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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쓰고 싶은 날 - 2015 오픈키드 좋은그림책 목록 추천도서, 유치원총연합회 선정도서, 학교 도서관 저널 추천 ㅣ 바람그림책 1
타쿠시 니시카타 글.그림, 김소연 옮김 / 천개의바람 / 2011년 4월
평점 :
먼저 일곱 살 딸의 일기를 공개한다. 맞춤법도 틀리고 띄어쓰기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딸 아이의 일기를 공개하자니 딸에게 좀 미안하지만 이 책을 아이와 읽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딸아이의 일기에 있으니까 전후사정을 이야기하면 딸아이도 이해해주겠지 하는 대책없는 낙관론을 줏대있게 밀고나가기로 했다.
2011년 4월 26일 화요일
제목 생활
아침에일어나서세수을하고밥을먹고이을닦고옷을입고머리을빗고가방을매고비옷을입고신발신고버스가서면타고유치원에와서비옷을벗고반에들어와서컵을꺼내고수저을꺼내고계획하고손씻고논다간식먹고책을본다이야기나누기하고점심을먹고논다간다엄마랑같이논다
누가 쓰라고 시키지도 않았건만 선물로 받았을 게 분명한, 디즈니 공주들이 총출동한 요란스런 표지의 그림일기장을 어딘가에서 찾아 꺼내와서는 방바닥에 절하듯 엎드려 연필로 꼭꼭 눌러쓴 일기다. (그런데 '일기'라는 글쓰기 형식은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다 쓰고서는 가져와 나에게 자랑스럽게 내밀었는데, 깍두기 공책 칸칸마다 나름 정성을 기울여 쓴듯한 글씨들과 또 어쨌든 시키지도 않은 일기를 쓴다고 꽤 긴 글을 쓴 그 노력에 감동했다. 하지만 솔직히 일기의 내용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내용은 물론이고 무참하게 무시당한 맞춤법과 띄어쓰기에도 차마 지적질을 하고 싶진 않았다. '아이가 쓴 글에 지적질하지 않는다'는 첫아이 때부터 지켜온 나름의 신조다. 그냥 "와~~ 우리 딸이 이제 일기도 쓰네~ 이만큼 글씨를 쓰려면 힘들었을 텐데.."라고 한 마디 했을 뿐.
그러나 며칠 후 소풍을 다녀온 딸아이가 일기를 쓰겠다고 했을 때 나는 "이번에는 소풍간 이야기를 쓰면 좋겠다."라고 한 마디 하고 말았다. 소풍간 날의 일기다.
2011년 4월 29일 금요일
제목 소풍가는 날
오늘은초록향기마을가다토끼도보고사슴도보고딸기도따다피아노집도있었다또빈일하우수가더워다
처음 일기보다 글이 무척 짧아졌고, 나열식 문장은 변함이 없고, '비닐하우스'를 '빈일하우수'라고 쓰는 등 맞춤법과 띄어쓰기에서도 개선의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지만 일곱 살 아이가 놀자고 하는 일에 죽자고 덤비는 꼴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어미된 도리로써 적어도 일기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고 싶은 욕구도 무시할 수 없는 터. 그러다가 마침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생쥐 별이와 참새 달이가 또박이 삼촌과 함께 '나들이 일기책'을 만드는 과정의 이야기를 담았다. 자연사 박물관에 다녀온 별이와 달이가 박물관 마당에서 주운 나뭇잎, 기념스탬프, 입장권 등을 붙이고 그림을 그려서 나들이 일기를 완성한다. 하지만 '나들이 일기책'을 쓰기 위해 꼭 특별한 장소로의 나들이가 필요한 건 아니라는 것도 언급해준다. 바람에 춤추고 있는 빨래, 고양이의 하품, 하늘에 하얀 빗금을 그리며 날아가는 비행기, 떨어진 새의 깃털 하나, 재미있게 생긴 벽.... 이런 사소한 풍경들을 그림으로 담아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중간 '우리 함께 나들이 일기책을 만들어 보자.',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줄게.', '그림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 줄게.' 같은 Tip들이 있어서 아이들이 나들이 일기책에 쉽게 접근해볼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어서 유용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나들이 일기책'을 쓰고 만드는 방법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점을 발견했고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건 또박이 삼촌이 아이들에게 해주는 말 속에 있다.
또박이 삼촌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해준다.
"잘 만들지 못해도 괜찮아. 나만의 나들이 일기책이니까 마음껏 해보는 거야."
"쓰고 싶을 때 쓰면 돼.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까 재미있는 거야."
내가 딸아이에게 해줘야 할 말들이 책 안에 모두 담겨 있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맨 마지막 장에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언제든 나들이 일기책을 펼치면 그 때의 나를 만날 수 있답니다.'라는 멋진 멘트를 날려주다니. 딸아이의 일기를 보고 지적질 하지 않은 나 자신을 쓰다듬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별이와 달이가 삼촌에게 한 수 배운 실력을 발휘한 첫 나들이 일기는 우리 딸의 일기만큼이나 미숙한 면모를 보여주지만, 그게 또 이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 용기를 주지 않을까. 또박이 삼촌이 만든 것처럼 완벽한 예만을 보여준다면 그 앞에서 아이들은 감히 나들이 일기책을 만들어볼 엄두를 내지 못할 테니, 미숙한 별이와 달이의 나들이 일기책 또한 아이들에 대한 배려인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자기도 나들이 일기책을 만들어 보겠다고 나선다. 욕심에 제대로 나들이를 해서 만들고 싶단다. 얼마 전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열리고 있는 '해치야 놀자'를 어린이집에서 다녀왔는데, 이번 주 토요일에 엄마아빠랑 다시 한 번 더 가보고 싶다며 벼르고 있다. 아무튼 우리 딸의 일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려준 책이자 쓰고자 하는 동기부여를 확실하게 해 준 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