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화단에 뭔가 싶고 싶은 욕심에 안달이 났었는데, 드디어 심었다.

붓들레아 묘목 3개 ...  카달로그에는 나비를 부르는 나무라고 써있었다.  월동도 문제없고 꽃도 꽤 오래간단다. ㅎㅎ 

사계장미 묘목 2개 ..  기존에 있던 것까지 해서 이제 4개가 되었다.  노랑, 분홍, 빨강..ㅎㅎ 아직은 키도 작고 볼품없지만 잘 키워봐야지. 근데 장미는 여름철엔 꼭 진딧물이 낀다.  장갑끼고 손으로 훑어 잡으려면 귀찮고 징그럽다.

수국 3개 ... 재작년에 산수국을 심었는데 실패했었다.  지난번꺼보다는 좀 튼실해보이긴 하는데 모르겠다.  토질이 알칼리성이면 꽃이 파랗고, 산성이면 붉은 색이라는데 어떤 색 꽃이 필까 궁금하다.  

백함 구근 6개 ... 작년에 심은 보라색 히야신스가 꽃을 피우고 있는데 거기에 분홍과 하얀 백합을 더 보탰다. 

유카 4개 ... 이건 좀 그렇다.  양재동 그 원예조경 가게 아줌마가 월동도 문제 없고 잘자란다고 추천해서 사왔는데 인터넷에 검색해보니까 내한성이 약하고 우리나라 남부지역에서 잘자란다고 했다.  아무래도 찝찝하다.  겨울에 죽으면 어쩌지?

도라지, 페튜니아, 패랭이꽃 씨앗 ... 화원에서 배양토을 사다가 화단 흙에 좀 섞은 다음 뿌려야 겠다.  도라지 꽃이 제일 기대가 된다.

큰꿩의 비름 ... 기존에 심었던 것을 옮겨 심으면서 포기를 나누었다.  괜찮을까 모르겠다.  병나지 말고 잘 커야 하는데..

금낭화 ... 재작년에 심은 건데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다.  심은 첫해는 정말 보잘 것 없더니 작년엔 제법 꽃을 보여줬다.  올해는 싹이 나오는 것부터가 작년과 또 다르다.  거름을 좋아하는 녀석이라 주변에 거름을 넉넉히 뿌려줬다.

철쭉 2개 ... 작년 여름에 아이들 공이 화단으로 넘어오면서 철쭉 가지 하나를 뚝 부러뜨려 놓아서 무척 속상했다.  냄푠이 가지 부러진 철쭉을 감나무 근처로 옮겨심었다.  철쭉은 모여서 피어야 제맛인데.. 두그루밖에 없는 걸 떨어뜨려 놓다니.. 마음에 걸린다.

아이들은 작년처럼 방울토마토나 깻잎도 심었으면 좋겠다고 난리다.  딸기도 심고 봉선화도 심잔다.  화단은 작은데 심고 싶은 건 많으니 큰일이다.   거기다 이제 막 싹이 나기 시작한 단풍나무와 감나무에 잎이라도 무성해지면 화단에 그늘이져서 생각만큼 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  작년 방울토마토는 뭐 꽤 짭짤했지만..

그래도 뽀의 연못타령이 쏙 들어갔으니 다행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화단에 흙을 파서 비닐을 깔고 물을 부어 연못을 만들고 거기에 수련을 심자고 성화였었다.  ㅎㅎㅎ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허락하지 않을거라고 해도 고집을 피우더니 올해는 그 얘기가 쏙 들어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남편은 덩쿨장미를 더 사다 심을까 어쩔까 하며 고민한다. 근데 내 생각엔 좀 빈땅을 남겨둬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저기 조만큼 비어있는 데다가  뭘 심으면 좋을까 고민하는 재미가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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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4-09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단이 있군요. 멋져요. 빈땅을 남겨두시려는 님의 마음이 참 좋습니다.
어릴 적 마당에 있었던 아주 작은 화단이 생각납니다. 별 것 없어도 바라보기만
해도 소담스러워지는 꽃밭. 비어있는 땅에 뭘 심으면 좋을까, 행복한 고민에
빠지는 님을 그려봅니다.

