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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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난 해 다른 사람들은 이미 한참 전에 읽고 지나갔을 법한 책을 뒤늦게 읽고 탄복한 적이 있다. (어디 그런 책이 한두 권이랴!)  바로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책이었는데, 그 책을 읽고는 알랭 드 보통이라는 작가의 글맛을 더 느껴보고 싶어서 그의 ‘사랑과 인간관계 3부작’을 완독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사랑일까>와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을 마련해두었었다.  그의 처녀작이자 사랑과 인간관계 1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은 지 석 달 만에 2부 <우리는 사랑일까>를 잡았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는 작중1인칭화자 ‘나’와 ‘클로이’라는 여성과의 사랑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성인 클로이의 내면보다는 남성인 ‘나’의 내면이 더 잘 드러나 있었다.  그게 좀 아쉬움으로 남아 은근히 여성편을 바라고 있었는데, <우리는 사랑일까>는 주인공 에릭과 앨리스의 이야기가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펼쳐져있어 여성과 남성 각각의 사랑의 심리를 날카롭게 분석해가는 작가의 글을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었다. 소설 속에다 사람의 복잡하고 다난한 마음을 어쩌면 그렇게 잘 투영해 놓았던지, 알랭 드 보통이 더욱 신비스러운 매력을 가진 작가로 생각되었다.


네가 날 사랑하는 이유?  

여성과 남성(물론 소설 속의 에릭과 앨리스로 대표되는)이 가진 가치체계에 대한 고찰은 실내장식, 감상주의, 벌거벗는 것, 감정적인 벌거벗음, 너그러움과 같은 소제목들로 분류되어 남녀사이에 미묘한 갈등과 오해를 빚어내는 원인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왜 사랑받는가’라는 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육체나 돈, 이뤄놓은 일, 나약함, 혹은 세세한 면이나 불안감, 두뇌 등을 이유로 사랑받기를 두려워하고 단지 존재로서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존재 자체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 모호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의 동기 중 덧없는 요소를 다 뺐을 때, 앨리스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육체와 지성과 가진 것들을 제하니, 어떤 사랑할 이유가 남았을까? 데카르트처럼 별로 남는 게 없었다.’(P.227)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서 이런 저런 요소들을 모두 빼고 나면 사랑의 이유가 별로 남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결국 데카르트의 공허한(?) 울림처럼 ‘나는 사랑받기를 원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사실만이 남게 될 것이란 이야기다.  아무 이유도 조건도 없이 ‘나’이기 때문에 사랑해줄 누군가를 바란다는 것은 덧없는 희망사항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이 문제에 대해 확실한 답을 피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는 ‘상대방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살아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예의에 속한다.  개인적인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어떤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속성이나 특질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위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p.190)라고 하면서 그것은 일종의 시험이라고 설명한다. ‘내 소망은 내가 모든 것을 잃고 “나”만 남았다고 해도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이 신비한 “나”는 가장 약한, 가장 상처받기 쉬운 지점에 자리 잡은 자아로 간주된다.  내가 너한테 약해 보여도 될 만큼 나를 사랑하니? 모두가 힘을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내 약한 것 때문에 나는 사랑하니? 이것이 진짜 시험이다.’(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p.191)라고.

그렇게 결과가 무지 부담스런 시험은 문제를 내는 쪽도 치러야 하는 쪽도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고 또 막상 사랑에서 ‘왜?’라는 질문자체가 그렇게 공허한 거라면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사랑인지나 제대로 알고 가는 건 어떨까.

사랑 안에 숨어있는 권력과 방정식

이 책 안에는 그 또는 그녀에게는 감춰놓고 알려주고 싶지 않은 사랑의 권력과 방정식에 대한 풀이도 등장한다.  알랭 드 보통은 말한다. ‘권력이란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영향을 미치거나, 사람이나 사물에게 작용을 가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중략) 하지만 사랑에서는 권력이 훨씬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정의에 의존하는 것 같다.  사랑에서는 권력이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능력으로 간주된다.’(p.175)고 하면서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사랑의 목표는 소통과 이해이기 때문에, 화제를 바꿔서 대화를 막거나 두 시간 후에나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이, 힘없고 더 의존적이고 바라는 게 많은 사람에게 힘 들이지 않고 권력을 행사한다.’(p.177)고 갈파한다.  사랑에서 권력 운운하는 것 자체부터 그 사랑의 끝이 보이는 감이 없지 않지만, 아무튼 맞는 말임엔 틀림이 없다.  사랑하면서도 때때로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 억울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에서의 권력이라는 게 때론 잔인하고 치사한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지 않을까 싶은데....

