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장을 보고 버스를 탔다. 대형마트는 늘 사람으로 넘쳐나고, 그래서 늘 버스정류장도 복잡하다. 내가 타는 마을버스는 대형마트로 들어서는 길에서 오고가는 버스노선이 겹친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큰길에서 좀 들어간 곳에 대형마트가 있는데 대형마트 가는 손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서로 반대방향으로 가는 같은 번호의 버스가 다 들렀다가 가려다보니, 대형마트로 들어서는 도로에서는 다른 방향의 같은 번호 버스가 서야 하는 정류장이 똑같아 지는 것이다.  그래서 버스를 타기 전에 어느 방향으로 가는 버스인지 잘 확인하고 타지 않으면 버스가 반대방향으로 달려가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오늘도 버스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우르르르 몰려들었다. 앞문으로도 타고 뒷문으로도 탄다. 타야할 사람이 너무 많다보니 버스기사들도 마트 앞 정류장에서만큼은 뒷문으로 타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버스가 유턴을 해서 다시 큰길로 빠져나가는 도로 중간에서 어떤 아줌마 같은 할머니, 또는 할머니가 되려는 아줌마(?) - 편의상 젊은 할머니라고 부르자 - 로 보이는 분이 버스를 세웠다. 거긴 버스정류장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버스기사가 앞문을 열자 막 소리를 지르신다.  

"왜 버스정류장에서 사람도 안태우고 그냥 가!"
버스기사가 타서 말씀하시라고 하면서 일단 올라타기를 독촉하니까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진 젊은 할머니께서 올라타신다. 그러고는 막 소리를 지르시는 거다.  
"버스가 정류장에서 사람을 태우고 가야지! 사람도 안태우고 그냥 내빼면 어떡해!"
그러니까 버스기사가
"어디 계셨는데요? 정류장마다 다 섰는데, 어디서 제가 안 태워요?"
"내가 저-기서 계속 기다렸는데, 사람도 안태우고 앞에 차 앞질러서 그냥 갔잖어!"  

아마 젊은 할머니는  내가 탄 정류장 바로 전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셨던 것 같았다. 그 정류장은 버스 방향에 따라 한 3미터 간격을 두고 두 개의 정류장이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헷갈려 하는 정류장이다. 그러니까 이 젊은 할머니께서는 아래쪽 정류장에서 기다려야 했는데, 잘못해서 3미터 위쪽에 있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서는 정류장에서 서서 기다리고 계셨던 거다. 당연히 버스기사는 앞쪽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사람들만 태운 거고.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중에 몇 분이
"저 그 정류장에서 탔어요. 이 버스 거기서 섰었는데.."하고 기사를 변호했지만 아주 작은 목소리라서 그 젊은 할머니에게는 잘 들리지 않았을 것 같았다.
할머니가 노여움을 잔뜩 안고 버스 뒷편으로 갔는데, 버스기사가 그 할머니에게 큰 소리로 얘기했다.  

"거기는요, 정류장이 두 개예요. 이쪽 방향 버스를 타시려면 아래쪽 정류장에서 기다리셔야 하는데, 할머니가 잘못하시고는 저한테 화를 내시면 어떡해요. 다음엔 정류장 확인하시고 기다리세요. 아셨어요?" 
할머니가 무안하셨는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다른 사람들이
"그래, 그 정류장이 많이 헷갈려. 왜 그렇게 해놨는지 몰라."하면서 수근댔다.  
할머니가 아무 대답도 없자 버스기사가 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대답하세요!" 

난 그 때 좀 조마조마했다. 버스기사의 말투는 따지는 듯한 말투가 아니라 공손하지만 당당한, 그런 말투였다. 난 그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무척 노여워하고 계셨고, 그래서 버스기사의 "대답하세요!"라는 재촉에 "젊은 사람 운운, 버릇없이 운운.. " 뭐 그럴까봐, 그래서 싸움이 될까봐 두근두근했다. 버스 안엔 정말 바늘 끝같은 긴장이 감돌았다.  