섬사이 2007-04-09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파트 1층에 살아서 좋은 점 중에 하나예요. 아이들이 더 좋아하더라구요. 우리집 식구들은 "태평농법"(심어놓고는 별로 돌봐주지 않는 농법)의 신봉자들이긴 하지만요. ㅋㅋㅋ

치유 2007-04-09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사한 화단을 꾸며놓으시고 날마다 바라보는 눈길들의 사랑을 먹고 이쁘게 잘 클것입니다..볼때마다 너무 즐겁고 행복하시겠어요..저희는 아직 화분도 다 못채워주고 미적거리며 있네요..*^^*
수련을띄우면 너무 예쁠거에요..뽀생각도 이뻤네요..
시골에서 본 절구통같은 곳에 수련 떠있는것 보면 참 이쁘더라구요..


섬사이 2007-04-10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꽃님도 화초를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한번 구경하고 싶어요. 저희 화단은 아직 묘목 수준이라 볼품이 없어요. ^^
 

돌아가신지 어느새 6년이 흘렀네요.  4월, 할아버지가 계신 곳엔 개나리와 민들레가 곱게 웃고 있던데요.

봄햇볕을 받으며 오랜만에 찾은 할아버지 묘소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전 할아버지의 마지막 미소를 또 떠올리게 되네요. 

폐암으로 숨쉬기조차 힘드셨던 할아버지는 제가 병실을 찾았을 때 그냥 제 손을 꼭 잡고 인자한 눈빛으로 웃으셨어요. 

마치 할머니를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았죠. 

할아버지.  

제가 끓여드리는 해물매운탕을 좋아하셨죠.  제가 가면 매운탕을 끓여달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잖아요.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좀더 좋고 맛좋은 재료로 끓여드리는 거였는데 하며 후회를 했었죠.

그랬어요, 할아버지.

그 때 매운탕 재료를 사러가서 왜 우럭이나 대구같이 좀 비싼 생선을 집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요.  왜 모시조개나 대합처럼 좋은 해물을 고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했어요.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제손으로는  매운탕을 끓여 먹을 수가 없었어요.  어쩐지 할아버지께 죄송해서요.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구절판도 명절 때 만들어가도 재미가 없던걸요.  맛있구나, 고맙다 하시며 드셔주시는 할아버지가 안계시니까 만들 때도 신이 나질 않아요.  

할머닌 할아버지 얘기를 하시며 눈물짓곤 하세요.  침대에 누워 계시지만 그래도 건강하세요.  늘 기도하고 계셔서 그런가봐요.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과 똑같이 할머니는 뽀더러는 우리집안 대장이라고 하시고 지니더러는 미스 코리아라고 하세요. 누워만 계신 할머니께 저희가 힘을 드리고 와야 하는데, 오히려 저희가 할머니의 응원을 받고 온답니다.  내색은 안하시지만 할머닌 할아버지가 보고 싶으신가봐요. 

할아버지가 뽀를 귀여워하시며 보고싶어 하셨다는 얘기도 하시고, 할아버지가 젊으셨을 때 얼마나 명민하셨었는지를 자랑스럽게  얘기하시곤 해요.  

할아버지, 이상하게 들으실 수도 있지만, 지니아범과 저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본받고 싶단 얘기를 종종 나누곤 해요.  생전에도 늘 말씀이 무겁고 일이 깔끔하셨던 할아버지께 존경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말이예요.

돌아가실 날이 다가오자 할아버지는 부활절이 며칠 남았느냐고 물으시곤 병실 벽에서 달력을 떼라고 하셨죠.   그리곤 공책 하나를 달라고 하시곤 돌아가신 다음 남은 저희들이 연락해야 할 분들을 적기 시작하셨어요.  기운이 하나도 없으셔서 말씀하시기도 힘드셨는데 말이예요.  투병하시는 동안 참석하지 못했던 성당 모임의 밀린 회비까지 깨끗한 봉투에 넣어 두셨죠.   

그리고 며칠 후 문병오신 성당 교우분들이 기도를 하시는 중에 조용히 돌아가셨어요.  장례를 마치고 지니아범과 저는 우리도 그렇게 떠나고 싶다고 긴 시간을 들여 얘기를 나눴었죠. 