알랭 드 보통이 들려주는 사랑에 대한 방정식은 ‘관계란 스스로 균형을 잡고자 하는 원초적이고 잔혹한 욕망이라고’(p.381)할 수 있다고 하면서 어느 한쪽이 관계유지를 위한 노력을 덜 기울이게 되면 다른 한쪽이 상대방의 모자라는 몫까지 더 노력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말도 맞는 말이다.  알랭 드 보통이라는 이 사람, 참 무서운 사람인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이 사람이 기혼일지 미혼일지, 결혼을 했다면 그 결혼생활은 어떨지, 그의 부인은 행복할지 불행할지, 별 게 다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너에게 난, 나에게 넌....

그러나 알랭 드 보통도 사랑이 바람직하게 흘러가고 유지되길 원한다면 ‘권력’이니 ‘방정식’이니 하는 말이 ‘사랑’이라는 말에 끼어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빌려가며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 그들이 우리의 농담을 이해하면 우리는 재미난 사람이 되고, 그들의 지성에 의해 우리는 지성 있는 사람이 된다.  그들의 너그러움이 우리를 너그럽게 하고, 그들의 모순이 우리를 모순되게 한다.  개성이란 읽는 이와 쓰는 이 양쪽이 다 필요한 언어와 같다.’(p.318)고. ‘관계의 기반은 상대방의 특성이 아니라, 그런 특성이 우리의 자아상에 미치는 영향에 있다.’(p.319)는 말은 작가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은 달라진다.  우리는 조금씩 남들이 우리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자아는 아메바에 비유할 수 있다.’(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p.150)고 한 말과 상통하는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를 점검해 보아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라면 나는 너를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하게 비춰줄 수 있는지를, 혹시 내가 너를 황량한 겨울들판을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걸어가는 외로운 모습으로 비춰주고 있지는 않은지를.

이제 주인공 앨리스와 에릭의 사랑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한 때 완벽하다고 느꼈던 사랑에 금이 가는 여러 가지 이유가 열거되는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상대방을 통해 나의 존재가 드러나고 이해받는 일이 불가능했다는 점이 아닐까.  앨리스가 에릭에게는 갈수록 실망을 깊이 느끼는데 비해 필립에게는 더욱 강한 매력을 느끼며 끌리는 것은 에릭보다는 필립과 더 코드가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라도 필립에게 끌리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앨리스는 에릭과 이야기할 때에는 ‘자페적인 기분’(p.367)에 휩싸였지만 필립과 이야기 할 때는 더 풍성한 대화의 가지를 뻗을 수 있었고, ‘신실한 암반에 도달’(p.309)할 수 있었으며 ‘자신이 자신답다고’(p.317)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KISS & TELL>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클로이가 주인공 ‘나’의 직장 동료 윌(‘나’보다 훨씬 능력있는 인물)에게로 사랑을 움직여 가는 바람에 실연을 맞게 되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사랑일까>에서는 사랑이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이 더 사실적이고 세밀하다.  게다가 사랑이 하나의 선택이며 과정이라는 인식이 더 치밀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에서는 사랑에 대한 더 깊고 예리한 분석과 통찰이 펼쳐지리라고 즐겁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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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거짓말
기무라 유이치 지음, 임희선 옮김 / 지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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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간략하게 말하자면 멜로드라마 한 편을 본 느낌이다. 촉망을 한 몸에 받으며 잘 나가던 시나리오 작가 나오키는 어느 날 한계에 부딪치고는 기차를 타고 무작정 도피한다.  바닷가 외딴 마을에서 이름을 히사노리로 바꾸고 바텐더로 취직한 나오키는 순수하고 밝은 라멘가게 집 딸인 고토미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고는 점차 마을 사람들을 향해서도 마음을 열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소재로 삼아 다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시나리오는 방송국의 가마타 감독에게 메일로 전달되고 드라마로 제작되어 높은 시청률을 올리면서 나오키에게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재기의 발판이 되어 준다. 그러나 정체를 숨기며 시나리오 작업에 골몰하던 나오키는 사랑하는 고토미의 의심을 사게 되고, 결국 고토미는 나오키가 시나리오를 위해서 자신을 이용했다는 오해를 하고 떠나게 되는 이야기다. 

