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나오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유럽 1 - 프랑스·독일·그리스·노르웨이 교과서에 나오는 유네스코
이형준 글,사진 / 시공주니어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무엇보다 이 책이 탐이 났던 것은 큰딸이 올여름 유럽 여행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듯이 여행을 떠나기 전 예비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고 가야 그만큼 받아들이는 폭과 깊이가 다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서양미술사나 그리스로마 신화정도는 읽게 했지만 이 책을 보는 순간 내가 빠트린 게 있었구나 싶었다.  유럽에 가서 미술관만 보고 올 것도 아닌데, 왜 미술 쪽만 생각했을까.  아마 유럽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유명한 화가들과 곳곳에 세워진 조각들, 그리고 미술관이라서 그랬나보다.  아무튼 이 책이 무척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을 전공한 전문 사진작가답게 선명하고 시원시원한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책을 읽기 전에는 ‘여행담’ 쪽에 더 비중을 두었으면 어쩌나 살짝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문화유산에 대한 설명이 주가 된 책이었다.  친절한 ‘~어요.’ 또는 ‘~습니다.’ 문체로 문화유산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참 조곤조곤하게 잘 설명하고 있어서 청소년이나 초등 고학년 아이들이 읽기에도 무난할 것 같았다.  각 장 끝마다 딸려있는 ‘흥미진진 포인트’, ‘감상 포인트’를 통해서  본문에서 부족했던 설명을 추가하고, 직접 가서 문화유산을 보게 될 경우 어떤 식으로 감상하면 더 좋을지를 설명하고 있어 작가의 세세함이 드러난다.

1권에는 유럽하면 떠오르는 나라 프랑스와 독일, 그리스, 노르웨이의 문화유산에 대한 글과 사진이 들어있다.  프랑스 그 중에서도 파리에 대한 은근한 동경을 갖고 있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파리보다도 더 가보고 싶은 곳이 새로 생겼다.  그 곳은 바로 독일의 포츠담 상수시 궁전이다.  포츠담이야 역사시간에 배운 ‘포츠담 선언’ 덕분에 꽤 익숙했지만 상수시 궁전은 생소했다.  상수시는 프랑스 어로 ‘근심 없는’이라는 뜻이라는데, 이 책에서  본 상수시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상수시 궁전은 ‘사색의 황제’, ‘철학자 황제’, ‘예술가 황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진 프리드리히 2세가 애정을 갖고 지은 궁전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엔 상수시 궁전도 작가의 말처럼 ‘소박하고 아담’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지만, 베르사유 궁전에 비하면 뭔가 고즈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 것 같긴 했다.  특히 궁전 전체 면적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넓은 정원이 매력적이라는데, 인공적인 분위기의 정원이 아니라 자연스런 편안함이 흐르는 정원이라니 그 곳에 가서 상수시라는 이름대로 ‘근심 없이’ 조용하게 거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맨발로 걸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이 정원을 만든 페터 요제프 레베라는 정원사와 철학자, 예술가, 문인들과 어울렸던 프리드리히 2세를 상상하면서 말이다.  한가롭게 거닐다가 일본으로부터의 우리나라 독립을 확인하는 포츠담 선언의 현장 체칠리엔호프 궁전도 비장한 마음으로 둘러보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창피하고 민망했던 부분이 있다. 프랑스 편에 카르카손 요새도시가 소개되고 있는데,  난 카르카손이 그저 보드게임 이름인 줄 알았었다.  몇 해 전에 아이들에게 카르카손이라는 보드게임을 사 준 적이 있었다.  성을 짓는 게임이었는데, 이제야 그 게임 이름이 왜 카르카손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 책이 아니었으면 난 죽을 때까지 카르카손은 보드게임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참 끔찍하면서도 실소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래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는 말이 있나보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라는 명찰 뒤엔 그에 어울리는 역사와 문화, 예술, 종교의 배경이 깔려 있을 것이다.  이 말은 그 배경이 되는 역사, 문화, 예술, 종교 등등의 지식이 없이는 그 문화유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닐까.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니 무조건 중요한 것이고 그러니 무조건 잘 보존해야 한다는 식의 단순함과 교과서에 나오는 거니까 그게 무엇이든 달달 외워라 하는 식의 구시대적 주입식 교육으로 버티기에는 세상이 너무 열려있지 않은가.  이 책은 청소년들에게 열려 있는 세상을 향한 작은 징검다리가 되어줄 것만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막스 티볼리의 고백
앤드루 손 그리어 지음, 윤희기 옮김 / 시공사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신체적인 나이를 일흔부터 시작한다는 충격적인 설정 때문에 기대가 컸던 소설이다.  표지의 우수어린 눈빛의 소년은 또 얼마나 책의 내용을 궁금하게 만들었던가.  그러나 빨리 내용을 확인하고 싶다는 기분이 너무 앞섰던 걸까.  이 책에 충분히 젖어들지 못한 것 같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두 읽은 내 기분은 무척 우울하고 좀 짜증스럽다.