할아버지.  비니를 보고 계세요?  전 비니가 할아버지를 모르고 자라나는 게 내심 아쉬울 때가 있어요.  지니나 뽀가 갖고 있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비니는 함께 가질 수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용현동 집에 가면 비니는 2층을 가리키며 "하미니,하미니" 해요.  비니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 할머니 방으로 가면 비니는 할머니의 굳은 손을 잡고 악수를 하기도 하고 재롱을 부려요.  할머니는 벌써 여든 아홉이 되셨어요.  비니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지니랑 뽀가 결혼을 할 때까지 더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직접 고르셨고 이제 할아버지가 육신이 모셔진 가족묘 앞에 섰어요.  언젠간 우리 모두 그 곳에 모일 거란 생각을 하곤 해요.  아직 철없고 촐랑대는 뽀까지도 들어갈 자리가 있다며 농담처럼 웃으며 얘기하지만, 참 이상하죠?  제가 죽어 들어갈 자리 하나 있다는 게 참 편안하게 느껴지니 말이예요.  그것도 가족 모두 다 같이 한 자리에 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죽음이 덜 차갑게 느껴진답니다.

시집와서 남들은 시할아버지 시할머니까지 있는 집에서 참 힘들겠다며 절 딱하게 여기곤 했지만, 전 정말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저에겐 언제나 인자하고 따뜻한 분이세요.

부활절이예요.  제가 기억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인자한 미소처럼 따뜻한 햇살이 흐르는 부활절이었어요.  할아버지는 제가 알고 있는 할아버지 중에 정말 최고였어요.  알고 계시죠?

부디 할아버지가 하늘나라에서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언젠간 그곳에서 할아버지의 인자하고 따뜻한 웃음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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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7-04-09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실때 편안하게 가신다는것 보내는이들에게도 가시는이에게도 참 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움 가득이네요..그 마음 다 지켜 보고 계실거에요..

섬사이 2007-04-10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가끔 할아버지가 옆에서 웃으며 지켜보실 것만 같을 때가 있어요.
 
나랑 같이 놀자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5
마리 홀 에츠 지음 / 시공주니어 / 199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은 환한 노란색으로 밝게 빛나고 있는 듯 했다.  마치  한움큼의 밝고 따뜻한 봄햇살이 그대로 책 갈피마다 꽂혀 있는 것처럼. 

그 노란색에 반해서 망설이지 않고 골라 들었던 그림책이다.  해님의 미소를 받으며 작은 여자 아이 하나가 들판으로 놀러가고 있다.  친구가 없는 아이는 메뚜기며, 개구리, 거북이, 다람쥐, 어치, 토끼, 심지어 뱀에게 까지 "나하고 놀자"고 다가가지만 모두 달아나 버리고 만다.  그 서운함이란..

아이는 시무룩해져서 연못가 바위에 걸터 앉는다.  해님은 여전히 아이를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고.. 함께 놀 친구가 없어서 혼자 가만히 앉아 있는 아이 곁으로 달아났던 동물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든다. 

들판은 환한 햇살과 고요한 평화, 친밀함, 친구를 얻은 아이의 행복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림을 가득 채우고 있는 노랑은 바로 그런 아이의 세계에 대한 상징의 색이다.

절대로 깨뜨리지 않고 싶은 풍경이 있다면 바로 이런 풍경이 아닐까 싶다.  혹시라도 동물들이 다시 달아나 버리면 어쩌나 하고 읽는 사람마저 조심스러워지게 만드는 책이다.

저편 덤불 속에 사슴이 있다.  엉?  그런데 그림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철조망.. 사슴이 등장하면서 마치 그림책을 읽는 사람과 그림 사이를 갈라 놓는 듯한 철조망이 쳐지기 시작한다.

아이는 줄곧 잠자코 앉아 있고, 이젠 아무도 겁을 먹고 달아나지 않는다.  사슴은 아이에게 다가가 뺨을 핥을 정도로 친한 친구가 되고 다른 동물들도 아이 가까이로 옹기종기 모여든다. 

행복해 하는 아이와 동물들이 바로 저기 철조망 너머에 있다.  그것도 너무나 허술해보이는 철조망 너머에.

