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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경제수준이 높아지고 삶의 여유를 갖게 되면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예전에 비해 높아졌다. 그런데 그 관심의 방향이 ‘맛’이나 ‘영양’보다는 ‘안전’과 ‘건강유지’ 쪽으로 비중이 옮겨간 듯 보인다. 채소나 과일을 사면서도 농약이 너무 많이 뿌려진 것은 아닌지, 윤기를 더하기 위해 왁스를 바른 건 아닌지, 쉽게 상하지 말라고 약품처리를 한 건 아닌지, 의심이 들어서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이런 갈등들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잡식 동물의 딜레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원시시대처럼 식용가능의 여부나 독성물질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여전히 무엇을 먹어야 좋을지 몰라 불안해하는 것은 원시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산업음식’의 등장으로 인류가 섭식장애라는 딜레마에 빠졌다고 보고, 어딘가에서 시작되어 우리의 식탁까지 연결되어 있는 음식사슬을 추적한다. 우리의 식탁의 시작인 ‘그 어딘가’를 저자는 ‘산업적 음식’과 ‘전원적 음식’, 그리고 ‘수렵,채집 음식’으로 나눈다.
‘산업적 음식 사슬’로는 아이오와 주의 옥수수 단일재배농장을 시작으로 공장형 농장을 거쳐 맥도널드 햄버거에 이르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으며, '전원적 음식사슬‘로는 산업적 유기농식품과 로컬푸드 농장인 버지니아의 폴리페이스 농장을 체험하고 친한 벗들과 함께 손수 요리한 음식을 즐기며 끝을 마감하고 있다. ’수렵.채집 음식사슬‘에서는 저자는 야생돼지 사냥과 버섯채집에 나서고 수렵과 채집에 도움을 준 지인들과 야생돼지고기 요리와 채집한 버섯 요리를 만들어 대접한다.
이러한 저자의 열정적인 추적과 몸을 사리지 않는 체험담은 오늘날의 잘못된 음식의 위험을 경고하는 다른 책들과 비교했을 때 이 책을 단연코 돋보이게 만든다. 게다가 음식에 대한 생물학적, 문화인류학적, 철학적 사유들은 무척 객관적이고 통합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어 이 책이 단순히 음식에 대한 이야기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꽤나 정치적이고 사회비판적인 이야기로 뻗어가고 있으니, 페이지를 넘길수록 매력은 더욱 짙어져갔다.
산업적 음식사슬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었으나 옥수수의 어마어마한 쓰임새에는 입이 쩍 벌어진다. “일반적으로 슈퍼마켓에는 약 4만 5천가지의 물품이 있는데, 그 중 4분의 1이상에 옥수수가 들어있다‘(p.35)고 한다. 콜라에 설탕이 잔뜩 들어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던 나는 1984년에 코카콜라와 펩시가 모두 설탕을 값싼 고과당옥수수시럽으로 대체해버리면서 가격을 낮추는 대신 8온스짜리 코카콜라병을 모두 20온스짜리 병으로 바꾸었다는 글에서 어쩐지 속았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까 슈퍼에서 가공음식을 아무거나 들고 보면 고과당이니 액상과당이니하고 표시되어 있던 게 바로 설탕이 아니라 옥수수였던 거다. 그것도 유전자 조작 옥수수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도 없는..
