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되겠지>는 소설가 김중혁의 산문집이다. 기분을 가볍게 하기에 아주 그만이다. 초반에 작가의 자유분방한 학점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나도 모르게 !’하고 웃음이 터졌다. ‘학고(학사경고의 줄임말) 김중혁 선생의 학점을 비웃으려는 의도는 1도 없었다. 그가 얘기하는 방식이 웃음을 자아냈다. 그가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했다면 난 진심으로 같이 걱정해주었을 뿐 아니라 위로와 격려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얘기하는 방식은 , 나 학사경고 4번이나 받았어. 그래서 F4. 근데 뭐? 그게 그렇게 중요하고 대단한 일도 아니잖아?”하는 식이다. 그래서 걱정해주지 않아도 잘 살 것 같고, 위로나 격려 따위는 개나 줘버려, 할 것 같다. 밝고 씩씩하다.


나는 대학에 다닐 때 학점이 웬만큼 잘 나와서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다. (오해하지 마시길, 자랑하려는 게 아니다.) 처음엔 멋모르고 한 번 받았는데, 그게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니까 못 받으면 부모님께 죄스러운 이상한 처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내가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묘한 압박감에 밀려서 공부를 했다. 근데 내가 대학을 다닌 시기는 바야흐로 80년대 중반. 영화 <1987>을 본 사람은 알 거다. 그때 우리가 얼마나 격렬한 시간을 보냈는지. 그러니까 시험 때가 되어 공부를 하는 것이, 장학금을 받는 것이 이게 또 이상한 죄책감으로 작용을 하는 거다. 물론 나도 시위대 가장자리에 끼어보고, 최루탄 가스에 눈물 콧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뭐랄까... 내가 가짜인 것 같은 불쾌함이 마음 한 구석에서 나를 괴롭게 했었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공부를 참아가면서 공부하고, 불쾌감을 견뎌가며 대학을 다녔는데, 막상 졸업하니 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고, 그냥 학점이 꽤 높은 대졸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좀 더 많은 일에 도전하고 경험을 쌓을 걸, 신나게 놀아보기라도 할 걸, 후회했다.


얼마 전에 읽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하루키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을 때 강요받는 일을 예전부터 참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자신이 하고 싶을 때, 자신이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다면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했다.’고 하면서 학교에서 우리가 배우는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다라는 진리라고 말한다.


작가는 고등학교 때 어렴풋이 글 쓰는 사람이 되어 볼까 하는 생각으로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으나, 국어국문학과가 글쓰기를 가르쳐주는 학과가 아니라는 걸 알고 나서는 학교를 대충 다녔다고 한다. 그때 학점관리를 안하고 시간을 충분히 낭비하며 뇌를 싱싱하게 유지한 것이 소설가가 되는 데 도움이 되는 현명한 판단이었던 거다.


엄마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다. “공부를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학생인 이상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 사람들이 성적을 보면 얘가 성실한 아이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옛날엔 그런가?’했는데, 언젠가부터 말도 안 돼!’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지난번에도 어떤 엄마에게 그런 얘기를 들었다. 공부에 통 관심이 없는 아이 때문에 속상해하면서 또 그 성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근데,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일에, 심지어 하기 싫어 죽겠는 일에 성실하기가 쉬운 일일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두 달도 아니고, 초등학교 때부터 고3때까지 총 12년을(대학 4년을 더하면 16년을!) 하고 싶지 않은 일에 한결같이 성실할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한 얘기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일이라도 12년간 성실하기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싫어하는 일을 12년 동안이나 성실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만약 누군가 나에게 달리기는 지구력과 심폐기능 향상, 혈액순환에 좋을 뿐 아니라 인내심을 키워주는 훌륭한 운동이니까 앞으로 12년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달리세요.’라면서 강요한다고 치자. 그게 사회적으로도 암묵적으로 합의된 매우 중요한 거라서 달리기를 잘해야 취업과 승진에 유리하고 성공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치자. 난 달리기가 싫은데, 달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나더러 불성실하다고 하고, 왜 최선을 다해 더 빨리 더 오래 달리지 못하냐고 재촉하고, 이대로 달리기를 못하면 내 앞의 인생이 깜깜해질 것 같고, 난 이미 틀려버린 건 아닐까 불안하고, 근데 난 달리기는 젬병이라 자주 다리에 쥐가 나고 발이 무거워진다면..... 난 어쩌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어야 그나마 즐겁게 기꺼이 성실할 수 있다. 아이가 공부에 성실하지 못하다면 그건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놈의 공부’, 그게 문제인 거다. 노력하면 뭐든지 다 가능하다고 말하지 마라. 아들딸이 엄마아빠는 왜 재벌이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지 않으셔서 이 모양 이 꼴이세요, 하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아이에게 성실을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내가 그다지 성실하지 않은 엄마이기 때문이다. 난 가끔 슬쩍 반찬가게에서 반찬을 사오기도 하고, 밥하기 귀찮으면 인심 쓰는 척 자장면 같은 걸 시켜 먹이고, 어쩔 땐 빨래가 밀려서 수건이 없다 양말이 없다 찾게 만들고, 종종 설거지거리가 쌓여있고, 자주 청소를 거르는, 그런 엄마다. 내가 완벽하지 않은데 누구에게 완벽을 구하랴.