처음 이 그림책을 볼 때는 무슨 휴전선도 아니고 웬 흉물스런 철조망을 그려 넣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철조망이 갖고 있는 의미, "절대 접근 금지" 를 떠올리며 그림책 속의 철조망을 고마워한다.  그래,  아무도 방해해선 안되는 풍경이니까.  절대로 아무도 침범해선 안되는 '그들만의 공간'이니까, 저 밝고 환한 노랑의 평화와 친밀함이 세상으로부터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철조망이 아니었으면 나라도 불쑥 참견하며 끼어들고 싶었을테니까 말이다.  

이젠 그림책을 펼칠 때마다 철조망을 그려넣은 작가의 센스에 감동하곤 한다.   아이들의 세계는 그렇게 함부로 짓밟히지 않도록 보호되고 지켜져야 하는 밝고 환한 평화와 친밀의 공간이어야 함이 마땅하니까. 

그러나 저 철조망이 너무 허술해서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금방 들어가 버릴 것 같다.  그러면 저 아이와 동물들은 모두 겁을 먹고 달아나겠지. 그러니 보호의 책임과 의무는 철조망 밖에 있는 우리들에게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잘 지켜주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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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 2년 전쯤이던가?  연금술사를 읽었다.  한창 베스트셀러로 잘 팔리는 책 중에 하나였는데 딸이 친구가 읽는 걸 보고는 사읽고 싶다고 하길레 같이 읽었었다.

글쎄.. 별로 좋다는 느낌을 받진 못했다.  그 책에 쏟아진 엄청난 찬사들 때문에 내 기대치가 너무 높았졌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야기라는 포장지로 잘 싸여진 종교서적을 하나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하긴 "영적구도서"라는 별칭을 달고 다니는 책이니까 그럴수도 있으련만 기독교의 의식과 성서를 모티브로 쓰여진 책이라는 것 빼고는 그다지 "영적"인 깊이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어느 날 <순례자>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저자의 초기 작품이라고 하는데 차라리 "영적구도서"로서의 깊이는 <순례자>가 더 낫지 않나 싶다.  <연금술사>보다는 이야기라는 포장이 덜 된 느낌이 들긴 하지만 현실적인 욕구들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마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메세지가 더 크게 와닿았다.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일 때, 길에 집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목표에 도달하는 최선의 방법을 가르쳐주는 건 언제나 길이기 때문이죠. 길은 언제나 우리가 걸은 만큼 우리를 풍성하게 해줍니다"

나는 항상 목표에만 집중하느라고 내가 가는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경험이 많다.  그건 책 속의 주인공이 안내자 페트루스와 함께 하루면 충분히 넘을 피레네 산맥을 엿새나 걸려서 넘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주인공은 가고자 하는 목적지 산티아고 쪽만 생각하느라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는 생각지 못한다.  나는?  나는 목표에 너무 가치를 둔 나머지 서두르다가 길을 잘못 들거나 도중에 지쳐버린 적이 수도 없이 많다.  우리가 걸은 만큼 우리를 풍성해주는 길에 가치를 둔다면 아마도 좀 더 수월하게 목표에 이를 수 있지 않았을까.. 왜 서둘렀을까.. 왜 서두르다가  목표에 대한 열망마저 식게 만들어버렸을까.. 내가 길에 더 집중했더라면, 길의 가치를 좀 더 빨리 깨달았더라면 난 내가 길 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꼈을지도 모르는데.. 

"선한 싸움"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등장한다.  꿈을 위해 치뤄야 하는 선한 싸움,  사랑이 위선으로 오염되지 않도록 지키기 위해 벌여야 하는 선한 싸움에 대한 이야기다.  나?  나는 이미 사회의 시스템에 거의 완벽하게 길들여진 작은 톱니 바퀴다.  사실 나하나 어떻게 된다고 사회 시스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만큼 중요한 톱니바퀴도 아니다.  어쩌면, 난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굴러가기 위한 부속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시스템이 굴러가는 것을 보면서 안도감을 느끼는 걸로 만족하고 있는 별볼일 없는 나사 하나일 뿐이라는게 더 올바른 표현일 수도 있겠다.  그저 소속감 하나만으로 안도하는.. 그래, 코엘료의 말대로 난 예전에  "꿈을 죽인" 것 같다. 