결말은 깔끔한 해피 엔딩이고, 마을 주민인 트렌스젠더 아케미와 언젠가는 남태평양에서 청새치를 잡겠다는 꿈을 가진 타니 할배, 죽이 잘 맞는 두 친구 히라노와 토시, 다정한 오오사코 노부부,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 바보’라며 금요일마다 찾아와 술을 마시는 마키 등 소박하고 진솔한 삶을 살아가는 조연들이 돋보이고, 중간에 살짝 삼각관계가 형성되기도 하면서 드라마 같은 분위기를 한껏 띄워 놓는다. 

그러나 같은 사건이 나오키의 관점, 고토미의 관점, 다시 드라마의 내용으로 반복되는 마치 나선형 구조를 보고 있는 듯한 지루함이 없지 않았고, 작가가 책의 뒷부분에 적은 대로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p.320)처럼 상투적이고 통속적인 느낌이 드는 부분도 자주 보였다.  특히 주인공이 외롭고 처량한 기분이 들 때나 갈등이 일어나 헤어질 위기가 오면 어김없이 내리는 비라든가 드라마에서 봄직한 얄팍하고 진부한 설정들이 무척 거슬렸다. 

차라리 문학작품으로서가 아니라 드라마로 만났더라면 더 나았을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장르를 잘못 선택했다고 해야 하나?  문학적 깊이를 원하는 사람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고, 멜로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부담 없이 팝콘 먹는 기분으로 읽고 싶은 분이라면 딱 맞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벼락같은 운명적 사랑을 믿는 나이를 지나, 이제 남녀간의 사랑을 세살짜리 어린애 재롱 보듯이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그러니 이 책이 전혀 내 취향과 맞지 않았다는 것을 슬퍼해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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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녀석의 중학교 배정 등록 날이었다. 배정표를 챙겨서 오전에 막내를 데리고 배정받은 중학교에 갔다.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서 이번 신입생은 공동구매를 통해 교복을 구매할 수 있고 배정등록을 하는 날 공동구매하는 업체의 교복을 전시한다고 하기에 가서 살펴보고 안내지를 받아왔다.  동복 1세트(자켓,조끼,셔츠,바지)에 13만7천원.

큰딸이 중학교에 입학할 때에는 교복 공동구매가 없었기 때문에 *마트에 가서 교복을 사줬었다.  자켓과 조끼, 치마는 하나씩 그리고 자주 갈아입어야 하는 블라우스는 3장을 샀는데 정확한 액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략 35만원 정도 줬던 것 같다. 그나마도 거품이 한창 왕성할 때에 비해서 가격이 많이 내린 거라고 했는데도, 교복뿐 아니라 가방과 운동화, 참고서와 문제집, 체육복과 실내화, 소소하게는 교복에 맞춰 신을 스타킹과 속바지까지 마련해주는데 솔직히 휘청했다.

공동구매 교복을 구입하려면 아이의 치수를 재야한다고 해서 그 즉시 구입신청을 하지 못하고 일단 집에 돌아왔다.  학교 앞에서는 *마트, *이비클럽, *리트 등등 소위 메이커 교복 업체에서 나와 홍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눠주는 브로슈어까지 받아 집에 돌아와 살펴보는데, 어라? 큰딸 때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붙어 있었다. 할인쿠폰이었다.  동복 한 세트에 22만원인데 17만원에 살 수 있는, 거금 5만원을 할인 받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쿠폰이었다.