실패해도, 시간을 낭비해도 좋고(경우에 따라 낭비를 권장하고),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으니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그냥 이 모습대로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고, 굳이 애쓰며 살지 말라고 말하는 이 책이 좋다. 게다가 작가는 웹툰 작가의 경험도 있어서 책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만화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떨고 있는 청년들과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들이 이 책을 읽고 마음의 여유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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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너무 경솔했다. 책의 마지막 장까지 다 덮고 난 어제 저녁 나는 나의 단순함과 경솔함을 떠올리며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밝혔던 것처럼 이 책의 다윈도 악의 기원을 밝혀줄 게 분명하다고 흥분하며 떠들었던 내 자신이 민망하고 부끄럽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알 수 있었다. 누가 감히 악의 기원을 밝힐 수 있을까. 그에 대한 증명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너는 왜 그때 후드를 네온 강에 버리지 못했지? 왜 그 후드를 다시 집으로 갖고 와 원래 있던 지하실 상자 속에 그대로 넣어 두었지?

퇴근길에 후드를 몰래 숨기듯 집으로 가져와 서재 책장 뒤에 밀어 놓는 순간에도 그는 비아냥거리며 계속 물었다.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걸 버리지 못하고 거기다 처박아 놓는 거야, ? 말해봐, 도대체 왜 그렇게 겁먹은 어린애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117쪽)

 

악은 이 책에 나오는 후드 같은 거다. 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못하는 거. 남들이 찾을 수 없는 깊숙하고 은밀한 곳에 숨겨둘지언정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 하지만 우리는 왜 버릴 수 있는 것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 악을 버릴 수 있다는 건 우리의 착각일 뿐 악은 우리의 의지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가 아닐까. 이 세상 속에, 그리고 내 안에도(나도 이 세상의 일부니까) 선이 있는 것처럼 악도 그냥 있는 거라서 우리는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만 그조차도 쉽지가 않다.



 

그런데 단 한 번이라도 그게 진정한 선택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606쪽)

 

이 문장 앞에서 또 한참 머뭇거렸다. 그러게, 진정한 선택이었을까. 내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수많은 갈림길에서 선택했던 방향이 정말 나의 진정한 선택이었을까. 상황에 밀려서, 어쩔 수 없어서, 내가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걸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모험을 감행할 용기가 없어서,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이쪽 길이 더 안전해보여서.... 이런 저런 이유로 선택했던 것들이 진정한 나의 선택이었던 게 맞나. 오히려 타협에 더 가깝지 않았나. 지금에 와서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며 ,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좀 더 용기를 내서 다른 길을 선택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어리석었지.’하며 회한에 젖을 때가 있다. 그것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지만 선택하지 못하고 타협했던 나 자신에 대한 원망이기도 하다.



