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언으로 무슨 말을 남기게 될까, 가끔씩 생각을 하곤 했다.  

허무하게 "꼴까닥"하고 코미디같은 단발의 의성어를 남기는 건 너무 우습고, 

"내가 남긴 책들은 모두 너희 셋이 알맞게 나눠 갖도록 해라.."식의 재산분배 유언은 너무 분위기가 없다.  

뭔가, 세상을 살면서 내가 터득한 지혜를, 한 마디의 의미있는 경구를, 아니면 유머러스한 한 마디로 죽음을 가볍게 승화시키고 남은 사람들에게 여유를 줄 수 있는 그런 말이 필요하지 않을까, 문득 문득 생각하곤 했다.  

드디어,,,  유언으로 남길 말을 두 개를 생각해냈다.  

"한나라당 계통의 사람들과는 어울리지도 말고, 찍지도 말아라." 
"금덩이를 삼태기로 퍼준다고 해도 절대 조중동은 보지 마라." 

그러나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이런 유언들을 남길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오는 것이다.  

아이들이 그런 세상에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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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초가을쯤 도서관에서 알게 된 엄마가 '집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며 한숨을 쉬었다.   전세 계약이 끝나서 이사를 해야 하는데 이사갈 집이 없단다.  그 가을이 끝나갈 무렵엔 책고르미 모임의 대장이 같은 고민을 하는 걸 보았다.  이사를 해야하는데 집이 없다는.  결국 두 엄마 모두 살던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했다.

내가 사는 동네는 재개발이 시작되어 곳곳에 철거된 빈집들이 즐비하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유리없이 뻥뻥 뚫린 창문들을 보면 '저 집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궁금해지곤 했다.  우리 동네 뿐만이 아니라 근처 몇 동네가 모두 재개발 지역인지라, 지난 가을에 이사갈 집이 없다며 한숨을 쉬던 엄마들 처지가 이해된다.  아파트가 아니라면 웬만한 집은 모두 '비워줘야 할 집'일 것 같았다.

그날 미용실에서 내 머리를 잘라주던 미용사는 연립과 다세대 주택에 사는 동네 사람들이 집을 못 구해서 '피를 토한다'고 했다.  정말 표현이 그랬다.  '피를 토한다'고.  특히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은 애가 닳는단다.  전세값은 오르고, 이사 갈 집은 없고, 다른 구로 이사를 하자니 아이들 학교 문제가 걸리고..   그래, 그럴만도 하겠다, 했다.  그렇게 피를 토하던 사람들은 모두 무사히 이사를 했을까. 그 집의 아이들은 몇 배로 길어지고 고단해진 등하교길을 잘 견뎌내고 있을까, 문득문득 궁금해지곤 했다.     

슬픈 이 나라의 초상이 어제 하나 더 보태어졌다.  그냥 우리 살던 대로 살게 해달라는, 참 지극히도 소박하고 당연한 요구가 불길에 활활 타올라 허무한 재로 흩날렸다.  울산 현대중공업 소각장 굴뚝 꼭대기에서 초콜릿과 물만으로 겨울을 나고 있다는 두 노동자가 생각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규도 윙윙거렸다.  PD들과 기자들의 파업선언이 떠오르는가 하면, 4층 사무실에서 목에 줄을 걸고 뛰어내렸다는 한 노동자의 이야기도 머리속을 스쳐지나간다.   

어제는 유빈이의 다섯살 생일이었다.  11살 연하 친구, 신이 엄마가 분홍색 털자켓을 선물했고, 케이크를 놓고 축하노래도 불렀다.  기뻐야 할 딸의 생일을 누군가 망쳐놓았다.  그 누군가가 너무나 원망스럽다.  피를 토하는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이 나라는 슬프고 우울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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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유빈이는 또 달을 찾는다.
아직 달이 나올 시간이 아닌데도 유빈이는 그저 달이 자기를 또 따라오기만을 바랐나보다.  
"엄마, 왜 달이 안따라오지?"
"그러게... 달이 없네..  아직 안나왔나보다."
유빈이는 차창 밖으로 하늘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어.... 달이 아픈가?"  
아직 뜨지 않은 달을 아파서 못나오는 걸로 생각하다니, 정말 아이들이란... ^^
"그러게..  많이 아픈가..?"
이럴 땐 그저 웃으며 장단을 맞춰주는 수밖에..
"아니면... 엄마, 달이 너무 심심해서 다른 데 놀러갔나보다.."
"그런가 보다.  유빈이 기다리다가 안나오니까 너무 심심해서 다른 데 놀러갔구나."
아픈 것보다는 다른 데로 놀러간 게 좀 덜 비극적이라 그 핑계가 더 마음에 들었다.  