이러한 산업적 음식사슬은 효용과 군산복합체의 이윤을 가장 중요시 한다. 효율과 생산성은 오직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느냐는 기준으로만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에, 식물이든 동물이든 산업적 음식사슬에 엮이기만 하면 그것은 저마다의 본성을 간직한 생명체가 아니라 탄수화물이나 단백질을 생산하는 기계로 변해버리고 만다. 그런 산업적 사고방식 때문에 돼지는 꼬리를 잘리고, 산란계들은 부리를 잘리며, 소들에게는 억지로 옥수수를 먹이며 항생제와 성장촉진제가 투여되고, 비싼 화석연료를 소비하고 환경을 오염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업적 유기농 식품은 어떨까? 저자는 ‘전원적 음식사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산업’이라는 말과 ‘유기농’이라는 말이 애초에 함께 사용할 수 없는 말이라고 못박는다. 그것은 그저 우리의 목가적 상상력을 충족시키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직접 산업적 유기농 농장을 직접 찾아가 보기도 하는데 거기엔 우리가 꿈꾸고 상상하던 유기농 농장의 모습은 없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유기농 식품을 선택하는 것으로 적어도 농약과 화학비료, 제초제 등의 사용을 줄이는 효과는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로컬푸드’라는 ‘초유기농’이라고 부를 수 있는 농업형태를 제시한다. 저자 마이클 폴란은 직접 폴리페이스라는 농장에서 일주일간 일을 하며 로컬푸드를 체험한다. 화석연료가 아닌 태양광으로 음식사슬의 처음을 장식하는 농장, 동물들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존중하는 경영방식, 자연 생태계의 다양성과 상호의존성이 보존되는 그 곳은 나에게 꿈의 농장으로 다가왔다. ‘로컬푸드’라는 용어에서 암시하듯이 이 꿈의 농장에서 재배되는 것들은 산업시스템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퍼마켓에 가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 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 농장에서 계란이나 닭고기를 사기 위해 구매할 수 있는 정해진 날에 맞춰 차를 타고 손수 달려오는 수고를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절대로 우리집 현관문 앞까지 배달되는 일은 바랄 수 없다. 그러나 로컬푸드를 선택하는 것은 환경과 자연, 건강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의사표현이며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한편으로 미국에 비해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는 로컬푸드가 좀 더 잘 활성화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갖기도 했다. 어쩌면 한미FTA니 신자유주의니 하는 것들 때문에 상처받은 우리 농민들에게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어설픈 상상을 펼쳐보기도 하고, 싼 산업적 음식과 조금 더 비싼 로컬푸드 중에서 과연 나는 한 점 망설임 없이 비싼 로컬푸드를 선택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수렵,채집 음식사슬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채식주의에 대한 이야기도 나의 관심을 끌었는데, 바로 2,3년 전쯤에 나도 채식주의자가 되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의 의견에 저자가 조목조목 반박하는 것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수렵에 대해서 나는 꽤나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는데 저자의 사냥 경험담을 읽으며 나의 시각을 많이 조정할 수 있었다. 갑자기 사냥을 멋진 일이라고 추켜세울 수는 없지만 사냥의 과정에서 그 대상이 단순히 우리의 배를 채워 줄 ‘음식’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 훨씬 고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비유가 좀 그렇지만, 마치 지능적이고 잔인한 범죄자와 그를 쫓는 열정적인 형사의 관계처럼 서로의 존재를 깊이 인식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러므로 인간의 손에 길들여진 채 키워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도축당하는 가축들보다 사냥에 희생된 동물은 훨씬 더 동물의 본성에 가깝게, 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버섯채집에 대한 이야기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는데 저자는 버섯을 사냥(저자는 ‘사냥’이라는 말을 쓴다.)하기 위해 숲 속을 헤매다 보면 ‘누구든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경관, 새로운 향기, 새로운 맛이라는 극사실적인 감각들과 함께 완벽한 존재의 가벼움은 느낄 수’(p.486)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수렵과 채집을 통해 얻은 것들은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대가 없이 주어진, 놀랍고 설명할 수 없는 선물에 가까웠다.’(p.490)고 고백한다.
끼니마다 음식을 먹으며 놀랍고 설명할 수 없는 선물을 받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면 어떨까?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즐겁지 않을까. 수렵과 채집은 가장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생활형태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가장 순수하고 정신적인(?) 섭식형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엇을 우리들의 Comfort food로 만들지는 우리 스스로가 선택할 몫이다. 나는 어릴 적 엄마가 만들어주던 살짝 살얼음이 낀 식혜와 얼갈이가 섞인 개운한 열무김치가 떠오른다. 지금도 맛있는 식혜와 열무김치를 먹으면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입안 가득히 퍼지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의 아이들은 어른이 된 후 무엇을 자신의 Comfort food로 떠올릴지. 혹시 맥도널드 햄버거나 신라면, 혹은 도미노피자 같은 것들이 되진 않을까 걱정스럽다.
저자는 말한다. ‘아마도 완벽한 식사는 완전히 보상을 지불하고 빚을 남기지 않는 식사일 것이다.’(p.516)라고. 그리고 ‘우리가 먹는 음식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몸이다.’(p.518)라고. 오랫동안 되새겨볼 글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