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클로드 모네전에 엉엉 울어대는 비니를 챙겨 급하게 나가느라 디카고 뭐고 아무것도 챙겨가질 못했다.  덕분에 사진 한 장 없는 페이퍼를 올리게 되고 말았다.

옆지기는 시종일관 "난 모네 별로야."란다.  옆지긴 모네보다 마네를 더 좋아한다.  특히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을 좋아한다.  옆지기는 파리에 가면 그 <피리부는 소년>을 보려고 오르세에 일부러 들르곤 할 정도다. 

모네의 그림은 예뻤다.  그 예쁨이 옆지기 마음에 들지 않으리라. 사람들이 자기 집 벽에 걸어두고 싶어할만한 장식적 요소를 갖춘 그림이라는 게, 삶의 무거움과 현실의 가혹함이 들어 있지 않은 가볍고 밝은 그림이라는 게 옆지기의 마음을 꼬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모네 그림 속의 분홍빛이 덧발라진 저 몽글몽글한 구름들이 사람들 마음 안으로 "WONDERFUL LIFE"에 대한 환상으로 변하여 날아들어온들 누가 감히 거부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보다 환상을 사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닐까. 뭐, 그렇다고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해도 된다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환상으로부터 힘겨운 삶에 대한 위로를 얻고자 하는 걸 잘못이라고도 할 수 없는 거 아니냐구...

"치, 근데 생각해 봐. 튜브식 물감이 발명되어서 칙칙하고 어두운 작업실에서 뛰쳐나와 그림을 그릴 때의 기분.. 내가 모네라고 해도 저렇게 그림을 그리고 싶었을 거야.  빛의 찬란함을 그리고 싶지, 누가 실내와 똑같은 칙칙하고 어두운 색을 쓰고 싶겠어?"  - 나의 반격 

"그래도 별로야." -옆지기의 고집

"광학의 발달도 인상파 그림에 영향을 미쳤다는데.. 사진을 하는 사람이 인상파 모네랑 좀 친하게 지내지 그래.  어차피 광학으로 함께 엮인 사인데 사이좋게 지내봐." -나의 회유

"그림에 고민이 없어 보이잖아, 고민이.." - 옆지기의 저항

"고민 없는 작품이 어디 있겠수." - 나의 일반론

"있어.." - 옆지기의 체험론

마지막 그 말 "있어..", 그 말 한 마디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맞어, 있어.. 속으로 그렇게 되뇌이면서.  옆지기의 그 말 한 마디엔 그 사람의 지난 실망과 아픔이 다 들어 있다는 걸 알기에 뒷말을 더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옆지기의 말대로 모네의 그림은 예쁘고 고왔다.  그래서 대중의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옆지기처럼 모네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옆지기의 생각, 다른 이들의 의견 다 걷어 치우고 이제 내 얘기를 해봐야겠다.

옆지기의 투덜거림에도 불구하고 난 전시장을 두 바퀴 돌았다.  만약 옆지기가 없었다면 난 몇 바퀴 더 돌았을 것이다.  모네의 그림을 되풀이해서 보고 싶었던 건, 예쁨이나 고움 때문이 아니라 다채로움 때문이었다.  인상파 화가의 전시를 보러 갔으니 빛의 다채로움을 느끼는 거야 당연한 것이겠지만, 책이나 도록같은 인쇄물에서 보던 모네의 그림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하늘빛의 향연에는 정말 황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옆지기는 그 색도 맘에 안들겠지만.)

모네더러 "빛의 화가"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모네더러 "물의 화가"라고 하는 말에는 약간의 이의가 생겼다.  나더러 모네를 정의하라고 한다면 난 모네를 "하늘의 화가"라고 부르고 싶다.  "수련과 물"의 화가 모네의 전시에서 나는 "하늘"의 빛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다. 

앞으로 하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렇게 이야기해도 좋으리라.

"오늘 아침은 <포르비예의 세느강> 하늘이 펼쳐져 있군요."