"알았어!" 아직 노여움이 가시지 않은 퉁명스러운 할머니의 대답. 일단 할머니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신 셈이었다. 그런 할머니를 향해 버스기사가 마무리짓는 결정적 멘트를 날렸다.  
"왜 운전하는 사람 스트레스 받게 그러세요. 미안하다는 말씀도 안하시고.." 

와, 저 버스기사 대단하다고 감탄했다. 내가 지금 저 버스기사였다면 할머니를 따라 나도 화를 냈을 것이고, 할머니가 심술궂은 목소리로 "알았어!"하신 걸로 나도 감정이 풀어지지 않았지만 그냥 덮어버렸을 것 같았다. 그리고는 하루종일 내내 짜증을 내며 구시렁댔을 것 같았다. 그런데 버스기사는 은근슬쩍 할머니의 사과를 요구한 것이다.  내 뒤에 앉아계시던 할머니가
"그러게.. 운전하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데 그러면 안되지.."하고 버스 기사 편을 들었다.  

젊은 할머니가 버스기사 곁으로 가더니 "알았어!"했을 때의 심술궂음, 노여움, 퉁명스러움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목소리로
"거기 버스 정류장이 어떻게 돼있다구?" 하고 물으셨다.
"거기는요, 버스정류장이 두 개라구요. 청계천 방향으로 가는 버스는 위쪽 정류장에서 타셔야 하구요, 이쪽 방향 버스는 아래쪽에서 타셔야 해요."
버스기사가 자분자분 다시 설명을 해드렸다. 버스기사도 원망같은 게 전혀 없는 말투다.
"그래.. 내가 잘 몰랐어. 미안하네.." 

와~~ 할머니가 버스기사에게 사과를 하셨다. 버스기사는 할머니에게 사과를 받았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이런 싸움이 벌어지면 같이 타고 가는 사람들이 모두 피곤해진다. 그런데 난 오늘 버스기사와 할머니의 이 갈등과 해소과정이 기승전결이 잘 짜여진 완벽한 드라마처럼 여겨졌다. 너무 멋졌다. 버스기사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공손하면서 당당하게 자기 말을 다 전달하는 것도 대단했고, 젊은 사람에게 다가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그 어르신도 멋있었다.  (게다가 버스기사는 젊은 할머니와 입씨름을 하는 동안에도 버스에 타는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했다!!!) 

난 살짝 버스기사의 얼굴을 보았다. 나이는 30대 초반? 까무잡잡한 피부에 약간 마른 듯하지만 단단한 몸집이다. 앉아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키도 작아보이지 않는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눈빛을 보지 못한 게 좀 아쉽다. 다음에 버스를 탔을 때 이 버스기사가 운전석에 앉아 있으면 꼭 웃으며 인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난 착한 사람이 좋다. 그리고 착하면서 당당한 사람들은 더 좋다. 
사람들이 다투는 건 싫지만 기승전결이 있고 해피엔딩으로 깔끔하게 끝나는 싸움이라면 그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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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13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기사처럼 성정을 가질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단 발끈하고 속으로 움츠리고 두고두고 게워내고,
할 수 있는 지저분한 일은 다 하니까요. 참..... 멋지네요.
기사나 할머니나 이렇게 전달해주시는 섬사이님 두요.

평생, 이 성질머리 고쳐지지 않을까봐 요즘은 걱정스럽답니다, 전.

섬사이 2011-04-13 21:10   좋아요 0 | URL
그 버스기사는 젊은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경지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어요. 화가 나고 짜증나는 일이 생길 때마다 그 버스기사 생각이 날 것 같아요.
저도 바람직하지 못한 성질이라서.. ^^;;

희망으로 2011-04-1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들면 저절로 아량이란게 생기는 줄 알았는데 제 경우를 보면 고집과 아집이 더 단단해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나이드신 분들이 사과하는 경우가 드문게 아닌가 해요. 정말 할머니도 멋지고 기사님도 멋지십니다. 싸우는 일이 많아지길 바라는 것은 그렇지만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이 바람직하게 이뤄지는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건....괜찮은거죠^^

섬사이 2011-04-13 21:16   좋아요 0 | URL
나이 많은 사람이 자기 보다 어린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불필요한 기싸움을 벌이는 경우가 더 많죠.
필요하다면 싸워야겠지만 싸움 뒤에 화해가 온다면 더 좋겠지요.

