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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평점 :
지난 해 다른 사람들은 이미 한참 전에 읽고 지나갔을 법한 책을 뒤늦게 읽고 탄복한 적이 있다. (어디 그런 책이 한두 권이랴!) 바로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책이었는데, 그 책을 읽고는 알랭 드 보통이라는 작가의 글맛을 더 느껴보고 싶어서 그의 ‘사랑과 인간관계 3부작’을 완독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사랑일까>와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을 마련해두었었다. 그의 처녀작이자 사랑과 인간관계 1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은 지 석 달 만에 2부 <우리는 사랑일까>를 잡았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는 작중1인칭화자 ‘나’와 ‘클로이’라는 여성과의 사랑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성인 클로이의 내면보다는 남성인 ‘나’의 내면이 더 잘 드러나 있었다. 그게 좀 아쉬움으로 남아 은근히 여성편을 바라고 있었는데, <우리는 사랑일까>는 주인공 에릭과 앨리스의 이야기가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펼쳐져있어 여성과 남성 각각의 사랑의 심리를 날카롭게 분석해가는 작가의 글을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었다. 소설 속에다 사람의 복잡하고 다난한 마음을 어쩌면 그렇게 잘 투영해 놓았던지, 알랭 드 보통이 더욱 신비스러운 매력을 가진 작가로 생각되었다.
네가 날 사랑하는 이유?
여성과 남성(물론 소설 속의 에릭과 앨리스로 대표되는)이 가진 가치체계에 대한 고찰은 실내장식, 감상주의, 벌거벗는 것, 감정적인 벌거벗음, 너그러움과 같은 소제목들로 분류되어 남녀사이에 미묘한 갈등과 오해를 빚어내는 원인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왜 사랑받는가’라는 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육체나 돈, 이뤄놓은 일, 나약함, 혹은 세세한 면이나 불안감, 두뇌 등을 이유로 사랑받기를 두려워하고 단지 존재로서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존재 자체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 모호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의 동기 중 덧없는 요소를 다 뺐을 때, 앨리스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육체와 지성과 가진 것들을 제하니, 어떤 사랑할 이유가 남았을까? 데카르트처럼 별로 남는 게 없었다.’(P.227)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서 이런 저런 요소들을 모두 빼고 나면 사랑의 이유가 별로 남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결국 데카르트의 공허한(?) 울림처럼 ‘나는 사랑받기를 원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사실만이 남게 될 것이란 이야기다. 아무 이유도 조건도 없이 ‘나’이기 때문에 사랑해줄 누군가를 바란다는 것은 덧없는 희망사항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이 문제에 대해 확실한 답을 피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는 ‘상대방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살아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예의에 속한다. 개인적인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어떤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속성이나 특질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위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p.190)라고 하면서 그것은 일종의 시험이라고 설명한다. ‘내 소망은 내가 모든 것을 잃고 “나”만 남았다고 해도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이 신비한 “나”는 가장 약한, 가장 상처받기 쉬운 지점에 자리 잡은 자아로 간주된다. 내가 너한테 약해 보여도 될 만큼 나를 사랑하니? 모두가 힘을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내 약한 것 때문에 나는 사랑하니? 이것이 진짜 시험이다.’(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p.191)라고.
그렇게 결과가 무지 부담스런 시험은 문제를 내는 쪽도 치러야 하는 쪽도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고 또 막상 사랑에서 ‘왜?’라는 질문자체가 그렇게 공허한 거라면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사랑인지나 제대로 알고 가는 건 어떨까.