이쯤에서 고해성사를 하련다.  흔들렸다고.  메이커의 유혹은 생각보다 강렬했다.  공동구매 교복의 품질은 어떨까?  금방 보푸라기가 일어난다거나 바느질이 약하다거나 입었을 때 맵시가 나지 않는다거나 하는 건 아닐까?  공동구매 교복을 구입했다가 만약 하자가 발견되었을 때  교환이나 환불, 하다못해 AS도 받지 못하면 어떡하지? 옷감이 약해서 오래 못 입고 중간에 교복을 한 번 더 사줘야 한다면 낭패가 아닌가?  갖가지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이 났다.  내 꼴이 하도 우스워서. 지금 내가 자본주의(거창하게 자본주의를 들먹거릴 것까지야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난 내 결정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사회에서 써먹을 수 있는 소비의 힘을 가지고 그 힘을 행사하려고 하는 거라면 어느 쪽에 힘을 실어줘야 할까.  메이커 교복 업체들은 학부모와 학생들의 교복구매라는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조건을 이용해서 해마다 무지막지한 이윤을 거둬들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결국 학교와 학부모단체들이 발품, 손품 다 팔아가며 선정했을 교복을 믿어보기로 결론을 내렸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야, OO이네는 교복 어떻게 한대?”하고 아들에게 슬쩍 물어봤다.  그랬더니 “걔네는 공동구매 안하고 그냥 사줄 거라던데?”한다.  그래, 교복 값이 너무 비싸다고 불평하면서도 결국 메이커 교복을 사주기로 한단 말이지...

아들 녀석을 데리고 다시 학교에 갔다.  치수를 재고 공동구매 교복을 신청했다.  바지 하나와 셔츠 하나를 추가해서 주문했더니 19만 5천원이 나왔다.  내 나름의 모험이었다.  큰아이를 통해 품질이 확인된 *마트 교복을 사주는 게 더 현명하고 안전한 결정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학교 어머니들의 손품, 발품 쪽에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어머니들간의 끈끈한 의리표현이기도 하고 그나마 그 힘도 실어주지 않으면 메이커 교복 업체의 횡포를 막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학부모측에서 교복 공동구매에 나서자 당장 5만원 할인쿠폰이 급조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 내 기분이 완벽하게 말끔하고 개운하지는 않다.  의심이 많은 나는, 혹시 공동구매 교복 업체와 학부모단체, 또는 학교사이에 검은 거래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혹을 애써 누르고 있는 중이다.  (안 누르면 뭘 어쩔건데?)

                                                                                                   2008. 2. 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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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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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사두고 읽기를 주저했던 건 완전히 나의 착각 때문이었다.  나는 이 책이 꽤 무겁고 진지한 내용일 거라고 생각했고 조용히 집중해서 읽을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군사독재에 대항하여 투쟁의 삶을 살다 간 파블로 네루다가 떡하니 제목에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책을 대충 휙 넘겨보는데 뒷부분에서 살바도르 아옌데라는 이름이 언뜻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쿠바의 카스트로가 선물한 기관총을 손에 들고는 머리가 깨어져 뇌수가 바닥과 벽 여기저기에 흩어진 모습으로 피노체트가 이끄는 쿠데타에 희생되었다던 아옌데와 파블로 네루다가 만났으니, 이 소설 알만 하겠군, 하며 각오를 단단히 하고 읽으리라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을 읽게 될 입장에 놓이자 어쩐지 남미문학 한 편 정도는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준비예식 쯤으로 책장에서 빼내어 손에 잡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잔뜩 폼 잡고 앉아 책을 읽던 나는 얼마 안가서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방금 바다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마냥 소설 속 인물들이 얼마나 싱싱하게 펄떡거리던지, 얼마나 육감적으로 생생하게 다가오던지, 그들이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실감나게 내 귓가에서 울리던지, 책 속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고기잡이 일에 정을 못 붙이고 아무런 낙 없이 빈둥거리며 지내던 마리오가 수신인이 네루다 한 사람 뿐인 이슬라 네그라를 담당하는 우편배달부가 된다.  네루다에게 저자 사인과 헌사를 받고 싶다는 욕심으로 첫 번째 월급과 두 번째 월급을 차례로 털어서 네루다의 시집을 산 마리오는 어느 틈에 시에 빠져들고 네루다로부터 메타포에 대한 강의(?)까지 듣게 된다. 그 과정에서 넉살좋은 마리오와 우편배달부에게 스스럼없이 시를 낭송해 줘가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네루다의 진솔하고 소박한 성품이 웃음을 자아낸다. 