"어제 저녁엔 1907년에 그린 마르모땅 미술관의 <수련> 노을이 드리워져 무척 아름다웠어요."


"오늘은 너무 우울해요. <푸르빌의 바다풍경>하늘이 보고 싶네요."




"저는 <돛단배-저녁의 효과> 하늘 아래서 당신과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어요."
(이미지가 없음.-_-;;)

하늘빛에 얼마나 매료되었던지, 난 수련 그림들도 모두 하늘 그림으로만 보였다. 수련이 피어있는 연못에 비친 하늘을 그린 그림으로.  내 말이 사실이기도 하다. (죽어라고 우겨본다)  모네가 그린 수련 연못은 하늘빛을 반사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수련연못의 빛깔은 노을 빛이기도 하고 짙푸른 가을 하늘 빛이기도 하고 좀 뿌연 흐린 하늘빛이 되기도 하니까. 

관람을 마치고 판매하고 있는 도록을 펼쳐본다.  3만원이나 하지만 마음에만 들면 옆지기에게 하나 사달라고 떼를 쓰려고 했다.  그런데 도록 속의 그림에선 하늘빛이 죽어있다.  1층 아트샵에 가서 모네에 대한 다른 책들을 펼쳐보았는데 그것도 또한 하늘빛은 죽어있다.  아쉽다. 너무 아쉽다.  인쇄술이 겨우 이 정도밖에 안되다니.  하긴 훨씬 더 섬세하고 생생한 인쇄를 한다면 대신 책값이 확 뛰어버려서 주머니 속의 빈곤 때문에 책 구입을 포기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겠지만.

결국 난 "모네 그림은 별로야"라고 중얼거리는 옆지기에게 한 마디 한다.

"7월 어느 사람 없는 평일에 나 혼자 또 와서 실컷 봐야지."
"그렇게 좋았어?"

옆지기에게 차마 어떻게 말하랴.  당신보다 모네의 하늘이 내 마음을 더 잘 어루만져주더라고.
모네의 하늘이 당신의 눈빛보다 나를 더 황홀하게 하더라고.
모네의 하늘을 보면 지니가 즐겨듣던 "LIFE IS SO COOL"이라는 팝송을 흥얼거리고 싶어진다고.

클로드 모네 전이 끝나고 나면 고흐전이 열린다.  거기다 덕수궁 미술관에서는 "렘브란트와 바로크 거장들 展"이 내일부터 9월 30일까지 열린다. (2,000원 할인티켓이 있다.)  예술의 전당에서 하고 있는 "오르세 미술관展"은 티켓이 있는데도 아직 가보질 못하고 있다. 지니의 기말고사가 끝난 다음에 갈까 생각 중이다.

아, 지니는 모네가 생각보다 별로였단다. (지 아빠랑 똑같다. 근데 지니는 모네의 그림이 너무 평범해서 별로란다). 모네의 그림에서 분홍과 보라 계열의 색이 가장 잘 느껴졌단다.  1층에서는 우리나라 작가들의 판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지니는 그 판화전이 더 마음에 든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엄마, 나는 아무래도 현대 미술 쪽이 더 맞는 것 같아. 더 개성있고 특이하고 작가의 생각과 느낌이 더 잘 드러나는 것 같아서 더 좋아." 그런다.
"그럼 넌 '렘브란트와 바로크 거장들 展'은 가지 마라. 나만 갔다 올게."했더니만
"안돼~~ 나, 그거 꼭 봐야 해."

혹시라도 이 다음에 도쿄에 갈 기회가 생기거들랑 도쿄궁 미술관에 꼭 가보라고, 거기가 현대미술 쪽으로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미술관이라더라~고 말해줬더니 지니의 눈이 반짝였다. 지니는 점점 내 친구가 되어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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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07-06-25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빛에 얼마나 매료되었던지... 전 섬사이님께 매료되었어요... ☆.☆
7월 어느 사람 없는 평일에 나 혼자 또 와서 실컷 봐야지... 저도 그래야 겠습니다 ^^*
'렘브란트와 바로크 거장들 展'... 오옷~~!! 바로크 거장들이... @.@

섬사이님... 제가요, 그림에 대해선 뭣도 하나도 아는게 없는 제가요 요즘 그림들이 너무 고파졌어요... ^__^
저도 곧 모네전 보러가야 겠어요. 램브란트도 보러가구요..

