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이야기 - Shakespeare's Complete Works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윤기 외 옮김 / 달궁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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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만에 셰익스피어의 책을 잡은 걸까? 까마득하다. 고등학생이던 시절 우리집에는 셰익스피어 전집이 있었다.  페이지를 2단으로 나눈 세로 배열 활자들이 읽기도 전에 기가 질리게 만드는 오래된 책이었는데, 그날은 무슨 맘을 먹었었던 건지 갑자기 펼쳐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꽤나 심심했던 것 같다. 각오는 했었지만 어려웠고,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오델로>를 겨우겨우 읽고나서 <한여름 밤의 꿈>을 읽다가 포기한 기억이 난다.  그래도 셰익스피어의 그 반짝이며 흘러가는 듯한 유려한 문체의 맛이라도 봤던 셈이니 그만하면 읽으려고 노력한 뜻을 스스로 기특하게 여기고 싶다.

설명이 필요 없는 이윤기 님의 번역이라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게다가 제목이 <겨울이야기>다 보니 이 쓸쓸하고 차가운 겨울날에 꼭 읽어봐야지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다보면 <한여름 밤의 꿈>은 여름이 되어야 읽을 수 있을 듯.. )

머리글이라고 할 수 있는 ‘셰익스피어, 압축파일 풀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윤기 님도 고등학생 시절에 “셰익스피어를 뚫어 내지 못했다.”(p.6)고 고백하고 있는 걸 보면 셰익스피어의 작품 앞에 내가 무릎을 꿇은 건 그리 창피해할 일도 아닌 것 같다.  이윤기 님의 말로는 셰익스피어 작품이 잘 읽히지 않는 이유가 셰익스피어 작품 안에 녹아 있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신화와 고전들에 무지하기 때문이란다.

“나는 셰익스피어를, 호메로스부터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같은 신화 작가들,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뤼피데스 같은 그리스 비극 작가들, 헤로도토스, 플루타르코스 같은 역사가들로부터 흘러온 길고 깊은 강이라고 생각한다.”(p.13)고 하니 이거 원, 나 같은 사람은 아예 셰익스피어 작품 근처에는 아예 얼씬거려서도 안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책을 쭈욱 넘기다 보니 책 뒤편에 ‘<겨울이야기> 재미나게 읽기’라는 글이 하나 더 있었다.  그 글 안에 <겨울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암시하는 신화적 배경들이 설명되어 있었다.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시칠리아의 아름다운 왕비 ‘헤르미오네’와 후반부에 등장하는 사기꾼 ‘아우톨뤼코스’라는 인물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어떤 인물들에서 차용된 것인지, 그리고 헤르미오네가 정교한 대리석상으로 등장하는 부분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실려 있는 ‘퓌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이야기와 연관지어 설명해준다.  이쯤이면 이윤기 님이 언급하신 ‘문맥에 참여하는 재미의 체험’(p.219)에 참여할 수 있는 친절한 안내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으로 무작정 뛰어들려는 독자를 붙잡고 사전에 준비시켜주는 듯해서 다른 책에 비해 독자에 대한 배려가 돋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 더 마음에 드는 것은 “‘읽히는 셰익스피어’쪽으로 기우는 해석을 선택했다.”(p.236)는 번역가의 말이다.  이리 반가울 수가! 자신감을 갖고 본격적으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

