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승사자에게 잡혀간 호랑이 - 저승이야기 ㅣ 우리 문화 그림책 12
김미혜 글, 최미란 그림 / 사계절 / 2008년 3월
평점 :
흰 바탕에 저승사자와 호랑이의 그림이 그려진 깔끔한 표지를 넘기면, 곧바로 표지 뒷장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캄캄한 밤 창호 문살 너머로 아이와 할머니의 그림자가 비치네요. “할머니, 할머니, 옛날 얘기 하나 해줘.” 손자가 옛날이야기를 해달라며 조릅니다. 어릴 적 ‘옛날이야기 너무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며 저의 투정을 무마해보려던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오르더군요. 저도 그 때는 옛날이야기를 조르던 작은 아이였는데, 어느새 이만큼의 시간이 흘러버린 걸까요.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나서 잠시 그림 속 아이와 할머니의 그림자를 쓰다듬었다지요. 아무튼 이 그림책의 지옥에 간 호랑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표지를 넘기자마자 곧바로.
그런데 이 그림책의 본격적인 도입부도 무척 흥미로웠어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이야기에 나오는 그 못된 호랑이가 수수밭에 떨어져 죽는 장면부터 이야기가 들어갑니다. 앞부분에 썩은 동아줄을 손에 쥔 채 죽은 호랑이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고 사람들이 몰려와 죽은 호랑이를 구경하고 있어요.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 익살스럽고 재미있네요. 죽은 호랑이를 앞쪽에 커다랗게 과장된 원근법으로 그려놓은 덕에 저도 이 쪽에 서서 구경꾼의 한 패가 되어 죽은 호랑이며 구경꾼들을 둘러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어요. 참 절묘하게 배치한 짜임새 있는 그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페이지 오른쪽 위로 저승사자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게 보입니다. 옷자락을 휘날리며 황금색 구름 위로 말을 타고 달리는 저승사자의 모습은 시커먼 도포에 창백한 낯빛을 하고 갓을 쓴 저승사자와는 차원이 다르게 아주 멋집니다. 저 저승사자에게 곧 호랑이가 잡혀가겠군요. 저승사자와 호랑이를 따라서 저승구경을 시작합니다. 아이들에게 우리 고유의 저승에 대한 이야기를 이만큼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들려줄 수 있을까요. 이 그림책이 들려주는 저승이야기는 밝고 경쾌하고 재미있고 익살스럽고 해학이 넘칩니다.
저승에 끌려온 호랑이는 생전에 지은 죄를 비춰준다는 업경과 죄의 무게를 재는 저울 업칭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자기 죄에 대해 변명 한 마디 못하고 가마솥 지옥과 얼음지옥, 발설지옥, 칼산지옥, 독사지옥을 체험하게 됩니다. 참 끔찍하고 잔인한 모습의 지옥인데 그림들을 살펴보다가 킬킬 웃게 됩니다.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 오게 된 지옥 체험 첫 번째 장소 가마솥 지옥, 그 그림 속에는 ‘차카게 살자, 걸리면 백 원에 한대’라는 문신을 새긴 조폭이 눈물과 땀을 흘리며 벌벌 떠는 모습도 있고, 후크선장일 것 같은 해적의 갈고리 손도 보입니다. 그 뿐인가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죗값으로 가게 된 얼음지옥에서는 백설 공주의 못된 계모왕비와 요술거울도 보이네요. 놀부와 놀부 마누라도 끌려오고 있군요. 거짓말한 죄로 가게 된 발설지옥에서는 자기 코를 톱으로 자르고 있는 피노키오가 압권입니다. 약한 사람을 괴롭힌 죄로 간 칼산지옥에는 드라큘라 백작과 빨간 모자 이야기의 늑대가 보이네요. 저 쪽에 꼬리가 아홉 달린 구미호도 있구요. 남의 것을 빼앗은 죄로 온 독사지옥에는 일본 제국주의 복장을 차려입고 얌체 같은 콧수염을 기른 일본인이 보여요. 저절로 이토 히로부미 등이 연상되면서 민족적 카타르시스까지 경험하게 되네요. 전통적인 느낌을 잘 살리면서 익살과 해학을 담아낸 작가의 그림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네요.
자, 이렇게 지옥 곳곳의 체험을 끝낸 호랑이에게 저승의 열명의 왕(시왕)이 윤회를 허합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냐구요? 아, 천만에요. 여러 해가 흐른 뒤 우리는 이 그림책 속에서 또 다른 호랑이의 죽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또 저승사자가 내려오고 숨진 호랑이에게 묻죠. ‘나무꾼한테 형님 소리 들은 호랑이가 맞으렷다?“ 하구요.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속의 못된 호랑이가 <효성 깊은 호랑이> 속 착한 호랑이로 윤회의 삶을 살다가 다시 죽게 된 거랍니다. 정말 작가의 반짝반짝하는 아이디어에 감탄하게 됩니다. 착한 호랑이는 저승에서 업경과 업칭의 절차를 받고는 사람의 아기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으로 손주에게 들려주는 할머니의 지옥이야기는 끝이 난 것 같은데 그림책의 뒷표지 안쪽에는 이 책 맨처음에서 보았던 창호문살 속 아이와 할머니의 그림자가 있고, 이런 글이 써있습니다.
“할머니, 그 호랑이가 진짜 삶이 되었어?”
“그럼. 저승 대왕이 말했잖아. 사람으로 다시 살라고.”
“할머니, 그 호랑이는 엄마 말도 잘 듣고 할머니 볼에 뽀뽀도 하고, 착한 사람이 되었을 거야!”
“우리 강아지가 그걸 어떻게 아누?”
“그걸 왜 몰라. 저승사자에게 두 번이나 잡혀간 호랑이가 바로 난데. 어흥!”
거의 식스센스 수준의 반전이 아닌가요? 아이의 장난스런 말 한 마디가 그림책을 읽는 독자에겐 섬뜩한 반전으로 다가옵니다.
글도 그림도 그리고 편집까지 참 잘 계산되고, 참 잘 짜여지고, 참 잘 만들어진 좋은 그림책인 것 같아 읽고난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다시 표지를 살펴보니 ‘우리 문화 그림책 12’라고 윗부분에 조그맣게 적혀있네요. 찾아보니 ‘우리 문화 그림책’시리즈로 사물놀이며, 우리 고유의 건축예술인 단청, 전통 상례와 설빔 등등에 대한 책이 더 있더군요. 도서관에 가서 아이의 그림책을 빌릴 때면 일본작가의 그림책이나 서양의 그림책에 비해 우리 작가의 그림책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그나마 아이의 눈길을 확 사로잡을만한 양질의 그림책을 추려내자면 그 수는 더 적어지겠지요. 게다가 요즘은 영어그림책까지 합세해서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고르다가 한숨이 새어나올 때도 종종 있었거든요. 그러니 이 그림책을 만나고 제 마음이 벅찼던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마음 속에 관심 그림책 시리즈로 콕 박아두었습니다. 제 욕심같아선 다른 분들 마음 속에다가도 콕콕 박아드리고 싶습니다만...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