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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홀든 콜필드 16살 사춘기의 소년. 흔히 말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정말 질풍노도답게 살아가는 한 소년의 이야기다. 학교생활의 부적응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을 바라보는 콜필드의 시선 역시 그 나이의 소년답다.
사춘기 소년다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나쁜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어린이 시절에서 사춘기로 접어들 때의 불안과 당황스러움을 기억한다면 콜필드의 불안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본다. 어린시절에 동경하는 어른의 세계는 완벽하고 안정되어 있으며, 어떤 일 앞에서도 흔들림없이 강하고 고상할 뿐 아니라 막강한 권력과 무한한 자유를 가진 사람들의 세계였다. 조금의 어긋남도 없는 완벽한 법도의 세계. 어서 자라서 나도 그 세계에 빨리 들어가기를 바라지 않았었던가.
그러나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어른들이 생각처럼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완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기적인 모순덩어리이며 계산적이고 비겁하고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속물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와 선생님을 비롯한 기성세대에 반항하고, 동시에 허점투성이인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룰에 아무런 비판도 없이 순응하는 친구들이 우습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꼭 콜필드가 그렇다. 퇴학당하는 자기를 불러서 훈계하는 스펜서 선생님에게서 비열한 자기과시욕을 엿보게 되며, 기숙사 동료 스트라드레이터의 아무런 의식도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참을 수 없게 되기도 하고, 형 D.B의 헐리우드 진출을 두고 속물의 냄새를 맡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콜필드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난 싫어.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싫어해. 그 뿐만이 아니야. 모든 것이 다 그래. 뉴욕에서 사는 것도 싫고, 택시니, 매디슨 가의 버스들, 뒷문으로 내리라고 고함이나 질러대는 운전 기사들, 런트 부부를 천사라고 그러는 멍청이에게 소개되는 일이나, 밖에 잠깐 나가려고 해도 엘리베이터를 타야하는 일이나, 브룩스에 가서만 바지를 맞추는 놈들, 언제나 사람들은..."
"언제 한번 남학교에 가봐. 시험삼아서 말이야. 온통 엉터리같은 녀석들 뿐일테니. 그 자식들이 공부하는 이유는 오직 나중에 캐딜락을 살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야. 축구팀이 경기에서 지면 온갖 욕설이나 해대고, 온종일 여자나 술, 섹스 같은 이야기만 지껄여대. 더럽기 짝이 없는 온갖 파벌을 만들어, 그놈들끼리 뭉쳐 다니지 않나. ..(생략)"
콜필드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초등학교 4학년짜리 여동생 피비뿐이다. 또다른 남동생 앨리를 그리워하지만 그 동생은 백혈병으로 죽어버렸다. 왜 콜필드가 편안함을 찾는 곳은 어린 동생들에게서 뿐일까. 그건 아마도 콜필드가 이미 떠나온 세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콜필드가 가야하는 어른의 세계가, 또는 어른으로 가는 그 과정이 감수성 예민한 콜필드가 소화하기엔 너무 역겹고 삼키기엔 너무 단단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여동생 피비에게서 지나간 자기의 어린시절의 순수함을 보고 편안해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리워지는 시기가 올 것이다. 책 마지막에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라고 하지 않았던가. 모든 것이 그리워지는 그 때가 오면, 세상의 부조리함도 사람들의 비열함도 어느 정도는 눈감아주는 너그러움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아니, 너그러움이 아니라 체념이라 해야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지금도 콜필드처럼 방황하고 있을 우리의 십대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드는 건, 우리 기성세대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지 못한 스스로 우리의 잘못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부끄럽고 미안할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