네루다가 읊는 시를 듣고 ‘’제가 선생님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 같았어요“‘(p.31)라고 이야기하며 ‘“온 세상이 다 무엇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p.32)라고 철학적이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질문으로 네루다에게 놀라움을 선사하는 마리오는 이제 빈둥거리고 인생을 소극적으로 살아가던 예전의 마리오가 아니다. 마리오는 시에 눈을 뜨면서 베아트리스의 사랑을 얻어내고, 네루다의 벗이 되고, 무엇보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시와 언어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생각도 재미있다.  마리오와 네루다가 시와 메타포에 매료되어 사로잡힌 사람들이라면 상대적으로 베아트리스의 어머니인 로사 곤살레스 부인은 언어는 ‘허공에서 사라지는 불꽃놀이’(p.63)이고 글은 ‘빨리 읽든 늦게 읽든 뜻은 똑같’(p.105)다는 생각으로 ‘글을 읽는 게 아니라 삼켜  버리’(p.106)는 사람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에서 가장 육감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바로 이 로사 곤살레스 부인이다.  그녀가 쏟아내는 말에서 얼마나 키득거리며 웃어댔는지, 큰딸이 옆에 있다가 ‘엄마, 그 책이 그렇게 재밌어?’하며 궁금해 했다. 

그러나 역시, 네루다와 아옌데, 아니 칠레에 불어 닥친 비극적인 바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어서 소설의 뒷부분에 이르면 웃음은 점차 사라지고 진지함과 애잔함이 깃들기 시작한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아옌데의 인민연합 정부가 추진하려고 했던 정책들 (주요산업의 국유화와 철저한 농지개혁, 분유 무상보급 등)은 미국의 원조 삭감, 국제금융기관의 대출 정지, 미국 중앙정보국과 거대 기업 아이티티사의 후원을 받은 우파의 정권 전복 공작 등으로 실패하고 만다. 물론 소설 안에 그런 세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저 네루다의 죽음과 마리오의 실종으로 그 비극을 전할 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등장인물들의 열정적이며 육감적인 생생한 삶의 모습, 소박한 행복에 싸여 털털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기꺼이 즐거워하던 그만큼 비극의 느낌은 예리하게 마음을 그었다. 

책을 덮으며 정말 명작이다, 싶었다.  사람을 웃겼다 울렸다 하면서 결국 권력과 폭력 앞에 희생되는 인간의 모습,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삶을 지탱하고 변화를 꿈꾸는 반짝이는 민중의 모습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난 아직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지 못했다.  영화로 네루다와 마리오, 베아트리스와 로사 곤살레스 부인을 만나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진다.  이슬라 네그라 해안가의 네루다의 집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리며 찾아든다고 한다.  그리고 울타리에 메시지를 써놓고는 한다고.  그 중엔 이런 글이 남아있다고 한다.

“사랑은 결코 죽지 않는다. 장군이여, 아옌데와 네루다는 살아 있다.  한순간의 암흑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지 못한다.”라는.


* 서평을 쓰면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서경식 지음/이목 옮김/돌베개)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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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영어를 처음 배울 때는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라고 했지만) 6학년 겨울 방학 기간 이었다.  당시만 해도 중학교에 입학해야 정규과목으로 영어가 있었던 터라 난 중학교 입학을 코앞에 두고도 알파벳도 제대로 몰랐다.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정말?”하고 놀랄 이야기지만 그 시절엔 아이들 대부분이 거의 그랬던 것 같다.

엄마는 나를 20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 영어학원에 보내주셨다.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새로운 걸 배운다는 생각에 꿈에 부풀어 열심히 다녔던 것 같다.  줄이 쳐있는 공책에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 인쇄체, 필기체를 연습하면서 한글과는 다르게 곡선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알파벳의 이국적 매력에 빠져 황홀해 하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알파벳 쓰기 연습을 한답시고 싸구려 나무 펜대에 알파벳 모양처럼 우아한 곡선의 형태를 지닌 펜촉을 끼우고 파란 잉크를 살짝 찍어서 공책에 글자의 선을 그을 때면 펜촉이 공책의 표면을 긁는 그 느낌도 얼마나 좋았던지.. 내 앞에 새로운 길이 뻥 뚫리고 새로운 문이 활짝 열려 나의 세상이 커지고 넓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었다.   