섬사이 2007-06-26 01:10   좋아요 0 | URL
저도 그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도 그림은,, 몰라도 즐길 수 있는 것들 중 하나인 것 같아요. 감독이나 배우, 연출기법, 영화 이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도 영화를 보고 즐길 수 있는 것처럼요. 7월 어느 날 미술관에 가게 되면 혹시 무스탕님이 계신지 두리번거리게 될 것 같아요. 전 무스탕님을 알지요~~^^

홍수맘 2007-06-25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을 보면서 황홀함을 느끼는 님의 모습이 너무 부럽답니다. 전 메마른 걸까요? 그림을 보면서도 항상 단답형만이 떠오르니....
그리고, 점점 지니와 친구가 되어가는 님의 모습 또한 부러워요. 우리 수도 얼렁 자라서 친구처럼 수다를 떨 때가 왔으면 하는 바램이 생기네요.

섬사이 2007-06-26 01:11   좋아요 0 | URL
저도 따지고 보면 단답형 아닌가요? 모네의 하늘빛이 참 좋더라.. 그게 전부잖아요. ^^

비로그인 2007-06-25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볼만한 전시회들이 줄을 잇는거 같아요.
지나면서 보니까 모짜르트 어쩌구 전시회도 열리고 +_+
전 직장인이라 참 짬내기가 수월치 않은데 아이들은 곧 방학이라 좋겠어요 ^^

섬사이 2007-06-26 01:14   좋아요 0 | URL
세종문화회관에서 하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 展>이요? ㅎㅎㅎ 이번 메세나 콘서트가 바로 그거거든요. 열심히 들락거리며 하긴 했는데, 당첨이 될지 모르겠어요.

치유 2007-06-25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과 함께 이런 저런 전시회며 공연장을 갈수 있다는것은 참 행운이에요..
부군께도 전 높은 점수 팍팍 부여합니다..^^&

섬사이 2007-06-26 01:17   좋아요 0 | URL
네, 같이 다녀줄 사람이 늘 대기중에 있어서 행복해요. 옆지기는 제가 좀 따돌리는 편이에요. 주말이면 아무 생각없이 쉬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 같이 다니면 부담스러워요. 피곤한 사람 억지로 끌고 다니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점수 팍팍 주지 마세요. ^^

fallin 2007-06-26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고나면 더 흥미롭고 이뻐보일텐데...그림은 매력적으로 다가오질 않아요..그래서 섬사이님이 부럽네요..어떻게 하면 그림을 보고 감동하고 황홀하다 느낄 수 있을까요? 궁금하다...

섬사이 2007-06-27 06:36   좋아요 0 | URL
미술이나 사진 작품들은 책이나 도록을 통해서 보는 것과 실제 작품을 보는 것의 차이가 큰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가끔 예술작품들은 보는 게 아니라 경험하는 거란 생각이 들곤 해요. 모네의 하늘빛도 제가 모네展에 가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거에요. 도록이나 책의 모네 그림 사진 속에선 하늘빛이 죽어있었거든요. 페이퍼에 올린 저 이미지 속의 하늘과도 다른 하늘이에요. ^^

fallin 2007-06-26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보면서 감흥을 느끼지 못해 제 감정이 메말랐나 의심했어요^^;;; 직접보면 다르구나. 경험하는 거란 말...멋있어요 ^^

섬사이 2007-06-27 06:40   좋아요 0 | URL
예, 느낌이 많이 달라요. 그림책 속에서만 코끼리며 기린을 보던 아이가 동물원에서 처음으로 코끼리와 기린의 실제 모습을 보고 놀라는 느낌과 비슷할 거에요. (제가 어렸을 때 바로 그랬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