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는 조용히 지나갔다.

옆지기는 일 때문에 부산에 갔다가 크리스마스 새벽에 산타처럼 조용히 들어왔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에 잠든 막내 머리맡에 선물을 놔주고, 또 이렇게 한 해가 가는구나 싶어서 뒤숭숭.

이불 속에 들어가서 <감각의 박물학>을 읽다가, 들어오는 옆지기랑 몇 마디 나누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아무래도 <감각의 박물학>을 읽는 도중에 해가 바뀔 것 같다.

이 해를 보내며, 새해를 맞으며 읽는 책이 되겠구나.

 

 

이브에 문학교실 마지막 쫑파티를 했다. 명색이 '문학교실'인데 그 이름에 걸맞는 이벤트가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우리집에 있는 책들 중에 몇 권 골라서 책나눔 이벤트를 했다. 도서관 곳곳에 쪽지를 숨겨두고 보물찾기처럼 쪽지를 찾아오면, 쪽지에 적힌 숫자에 해당하는 책을 선물로 주었는데, 역시 아이들은 책 선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게다가 시즌이 시즌인만큼 아이들은 학원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열리는 마켓데이며 파티에 참석하느라 스케줄이 바빴다.

문학교실 쫑파티 하는 날에도 영어학원에서 파티를 마치고 온 아이, 문학교실 파티 끝나면 교회 파티에 갈 아이, 이미 선물을 가방 가득 받아서 들고 온 아이.. 준비한 피자도 과자도 음료도 과일도.. 시큰둥.. 아이들은 이제 파티도 시시하다.

얘들은 무슨 재미로 사나.... 싶었는데, 그래도 종알종알 이야기를 하고, 가위바위보 몇 번에 즐거워하고, 실뜨기 대결을 벌이며 으쓱해 하고, 찾아온 보물쪽지 모아서 번갈아 다시 숨겨놓고 찾는 놀이를 하며 진지하게 집중했다.(나눠줄 보물도 다 떨어졌는데!!)

문학교실 과정을 다 끝내고 나면 속이 시원하고 개운할 것 같았는데, 막상 끝내고 돌아오는 길은 그리 신 나지 않았다. 나름 신경쓰고 준비한 파티가 재미있지 않아서 속상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파티가 끝나고 나서 아이들과 마무리 인사를 제대로 나누지 못한 게 아쉬웠던 것 같기도 하다.  

 

책을 많이 갖고 있는 알라딘 서재의 장서가 분들에 비하면 우리집에는 책이 많다고 볼 수는 없는데, 그런데도, 요즘 집에 있는 책들이 마음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책 사들이기에 여념이 없던 시기가 있었고, 그러다가 책에 대한 욕심을 덜어내야 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도서관을 이용했다. 요즘은 장바구니에 욕심나는 책들을 잔뜩 담아놓고서 마지막 순간 '주문하기'를 클릭하기 전 잠시 멈춤, 결국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아둔 채 결제를 며칠 미루게 된다. 그렇게 며칠 미루다가 결국 주문하는 책도 있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보관함으로 옮겨지거나, 도서관에서 빌려 읽게 되거나, 삭제를 당하기도 한다. 덕분에 책이 더 늘어나지는 않았지만, 가끔 집에 있는 책들을 가만히 둘러보고 있노라면... 뭐랄까.. 좀 부끄럽다. 욕심에 사두고는  읽지 않은 책들이 태반인데, 그 태반의 책들이, 읽고 싶은 욕심에 산 책들이 분명한데도 더이상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이 책을 왜 샀지?'하는 의구심이 솟아나는 책들도 여러 권 된다. 새해에는 책장을 정리해서 작고 간소하고 소박하고 단출한 서가를 만들어 보려고 한다. 책을 소비하고 소유하는 나의 태도가 변한 것과 맞물려 내가 책을 왜 읽는지에 대한 의문도 마음 한 켠에 자리잡게 되었다. '왜' 읽는지에 대한 의문은 앞으로 책을 어떻게 읽을 건지에 대한 고민도 불러왔다.

 

얼마 전에 도서관에 갔을 때, 한 손에 분홍색 텀블러를 들고 서가의 책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은발의 할머니를 보았다. 서가 옆 책상에는 짙은 갈색 목도리를 두르고 회색 헌팅캡을 쓰신 은발의 할아버지가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도서관 문을 연지 얼마 안된 이른 시간이었다. 아마도 노부부는 아침을 먹고 서둘러 설거지를 끝내고 나서 함께 집을 나섰겠지, 오늘은 날씨가 추우니 감기 걸리지 않게 잊지말고 목도리 둘러요, 준비하는데 뭐 그렇게 오래 걸려, 퉁명스럽게 한 마디씩 주고 받았을지도 모르지, 도서관까지 오면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하게 걸어왔는지도. 그래도 그 노부부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우리 부부로 말하자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도 함께 도서관에 갈 일은 없을 게 뻔하다. 옆지기는 책보다는 TV를 좋아하고,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보다 집에서 읽는 걸 더 좋아하니까. 그래도 도서관에서 본 노부부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책을 평생의 친구로 삼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책을 읽는 모습이 흔하게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그렇게 늙어갔으면 좋겠고.