유빈이가 친구들과 못만나는 이유도 대강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거나, 아니면 할머니 댁이나 다른 곳으로 놀러갔을 때.
그러니까 유빈인 자기의 경험을 충실하게 달님에게 반영한게다.  

매달 셋째 주 금요일마다 도서관에서는 도서관 꼬마들이 작아진 옷, 신발, 장난감 등등을 펼쳐놓고 파는 꼬마장터가 열린다.  유빈이는 꼬마장터에서 쇼핑하기를 꽤 즐기는 편이라 간혹 과소비(?)를 하게 될 때가 있다.  이번에는 요술봉(1000원), 디즈니 공주 손가방(1000원), 디즈니 공주 목걸이 지갑(500원), 진분홍 미니스커트(500원), 노란 가디건(500원), 연보라빛 골덴 홈드레스(1000원), 헬로키티 후드 조끼와 분홍색 무늬가 있는 하얀 티셔츠 세트(500원)를 구입하는 바람에 거금 5000원을 쓰고 왔다.  꼬마장터에서 쓴 돈으로 치자면 좀 과소비한 날이다.  
꼬마장터에서 산 물건들 중에는 유빈이의 애장품이 된 것들이 꽤 있다.  지난 여름엔 꼬마장터에서 산 분홍 발레복을 여름 내내 집에서 입고 놀았다.  잘 때도 입고 자고,,, 가운데 꽃이 달리고 발을 디딜 때마다 불이 번쩍번쩍 들어오는 매우 여성스러운 분위기의 샌들은 집에서만 신고 논다.  몇몇 원피스와 블라우스는 친구와 놀러 나갈 때 부담없이 입을 수 있고 유빈이의 공주 취향도 만족시키는 옷들이다.  

요즘 나는 <프리덤 라이터스 다이어리>를 읽고 있다.  산지는 오래되었는데, 이제서야 붙잡고 읽기 시작했다. 글쓰기를 통해 자기를 돌아보고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되는 미국 윌슨 고등학교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다.  안타까우면서도 그들의 변화가 부럽기도 했는데,,,  이 책을 다음 달에 도서관 선정도서로 추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미국 고등학생들, 그것도 문제아들이던 청소년들의 이야기라 강간, 마약, 갱단, 살인, 폭력, 학대 등등의 글이 실려있는데, 도서관에는 매우 보수적인 엄마들이 좀 있어서, 약간만 그런 내용이 나와도 서가에서 책을 빼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함께 읽고 싶은 책이다.  아이들이 읽기 적당하지 않다고 한다면, 엄마들이나 선생님들만이라도...   나중에 의논을 좀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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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학원에서 돌아온 큰딸이 선생님들이 숙제를 조금밖에 안내줬다며 기뻐했다.  
그러더니 만화책을 잡고 읽는다.  
그럴 때마다 유빈이는 좀 서운한 티를 낸다. 
언니 오빠가 자기랑 놀아줬으면 좋겠는데, 늘 어딘가로 가고, 바쁘고, 항상 뭔가를 먼저 해야한다고 하니 심술이 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그런가 보다.  

놀아달라는 간곡한 청을 매정하게 거절하고 만화책 속으로 빠져버린 언니에게 유빈이가 한 마디를 날렸다.  

"언니는 만화쟁이~~"  

으흠~~~ 유빈이가 OO쟁이의 용법을 터득했구나, 싶어 유빈이를 안고 웃었다.  자기 말에 웃으며 반응해주는 엄마 때문에 유빈이도 조금 마음이 풀렸다.  

"유빈아, 언니는 정말 만화쟁이다, 그치?  그럼 오빠는?"
"음.. 오빠는 게임쟁이~!!" 

방학을 맞아 하루에 두 시간 정도 게임을 즐기는 명보는 자기가 게임폐인도 아닌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뭐, 이건 어디까지나 유빈이의 시각이니까.. 

"그럼, 아빠는?" 
"음... 아빠는 뽀뽀쟁이!!" 

우하하하하...  매일 유빈이만 보면 뽀뽀하자고 덤비고, 협박하고, 안해주면 토라지는 아빠니까 그래, 뽀뽀쟁이가 맞다.  그럼 엄마인 나를 무슨쟁이라고 할까,,,, 긴장,,,, 

"그럼, 엄마는?" 
"음..  엄마는 사랑쟁이!" 