이윤기 님으로부터 미리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덕분인지 이야기 속에 폭 빠져서 읽을 수 있었다.  시칠리아와 왕 레온테스가 왕비인 헤르미오네와 죽마고우인 보헤미아의 왕 폴릭세네스 사이를 의심하고 질투하면서 시작되는 사건이 헤르미오네의 버려진 딸 페르디타와 폴릭세네스의 아들인 플로리젤의 사랑이야기로 이어지는데 그 안에는 달콤한 사랑의 맹세, 불같은 질투, 저주와 증오, 눈물어린 회한과 참회, 용서와 화해, 거기에다 유머까지 담겨 있어서 셰익스피어의 언어의 연금술에 홀린 듯 빠져 있다보면 가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400년이라는 길고 험한 시간의 물살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내공을 갖고 있구나,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쉽고도 매끄러운 번역으로 예술작품의 사진까지 곁들인 친절한 설명과 함께 만나볼 수 있는 책을 만나게 된 것 같아 기쁘다.  아무래도 이 시리즈를 차곡차곡 모으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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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없다
버지니아 펠로스 지음, 정탄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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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펼칠 때 나는 색연필과 노트, 삼색볼펜을 함께 준비했었다. 좀 골머리가 지끈거리더라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속속들이 파헤쳐가며 읽을 매혹적인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었다.  고등학생 시절 셰익스피어 전집에서 몇 권 골라 읽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이 영 불안하고 작가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거론할 때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이 책을 계기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환기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기도 했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기면서 처음엔 노트와 볼펜이 필요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급기야 색연필도 팽개쳐버렸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가지고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영국 경험론 철학자인 프랜시스 베이컨의 일대기에 대한 예찬이라고 볼 수 있는 내용들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작가가 신비주의 연구가(칸트나 괴테가 근세 신비주의 운동으로 태어난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근거부족이 신비주의 탓은 아닌 것 같지만) 라서 그런지 그나마 ‘셰익스피어는 없다’라는 폭로성 발언을 뒷받침할만한 논리적 근거도 빈약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서 캐낼 수 있다는 암호들의 해독에 대한 설명도 너무 불충분하다.

베이컨학파의 주장과 정황상의 추측에 의존하여 전개되는 이야기는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심지어 점성술과 탄생별자리, 초신성을 운운하는 것도 모자라 동방박사를 인도했다는 베들레헴의 별까지 거론하며 그것이 베이컨의 천성적인 위대한 재능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추켜세울 때는 오히려 저자의 글에 대한 반감이 밀려들었다.

흥미만을 기대한다면 그리 기대를 저버리는 책은 아니다.  프랜시스 베이컨 당시의 영국 왕조(헨리 8세에서 찰스 1세까지 이어지는)와 사회를 무대로 암투와 비리, 부정과 비밀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처녀여왕 엘리자베스의 아들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핵심으로 들어갈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는 것, 또 프랜시스 베이컨의 고매한 인격과 천재적인 재능과 군계일학과 같은 귀품과 높은 지식을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 때문에 불행한 일생을 보냈고, 그런 비운의 사실들을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빌려 출간한 작품들 속에 암호로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사이비스럽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운 것은 아마도 내가 이 책에 걸었던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보니 어떤 서점에서는 소설로 분류가 되어 있기도 했다.  차라리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다면 얻은 게 많았다고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셰익스피어가 주민 대부분이 문맹이며 사투리를 사용하는 스트랫포드의  에이번 마을 출신이라서 ‘교육과 교양과 학식의 뿌리가 스트랫포드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는’(p.31) 주장을 폈지만 정설로는 셰익스피어의 아버지 존은 비교적 부유한  상인으로  피혁가공업과  중농(中農)을  겸하고 있었고  사회적  신분으로서는  중산계급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풍족한  소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뿐 아니라  당시 스트랫포드  에이번에는  훌륭한  초·중급학교가  있어서  라틴어를  중심으로  한  기본적 고전교육을  받았으며,  뒤에 그에게  필요했던  고전 소양도 이때  얻었다고 하고 있어 이 책의 저자의 주장과 어긋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상반된 하나의 예를 보더라도 셰익스피어에 대한 정설을 기본으로 바탕에 두지 않고 이 책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 현명하다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그저 프랜시스 베이컨을 셰익스피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안 것, 근세철학의 한 줄기라고 할 수 있는 경험론의 주인공 베이컨에 대한 일대기를 살펴볼 수 있었다는 것에 실망에 대한 위안을 얻으려고 한다.  그리고 400여 년의 내공을 쌓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 데는 그 작가가 셰익스피어건 베이컨이건 그다지 크게 상관할 바 없다는 사실이 고마울 뿐이다.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셰익스피어 혹은 베이컨의 <겨울이야기>를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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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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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경제수준이 높아지고 삶의 여유를 갖게 되면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예전에 비해 높아졌다.  그런데 그 관심의 방향이 ‘맛’이나 ‘영양’보다는 ‘안전’과 ‘건강유지’ 쪽으로 비중이 옮겨간 듯 보인다.  채소나 과일을 사면서도 농약이 너무 많이 뿌려진 것은 아닌지, 윤기를 더하기 위해 왁스를 바른 건 아닌지, 쉽게 상하지 말라고 약품처리를 한 건 아닌지, 의심이 들어서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이런 갈등들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잡식 동물의 딜레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원시시대처럼 식용가능의 여부나 독성물질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여전히 무엇을 먹어야 좋을지 몰라 불안해하는 것은 원시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산업음식’의 등장으로 인류가 섭식장애라는 딜레마에 빠졌다고 보고, 어딘가에서 시작되어 우리의 식탁까지 연결되어 있는 음식사슬을 추적한다.  우리의 식탁의 시작인 ‘그 어딘가’를 저자는 ‘산업적 음식’‘전원적 음식’, 그리고 ‘수렵,채집 음식’으로 나눈다. 

