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고 있는 책이다. 856페이지 분량의 두꺼운 책이지만 흡인력이 있어서 책장이 금방 넘어간다. 그저께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지금 521쪽까지 읽었다.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어서 짜릿한 흥분과 조마조마한 긴장감을 맛보고 있는 중이다. 

박지리라는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그동안 <맨홀>, <합체>, <양춘단 대학 탐방기>라는 책을 냈다는데, <다윈영의 악의 기원>에서 뿜어져 나오는 작가의 에너지를 보면 다른 책들도 재미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몰라봐서 미안하다... 박지리 작가의 다른 책들을 읽어보고 싶은 욕구가 마구 치솟고 있어서, 조만간 다른 책들을 읽는 것으로 미안함을 덜어볼 생각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재미있다는 거다.  나는 책, 그것도 소설에서 '재미'는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오랜 옛날 사람들이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한 것도 '재미'를 위해서이지 않을까. 교훈이든 비판이든 풍자든 감동이든 뭐든 간에 그게 이야기 속에 재미있게 녹아들지 않으면 그 이야기는 힘을 잃고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가는 이야기를 잘 다룬다. 이야기의 힘이 어마어마하다. 예전에 천명관의 <고래>를 읽고 그 서사의 힘에 감동한 적이 있었는데, 이 책도 그에 못지않은 것 같다. 책을 쓰기 위해 작가가 세심하게 공을 들였다는 게 느껴진다. 아니면 작가가 엄청난 천재인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이 책에는 '헌터'라는 성을 가진 인물들이 나온다. 30년 전 의문의 살해를 당한 제이 헌터, 그리고 제이 헌터의 아버지이자 실력 있는 사진작가인 해리 헌터, 그리고 제이 헌터의 동생 조이 헌터의 딸 루미 헌터다. 그들은 모두 헌터(사냥꾼)같은 성향을 보인다. 사진작가라는 직업은 종종 사냥꾼으로 비유된다. 총 대신 카메라로 피사체를 포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미의 할아버지 해리는 '헌터'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 제이 헌터는 9개의 지역으로 구획된 계급사회에서 하위계급 사회에 대한 잔인한 적개심을 드러낸다. 물론 그의 적개심에는 나름대로 그 이유가 있지만 '척결'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만큼 그는 하위계층에 대한 증오가 대단하다. 그런 제이 헌터에게선 표적을 쫓는 오만하고 포악한 사냥꾼의 모습이 보인다. 제이 헌터의 본모습은 알지 못한 채 30년 전 열여섯 살의 나이에 살해당한 삼촌 제이 헌터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는 루미 헌터는 삼촌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 진실에 다가가려 한다. 마치 사냥감을 쫓는 집요한 사냥꾼의 모습 같다. 루미 헌터의 아버지이자 제이 헌터의 동생인 조이 헌터는 사냥꾼보다 표적에 가깝지만 거기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처음엔 무심코 읽다가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아, 작가가 이래서 이 가족의 성을 헌터라고 지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가 센스 있다. 

주인공 '다윈'의 이름도 그렇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밝힌 것처럼 이 책의 주인공 '다윈'은 '악의 기원'을 밝혀야 할 운명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지금 읽고 있는 512쪽 근처에서 다윈은 커다란 혼란 속에서 괴로워하며 구토 중이다.  유순하고 모범적이고 밝고 순진했던 다윈이었는데, 참으로 딱하다. 다윈이 밝혀줄 '악의 기원'이 사회적 불평등한 구조일까. 더 깊이 들어가 불평등한 계급사회를 만든 인간의 이기적 본성일까. 센스 있는 이 작가가 어떤 결말을 보여줄지 가슴 두근거리며 설레며 읽고 있다. 좋다, 이런 흥분. 

비유 면에서도 그렇다. 이것도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다윈이 외국어 공부를 하면서 시제와 인칭에 따라 달라지는 불규칙 동사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불규칙동사'는 규칙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과 규칙에 불응 저항하며 무리에서 이탈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생존 능력이 강할까에 대한 상념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이 '불규칙동사'의 비유는 늘 사랑 가득한 모습으로 안심과 확신을 주었던 아버지가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쓰인다. 그리고 혼란에 싸여있는 다윈이 명문 프라임 스쿨의 교정에서 친구 레오와 만나는 장면에서 다시 나온다. '프라임 스쿨의 일원으로 있으면서도 이 분위기에 완전히 지배당하지 않는 레오가 과거 현재 미래에서 자유롭게 변화하는 하나의 불규칙 동사 같았다.'(514쪽)라고. 
이런 식의 비유들이 몇 군데에서 등장한다. 다윈의 아버지 니스 영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상상하다가 루미와 맞닥트리는 장면도 그렇다. 

재미있으면서 독자에게 던지는 물음은 가볍지 않다. 불규칙동사만 해도 '규칙에 불응, 저항해서 무리에서 이탈한 자는 도태된 낙오자인가, 아니면 규칙과 질서를 뛰어넘는 우수한 능력을 가진 자인가'라는 물음을 내포하고 있다.  '7급 서기관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조이 헌터는 루미의 말대로 야망 없는 겁쟁이일까, 진정한 행복에 가까이 다가선 사람일까'도 청소년 아이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해볼 만한 물음이다. 

음... 다윈이 어떤 방법으로 이 엄청난 혼란을 극복하고 성장해나갈지 걱정스럽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한다. 빨리 다시 책으로 돌아가 일단 다윈의 구토부터 진정시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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