가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물리적인 나이와 정신적인 나이를 일치시키지 못한다는 게 꽤나 비극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고.  그런데 이 책의 주인공 막스가 바로 신체적 나이와 정신적 나이의 불일치라는 선천적인 형벌을 타고난 인물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올드맨’이라고 불렀고 “사람들이 네 나이가 얼마쯤이라고 생각하면 그에 맞춰 행동해야 한다.”(p.38)며 막스가 어릴 때부터 나름의 처세를 가르친다.  그러나 그가 짊어진 비극적인 형벌은 쉰셋의 몸을 가진 열일곱 살 막스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사랑 앨리스와의 만남으로 인해 더욱 가혹해진다.  노인의 몸에서 점점 어린 아이의 몸으로 시간의 흐름을 역행해가는 막스가 평생을 바쳐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리고 막스의 유일한 친구, 휴이.  명랑하고 밝은 모습을 지녔으면서도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에 평생 슬프고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살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 책 속의 또 다른 비극적 인물이다. 

책은 이미 쉰여덟 살이 되었지만 열두 살 쯤의 어린이의 몸을 가지게 된 막스가 앨리스의 양아들이 되려는 시점에서 자신의 아들 새미와 앨리스에게 자신의 일생을 고백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책 표지에는 작가의 ‘유려한 말솜씨와 화려한 문체’를 자랑으로 삼았지만 유려한 말솜씨와 화려한 문체를 이야기의 진행보다는 배경묘사나 심리묘사 쪽에 비중을 두고 있어 좀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읽다보면 ‘이 표현 참 세밀하고 기가 막히다.’며 감탄할 문장들을 만나기도 하니 그리 억울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이 책에서 느끼는 우울과 짜증은 어쩌면 애초에 내가 기대를 걸었던 충격적인 설정이 오히려 감정이입을 방해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기이하고 현실감 없는 존재, 그런 존재가 보이는 섬뜩하리만큼 집요한 사랑, 그리고 그에 대한 기록.  어쩌면 나는 막스가 이런 고백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주기를 바란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고백이 앨리스와 새미가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 이 고백조차도 막스의 이기적이고 집요한 사랑의 한풀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우울과 짜증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광고문구가 생각났다.  그 광고를 볼 때마다 쓴웃음 지었던 기억도.  나이가 어찌 단순한 숫자에 불과하랴.  사람들이 구분해놓은 ‘나이’라는 시간의 갈피마다에 꽂혀진 삶과 그 삶이 드리운 그림자들을 몽땅 가려놓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호기롭게 외치는 그 광고가 내 눈에는 처연하게 보였었다.  막스 티볼리의 삶은 그의 가혹한 천형에 의해 뒤틀리고 꼬이고 엉망진창으로 엉켜버렸지만 그래도 막스는 ‘그러나 난 내 인생을 사랑했소.’(p.406)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는 역행하는 신체의 나이와 순행하는 정신의 나이 양쪽에 새겨진 삶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것일 게다.  인생이라고 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어떻게 꼬이고 엉켜버리든 그 속에 담긴 삶의 내용을 사랑할 수 있을까.  여전히 우울하다.  고백은, 하는 쪽도 어렵지만 듣는 쪽도 부담스러운 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승사자에게 잡혀간 호랑이 - 저승이야기 우리 문화 그림책 12
김미혜 글, 최미란 그림 / 사계절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흰 바탕에 저승사자와 호랑이의 그림이 그려진 깔끔한 표지를 넘기면, 곧바로 표지 뒷장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캄캄한 밤 창호 문살 너머로 아이와 할머니의 그림자가 비치네요.  “할머니, 할머니, 옛날 얘기 하나 해줘.” 손자가 옛날이야기를 해달라며 조릅니다.  어릴 적 ‘옛날이야기 너무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며 저의 투정을 무마해보려던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오르더군요. 저도 그 때는 옛날이야기를 조르던 작은 아이였는데, 어느새 이만큼의 시간이 흘러버린 걸까요.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나서 잠시 그림 속 아이와 할머니의 그림자를 쓰다듬었다지요. 아무튼 이 그림책의 지옥에 간 호랑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표지를 넘기자마자 곧바로.