‘산업적 음식 사슬’로는 아이오와 주의 옥수수 단일재배농장을 시작으로 공장형 농장을 거쳐 맥도널드 햄버거에 이르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으며, '전원적 음식사슬‘로는 산업적 유기농식품과 로컬푸드 농장인 버지니아의 폴리페이스 농장을 체험하고 친한 벗들과 함께 손수 요리한 음식을 즐기며 끝을 마감하고 있다.  ’수렵.채집 음식사슬‘에서는 저자는 야생돼지 사냥과 버섯채집에 나서고 수렵과 채집에 도움을 준 지인들과 야생돼지고기 요리와 채집한 버섯 요리를 만들어 대접한다.

이러한 저자의 열정적인 추적과 몸을 사리지 않는 체험담은 오늘날의 잘못된 음식의 위험을 경고하는 다른 책들과 비교했을 때 이 책을 단연코 돋보이게 만든다.  게다가 음식에 대한 생물학적, 문화인류학적, 철학적 사유들은 무척 객관적이고 통합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어 이 책이 단순히 음식에 대한 이야기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꽤나 정치적이고 사회비판적인 이야기로 뻗어가고 있으니, 페이지를 넘길수록 매력은 더욱 짙어져갔다.

산업적 음식사슬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었으나 옥수수의 어마어마한 쓰임새에는 입이 쩍 벌어진다.  “일반적으로 슈퍼마켓에는 약 4만 5천가지의 물품이 있는데, 그 중 4분의 1이상에 옥수수가 들어있다‘(p.35)고 한다.  콜라에 설탕이 잔뜩 들어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던 나는 1984년에 코카콜라와 펩시가 모두 설탕을 값싼 고과당옥수수시럽으로 대체해버리면서 가격을 낮추는 대신 8온스짜리 코카콜라병을 모두 20온스짜리 병으로 바꾸었다는 글에서 어쩐지 속았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까 슈퍼에서 가공음식을 아무거나 들고 보면 고과당이니 액상과당이니하고 표시되어 있던 게 바로 설탕이 아니라 옥수수였던 거다. 그것도 유전자 조작 옥수수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도 없는..