 

예전에는 책을 읽는 목적이 여러 가지였다면, 이제 여러 목적들을 털어내 버리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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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12-28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만한 이벤트나 파티에 의도한만큼 호응을 보여주지 않은 것이 서운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워낙 깜짝 놀랄만한 사건 사고들이 거의 매일 뉴스를 터뜨리는 세상에 살다보니 우리 모두 그렇게 무감각해져가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파티를 준비하는 사람의 마음은 아름답고 따뜻하지 않을까요? ^^
마지막줄에 여러 목적들을 털어내련다는 말씀에 공감해요. 목적과 명분, 의의를 채워넣기 보다 그저 툴툴 털어내고 초심만 남겨두는...

섬사이 2014-12-28 00:23   좋아요 0 | URL
제가 책읽기에 대해 가진 첫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어릴 때 책에 대해 막연한 동경 같은 걸 갖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알라딘 서재를 시작하면서는 한때 지나치게 의욕에 불탔던 적도 있고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초심이랄 것도 없어요.
책과 내가 서로 친구가 된다면, 부담스러운 친구는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

세실 2014-12-26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퇴직하고 나면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근처 도서관에 가서 책 읽으려고요^^ 신랑은? 아마 심심해서 따라가지 않을까요?
책 욕심 버렸고, 정가제 되고 나서는 1회 구입에 그쳤습니다.
아이들과 집에 있는 책 한 리어카 버리고 나니 개운해요. 더 버리려고 합니다. 중고책으로 파는건 엄청 번거롭더라구요^^
우리 새해엔 더 가뿐하게 살아요^^

섬사이 2014-12-28 00:23   좋아요 0 | URL
네, 새해에는 가뿐하게요.
몸무게도 가뿐해지면 좋겠어요. ^^

순오기 2014-12-26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쏟아 무언가 열중하는 건 다 아름답다 생각해요.^^
그리고 마음을 비우고 사는 일이 가장 어렵다는 걸 알아가는 중이고요. 노년을 아름답게 보내는 것도 어려운 과제 같고...

섬사이 2014-12-28 00:29   좋아요 0 | URL
마음을 쏟아 무언가에 열중하다 보면, 그 `무언가`를 뺀 나머지 것들에 무심해진다는 게 저의 문제예요.
그래서 결국 일상이 흐트러지기 시작하고, 그러다보면 그 흐트러진 일상에 짜증이 나고.. ㅠㅠ
하는 일이 많지는 않지만, 결국 삶을 간소화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 마음을 비우는 것도 조금 쉬워지지 않을까요...?
노년은.. 어렵고도 두렵고도 신비로운 과제예요.

무스탕 2014-12-27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대로 읽어야지, 읽고싶어! 그래서 사들인 책인데 읽어주지 않고 책장에 모셔 놓기만 하니 그 애들이 저를 맨날 노려보는것아 부담이기도 하고 내가 저걸 장식용으로 산건가 싶어 이젠 정말 책 구입을 신중히 하려고요.
새해에도 우리 인연 많이 쌓아요~ ^^

섬사이 2014-12-28 00:42   좋아요 0 | URL
저도 꽂혀있는 책들을 보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저 책들을 살 돈으로 좀 더 가치있는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지적 허영심을 채우려고 책을 사들였던 건 아닐까.. 그런 자괴감이 들어 한숨이 나올 때가 있어요.
내게 의미있고 소중한 책들로만 채워진 책장 하나면 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성이 지성이랑, 크리스마스는 즐겁게 보내셨나요?
새해에는 좀 더 자주 뵐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라로 2014-12-28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위안을 받습니다. ㅎㅎ 저희는 이번에 미국으로 이사하면서 책을 많이 버릴 수밖에 없어서 마음 아픈 경험을 했지요. 그래서 그런가 책에 대한 욕심이 예전 같진 않네요~~~그런데 책뿐 어니라 다른 욕심도 예전같지 않은 것 보면 많이 늙었구나 싶어요. 멋진 노부부처럼 노후를 편안하게 보내고 싶다정도의 꿈은 아직 가지고 있지만요~~~^^;;;

섬사이 2014-12-29 20:43   좋아요 0 | URL
ㅎㅎ 맞아요. 이젠 남편이 ˝뭐 먹고 싶은 거 없어?˝라고 물어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요.
특별히 먹고 싶은 건 없는데, 옆에 먹을 게 있으면 계속 먹어요.
그래서 먹고 싶은 건 없어도 살은 꾸준히 찌죠. ㅠ,ㅠ
멋진 할머니가 되는 거, 저의 노년에 대한 로망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