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 50분.  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보충수업 때문에 학교 가는 큰딸을 위해 콩나물국을 끓이고, 우엉을 조리고, 느타리 버섯을 볶고, 시금치를 무치고, 쌈다시마를 불렸다.  방학인데도 보충수업 받으랴, 숙제하랴, 공부하랴 피곤한지 입병이 났다고 해서 부드러운 흰 쌀밥을 지었다.  어제 밤에 입병이 난 자리에 꿀을 발라줬더니 따갑고 쓰리다며 눈물이 글썽해 있었는데 좀 나아졌는지.  

딸아이가 먹고난 아침 식탁을 치우다가 주방 창문을 보니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또 눈이야?  어제 지리산 근처로 출장을 간 남편이 걱정된다.  체인까지 다 챙겨가긴 했지만 아무래도 조심스럽고 위험할 텐데. 우산을 꺼내주면서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서 다니라고 잔소리까지 챙겨 큰딸을 보내고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창 밖으로 눈 내리는 걸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좀 심난하다.  

어떤 학자들은 미니 빙하기가 온 거라고 주장한다던데, 그렇다면 저 눈은 그냥 눈이 아니라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겠구나.  지난 번 한파가 몰아쳤을 때는 이 집에 이사오고 처음으로 세탁기가 얼었다.  뜨거운 물로 세탁기를 녹이면서 지켜보고 서있는 아들에게 "명보야, 엄마는 빙하기 오면 못 살 것 같어.."했던 게 생각났다.  그런데 지금 내리고 있는 눈을 보고 있자니, '못 살긴 뭘 못 살어. 자업자득인데 눈이 오든 한파가 몰아치든 빙하기가 다시 오든 군소리 말고 벌 받으며 살아야지!'하는 자괴감 같은 것도 느껴진다.  

동네 슈퍼나 큰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참치캔이 쌓여있는 걸 보면 정육코너에 놓인 고기들을 보는 것보다 끔찍하단 생각이 더 많이 든다.  그렇다고 채식주의자도 아닌 내가 참치캔들에 대해선 왜 유난히 으스스 몸서리가 나는 건지 생각해봤는데, 아마도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쳐다니던 참치들을 잡아 분해한 다음 조그만 통조림 속에 담아 가두어 그냥 '상품'이 되게 만들었다는 것 때문인 듯하다.  드넓은 자유의 공간 바다와 답답한 상품 유통의 고리에 묶인 조그만 통조림이 너무 극명하게 대비되어 내 머리 속에 박힌 걸까.  

오늘 내리고 있는 저 눈이, 지난 번에 쌓인 눈이 채 녹기도 전에 그 위를 덮고 있는 저 눈이, 참치캔들 만큼이나 으스스하다.  mbc '아마존의 눈물'을 보다 알게 된 조에족의 모닌과 와후에게 우리의 문명이 너무 번성해서 미안하다,고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겠지.  

오늘도 경비아저씨들이 눈 치우시느라 힘들겠구나. 거드는 사람들이 많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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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0-01-15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소설같은 글들이에요 그냥 일상인데 참 재미나게 쓰시네요.
엄마의 정이 느껴져요

섬사이 2010-01-18 16:23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어주시니 고마워요. ^^

무스탕 2010-01-15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학인데도 그렇게 일찍 학교엘 가는군요.. 암만봐도 정말 가여운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에요ㅠ.ㅠ
참치캔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오늘 이후로 참치캔을 보면 다른 생각이 날것 같아요.
가끔 캔이 펄떡거리는 환영이 보일지도 모르겠구요. ㅎㅎ

섬사이 2010-01-18 16:24   좋아요 0 | URL
고등학생은 방학도 방학이 아니더라구요. -.-;;

다락방 2010-01-16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찍 출근하는 저 때문에 언제나 저보다 먼저 일어나서 아침 밥상을 준비하시는 엄마가 생각나버리는 글이에요. 전 이렇게 나이 들었는데도 여전히 엄마랑 같이 살고 여전히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네요. 빙하기나 참치보다 5시50분에 일어난 섬사이님과 입병이 나버린 따님이 더 애틋해요.

섬사이 2010-01-18 16:25   좋아요 0 | URL
엄마가 차려주는 밥, 너무 그리워요. 예전엔 왜 그 밥이 그렇게 좋은 밥이라는 걸 몰랐을까요. 많이 많이 먹어두세요, 다락방님. ^^

꿈꾸는섬 2010-01-17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 일찍 반찬을 몇가지씩~~~너무 부지런하세요.
참치캔에 대한 이야기, 공감되요. 전 참치캔은 안 사게 되더라구요.

섬사이 2010-01-18 16:26   좋아요 0 | URL
부지런한 게 아니라.. 반찬이 마땅치가 않아서 손을 댄다는 것이 그만,, 왜 그럴 때 있잖아요. '해볼까?'하고 손댔는데 연쇄반응이 일어나서 일들을 연이어 하게 되는.. 그런 날이었을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