이러한 산업적 음식사슬은 효용과 군산복합체의 이윤을 가장 중요시 한다.  효율과 생산성은 오직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느냐는 기준으로만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에, 식물이든 동물이든 산업적 음식사슬에 엮이기만 하면 그것은 저마다의 본성을 간직한 생명체가 아니라 탄수화물이나 단백질을 생산하는 기계로 변해버리고 만다.  그런 산업적 사고방식 때문에 돼지는 꼬리를 잘리고, 산란계들은 부리를 잘리며, 소들에게는 억지로 옥수수를 먹이며 항생제와 성장촉진제가 투여되고, 비싼 화석연료를 소비하고 환경을 오염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업적 유기농 식품은 어떨까?  저자는 ‘전원적 음식사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산업’이라는 말과 ‘유기농’이라는 말이 애초에 함께 사용할 수 없는 말이라고 못박는다.  그것은 그저 우리의 목가적 상상력을 충족시키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직접 산업적 유기농 농장을 직접 찾아가 보기도 하는데 거기엔 우리가 꿈꾸고 상상하던 유기농 농장의 모습은 없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유기농 식품을 선택하는 것으로 적어도 농약과 화학비료, 제초제 등의 사용을 줄이는 효과는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로컬푸드’라는 ‘초유기농’이라고 부를 수 있는 농업형태를 제시한다.  저자 마이클 폴란은 직접 폴리페이스라는 농장에서 일주일간 일을 하며 로컬푸드를 체험한다.  화석연료가 아닌 태양광으로 음식사슬의 처음을 장식하는 농장, 동물들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존중하는 경영방식, 자연 생태계의 다양성과 상호의존성이 보존되는 그 곳은 나에게 꿈의 농장으로 다가왔다.  ‘로컬푸드’라는 용어에서 암시하듯이 이 꿈의 농장에서 재배되는 것들은 산업시스템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퍼마켓에 가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 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 농장에서 계란이나 닭고기를 사기 위해 구매할 수 있는 정해진 날에 맞춰 차를 타고 손수 달려오는 수고를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절대로 우리집 현관문 앞까지 배달되는 일은 바랄 수 없다.  그러나 로컬푸드를 선택하는 것은 환경과 자연, 건강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의사표현이며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한편으로 미국에 비해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는 로컬푸드가 좀 더 잘 활성화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갖기도 했다.  어쩌면 한미FTA니 신자유주의니 하는 것들 때문에 상처받은 우리 농민들에게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어설픈 상상을 펼쳐보기도 하고,  싼 산업적 음식과 조금 더 비싼 로컬푸드 중에서 과연 나는 한 점 망설임 없이 비싼 로컬푸드를 선택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수렵,채집 음식사슬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채식주의에 대한 이야기도 나의 관심을 끌었는데, 바로 2,3년 전쯤에 나도 채식주의자가 되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의 의견에 저자가 조목조목 반박하는 것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수렵에 대해서 나는 꽤나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는데 저자의 사냥 경험담을 읽으며 나의 시각을 많이 조정할 수 있었다.  갑자기 사냥을 멋진 일이라고 추켜세울 수는 없지만 사냥의 과정에서 그 대상이 단순히 우리의 배를 채워 줄 ‘음식’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 훨씬 고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비유가 좀 그렇지만, 마치 지능적이고 잔인한 범죄자와 그를 쫓는 열정적인 형사의 관계처럼 서로의 존재를 깊이 인식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러므로 인간의 손에 길들여진 채 키워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도축당하는 가축들보다 사냥에 희생된 동물은 훨씬 더 동물의 본성에 가깝게, 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버섯채집에 대한 이야기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는데 저자는 버섯을 사냥(저자는 ‘사냥’이라는 말을 쓴다.)하기 위해 숲 속을 헤매다 보면 ‘누구든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경관, 새로운 향기, 새로운 맛이라는 극사실적인 감각들과 함께 완벽한 존재의 가벼움은 느낄 수’(p.486)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수렵과 채집을 통해 얻은 것들은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대가 없이 주어진, 놀랍고 설명할 수 없는 선물에 가까웠다.’(p.490)고 고백한다. 

끼니마다 음식을 먹으며 놀랍고 설명할 수 없는 선물을 받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면 어떨까?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즐겁지 않을까. 수렵과 채집은 가장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생활형태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가장 순수하고 정신적인(?) 섭식형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엇을 우리들의 Comfort food로 만들지는 우리 스스로가 선택할 몫이다.  나는 어릴 적 엄마가 만들어주던 살짝 살얼음이 낀 식혜와 얼갈이가 섞인 개운한 열무김치가 떠오른다.  지금도 맛있는 식혜와 열무김치를 먹으면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입안 가득히 퍼지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의 아이들은 어른이 된 후 무엇을 자신의 Comfort food로 떠올릴지.  혹시 맥도널드 햄버거나 신라면, 혹은 도미노피자 같은 것들이 되진 않을까 걱정스럽다. 