 

어젯밤의 판결은 아버지가 이뤄 놓은 세계를 자신이 그대로 승계하기로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흠결이 있는 세계라 할지라도 그것이 보장하는 안정과 미래를 받아들이기로 선택했다는 뜻이다.  (776쪽)

 

안정과 미래를 보장받는 길이란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 그 유혹 앞에서 흠결을 트집 잡아, 흠결은 없지만 안정과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는 위험천만한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악은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속삭이는 걸까. ‘이봐, 이런 정도의 흠결은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거야. 다들 그렇게 살아. 너 혼자 고결한 척 유난 떨지 마. 이 정도의 흠결을 트집 잡아 힘든 길로 간다면 그건 너만 손해라고.’ 현실에서는 이런 속삭임에 무릎을 꿇는 것이 비난거리가 되기는커녕 현명하다는 인정과 칭찬을 받는다. 그런 세상이고 나도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간다. 내가 선택했다고 해서 다 이루어지는 세상도 아니니까. 식당에 가서 메뉴판을 보고 먹고 싶은 음식을 선택하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그런 간단한 선택이 아니니까, 갈림길 앞에서 나는 진정한 선택보다 쉬운 타협을 더 많이 하며 살아온 것 같다. 별로 좋지도 않은 머리로 선택에 따른 나의 손익계산을 따져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고 봐주고 납득할 수 있는 악의 경계는 어디까지이며 그 경계는 누가 어떻게 만들었고, 우리는 그 경계에 대해 어떻게 합의한 걸까. 내 짧은 생각을 아무리 뻗어본다고 해도 다다를 수 없는 심오한 문제라는 것만 확인할 뿐이다. 니스의 아버지이자 다윈의 할아버지인 러너가 내 편이 되어준다.

그건 나쁜 게 아니야. 환경에 적응해 가는 것뿐이지. 카멜레온이 제 몸 색깔을 바꾼다고 누가 비난하더냐? 이 혼탁한 세상에서 아무 죄도 짓지 않고 아버지가 된다는 게 가능할 것 같으냔 말이야.’ (636)

이 말이 왜 이다지도 고마우면서 슬플까.



 

누구도 기원을 끝까지 밝혀 가며 살 수는 없다.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살인하지 않은 조상을 가진 핏줄이 과연 단 하나라도 있을까? (770)

 

악은 우리 뼈와 핏줄 안에 깊이 새겨져 있는 본성일 것이다. 저 글을 읽으며 루쉰의 <광인일기>가 생각났다. 루쉰의 <광인일기>에서는 사천 년간 사람을 먹은 이력을 가진 나. 처음엔 몰랐지만 이젠 알겠다. 제대로 된 인간을 만나기 어려움을!’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책에도 할아버지 DNA가 아버지랑 저에게 공유돼서 그런 거 아닐까요?”(738)라거나 말은 DNA가 중요한 동물이거든 인간처럼 조상과 후손을 엄격하게 따지지.”(764)같은 문장들이 보인다. 악의 DNA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은 을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인간의 뼈와 핏줄 안에 깊이 새겨진 악을 지워낼 수 있을까 고민해 왔지만 실패했다. 문명이라는 화려한 이름 아래 세련되게 숨겨두는 건 가능했을지 몰라도 우리 안에 있는 악을 부정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운명인가 보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루미는 이 진화한 다윈이 자기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는 것을 느꼈다. 루미는 자기도 모르게 돌발적으로 다윈에게 입을 맞추었다. (851)

 

진실을 집요하게 좇던 루미는 진화한 다윈에게 돌발적으로 입을 맞추며 다윈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신이 늘 바라 온 이상적인 남자의 모습’(856)이라고 생각한다. 루미는 내내 자신의 이름처럼 빛을 좇아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했으나 루미가 이라고 확신했던 제이삼촌도 실상은 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인물이다. 이 책의 그 누구도 빛이 아니고, 이 세상 그 누구도 빛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루미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은 다윈도 이상적인 남자가 아니다. 아니, 어쩌면 드디어 악을 삼킨 다윈이기에 이상적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라면 무릇 악의 DNA까지 발현되어야 완전한 인간인 건가. 악을 모르는 순진무구한 인간이 오히려 불완전한 걸까. 하긴 인간이 선한 빛으로만 가득하다면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반납하고 하늘로 올라가 천사가 되어 천국을 누리며 살고 있겠지. 루미가 진화한 다윈에게 이끌리듯 우리는 본능적으로 악을 향해 몸을 기울이게 되는 운명인가 보다. 우리는 여전히 어딘가에 자기만의 후드를 감춰두고 살아가고 세상 곳곳에서 악은 음흉한 꼬리를 흔들며 유혹한다. 누구였더라... 악은 정교하고 치밀하다고. 인간주제에 그렇게 정교하고 치밀한 악의 계략에서 빠져나간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운명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삶을 사는 것뿐이라는 거야.” 651

