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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 세계적인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장 속물적인 돈 이야기
석영중 지음 / 예담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도스토예프스키, 그 이름만으로도 묵직한 중량감이 느껴진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같은 굵직한 작품들은 책을 펼쳐보기도 전에 기를 질리게 만드는, 고전 명작으로서의 카리스마가 철철 흘러넘치는 것만 같다. 감히 용감무쌍 덤벼볼 엄두가 나질 않는다. 이런 작품을 쓰는 사람은 비범한 천재이고 그의 삶 역시 밤하늘에 걸린 찬란한 별처럼 고결하고 숭고하고 특별할 것만 같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찌릿하고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그 즉시 오금이 저려와 깨갱거릴 것 같고, 내 얄팍하고 천박한 속내가 드러날까 두려워 입 한 번 뻥긋하지도 못할 것 같다. 그게 바로 내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이었다.
이 책이 재미있는 건 나의 이런 선입견을 뒤집어 놓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과시하기 좋아하고 시쳇말로 잔뜩 폼 잡으며 남들에게 있어 보이고 싶어서 아버지에게 미리 자기 몫의 유산을 당겨 달라고 요구하는 철없는 망나니(?)였으며 출판사에 선불을 사정하며 글을 써서 살아가는 세상살이에 야무지지 못한 작가였다면서 그동안 도스토예프스키의 주변에 자욱하게 껴있던 신비감의 연막을 가차 없이 거둬내고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여행길에 도박에 빠져 땡전 한 푼 없이 가진 돈을 모두 날리고는 돌아갈 여비도 없어서 투루게네프에게 구걸하듯 편지를 쓰고는 나중에 적반하장으로 돈을 빌려준 투르게네프를 두고 온갖 비난을 서슴지 않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다.
제목에서 암시하다시피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이나 문학사적인 업적, 작품의 테마보다는 ‘세속적인 차원에서 소설에 드러난 돈의 메시지만을 살펴’(p.204)보는 경향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 <미성년>, <도박꾼>,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렇게 7개의 작품을 가지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열심히 읽다보면 도스토예프스키나 등장인물들의 돈에 대한 이야기에 빠져서 “잠깐, 지금 내가 읽고 있는 부분이 무슨 작품에 대한 글이지?”하고 앞으로 돌아가 작품명을 확인한 적도 몇 번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의 곤궁한 삶이 비록 대문호다운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을지 몰라도 당시 농노가 붕괴되고 급격한 도시화가 이루어지는 러시아, 더 정확하게는 상테페테르부르크의 비참한 현실을 마주하게 했고, 돈과 인간이 한데 엉켜서 굴러가는 삶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심도 깊은 직관력을 갖게 한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작품마다 구체적이며 사실감 있게 드러난다는 돈에 대한 이야기는 요즘 시중에 나오는 펀드나 부동산, 경매, 10억 만들기 등과 같은 재테크 관련 서적과는 차원이 다른 돈 이야기이다. 그의 작품 속 돈 이야기는 단순히 ‘돈’이 아니라 인간의 복잡 미묘한 심리와 위선을 까발리고 부와 가난, 행복과 구원에 대해 성찰하기 위한 심오한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아마 도스토예프스키가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본다면 혀를 끌끌 차지 않을까. 철학이 없는 돈, 구원의 희망이 거세된 돈, 인간에게 자유가 아니라 종속의 사슬만을 던져주는 돈, 맹목이 되어버린 돈에 대해 그가 뭐라고 일침을 가할지 상상해 보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재에 밝지 못하고 곤궁을 벗지 못한 것은 수학에 낙제점을 받을 정도로 그 쪽 방면에 재능이 없어서라기보다 돈 너머에 있는 형이상학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백년이 훌쩍 넘었건만 아직도 우리는 돈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다. 돈방석을 깔고 앉을 수 있는 방법이나 매스컴과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돈의 깨끗하거나 더러운 도덕성 시비문제, 또는 아주 가끔씩 돈의 숭고한 쓰임새에 대해.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돈과 뗄 수 없는 애증의 관계를 맺게 된 우리의 돈에 대한 생각들이 아닐까.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은 좋은 거야. 그런데 너 자신도 좋은 사람이냐? 네가 살고 있는 세상도 좋은 세상이냐? 너나 네가 살고 있는 세상이 돈을 좋은 것으로 만들 만큼 그렇게 좋으냐?”고 묻지 않을까.
도스토예프스키라는 대문호와 그의 작품, 그리고 그가 말하는 돈에 대해 깔끔하고 재미있게 정리된 책이라서 읽는 일이 즐거웠다. 다시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읽으면 이 책의 저자가 말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돈’을 글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