저자는 말한다.  ‘아마도 완벽한 식사는 완전히 보상을 지불하고 빚을 남기지 않는 식사일 것이다.’(p.516)라고. 그리고 ‘우리가 먹는 음식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몸이다.’(p.518)라고.  오랫동안 되새겨볼 글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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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안녕하려면] 서평단 알림
우리와 안녕하려면 - 하이타니 겐지로 단편집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츠보야 레이코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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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도서입니다]

하이타니 겐지로는 <내가 만난 아이들>이라는 교육에세이집에서 ‘상냥함의 힘’을 강조했었다.  ‘어린이는 작은 거인이다.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어린이, 스스로 성장하려는 한없는 에너지를 지닌 인간으로서의 어린이, 내가 어린이를 이런 존재로 보게 된 바탕에 오키나와가 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진 어린이가 어떻게 낙천적일 수 있는가.  고통스러운 인생을 사는 어린이의 내면이 어떻게 상냥함으로 가득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면서 ‘나는 지금껏 나를 길러 준 상냥한 사람들의 고독과 절망을 먹으며 살아왔’으며 ‘상냥함은 정서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고 타인까지도 변화시키는 힘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서 배웠다고 고백했었다.

작가의 고백이 얼마나 절절하고 아프게 다가왔었는지, 난 그 책을 읽고 난 후 하이타니 겐지로의 책을 다시 펴볼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도서관에서 <태양의 아이>나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같은 책들을 들었다 놓았다하다가 대출을 몇 번이나 미루곤 했다.

그러던 내가 <내가 만난 아이들>이후로 처음 그의 소설을 읽었다.  ‘물 이야기’, ‘손’, ‘눈’, ‘소리’, ‘친구’, 이렇게 짤막한 제목을 가진 다섯 편의 단편이 실린 책이다. 역시나 작고 가난하고 상처 입었지만 따스하고 상냥하고 아름다운 아이들이 이 이야기들의 주인공이다. 

그 아이들은 ‘공부할 수 있는 놈한테는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지만, 슬픈 일이 하도 많아서 공부 따위 손에 잡히지 않는 놈한테는 슬픈 일을 같이 걱정해 주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잖아.  우리 학교에 그런 선생님이 있나?“(p.14)하고 교육현실을 토로하며 학교의 해산 명령에도 불복한 채 수영부에 매달리는 문제아들이기도 하고,  2차 세계 대전 당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치열한 전투지였던 오키나와에서 어릴 때 폭탄을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손을 잃은 선생님을 기억하며 당시의 아픈 역사를 찾아가는 소녀들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가난과 폐허 속에서도 맑은 눈망울을 간직한 채 해맑게 살아가는 아이들, 장애가 있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아이들, 비열하고 가식적인 사회와 그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는 어른들에게 저항하며 순수의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아이들이기도 했다.

책 속의 아이들은 동심을 잃은 지 이미 오래된 나에게 아픈 질문을 던지곤 했다. ‘스스로 맞서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남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다들 너무나 순순히 규칙을 따르고 너무나 욕망에 약해요.’(p.66)라며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고 자식과 부모의 관계가 평행을 이루거나 어긋나지 않고 잠깐씩이라도 만날 수 있는 게 나의 희생이 아니라 ‘자식의 희생’ 덕분일 수도 있다는 사실(p.154)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주기도 했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비열하고 치졸한 모습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바람에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아프고 부끄러운 모습들이 슬프다거나 추하다고 느껴지기보다 따스함으로 감싸여져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맑고 진솔한 느낌의 문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하이타니 겐지로가 소중히 여겼던 ‘상냥함의 힘’이 그의 문학 안에 크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상처와 고통을 녹아내어 따스한 상냥함으로 변화시키는 그의 삶과 문학 속 연금술이 너와 나, 서로에 대한 존재의 소중함을 확인하게 하고 우리 모두를 차별이나 편견 없이 하나로 묶어 놓는다.

오래전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던 사람이 생각났다.  그를 다시 만난다면 상냥함으로 그를 대할 수 있을까?  닫힌 마음을 열고 그에게 웃어줄 수 있을까? 아직도 남아 있는 상처를 딛고 그와 내가 ‘우리’라는 한 묶음이 될 수 있을까?  책을 향해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 마음을 향해서는 고개를 가로 젓는 내 모습이 참 씁쓸하다.  (080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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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했다.
대통령이 바뀌면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겠구나, 하고 예상하긴 했지만
착잡하고 심란한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는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나서 거의 2년 6개월 동안 동*일보를 구독했다.
그 전까지는 한**일보를 구독했던 우리집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이사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우리집 초인종을 눌렀다.
모든 신문을 거의 다 취급한다는 신문보급소 사람이었는데, 아쉽게도 한**일보만 취급하지 않고 있기에 조중동 중에 선택한 것이 동*일보였던 것이다.