모두 각자의 죽음이 납득되는 삶을 살아야 해.” 845

 

그러므로 어른이 된다는 것, 아니 그냥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건 내 안에 있는 악을 자각해야 가능한 걸까. 내 안의 악인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세상 앞에 죄인의 마음을 갖는 것. 내가 이 세상의 오점일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고 조심하고 겸손해지는 것. 나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나의 죽음이 납득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 모두 빛과 어둠을 다 끌어안고서 안쓰러울 정도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처럼 존재하는 악의 문제는 풀 수 없고 제어조차도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태어난 이상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나의 경솔했던 점 하나를 더 반성한다. 이 책은 청소년 책이 아니다. 물론 청소년들이 읽겠다는 걸 굳이 말릴 필요는 없다. 주인공들의 나이가 열여섯이니까 그 정도 나이의 청소년들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청소년읽을 책은 아니라는 거다. ‘청소년 책이라고 독자의 한계를 규정할 수 없는 책이라는 뜻이다. 성인들도 널리 두루 읽었으면 좋겠다. 이 책에서 다윈을 비롯한 열여섯 아이들의 아버지는 40대이고, 그 조부모는 70대이다. 그러니 청소년부터 노년까지 모두에게 일독을 권할 만한 소설이라고 해도 좋겠다. 악의 기원에 대한 증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악에 대한 진지한 고찰정도는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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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8-03-24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으니 정유정의 종의 기원이 생각나네요.

섬사이 2018-03-26 11:57   좋아요 0 | URL
정유정의 <종의 기원>도 이런 주제를 다뤘나 봐요.
예전에 <7년의 밤>을 읽었는데, 저와는 잘 안 맞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 이후로 정유정의 책은 찾아 읽지 않았는데,
<종의 기원>에서는 어떤 식으로 풀어냈을지 궁금해지긴 하네요.

다락방 2018-03-25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자기가 보고싶은대로 보기 마련이잖아요. 마지막에 루미가 다윈에게 이끌리고 이상적인 남자로 생각하게 됐을 때, 되게 복잡한 마음이 되더라고요. 니가 보는 게 다가 아니다, 너는 그토록 진실을 좇는 아이였잖니, 라고 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어디 루미에게만 해당되는 일일까요? 바로 제게도 해당되는 일일텐데요.

말씀하신 것처럼, 저 역시도 어른들에게 일독할만한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섬사이 2018-03-26 12:07   좋아요 0 | URL
맞아요. 내가 보고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고,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죠. 루미는,,,, 뭐랄까. 영악하고 야무지고 맹랑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더랬어요. 그런데 이 소설에서 루미 외에 다른 여성들은 수동적인 여성이거나 성녀처럼 이상적인 여성으로 그려져 있더라구요. 러너의 양어머니와 부인, 해리의 부인이자 제이의 엄마, 또 조이헌터의 부인까지도요. 그래서 나중엔 루미를 응원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는데.......
마지막 부분에 나무 아래 서 있는 다윈에게 다가가면서 다윈이 자기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라고 표현해서 루미처럼 영악하고 야무져도 결국 악이 끌어당기는 힘을 거부하기 힘들구나, 했죠.

다락방님과 이렇게 책 이야기 나누는 거 너무 좋아요. ^^
 



요즘 읽고 있는 책이다. 856페이지 분량의 두꺼운 책이지만 흡인력이 있어서 책장이 금방 넘어간다. 그저께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지금 521쪽까지 읽었다.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어서 짜릿한 흥분과 조마조마한 긴장감을 맛보고 있는 중이다. 