순오기 2011-04-14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기 드문 풍경이네요~~ ^^
그 버스기사님 아니어도 같이 인사하면 좋아요~~~~헤헤!^^

섬사이 2011-04-14 10:38   좋아요 0 | URL
인사를 하더라도 버스기사님 얼굴도 안보고 카드 찍으면서 대~충 했거든요.
이제 버스기사님 얼굴을 확인하고, 인사하게 됐어요.
거기다 살짝 웃어줄 거예요. ^^

무스탕 2011-04-14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달에 영화보러 가려고 제가 탔던 버스기사 아저씨랑은 참 비교되네요.
울동네 아저씨는 목적지에 가는 내내 옆차선, 반대차선, 하여간 주변에 지나가는 버스의 기사 아저씨들을 모두 참견하고 심지어는 이어폰을 사용했지만 핸드폰 통화까지 하고 아주 번잡스러워서 불안했는데 말이에요. (글쎄, 이 아저씨가 운전하는 버스를 극장에 갈때 집에 올때 모두 탔다는거 아닙니까?!)
당당하게 사과를 요구하는 젊은이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어른이나 모두 멋지네요!

섬사이 2011-04-14 10:43   좋아요 0 | URL
그런 버스기사를 만나면('님'자가 저절로 탈락하네요!) 정말 불안해요.
제가 만난 그 버스기사님은 '전문가'다웠어요.
화난 승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무조건 참거나 양보하거나 눈감아주는 게 '착함'이 아니라는 걸 느꼈어요. 그건 잘못하면 '위선'이나 '비겁'에 더 가까워지게 되니까요. 기꺼이 다가가 미안하다고 하신 어르신의 용기도 감동이었구요.

Mephistopheles 2011-04-14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마주치는 노인네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 할머니시군요. 젊은 사람에게 사과를 하는 할머니 역시 멋지십니다..^^

섬사이 2011-04-15 13:38   좋아요 0 | URL
지하철에서 몇 번 사건이 있었죠? 그 때마다 잘 늙어야지, 생각했어요.
잘못했다면 상대가 나보다 젊건 어리건 사과할 줄 아는 것,
그것도 잘 늙는 비법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반갑습니다. 메피님.^^

Arch 2011-04-15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한편의 드라마 같아요.

섬사이 2011-04-15 13:40   좋아요 0 | URL
버스에서 내리면서 무척 기분이 좋았어요.
그러고보니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는 드라마같은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것 같아요. 때론 좀 추잡스러운 경우도 있지만, 사람의 면면들을 다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영화제작에 손대야 하나....^^;;)
반가워요, 아치님.

감은빛 2011-04-15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한 기사님이시네요. 잘못을 인정하신 할머니도 대단하구요.
저도 잘못된 상황을 못 참는 성격인데,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다보면 결국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몇번 그러고나면 또 비슷한 상황이 생겨도,
그냥 귀찮아서 참아버리고 말지 하고나서(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나중에 속으로 혼자 속상해하게 되더라구요.

저 기사님의 현명한 태도가 참 부럽네요!

섬사이 2011-04-18 13:14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거든요. 겉으론 참고 넘어가는 것 같지만 속은 하루종일 부글부글하죠. 버스기사님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현명하게 자기전달을 잘 한 것 같아요. 또 버스기사님이 그렇게 했다고 해도 할머니가 고깝게 여겨 더 화를 냈다면 일은 또 안좋게 흘러갔을 텐데, 할머니도 자기 잘못을 빨리 인정하시더라구요. 두 분 다 정말 멋졌어요. 싸움구경하고 이렇게 산뜻하기는 정말 흔치 않을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