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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이야기 - Shakespeare's Complete Works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윤기 외 옮김 / 달궁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몇 년 만에 셰익스피어의 책을 잡은 걸까? 까마득하다. 고등학생이던 시절 우리집에는 셰익스피어 전집이 있었다. 페이지를 2단으로 나눈 세로 배열 활자들이 읽기도 전에 기가 질리게 만드는 오래된 책이었는데, 그날은 무슨 맘을 먹었었던 건지 갑자기 펼쳐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꽤나 심심했던 것 같다. 각오는 했었지만 어려웠고,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오델로>를 겨우겨우 읽고나서 <한여름 밤의 꿈>을 읽다가 포기한 기억이 난다. 그래도 셰익스피어의 그 반짝이며 흘러가는 듯한 유려한 문체의 맛이라도 봤던 셈이니 그만하면 읽으려고 노력한 뜻을 스스로 기특하게 여기고 싶다.
설명이 필요 없는 이윤기 님의 번역이라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게다가 제목이 <겨울이야기>다 보니 이 쓸쓸하고 차가운 겨울날에 꼭 읽어봐야지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다보면 <한여름 밤의 꿈>은 여름이 되어야 읽을 수 있을 듯.. )
머리글이라고 할 수 있는 ‘셰익스피어, 압축파일 풀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윤기 님도 고등학생 시절에 “셰익스피어를 뚫어 내지 못했다.”(p.6)고 고백하고 있는 걸 보면 셰익스피어의 작품 앞에 내가 무릎을 꿇은 건 그리 창피해할 일도 아닌 것 같다. 이윤기 님의 말로는 셰익스피어 작품이 잘 읽히지 않는 이유가 셰익스피어 작품 안에 녹아 있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신화와 고전들에 무지하기 때문이란다.
“나는 셰익스피어를, 호메로스부터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같은 신화 작가들,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뤼피데스 같은 그리스 비극 작가들, 헤로도토스, 플루타르코스 같은 역사가들로부터 흘러온 길고 깊은 강이라고 생각한다.”(p.13)고 하니 이거 원, 나 같은 사람은 아예 셰익스피어 작품 근처에는 아예 얼씬거려서도 안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책을 쭈욱 넘기다 보니 책 뒤편에 ‘<겨울이야기> 재미나게 읽기’라는 글이 하나 더 있었다. 그 글 안에 <겨울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암시하는 신화적 배경들이 설명되어 있었다.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시칠리아의 아름다운 왕비 ‘헤르미오네’와 후반부에 등장하는 사기꾼 ‘아우톨뤼코스’라는 인물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어떤 인물들에서 차용된 것인지, 그리고 헤르미오네가 정교한 대리석상으로 등장하는 부분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실려 있는 ‘퓌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이야기와 연관지어 설명해준다. 이쯤이면 이윤기 님이 언급하신 ‘문맥에 참여하는 재미의 체험’(p.219)에 참여할 수 있는 친절한 안내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으로 무작정 뛰어들려는 독자를 붙잡고 사전에 준비시켜주는 듯해서 다른 책에 비해 독자에 대한 배려가 돋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 더 마음에 드는 것은 “‘읽히는 셰익스피어’쪽으로 기우는 해석을 선택했다.”(p.236)는 번역가의 말이다. 이리 반가울 수가! 자신감을 갖고 본격적으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
이윤기 님으로부터 미리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덕분인지 이야기 속에 폭 빠져서 읽을 수 있었다. 시칠리아와 왕 레온테스가 왕비인 헤르미오네와 죽마고우인 보헤미아의 왕 폴릭세네스 사이를 의심하고 질투하면서 시작되는 사건이 헤르미오네의 버려진 딸 페르디타와 폴릭세네스의 아들인 플로리젤의 사랑이야기로 이어지는데 그 안에는 달콤한 사랑의 맹세, 불같은 질투, 저주와 증오, 눈물어린 회한과 참회, 용서와 화해, 거기에다 유머까지 담겨 있어서 셰익스피어의 언어의 연금술에 홀린 듯 빠져 있다보면 가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400년이라는 길고 험한 시간의 물살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내공을 갖고 있구나,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쉽고도 매끄러운 번역으로 예술작품의 사진까지 곁들인 친절한 설명과 함께 만나볼 수 있는 책을 만나게 된 것 같아 기쁘다. 아무래도 이 시리즈를 차곡차곡 모으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