싸움을 피해 도망간다는 것은 최악의 사태인 것이죠. 싸움에서 지는 것보다 더 나쁜 겁니다. 패배를 통해서는 무엇이든지 배울 게 있지만, 도망을 간다면 적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게 없으니까요.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좀더 젊었던 시절에 보장되지 않는 꿈, 불확실한 미래에 투신할 자신이 없어서 현실적이 되어야 한다는 둥의 핑계로 적당히 타협을 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패배를 통한 배움을 얻을 기회마저 잃어버린 셈이다.  그러나 크고 작게 벌여야 할 선한 싸움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늘 존재하는 것 같다.  20대의 찬란한 젊음이 꾸는 꿈을 위한 선한 싸움은 아닐지라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엔 언제나 마음 속에 희망이나 바램 따위가  바람처럼 불어오고 불어갈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희망의 지점과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지점을 잇는 길은 존재할 테니까.  "인간은 결코 꿈꾸기를 멈출 수가 없"으니까.

이 책의 주인공은 자기의 "검"을 목표로 순례의 길에 오른다.  "검"을 자기 손에 쥐어야 한다는 목표가 너무 강렬한 나머지 그 검으로 무엇을 할 지에 대해선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은채.  그런 예는 현실에서도 넘쳐난다.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최고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나 강한 탓이다.  그러나 최고가 된 다음에는?  부모라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을 최고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정작 최고의 자리에 앉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선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길을 따라 목표에 도달하고 나면 그 순간 우린 다시 또다른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 목표였던 것이 수단이 되어 다른 목표를 향하여 선한싸움을 하며 나아가야 한다.  처음 가졌던 목표가 유일한 것이며 최후의 꿈이라고 한다면 이미 그 목표는 "성취"만을 위한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코엘료의 말대로 길이 우리를 이끌어주고, 우리를 풍성하게 해준다면 끝없이 잇닿은 길이야말로 우리가 간절히 원해야 하는 바로 그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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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뽀가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한 말..

"엄마, 과학상상화를 그리라는데 뭘 그리면 좋을까?"

"음... 핵무기때문에 지구가 멸망한 거.. 아니면 무분별한 복제실험과 유전자 조작으로 기형적인 생물이 우글거리는 거... "

난 꼭 이럴 때면 삐딱선을 탄다.  과학문명의 발달이라는 게 늘 좋은 면만 있는 건 아닌데 과학상상화로 아이들에게 억지로 과학에 대한 장미빛 희망만 가지라고 강요아닌 강요를 하는 게 마땅치 않아서 내가 나서서 딴지를 걸어 보는 거다.  아들을 상대로 딴지 걸어서 뭔 소용이 있다구..

우리 아들 킥킥거리며 웃는다.

"엄마, 우리 반에서 미래의 우리학교를 그리는 게 있었거든."

"엉. 근데?"

"근데 어떤 애가 어떻게 그렸는지 알아?"

"어떻게 그렸어?"

"ㅋㅋㅋㅋ  학교가 폐교되서 학교자리에 아파트 들어선 거 그렸다~"

"?"

그 다음에 터져 나오는 웃음..

자기가 한 얘기에 엄마가 크게 웃어버리니까 우리 아들이 보태는 말,

"엄마, 근데 또 다른 애는 학교가 폐교 되서 그 폐교된 학교에서 애들이 재밌게 노는 거 그렸어."

"우하하하하":

선생님이 얼마나 황당해 하셨을까?

그런데 난 왜 이렇게 통쾌한 거야?

19세기 산업사회의 일꾼을 양성하기 위해 세워지기 시작했다는 역사도 길지 않은 이 학교라는 제도를 종종 자주 왕왕 못마땅하게 여기곤 했기 때문인가 보다.  학교라는 제도의 효율성과 필요성에 대해 의심을 품고 그 폭력성과 네모반듯한 규격성을 싫어했기 때문인가 보다.

그래도 그렇지.  어쩌구 저쩌구 궁시렁하면서도 결국엔 별 수 없이 아들 딸 다 학교보내고 살면서 초등학생 아이가 아무생각 없이 그린 무너진 학교 그림에 어찌 이리 즐거워할 수 있단 말인가. 

설거지 하면서 노래한다. 

"비겁하다~~~ 욕하지마~~~"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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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4-06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겁하다... 욕하지마... ㅎㅎ 이 노래 좋아해요^^

섬사이 2007-04-07 0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모르게 저절로 튀어나오곤 하는 노래 중에 하나예요. 적당히 절 대변해주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