햐~~~~나더러 사랑쟁이란다.  난 사랑쟁이다.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오늘 아침까지도 '난 사랑쟁이야.'하며 행복해하고 있다.  정말 다행이다.  유빈이에게 내가 사랑쟁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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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나는…
미야니시 타츠야 글 그림, 장지현 옮김 / 예림당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유빈이가 좋아하는 책이다.  작년 늦가을 무렵에 “어, 미야니시 타츠야다!”하고 그냥 장바구니에 넣어버린 책.  그도 그럴 것이 아주 어려서는 <누구 똥?>을, 그러다 <고 녀석 맛있겠다>를, 그리곤 <개구리의 낮잠>, <메리 크리스마스, 늑대 아저씨!>, <잠깐만, 잠깐만>까지 유빈이가 미야니시 타츠야의 책에 유난한 관심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예상은 적중해서 유빈인 이 책을 하루에도 몇 번씩 읽어달라고 하더니 얼마 안가서 외워버렸고 아직도 유빈이가 매일 읽어달라는 책 5위 안에 당당히 들어가는 책이다.

책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난 OOO가 싫어/못해/무서워/겁나... 그치만 내일의 나는...”이 반복되고 페이지를 넘기면 앞에서 보여준 부정적 자아를 벗어버리고 멋지게 변화한 아이가 등장하는 패턴이다.  처음엔 좀 실망스러웠다.  아이가 열광적으로 빠져들지 않았다면 미야니시 타츠야가 슬럼프 중에 출판사의 독촉에 못 이겨 만든 책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고 녀석 맛있겠다>나 <메리 크리스마스, 늑대 아저씨!>같은 작품들처럼 흥미로운 ‘이야기’전개되는 것도 아니고, <개구리의 낮잠>이나 <잠깐만, 잠깐만>처럼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긴장이 고조되는 구성도 아니라서 좀 맥이 빠진다고나 할까...  게다가 잘못 보면 아이에게 바른생활 어린이로의 긍정적인 변화를 ‘강요’하는 듯한 인상도 느껴져 읽어주기가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계속 읽어주다 보니 이 책 속의 마법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는 어른에 비하면 무척 불완전한 존재다. (결코, 어른이 완전한 존재란 이야기가 아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고, 극복하고 헤쳐 나가야 할 것들 투성이다.  유빈이는 자기 존재의 그 불안함을 이 책을 통해 대리만족하는 것 같았다.  지금은 별로지만 ‘내일의 나는’ 내 주변의 어른들처럼 멋지고 유능해질 수 있겠구나 하는(어쨌든 아이의 눈으로 볼 때에는!!) 희망을 발견하는 것 같다. 

더구나 이 책대로라면 변하기 위해서 아이는 그냥 ‘내일’이 되기만을 기다리면 될 뿐이다. 이처럼 편하고 간단한 방법이 어디 있을까!! 일부러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내일’이 되면 저절로 주사도 안약도 무섭지 않게 되고 피망도 당근도 잘 먹을 수 있으며, 자다가 오줌도 싸지 않고, 캄캄한 밤에도 혼자 잘 수 있고, 자전거의 보조 바퀴를 떼버리고 빨리 달리게 되고, 머리도 혼자 감고, 매운 치약으로 상쾌하게 이를 닦고, 무거운 짐도 척척 들고, 철봉도 바다도 무섭지 않은 나로 변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대로 끝난다면 미야니시 타츠야가 아니다.  아이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변화의 희망이 지겹고 부담스러워질 무렵, 미야니시 타츠야는 아이들의 긴장을 한순간에 녹여버린다.  마치 “그렇지만 이렇게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아.”하고 씩 웃어주는 것만 같다.  마지막은 이렇다.

'난 엄마가 / 안아 주는 게 / 좋은 응석 꾸러기.
그렇지만 / 내일의 나는.....


훨씬 더 응석꾸러기. / 엄마가 꼭 안아 주는 걸 / 정말 정말 좋아하는 / 응석꾸러기!‘

유빈이는 이 마지막 장에서 정말로 나에게 꼬옥 안겨온다. 그리고 그림 속 엄마처럼 뽀뽀를 ‘쪽!’ 해주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마음을 푹 놓게 된다.  엄마인 나까지도 내 아이가 ‘혼자서 뭐든지 척척 해내는 아이’가 되더라도 우리는 서로 온기를 나누고 따스하게 사랑하며 지내며 언제까지나 서로를 꼭 안아줄 수 있는 사이라는 걸 확인하고 안심하며 책을 덮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미야니시 타츠야의 책들을 좋아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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