그런데 이 그림책의 본격적인 도입부도 무척 흥미로웠어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이야기에 나오는 그 못된 호랑이가 수수밭에 떨어져 죽는 장면부터 이야기가 들어갑니다.  앞부분에 썩은 동아줄을 손에 쥔 채 죽은 호랑이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고 사람들이 몰려와 죽은 호랑이를 구경하고 있어요.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 익살스럽고 재미있네요. 죽은 호랑이를 앞쪽에 커다랗게 과장된 원근법으로 그려놓은 덕에 저도 이 쪽에 서서 구경꾼의 한 패가 되어 죽은 호랑이며 구경꾼들을 둘러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어요.  참 절묘하게 배치한 짜임새 있는 그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페이지 오른쪽 위로 저승사자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게 보입니다.  옷자락을 휘날리며 황금색 구름 위로 말을 타고 달리는 저승사자의 모습은 시커먼 도포에 창백한 낯빛을 하고 갓을 쓴 저승사자와는 차원이 다르게 아주 멋집니다.  저 저승사자에게 곧 호랑이가 잡혀가겠군요.  저승사자와 호랑이를 따라서 저승구경을 시작합니다.  아이들에게 우리 고유의 저승에 대한 이야기를 이만큼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들려줄 수 있을까요.  이 그림책이 들려주는 저승이야기는 밝고 경쾌하고 재미있고 익살스럽고 해학이 넘칩니다. 

 

 저승에 끌려온 호랑이는 생전에 지은 죄를 비춰준다는 업경과 죄의 무게를 재는 저울 업칭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자기 죄에 대해 변명 한 마디 못하고 가마솥 지옥과 얼음지옥, 발설지옥, 칼산지옥, 독사지옥을 체험하게 됩니다.  참 끔찍하고 잔인한 모습의 지옥인데 그림들을 살펴보다가 킬킬 웃게 됩니다.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 오게 된 지옥 체험 첫 번째 장소 가마솥 지옥, 그 그림 속에는 ‘차카게 살자, 걸리면 백 원에 한대’라는 문신을 새긴 조폭이 눈물과 땀을 흘리며 벌벌 떠는 모습도 있고, 후크선장일 것 같은 해적의 갈고리 손도 보입니다.  그 뿐인가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죗값으로 가게 된 얼음지옥에서는 백설 공주의 못된 계모왕비와 요술거울도 보이네요. 놀부와 놀부 마누라도 끌려오고 있군요. 거짓말한 죄로 가게 된 발설지옥에서는 자기 코를 톱으로 자르고 있는 피노키오가 압권입니다.  약한 사람을 괴롭힌 죄로 간 칼산지옥에는 드라큘라 백작과 빨간 모자 이야기의 늑대가 보이네요.  저 쪽에 꼬리가 아홉 달린 구미호도 있구요. 남의 것을 빼앗은 죄로 온 독사지옥에는 일본 제국주의 복장을 차려입고 얌체 같은 콧수염을 기른 일본인이 보여요.  저절로 이토 히로부미 등이 연상되면서 민족적 카타르시스까지 경험하게 되네요.  전통적인 느낌을 잘 살리면서 익살과 해학을 담아낸 작가의 그림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네요.

