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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없다
버지니아 펠로스 지음, 정탄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처음 이 책을 펼칠 때 나는 색연필과 노트, 삼색볼펜을 함께 준비했었다. 좀 골머리가 지끈거리더라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속속들이 파헤쳐가며 읽을 매혹적인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었다. 고등학생 시절 셰익스피어 전집에서 몇 권 골라 읽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이 영 불안하고 작가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거론할 때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이 책을 계기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환기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기도 했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기면서 처음엔 노트와 볼펜이 필요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급기야 색연필도 팽개쳐버렸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가지고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영국 경험론 철학자인 프랜시스 베이컨의 일대기에 대한 예찬이라고 볼 수 있는 내용들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작가가 신비주의 연구가(칸트나 괴테가 근세 신비주의 운동으로 태어난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근거부족이 신비주의 탓은 아닌 것 같지만) 라서 그런지 그나마 ‘셰익스피어는 없다’라는 폭로성 발언을 뒷받침할만한 논리적 근거도 빈약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서 캐낼 수 있다는 암호들의 해독에 대한 설명도 너무 불충분하다.
베이컨학파의 주장과 정황상의 추측에 의존하여 전개되는 이야기는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심지어 점성술과 탄생별자리, 초신성을 운운하는 것도 모자라 동방박사를 인도했다는 베들레헴의 별까지 거론하며 그것이 베이컨의 천성적인 위대한 재능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추켜세울 때는 오히려 저자의 글에 대한 반감이 밀려들었다.
흥미만을 기대한다면 그리 기대를 저버리는 책은 아니다. 프랜시스 베이컨 당시의 영국 왕조(헨리 8세에서 찰스 1세까지 이어지는)와 사회를 무대로 암투와 비리, 부정과 비밀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처녀여왕 엘리자베스의 아들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핵심으로 들어갈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는 것, 또 프랜시스 베이컨의 고매한 인격과 천재적인 재능과 군계일학과 같은 귀품과 높은 지식을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 때문에 불행한 일생을 보냈고, 그런 비운의 사실들을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빌려 출간한 작품들 속에 암호로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사이비스럽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운 것은 아마도 내가 이 책에 걸었던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보니 어떤 서점에서는 소설로 분류가 되어 있기도 했다. 차라리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다면 얻은 게 많았다고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셰익스피어가 주민 대부분이 문맹이며 사투리를 사용하는 스트랫포드의 에이번 마을 출신이라서 ‘교육과 교양과 학식의 뿌리가 스트랫포드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는’(p.31) 주장을 폈지만 정설로는 셰익스피어의 아버지 존은 비교적 부유한 상인으로 피혁가공업과 중농(中農)을 겸하고 있었고 사회적 신분으로서는 중산계급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풍족한 소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뿐 아니라 당시 스트랫포드 에이번에는 훌륭한 초·중급학교가 있어서 라틴어를 중심으로 한 기본적 고전교육을 받았으며, 뒤에 그에게 필요했던 고전 소양도 이때 얻었다고 하고 있어 이 책의 저자의 주장과 어긋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상반된 하나의 예를 보더라도 셰익스피어에 대한 정설을 기본으로 바탕에 두지 않고 이 책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 현명하다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그저 프랜시스 베이컨을 셰익스피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안 것, 근세철학의 한 줄기라고 할 수 있는 경험론의 주인공 베이컨에 대한 일대기를 살펴볼 수 있었다는 것에 실망에 대한 위안을 얻으려고 한다. 그리고 400여 년의 내공을 쌓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 데는 그 작가가 셰익스피어건 베이컨이건 그다지 크게 상관할 바 없다는 사실이 고마울 뿐이다.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셰익스피어 혹은 베이컨의 <겨울이야기>를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