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리 작가의 책을 <다윈 영의 악의 기원>, <합체>에 이어 <맨홀>을 읽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한 번 더 읽고 난 다음이었다. 1948년에 발표된 일본 작가의 소설 <인간 실격>과 2012년에 출간된 한국작가의 소설 <맨홀>은 그 주제가 비슷하게 닿아있다. (<맨홀>은 2012년에 책이 나왔고, 2017년에 표지를 갈아입고 새로 나왔다.) 인간의 난해함, 삶의 부조리, 가식적이고 이중적인 세상, 주인공은 세상과 겉돌고, 괴로워하고, 안간힘을 쓴다.
다른 게 있다면 <인간 실격> 요조의 방황의 원인이 타고난 예민한 감각 혹은 천재성과 같은 선천적인 것이라면 <맨홀>의 이름조차 갖지 못한 주인공 '나'의 방황은 아버지의 가정폭력과 학대라는 분명한 원인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악마같은 아버지를 세상 사람들은 16명의 생명을 구한 자랑스런 소방관이라며 경의를 표할 때나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던 누나와 엄마가 아버지에 대한 '용서'를 말할 때 주인공 '나'가 느껴야 하는 역겨움과 분노가 너무 실감나게 다가온다. <맨홀>의 주인공, 이제 겨우 고등학생인 '나'의 불행과 비교하면 <인간 실격>의 주인공 요조의 불행은 가볍게 느껴진다. 내가 천재성의 비극에 대해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언제나 인간관계란 것에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무엇이든 하나라도 틀어져 버리면 그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끝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집에서는 관계랄 수도 없는 학대를 당하면서 밖에서는 완전하고 순결무구한 것만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나의 속마음을 눈치 빠른 누군가에게 들킨 것 같으면, 나는 바로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절망하며 그 녀석과의 관계를 끊어 버렸다. 그러고는 역시 혼자가 편하다고 자위했다. <맨홀> 201쪽
<인간 실격>의 요조는 학교 따위 우습게 여기고 스스로 그만두다시피 하지만 <맨홀>의 '나'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상황이 올까봐 전전긍긍하며 자랐고, 학교에 다니지 못해서 아무것도 못 하는 구제 불능 낙오자가 될까봐 겁을 먹었고, 학교에 못 가게 될까봐 두려워서 지옥 같은 집을 뛰쳐나오지도 못한다. 누군가 자기의 불행을 알아차릴까봐 친구들 사이로 스며들지도 못한다. 마음 속에 타오르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거세어질수록 '나'를 삼켜버릴 깊고 어두운 구멍도 더 짙고 선명해진다.
이제는 내 정체를 완벽하게 은폐할 수 있나 보다 하고 마음을 놓으려는 참에 저는 실로 불의에 등 뒤에서 칼을 맞았습니다. ...... (중략)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았습니다. 일부러 실패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도 아닌 다케이치한테 간파당하리라곤 전혀 생각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온 세상이 일순간에 지옥의 업화에 휩싸여 불타오르는 것을 눈앞에 보는 듯 하여 왁 하고 소리치면서 발광할 것 같은 기핵을 필사적으로 억눌렀습니다.
그때부터 계속된 나날의 불안과 공포.
<인간 실격>, 31~32쪽
그에 비해 <인간 실격>의 요조는 '익살'이라는 나름의 비법을 연마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는다. 호감을 얻는다고 해서 요조가 느끼는 삶의 비관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다케이치에게 자신의 '익살'이 거짓이라는 걸 들키고는 내면에 품고 있는 인간에 대한 공포가 탄로날까봐 노심초사한다.
<인간 실격>은 누구나 갖고 있는 내면의 고민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다. <맨홀>처럼 가정폭력이나 학대 같은 분명하고 심각한 원인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떠안게 되는 어쩔 수 없는 고민들. 아무리 해도 알 수 없는 한 길 사람 속이라든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맑게 드러나지 않는 세상, 오리무중 뿌연 안개로 가려진 것 같은 애매모호한 진실 같은 것들, 나이를 먹고 오래 살아도 풀 수 없는 삶의 난해함과 인간관계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들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두 책이 비슷한 주제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인간 실격>은 좀 더 보편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 같고, <맨홀>은 좀 더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스토리를 통해 주제에 접근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읽은 박지리 작가의 책들 중에서 <맨홀>이 가장 무겁고 어두웠다. 가정폭력의 깊은 상처를 가졌다 하더라도 자라나는 청소년 고등학생의 이야기니까 마지막 어디쯤에 작가가 주인공 '나'가 이 지독한 상처를 이겨낸다는 희망의 암시라도 마련해 두었을지 모른다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인간 실격>도 그렇고 <맨홀>도 그렇고, 현실은 가혹하고 차디차고 광폭하고 허위와 허세에 가득 차있고, 역겹다고 말할 뿐이다.
연이어 어둡고 쓸쓸하고 아픈 책을 읽었더니 우울해진다. 더구나 <문라이트>라는 영화를 봤는데, 아, 이 영화도 마음이 힘들었다. 세상엔 왜 이렇게 아픈 이야기들이 많은 걸까.
게다가 세월호 4주기다. 문학동네에서는 <눈먼 자들의 국가> e-book을 무료로 대여 중이다. 오늘 낮에 태블릿에 다운받아서 맨 첫 글, 김애란 작가가 쓴 꼭지를 읽었다. 읽으면서, 왜 이렇게 글을 잘 쓴 거야, 이씨, 너무 잘 써서 그날 느꼈던 감정들이 다 결을 세우고 일어나잖아. 했다. 더 이상 읽기가 어려워서, 그 다음 글로 차마 넘어가지 못했다. 아침에 마음을 단단히 하고 다시 읽어야겠다.
그 다음엔 좀 따뜻하고 희망적인 책을 읽어야겠다. 안 그러면 무기력해져서 우울로 빠져버릴 것만 같다. 박지리 작가의 다른 책 <양춘단 대학 탐방기>가 테이블 위에 대기 중인데, 표지 분위기도 밝고 (코믹하고), 앞에 몇 쪽을 읽어본 바로는 묵직하고 어두운 느낌은 아니다.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