자, 이렇게 지옥 곳곳의 체험을 끝낸 호랑이에게 저승의 열명의 왕(시왕)이 윤회를 허합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냐구요?  아, 천만에요.  여러 해가 흐른 뒤 우리는 이 그림책 속에서 또 다른 호랑이의 죽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또 저승사자가 내려오고 숨진 호랑이에게 묻죠. ‘나무꾼한테 형님 소리 들은 호랑이가 맞으렷다?“ 하구요.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속의 못된 호랑이가 <효성 깊은 호랑이> 속 착한 호랑이로 윤회의 삶을 살다가 다시 죽게 된 거랍니다.  정말 작가의 반짝반짝하는 아이디어에 감탄하게 됩니다.  착한 호랑이는 저승에서 업경과 업칭의 절차를 받고는 사람의 아기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으로 손주에게 들려주는 할머니의 지옥이야기는 끝이 난 것 같은데 그림책의 뒷표지 안쪽에는 이 책 맨처음에서 보았던 창호문살 속 아이와 할머니의 그림자가 있고, 이런 글이 써있습니다.

“할머니, 그 호랑이가 진짜 삶이 되었어?”
“그럼. 저승 대왕이 말했잖아.  사람으로 다시 살라고.”
“할머니, 그 호랑이는 엄마 말도 잘 듣고 할머니 볼에 뽀뽀도 하고, 착한 사람이 되었을 거야!”
“우리 강아지가 그걸 어떻게 아누?”
“그걸 왜 몰라.  저승사자에게 두 번이나 잡혀간 호랑이가 바로 난데. 어흥!”
거의 식스센스 수준의 반전이 아닌가요?  아이의 장난스런 말 한 마디가 그림책을 읽는 독자에겐 섬뜩한 반전으로 다가옵니다.

글도 그림도 그리고 편집까지 참 잘 계산되고, 참 잘 짜여지고, 참 잘 만들어진 좋은 그림책인 것 같아 읽고난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다시 표지를 살펴보니 ‘우리 문화 그림책 12’라고 윗부분에 조그맣게 적혀있네요.  찾아보니 ‘우리 문화 그림책’시리즈로 사물놀이며, 우리 고유의 건축예술인 단청, 전통 상례와 설빔 등등에 대한 책이 더 있더군요.  도서관에 가서 아이의 그림책을 빌릴 때면 일본작가의 그림책이나 서양의 그림책에 비해 우리 작가의 그림책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그나마 아이의 눈길을 확 사로잡을만한 양질의 그림책을 추려내자면 그 수는 더 적어지겠지요.  게다가 요즘은 영어그림책까지 합세해서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고르다가 한숨이 새어나올 때도 종종 있었거든요.  그러니 이 그림책을 만나고 제 마음이 벅찼던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마음 속에 관심 그림책 시리즈로 콕 박아두었습니다.  제 욕심같아선 다른 분들 마음 속에다가도 콕콕 박아드리고 싶습니다만...  하하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역겨웠다.  성폭행, 살인, 복수에 대한 이야기로 처음부터 독자를 꼼짝달싹 못하게 하다니 시작이 불손하다 싶었다.  너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이라고 비난받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이 책의 시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섬뜩하고 잔혹하고 오물을 뒤집어쓴 듯 불쾌했다.  그렇게 유난스런 감정을 느꼈던 건, 아마도 내가 여성이며 두 딸의 엄마이기 때문일 것이다.

불량청소년이라는 표현이 너무 순진하게 느껴질 정도로 뻔뻔하고 악독한 열여덟 살의 아쓰야와 가이지는 납치해서 성폭행한 소녀 에마가 죽자 강물에 사체를 유기한다.   몇 년 전 아내를 잃고 딸 에마 하나만을 삶의 이유로 여기며 살아가던 나가미네는 휴대전화로 걸려온 익명의 제보자에 의해 딸 에마가 잔인하게 성폭행당하고 죽임을 당한 아쓰야의 집을 찾아가게 되고 그 곳에서 에마가 유린되는 비디오테이프를 보게 된다.  분노와 증오에 휩싸인 나가미네는 마침 집에 들어온 아쓰야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이미 도주한 가이지를 찾아 다니기 시작한다.  딸을 성폭행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그들이 단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그들이 저지른 악독한 범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보호받는다는 사실을 잘 아는 나가미네는 자기 손으로 직접 딸의 원한을 풀어주고자 한 것이다.