아무튼 그렇게 한 달 정도 다니면서 알파벳에도 익숙해지고 단어 몇 개도 외우고 be동사를 배우고 “Let me introduce myself...."로 시작하는 자기소개를 서너 문장으로 줄줄 외울 즈음, 난데없이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과외며 학원수강을 금지시키는 바람에 학원을 다니며 영어를 배우던 즐거움을 빼앗기고 말았다.  아직도 학원비를 환불 받아가라는 학원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학원 데스크에서 학원비를 돌려받을 때의 아쉬움이 기억난다.

그러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학교 영어를 배우면서 나는 영어가 주던 즐거움과 기쁨을 어느새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성적을 위한 영어, 입시를 위한 영어는 결코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아들 녀석이 딱 그 나이다.  나와는 다르게 초등3학년 때부터 정규과목으로 영어를 배운 아들은 아직 중학교 입학 전인데도 영어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학원을 다니면서 단어 시험과 문법에 치이며 영어에 대한 원망을 키워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영어를 처음 배울 때와는 무척 다른 모습이다.  어느 날 영어 공부에 대한 하소연을 하도 길게 늘어트리기에 뭐라고 한 마디 했더니 아들 녀석 하는 말이
“그냥 우리나라도 영어를 썼으면 좋겠어.  그러면 태어날 때부터 영어를 모국어로 쓰게 되니까 이렇게 영어 때문에 나중에 난리를 안 쳐도 되잖아.”하며 오히려 반항이다.  “너도 인수위 닮아 가냐? 아서라, 말이 씨가 될까 무섭다.”하며 내가 넌더리를 쳤더니 이 녀석이 한 술 더 뜬다.
“엄마, 그래도 나는 나은 편이야.  우리 반 어떤 애는 차라리 우리나라가 미국 식민지였으면 좋겠대.”

말문이 턱 막혔다.  얼마나 영어가 싫고 지겨웠으면 아이들이 영어가 모국어이기를, 우리나라가 미국의 식민지이기를 꿈꾼단 말인가. 
“야, 걔더러 차라리 영어 공부 하지 말라고 해라.  영어 때문에 모국어를 바꿔치고 나라를 팔아먹어서야 되겠냐?  그런 생각으로 영어 배우면 큰일 난다.  혹시 아냐? 걔가 우리나라 지도자가 되어서는 미국에다 우리나라를 고스란히 갖다 바칠지..  차라리 영어 공부 하지 마!”

우울해졌다.  내가 처음 영어를 배울 때 가졌던 동경,  나의 세계가 넓어지는 듯한 그 시원한 느낌은 너무 순진했던 걸까?  아이들은 왜 저렇게 변질(?)되었을까?  영어, 영어, 영어를 부르짖는 동안 아이들은 더 소중하고 중요한 가치를 잃어가는 건 아닐까?  정말 온 국민이 영어를 모국어처럼 잘해야 하는 걸까?  TV에서보면 중요한 국제회의에선 동시통역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던데, 나날이 소통을 가로막는 언어장벽을 극복하기 위한 첨단 기기들이 나오고 있는 듯한데, 아이들이 가져야 할 꿈과 가치를 죽이면서까지 영어에 올인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아이들은 좋은 성적을 위해, 더 좋은 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대학 입시를 위해, 커서는 취직을 위해, 승진을 위해 영어를 공부한다. 그것이 영어의 효용성일까? 물론 어딘가 써먹기는 할 것이다.  그저 막연한 어딘가에.

고백하건데, 요즘 인수위에서 발표하는 영어교육정책(영어를 정책화 하지 말라고는 하지만)을 지켜보면서 우리 아이들을 영어학원 한 군데 더 보내야 하는 것 아닐까, 고민했었다.  나 스스로 사교육을 멀리하며 살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잘못된 게 아닐까 혼란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나의 그 혼란도 아이들을 무조건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억지, 경쟁에 대한 불안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의심이 든다.  내가 원하는 건 ‘대학’이 아니라 아이들의 ‘행복’이다.  제발 우리나라가 대학을 나와야만 행복한 나라, 영어를 잘해야만 행복한 나라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요즘 들어서 ‘국가의 교육정책에 저항하는 의미로 아이들을 학교에 안보내면 어떨까?’하는 상상을 자주 하게 된다.  우리나라 모든 학부모가 자녀 학교 안 보내기 운동을 전개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  이런 무책임하고 위험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우리나라 교육현실이 참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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