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엔 키재기 벽이 있다. 이사오기 전에 살던 집에도 키재기 벽이 있었다.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의 8년에 걸친 성장기록이 담겨 있었는데 이사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다. 벽을 뜯어올 수는 없으니 참 아쉬웠다.
이사오고 나서 한동안 아이들 키를 재지 않다가 지난 10월에 아이들이 키재기 벽을 만들자고 졸라대기에 안방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좁다란 벽에 오랜만에 아이들 키를 재어 표시해 두었다. 이번엔 막내 비니까지 포함해서. 앞으로 이 집에서 사는 동안엔 우리 아이들의 성장 기록판이 되어줄 벽이 생긴 것이다.
이제 겨우 한달하고 조금 더 지났을 뿐인데, 아이들이 또 키를 재보자고 했다. 얼마나 자랐을라구~하면서 재미삼아 키를 쟀는데 둘째 뽀와 막내 비니는 거의 2센티미터정도 더 자란 것 같다. 첫째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성장이 더디어 지는지 1센티미터도 안되게 자랐고. 뽀는 뽐내가며 지 누나를 쳐다보았고 첫째는 그런 뽀를 까불지말라는 듯 꿀밤을 때렸다.
첫애가 언젠가부터 내 키를 넘어섰다. 씽크대 찬장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이 손끝이 닿을락말락해서 애먹고 있을 때 이제 첫째가 와서 쓰윽 꺼내 내려준다. 그러면서 뽀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도 조금은 거만한 표정을 하고 나를 쳐다보곤 한다는 걸 첫애는 모르나 보다.
키는 길이를 의미하는 거라서 그런지 수첩에 숫자로 기록되는 것보다 벽에 눈금으로 표시하는 편이 훨씬 시각적으로 와닿는다. 아이들도 눈금 옆에 써놓은 날짜를 보면서 "애개.. 내가 ( )살 때 겨우 요만했어?"하며 신기해 하기도 하고, 뽀는 누나 키를 따라 잡으려면 이만큼 더 커야 하는 거구나 하며 투지(?)를 불사르기도 한다. 나는.. 애들이 커가는 걸 기쁨 반, 서운함 반, 또 조금은 두려운 마음도 가지고 바라본다.
아이들이 크는 키만큼 내 마음의 도량도 점점 크고 깊어져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품안에 쏘옥 안기던 작은 아기가 아니니까.. 내 품이 좁을 만큼 저리도 많이 컸으니까 마음으로 안아주는 수밖에. 물보라를 일으키며 풍덩 안겨와도 언제든 다 감싸 안을만큼 나도 아이들따라 커야겠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어느새 한 해가 다 가버렸을까.. 12월도 이제 20일밖에 남지 않았다. 아이들은 한살씩 더 나이를 먹었다고 즐거워할 것이다. 어릴 땐 나이 먹는 게 즐거우니까. 내년에 아이들은 또 얼마나 더 클까.. 다시 찾아올 봄엔 또 짧아진 아이들의 바지가 생겨있을 테고 새바지를 사야겠다며 나는 생활비를 계산해볼 것이다. 뽀는 운동화며 실내화가 작아졌다고 투정을 부릴 지도 모르겠다. 첫째의 사춘기는 더 깊어갈테고, 막내 비니는 기저귀를 뗄 것이다.
그리고 남편과 나는 서로의 얼굴에서 함께 해온 긴 시간들을 확인하고 웃겠지. 이제 함께 늙어가는 일도 같이 잘 해보자며 서로의 등을 토닥거려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