사랑 안에 숨어있는 권력과 방정식
이 책 안에는 그 또는 그녀에게는 감춰놓고 알려주고 싶지 않은 사랑의 권력과 방정식에 대한 풀이도 등장한다. 알랭 드 보통은 말한다. ‘권력이란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영향을 미치거나, 사람이나 사물에게 작용을 가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중략) 하지만 사랑에서는 권력이 훨씬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정의에 의존하는 것 같다. 사랑에서는 권력이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능력으로 간주된다.’(p.175)고 하면서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사랑의 목표는 소통과 이해이기 때문에, 화제를 바꿔서 대화를 막거나 두 시간 후에나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이, 힘없고 더 의존적이고 바라는 게 많은 사람에게 힘 들이지 않고 권력을 행사한다.’(p.177)고 갈파한다. 사랑에서 권력 운운하는 것 자체부터 그 사랑의 끝이 보이는 감이 없지 않지만, 아무튼 맞는 말임엔 틀림이 없다. 사랑하면서도 때때로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 억울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에서의 권력이라는 게 때론 잔인하고 치사한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지 않을까 싶은데....
알랭 드 보통이 들려주는 사랑에 대한 방정식은 ‘관계란 스스로 균형을 잡고자 하는 원초적이고 잔혹한 욕망이라고’(p.381)할 수 있다고 하면서 어느 한쪽이 관계유지를 위한 노력을 덜 기울이게 되면 다른 한쪽이 상대방의 모자라는 몫까지 더 노력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말도 맞는 말이다. 알랭 드 보통이라는 이 사람, 참 무서운 사람인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이 사람이 기혼일지 미혼일지, 결혼을 했다면 그 결혼생활은 어떨지, 그의 부인은 행복할지 불행할지, 별 게 다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너에게 난, 나에게 넌....
그러나 알랭 드 보통도 사랑이 바람직하게 흘러가고 유지되길 원한다면 ‘권력’이니 ‘방정식’이니 하는 말이 ‘사랑’이라는 말에 끼어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빌려가며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 그들이 우리의 농담을 이해하면 우리는 재미난 사람이 되고, 그들의 지성에 의해 우리는 지성 있는 사람이 된다. 그들의 너그러움이 우리를 너그럽게 하고, 그들의 모순이 우리를 모순되게 한다. 개성이란 읽는 이와 쓰는 이 양쪽이 다 필요한 언어와 같다.’(p.318)고. ‘관계의 기반은 상대방의 특성이 아니라, 그런 특성이 우리의 자아상에 미치는 영향에 있다.’(p.319)는 말은 작가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은 달라진다. 우리는 조금씩 남들이 우리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자아는 아메바에 비유할 수 있다.’(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p.150)고 한 말과 상통하는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를 점검해 보아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라면 나는 너를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하게 비춰줄 수 있는지를, 혹시 내가 너를 황량한 겨울들판을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걸어가는 외로운 모습으로 비춰주고 있지는 않은지를.
이제 주인공 앨리스와 에릭의 사랑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한 때 완벽하다고 느꼈던 사랑에 금이 가는 여러 가지 이유가 열거되는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상대방을 통해 나의 존재가 드러나고 이해받는 일이 불가능했다는 점이 아닐까. 앨리스가 에릭에게는 갈수록 실망을 깊이 느끼는데 비해 필립에게는 더욱 강한 매력을 느끼며 끌리는 것은 에릭보다는 필립과 더 코드가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라도 필립에게 끌리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앨리스는 에릭과 이야기할 때에는 ‘자페적인 기분’(p.367)에 휩싸였지만 필립과 이야기 할 때는 더 풍성한 대화의 가지를 뻗을 수 있었고, ‘신실한 암반에 도달’(p.309)할 수 있었으며 ‘자신이 자신답다고’(p.317)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KISS & TELL>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클로이가 주인공 ‘나’의 직장 동료 윌(‘나’보다 훨씬 능력있는 인물)에게로 사랑을 움직여 가는 바람에 실연을 맞게 되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사랑일까>에서는 사랑이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이 더 사실적이고 세밀하다. 게다가 사랑이 하나의 선택이며 과정이라는 인식이 더 치밀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에서는 사랑에 대한 더 깊고 예리한 분석과 통찰이 펼쳐지리라고 즐겁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