박지리라는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그동안 <맨홀>, <합체>, <양춘단 대학 탐방기>라는 책을 냈다는데, <다윈영의 악의 기원>에서 뿜어져 나오는 작가의 에너지를 보면 다른 책들도 재미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몰라봐서 미안하다... 박지리 작가의 다른 책들을 읽어보고 싶은 욕구가 마구 치솟고 있어서, 조만간 다른 책들을 읽는 것으로 미안함을 덜어볼 생각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재미있다는 거다.  나는 책, 그것도 소설에서 '재미'는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오랜 옛날 사람들이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한 것도 '재미'를 위해서이지 않을까. 교훈이든 비판이든 풍자든 감동이든 뭐든 간에 그게 이야기 속에 재미있게 녹아들지 않으면 그 이야기는 힘을 잃고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가는 이야기를 잘 다룬다. 이야기의 힘이 어마어마하다. 예전에 천명관의 <고래>를 읽고 그 서사의 힘에 감동한 적이 있었는데, 이 책도 그에 못지않은 것 같다. 책을 쓰기 위해 작가가 세심하게 공을 들였다는 게 느껴진다. 아니면 작가가 엄청난 천재인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이 책에는 '헌터'라는 성을 가진 인물들이 나온다. 30년 전 의문의 살해를 당한 제이 헌터, 그리고 제이 헌터의 아버지이자 실력 있는 사진작가인 해리 헌터, 그리고 제이 헌터의 동생 조이 헌터의 딸 루미 헌터다. 그들은 모두 헌터(사냥꾼)같은 성향을 보인다. 사진작가라는 직업은 종종 사냥꾼으로 비유된다. 총 대신 카메라로 피사체를 포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미의 할아버지 해리는 '헌터'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 제이 헌터는 9개의 지역으로 구획된 계급사회에서 하위계급 사회에 대한 잔인한 적개심을 드러낸다. 물론 그의 적개심에는 나름대로 그 이유가 있지만 '척결'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만큼 그는 하위계층에 대한 증오가 대단하다. 그런 제이 헌터에게선 표적을 쫓는 오만하고 포악한 사냥꾼의 모습이 보인다. 제이 헌터의 본모습은 알지 못한 채 30년 전 열여섯 살의 나이에 살해당한 삼촌 제이 헌터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는 루미 헌터는 삼촌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 진실에 다가가려 한다. 마치 사냥감을 쫓는 집요한 사냥꾼의 모습 같다. 루미 헌터의 아버지이자 제이 헌터의 동생인 조이 헌터는 사냥꾼보다 표적에 가깝지만 거기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처음엔 무심코 읽다가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아, 작가가 이래서 이 가족의 성을 헌터라고 지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가 센스 있다. 

주인공 '다윈'의 이름도 그렇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밝힌 것처럼 이 책의 주인공 '다윈'은 '악의 기원'을 밝혀야 할 운명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지금 읽고 있는 512쪽 근처에서 다윈은 커다란 혼란 속에서 괴로워하며 구토 중이다.  유순하고 모범적이고 밝고 순진했던 다윈이었는데, 참으로 딱하다. 다윈이 밝혀줄 '악의 기원'이 사회적 불평등한 구조일까. 더 깊이 들어가 불평등한 계급사회를 만든 인간의 이기적 본성일까. 센스 있는 이 작가가 어떤 결말을 보여줄지 가슴 두근거리며 설레며 읽고 있다. 좋다, 이런 흥분. 

비유 면에서도 그렇다. 이것도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다윈이 외국어 공부를 하면서 시제와 인칭에 따라 달라지는 불규칙 동사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불규칙동사'는 규칙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과 규칙에 불응 저항하며 무리에서 이탈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생존 능력이 강할까에 대한 상념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이 '불규칙동사'의 비유는 늘 사랑 가득한 모습으로 안심과 확신을 주었던 아버지가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쓰인다. 그리고 혼란에 싸여있는 다윈이 명문 프라임 스쿨의 교정에서 친구 레오와 만나는 장면에서 다시 나온다. '프라임 스쿨의 일원으로 있으면서도 이 분위기에 완전히 지배당하지 않는 레오가 과거 현재 미래에서 자유롭게 변화하는 하나의 불규칙 동사 같았다.'(514쪽)라고. 
이런 식의 비유들이 몇 군데에서 등장한다. 다윈의 아버지 니스 영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상상하다가 루미와 맞닥트리는 장면도 그렇다. 

재미있으면서 독자에게 던지는 물음은 가볍지 않다. 불규칙동사만 해도 '규칙에 불응, 저항해서 무리에서 이탈한 자는 도태된 낙오자인가, 아니면 규칙과 질서를 뛰어넘는 우수한 능력을 가진 자인가'라는 물음을 내포하고 있다.  '7급 서기관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조이 헌터는 루미의 말대로 야망 없는 겁쟁이일까, 진정한 행복에 가까이 다가선 사람일까'도 청소년 아이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해볼 만한 물음이다. 