탐탁치 않았지만 한 번 구독한 거, 끊네 마네 요란떨기도 싫고 보급소 사람이랑 실랑이 벌이기도 귀찮아서 그동안 죽 봐왔는데, 대선이 끝나고는 도무지 신문 들추기가 싫어지는 것이었다. 드디어 보급소에 전화를 해서 구독을 중지해야겠다는 독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여보세요, 거기 신문보급소죠? 여기 OOO아파트 OOO동 OOO혼데요,  신문 그만 보려구요.“
“사모님, 오래 보셨는데, 저희가 서비스로 몇 달 넣어드릴테니까 계속 보시지 그러세요.  왜 그만 보시려고 그러세요..?“
“짜증나서 못 보겠어요.”
“?”

보급소 사람이 잠시 말문을 닫았다.  그러다가 피식 웃더니 그런 다른 신문으로 넣어주겠단다.  정 마땅치 않으면 경제신문으로라도...  다 싫다고 거절하고 끊었다.

그리고는 인터넷으로 한**일보 사이트에 들어가 구독신청을 했다. 오늘로 받아본지 3일째다.  동*일보보다는 신문보는 맛이 나긴 하는데 그래도 여전히 착잡하고 심란하기는 마찬가지다.  인권위가 대통령 직속이 된다는 말도 있고, 대운하 건설에서 제방을 높이는 데만 1조가 든다는 등 대운하 건설의 효용성을 두고 말도 무성하다.  무엇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입장에서 교육정책을 보고 있으면 우울하다.

자사고 설립, 고교등급제 인정, 본고사 부활.....  결국 특목고나 자사고에 진학하는 아이들에게 유리한 교육정책을 펼치겠다는 뜻인 것 같은데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느낄 위화감이나 상대적인 박탈감 같은 건 어떻게 해야할지.... 신문에선 학원들은 살판이 났고,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는 슬럼화 될 거라는 우려를 내비친다.

나는 요즘 우리가 아이들에게 행하고 있는 것이 교육인지 폭력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린다.  무한경쟁 속에 아이들을 던져놓고는 그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라고, 아니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기필코 승리하라고 목터져라 외치고 있는 게 바로 우리 부모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어 섬뜩하다.  이건 결코 교육이 아니다.  착하고 사랑스런 아이들에게 가하는 잔혹한 폭력이다.  그런데 그 폭력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보이질 않는다.  부모들은 부모들대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 같다.

큰아이가 중 3이 된다.  작년 초에 학원 외고반에 들어갔다가 질려서 그만 두었다.  학교에서 공부를 꽤나 한다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반이었지만, 그 반 아이들은 지나친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서 그런지 도벽과 폭언은 물론 친구를 따돌리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학원에 안 다니고 집에서 혼자 공부하던 큰아이는 아이들의 그런 모습에 충격을 받았고 결국 한달을 다 못 채우고 두 손을 들었다.  나도 그만 두라고 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외고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고.  지금까지 네가 해왔던 대로 하면 된다고,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는 게 실패는 아니지 않느냐고, 오늘이 행복하지 않다면 어떻게 내일이 행복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겠냐고, 엄마는 공부보다 네가 더 소중하다고... 

좀 더 자연스럽고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의 교육을 꿈꿔본다.  요즘 읽고 있는 하이타니 겐지로의 <우리와 안녕하려면>이란 책에 이런 글이 나온다.
“공부할 수 있는 놈한테는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지만, 슬픈 일이 하도 많아서 공부 따위가 손에 잡히지 않는 놈한테는 슬픈 일을 같이 걱정해 주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잖아.  우리 학교에 그런 선생님이 있나?”
선생님들이 아이들 교육의 모든 것을 책임질 수는 없다.  사회가, 사람들의 의식이 변해야 할 것이다. 모든 아이들의 모든 꿈이 소중히 여겨지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교육이 폭력이 되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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