전환한 건 탁월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김병현의 말이다.
"선발이 편하다. 마무리투수는 1점도 주면 안되지만, 선발투수는 한 2-3점 줘도 잘던졌다고 한다"
선발로 전환해 성공가도를 걷고있는 김병현이 내일 등판한다. 지난번 경기 때 90마일 이상의 직구스피드를 내면서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했음을 말해준 그의 호투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