음... 다윈이 어떤 방법으로 이 엄청난 혼란을 극복하고 성장해나갈지 걱정스럽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한다. 빨리 다시 책으로 돌아가 일단 다윈의 구토부터 진정시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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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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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던 1990년대 초반에 동네의 작은 책방에서 <상실의 시대>를 만났었다. 갑자기 낯선 일본 작가(그때만 해도 하루키는 낯선 작가였다)의 소설책을 골랐던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제목에 끌렸던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로 힘들고 불안했던 시기였으니까 상실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놓쳐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과 시대라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체념 같은 것들을 제목에서 느꼈던 것 같다. (<상실의 시대>의 원제목은 <노르웨이의 숲>이지만 다 읽고 나서는 제목이 무엇이든 상관 없을 만큼 인상깊었다.)


그 때 읽었던 <상실의 시대>는 말할 수 없이 좋았지만 그 이후로 하루키의 작품을 찾아 읽지는 않았다. 내가 읽은 것이라곤 <스푸트니크의 연인>, <1Q8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정도다. 누군가는 <먼 북소리>가 좋다고 했고, 누군가는 하루키 하면 <해변의 카프카>라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를 꼭 읽어 봐야한다고도 했지만, 내가 특별히 하루키를 피하는 것도 아닌데 읽어볼까 하면서도 자꾸 다른 책들한테 밀려나곤 했다.


그런 내가 어제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읽었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처음이었다. 2013년에 <1Q84>를 읽고 리뷰에 아주 아주 단단한 밀도와 강도를 가진, 모서리가 날카롭게 빛나는 삼각뿔을 만지고 있는 느낌이었다라고 적었는데, 이 책을 읽고는 음,,,, 사람이 그런 사람이구나, 그래서 그런 글들을 쓸 수 있는 거구나 하고 수긍하고 인정하게 되었다.


아테네에서 마라톤까지를 이글이글한 상상초월의 더위를 견디며 달리고, 100km의 울트라 마라톤과 25번의 풀마라톤을 완주하고, 사이클과 수영과 달리기를 해야 하는 트라이애슬론에 도전하고, 그러기 위해서 매일매일 성실하게 달리고, 매일매일 더 열심히 글을 쓰는 하루키는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라고 말하고 있다. 근성 있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그의 문학적 성과를 떠나서 그의 근성과 삶에 열심인 모습만으로도 본받을 만한 사람이다.


어떤 분이 하루키는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다고 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하루키의 소설을-겨우 몇 권 읽었을 뿐이지만- 읽을 땐 힘이 잔뜩 들어가지만 에세이는 좀 편안히 읽힌다. 하루키의 생각과 느낌과 삶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들을 정직(?)하게 읽어나갈 수 있다.


하루키의 대부분의 작품을 거의 다 읽은 남편의 얘기로는 하루키는 재즈나 위스키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이미 재즈나 위스키를 가지고 쓴 글들이 책으로도 나와 있다고 했다. 언젠가 지인들을 집에 초대해서 술자리를 가졌을 때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인 데다 술기운까지 올라와서 한껏 기분이 좋아진 남편이 하루키 때문에 내가 싱글몰트 위스키를 마시게 됐지하며 창고에서 꺼내온 위스키 뚜껑을 따고 술잔들을 채우던 게 생각난다. (우리남편은 하루키의 달리기보다는 싱글몰트 위스키가 더 인상적이었나 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 그 이야기를 글로 잘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면에서 하루키는 참 부러운 사람이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고통을 통과해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는 확실한 실감을, 적어도 그 한쪽 끝을, 우리는 그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256)라고 생각하면서 점점 더 자신을 강하게 단련시키는 모습이 아름답다.


