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어를 처음 배울 때는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라고 했지만) 6학년 겨울 방학 기간 이었다. 당시만 해도 중학교에 입학해야 정규과목으로 영어가 있었던 터라 난 중학교 입학을 코앞에 두고도 알파벳도 제대로 몰랐다.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정말?”하고 놀랄 이야기지만 그 시절엔 아이들 대부분이 거의 그랬던 것 같다.
엄마는 나를 20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 영어학원에 보내주셨다.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새로운 걸 배운다는 생각에 꿈에 부풀어 열심히 다녔던 것 같다. 줄이 쳐있는 공책에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 인쇄체, 필기체를 연습하면서 한글과는 다르게 곡선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알파벳의 이국적 매력에 빠져 황홀해 하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알파벳 쓰기 연습을 한답시고 싸구려 나무 펜대에 알파벳 모양처럼 우아한 곡선의 형태를 지닌 펜촉을 끼우고 파란 잉크를 살짝 찍어서 공책에 글자의 선을 그을 때면 펜촉이 공책의 표면을 긁는 그 느낌도 얼마나 좋았던지.. 내 앞에 새로운 길이 뻥 뚫리고 새로운 문이 활짝 열려 나의 세상이 커지고 넓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었다.
아무튼 그렇게 한 달 정도 다니면서 알파벳에도 익숙해지고 단어 몇 개도 외우고 be동사를 배우고 “Let me introduce myself...."로 시작하는 자기소개를 서너 문장으로 줄줄 외울 즈음, 난데없이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과외며 학원수강을 금지시키는 바람에 학원을 다니며 영어를 배우던 즐거움을 빼앗기고 말았다. 아직도 학원비를 환불 받아가라는 학원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학원 데스크에서 학원비를 돌려받을 때의 아쉬움이 기억난다.
그러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학교 영어를 배우면서 나는 영어가 주던 즐거움과 기쁨을 어느새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성적을 위한 영어, 입시를 위한 영어는 결코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아들 녀석이 딱 그 나이다. 나와는 다르게 초등3학년 때부터 정규과목으로 영어를 배운 아들은 아직 중학교 입학 전인데도 영어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학원을 다니면서 단어 시험과 문법에 치이며 영어에 대한 원망을 키워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영어를 처음 배울 때와는 무척 다른 모습이다. 어느 날 영어 공부에 대한 하소연을 하도 길게 늘어트리기에 뭐라고 한 마디 했더니 아들 녀석 하는 말이
“그냥 우리나라도 영어를 썼으면 좋겠어. 그러면 태어날 때부터 영어를 모국어로 쓰게 되니까 이렇게 영어 때문에 나중에 난리를 안 쳐도 되잖아.”하며 오히려 반항이다. “너도 인수위 닮아 가냐? 아서라, 말이 씨가 될까 무섭다.”하며 내가 넌더리를 쳤더니 이 녀석이 한 술 더 뜬다.
“엄마, 그래도 나는 나은 편이야. 우리 반 어떤 애는 차라리 우리나라가 미국 식민지였으면 좋겠대.”
말문이 턱 막혔다. 얼마나 영어가 싫고 지겨웠으면 아이들이 영어가 모국어이기를, 우리나라가 미국의 식민지이기를 꿈꾼단 말인가.
“야, 걔더러 차라리 영어 공부 하지 말라고 해라. 영어 때문에 모국어를 바꿔치고 나라를 팔아먹어서야 되겠냐? 그런 생각으로 영어 배우면 큰일 난다. 혹시 아냐? 걔가 우리나라 지도자가 되어서는 미국에다 우리나라를 고스란히 갖다 바칠지.. 차라리 영어 공부 하지 마!”
우울해졌다. 내가 처음 영어를 배울 때 가졌던 동경, 나의 세계가 넓어지는 듯한 그 시원한 느낌은 너무 순진했던 걸까? 아이들은 왜 저렇게 변질(?)되었을까? 영어, 영어, 영어를 부르짖는 동안 아이들은 더 소중하고 중요한 가치를 잃어가는 건 아닐까? 정말 온 국민이 영어를 모국어처럼 잘해야 하는 걸까? TV에서보면 중요한 국제회의에선 동시통역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던데, 나날이 소통을 가로막는 언어장벽을 극복하기 위한 첨단 기기들이 나오고 있는 듯한데, 아이들이 가져야 할 꿈과 가치를 죽이면서까지 영어에 올인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아이들은 좋은 성적을 위해, 더 좋은 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대학 입시를 위해, 커서는 취직을 위해, 승진을 위해 영어를 공부한다. 그것이 영어의 효용성일까? 물론 어딘가 써먹기는 할 것이다. 그저 막연한 어딘가에.
고백하건데, 요즘 인수위에서 발표하는 영어교육정책(영어를 정책화 하지 말라고는 하지만)을 지켜보면서 우리 아이들을 영어학원 한 군데 더 보내야 하는 것 아닐까, 고민했었다. 나 스스로 사교육을 멀리하며 살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잘못된 게 아닐까 혼란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나의 그 혼란도 아이들을 무조건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억지, 경쟁에 대한 불안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의심이 든다. 내가 원하는 건 ‘대학’이 아니라 아이들의 ‘행복’이다. 제발 우리나라가 대학을 나와야만 행복한 나라, 영어를 잘해야만 행복한 나라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요즘 들어서 ‘국가의 교육정책에 저항하는 의미로 아이들을 학교에 안보내면 어떨까?’하는 상상을 자주 하게 된다. 우리나라 모든 학부모가 자녀 학교 안 보내기 운동을 전개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 이런 무책임하고 위험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우리나라 교육현실이 참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