사건만 놓고 보자면 독자의 호기심을 확 끌어당기지 않을 수 없다.  성폭행, 살인, 복수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관음증을 자극하고 잔인함을 즐기는 사람의 본성에 잘 영합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가볍지 않다고 느껴졌다. 

작가는 미성년자의 범죄 문제와 그에 대응하는 법적인 처벌이 과연 합당한가에 대한 사회적 이슈를 이 책을 통해 제기하고 있는 걸까.  실제로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의 글들이 이 책 여기저기에서 많이 눈에 띈다.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나가미네의 입을 통해서는 물론이고, 또 다른 피해자의 아버지 아유무라, 나가미네와 가이지를 좇는 형사 오리베와 하싸스카 등을 통해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책을 더 읽어가다 보면, 표면에 드러나는 그런 사회적 이슈를 넘어 소년 범죄에 대한 현실성 없는 이상주의적인 대처와 미성년 범죄자의 ‘갱생’에 대한 맹목적 희망이,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방임하는 기성세대의 또 다른 과오임을 이야기한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 예로 작가는 아쓰야와 가이지의 부모들의 무책임하고 뻔뻔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 청소년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사회적 방임과 무관심에 대해 성토한다.
‘왜 그런 녀석들이 태어나고 방치된 것일까? 세상은 왜 그런 녀석들이 일을 벌이도록 놓아둔 것일까? 아니, 놓아둔 것이 아니다.  다만 무관심할 따름이다.
......(중략).......
그러나 그도 그러했다.  자기의 생활만 보장되면 다른 사람의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소년범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느냐?  문제 해결을 위해서 무슨 노력을 했느냐? 그렇게 물으면 그도 대답을 할 수 없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자기 역시 세상을 이렇게 만든 공범자라는 사실을.  공범자에게는 죗값을 치러야 할 책임이 똑같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번에 선택된 사람은 자신이었다.‘(p.481)
작가는 이 글을 통해 이 책을 읽는 사람 모두를 사건의 공범자로 끌어들이며 언젠가 우리가 저지른 무관심과 방임의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또 작가는 우리가 믿고 있는 ‘정의’를 문제 삼는다.  우리가 정의라고 생각하고 믿는 것들이 과연 올바른 것이냐고.  그 ‘정의’에 입각해서 과연 악을 처단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정의란 무엇이며 그 정의를 어떻게 행사할 수 있으며 그 ‘정의’에 입각해서 과연 악을 처단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우리의 삶이 부조리하고 이율배반적이니만큼 그 어떤 명제도 절대적인 선이 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쥐고 있는 ‘정의의 칼날’은 - 이 책에서는 국가의 법 - 무력하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방황하는 칼날’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 이 작가의 책으로 <흑소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단편을 묶은 책이었는데 읽으면서 작가가 사회를 꼬집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방황하는 칼날>이 내가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두 번째 책이 되었는데, 결코 실망스럽지 않았다.  다만 사족 하나를 달자면 이 책이 제기하는 진지한 메시지에 비해 옮긴이의 말이 너무 가볍다는 인상을 받아서 좀 아쉽다.  이 책의 초점을 너무 사이코패스 쪽에 맞추어 ‘어쩌면 당신 옆에 끔찍한 사이코패스가 있을지도 모른다.....’라며 무슨 공포영화 예고편처럼 글을 맺는 게 오히려 이 소설의 깊은 맛을 망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어디까지나 나의 사족일 뿐이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 세계적인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장 속물적인 돈 이야기
석영중 지음 / 예담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도스토예프스키, 그 이름만으로도 묵직한 중량감이 느껴진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같은 굵직한 작품들은 책을 펼쳐보기도 전에 기를 질리게 만드는, 고전 명작으로서의 카리스마가 철철 흘러넘치는 것만 같다.  감히 용감무쌍 덤벼볼 엄두가 나질 않는다.  이런 작품을 쓰는 사람은 비범한 천재이고 그의 삶 역시 밤하늘에 걸린 찬란한 별처럼 고결하고 숭고하고 특별할 것만 같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찌릿하고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그 즉시 오금이 저려와 깨갱거릴 것 같고, 내 얄팍하고 천박한 속내가 드러날까 두려워 입 한 번 뻥긋하지도 못할 것 같다.  그게 바로 내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이었다.