트라이애슬러를 준비하기 위해 사이클 훈련을 하는 하루키가 페달을 밟으며 똑같은 일의 끝없는 되풀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세상의 거의 모든 일들이 그 지겨운 똑같은 일의 끝없는 되풀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걸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이 책이 나온 게 2007년이다. 그로부터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1949년생인 하루키는 어느새 일흔의 나이가 되었을 텐데, 아직도 매일매일 달리고 있을까?  아마 하루키는 여전하게 세상에 있는 어느 길을 꾹꾹 열심히 밟으며 달리고 있을 것이다. ‘똑같은 일의 끝없는 되풀이를 오늘도 묵묵하고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계속하는 것 –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어지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그러나 탄력을 받은 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확실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쪽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마음이 받게 되는 아픈 상처는 그와 같은 인간의 자립성이 세계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대가인 것이다. 40쪽

건전한 자신감과 불건전한 교만을 가르는 벽은 아주 얇다. 87쪽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116~117쪽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작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의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혹은 가령 조금이라도 그것들과 비슷한 장소에 근접하는 것이다. 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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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막내의 교복 블라우스 2장, 하는 김에 큰딸의 셔츠 3장까지 다림질을 했다. 다림질을 끝내고 주방 씽크대 위에 어질러진 것들을 정리하는 동안 카푸치노를 잊고 있었다. 저녁으로 소고기를 먹고 돌아오는 길에 산 카푸치노는 거실 테이블 위에서 차갑게 식어버렸다. 난 식어버린 커피도 잘 마시므로 별로 개의치 않았다. 


거실에 앉아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카푸치노를 마셨다. 식은 커피도 잘 마시지만 식어서 다 내려앉은 카푸치노의 거품은 좀 볼썽 사나웠다. 12시가 넘었고, 월요일엔 아들이 6시 반에 일어나 나가야 하므로 나도 일찍 자려고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눈이 말똥말똥, 정신이 생생했다.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일어나 앉았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는데, 책이나 더 읽자. 


2시를 넘어가도 좀처럼 잠이 찾아오지 않았다. 밤늦은 시간에 마신 카푸치노 탓일까. 예전엔 하루 중 어느 시간에 커피를 마시든 잠을 자고 못자고는 상관이 없었는데, 나의 수면과 각성은 카페인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게 안되나보다. 몸이 카페인에게 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새벽 3시쯤엔 시집, 김사인 시인의 <가만히 좋아하는>을 펼쳤다. 봄밤이니까 '봄밤'을 읽고 자야지. 시 '봄밤'을 펼쳐 읽었다. 그런데 어, 내가 왜 이러지. 웃는데 눈물이 나는 건 뭐야. 처음 읽는 시도 아닌데, 뭐 이런 경우가...


 

추적추적한 봄밤에 이런 시는 너무 따뜻하고 정겹다. 술 한 잔 마시고 불콰해진 낯으로 고단한 삶 따위 뭐 대단키나 하냐는 듯이, 끌어당기는 소매 뒤로 쓸쓸함을 감추고 호기를 부리는 봄밤. 그 투박하고 서글픈 정서가 진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그때까지도 저녁에 먹은 소고기는 오랜 시골마을 터줏대감 어르신처럼 내 뱃속에 근엄하게 좌정하고 있었고, 내 위는 엄한 할아버지 앞에 무릎꿇고 앉아 불편해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 같았다. 카페인은 오래도록 막강하게 각성의 힘을 유지하고 있었고 내 마음은 시 하나에 무너져 어두컴컴한 거실 스탠드 조명 아래서 주책맞게 눈물이나 찔끔대고 있었으니... 참으로 길고 힘든 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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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8-03-20 0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오랜만이라 반가워서 덧글 남겨요. 막내가 벌써 교복입는 중학생인가요?@@

섬사이 2018-03-21 11:47   좋아요 0 | URL
아,순오기님, 반가워요.
여전히 책에 대한 열정 가득히, 잘 지내고 계시죠?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하고 쑥스럽다 하고 있었는데,
반겨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막내는 올해 중학생이 되었어요.
사춘기와의 대격돌을 각오하며 지내고 있어요. 하하하.

순오기 2018-03-22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렇게 오랜만에 소식 들으면 친정식구를 만난 듯 기뻐요.^^ 셋째니까 사춘기의 대격돌도 내공으로 슬기롭게 잘 넘기실 듯...♥

섬사이 2018-03-22 22:01   좋아요 0 | URL
친정식구처럼 반갑다고 하시니 마음이 덩달아 포근합니다.
(이참에 ‘언니‘로 모실까요? ^^)
사춘기 대격돌 쯤이야, 뭐 귀엽게 봐줘야지요.
자주 뵈어요. 순오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