이 책이 재미있는 건 나의 이런 선입견을 뒤집어 놓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과시하기 좋아하고 시쳇말로 잔뜩 폼 잡으며 남들에게 있어 보이고 싶어서 아버지에게 미리 자기 몫의 유산을 당겨 달라고 요구하는 철없는 망나니(?)였으며 출판사에 선불을 사정하며 글을 써서 살아가는 세상살이에 야무지지 못한 작가였다면서 그동안 도스토예프스키의 주변에 자욱하게 껴있던 신비감의 연막을 가차 없이 거둬내고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여행길에 도박에 빠져 땡전 한 푼 없이 가진 돈을 모두 날리고는 돌아갈 여비도 없어서 투루게네프에게 구걸하듯 편지를 쓰고는 나중에 적반하장으로 돈을 빌려준 투르게네프를 두고 온갖 비난을 서슴지 않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다.

제목에서 암시하다시피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이나 문학사적인 업적, 작품의 테마보다는 ‘세속적인 차원에서 소설에 드러난 돈의 메시지만을 살펴’(p.204)보는 경향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 <미성년>, <도박꾼>,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렇게 7개의 작품을 가지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열심히 읽다보면 도스토예프스키나 등장인물들의 돈에 대한 이야기에 빠져서 “잠깐, 지금 내가 읽고 있는 부분이 무슨 작품에 대한 글이지?”하고 앞으로 돌아가 작품명을 확인한 적도 몇 번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의 곤궁한 삶이 비록 대문호다운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을지 몰라도 당시 농노가 붕괴되고 급격한 도시화가 이루어지는 러시아, 더 정확하게는 상테페테르부르크의 비참한 현실을 마주하게 했고, 돈과 인간이 한데 엉켜서 굴러가는 삶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심도 깊은 직관력을 갖게 한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작품마다 구체적이며 사실감 있게 드러난다는 돈에 대한 이야기는 요즘 시중에 나오는 펀드나 부동산, 경매, 10억 만들기 등과 같은 재테크 관련 서적과는 차원이 다른 돈 이야기이다.  그의 작품 속 돈 이야기는 단순히 ‘돈’이 아니라 인간의 복잡 미묘한 심리와 위선을 까발리고 부와 가난, 행복과 구원에 대해 성찰하기 위한 심오한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아마 도스토예프스키가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본다면 혀를 끌끌 차지 않을까.  철학이 없는 돈, 구원의 희망이 거세된 돈, 인간에게 자유가 아니라 종속의 사슬만을 던져주는 돈, 맹목이 되어버린 돈에 대해 그가 뭐라고 일침을 가할지 상상해 보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재에 밝지 못하고 곤궁을 벗지 못한 것은 수학에 낙제점을 받을 정도로 그 쪽 방면에 재능이 없어서라기보다 돈 너머에 있는 형이상학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백년이 훌쩍 넘었건만 아직도 우리는 돈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다. 돈방석을 깔고 앉을 수 있는 방법이나 매스컴과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돈의 깨끗하거나 더러운 도덕성 시비문제, 또는 아주 가끔씩 돈의 숭고한 쓰임새에 대해.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돈과 뗄 수 없는 애증의 관계를 맺게 된 우리의 돈에 대한 생각들이 아닐까.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은 좋은 거야.  그런데 너 자신도 좋은 사람이냐? 네가 살고 있는 세상도 좋은 세상이냐? 너나 네가 살고 있는 세상이 돈을 좋은 것으로 만들 만큼 그렇게 좋으냐?”고 묻지 않을까.

도스토예프스키라는 대문호와 그의 작품, 그리고 그가 말하는 돈에 대해 깔끔하고 재미있게 정리된 책이라서 읽는 일이 즐거웠다. 다시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읽으면 이 책의 저자가 말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돈’을 글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