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
박균호 지음 / 소명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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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박균호 님의 신간을 읽었단다. 책 제목에 이 두 번이나 들어간 책 이야기를 엮은 책이란다. 박균호 님의 책들을 읽다 보면, 대단한 장서가이자 애서가라는 것을 알겠더구나. 그런 분들이라면 책에 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많이 있을 거야. 그리고 어떤 작가의 숨겨진 이야기, 어떤 책에 대한 재미있는 뒷이야기들그런 것들을 이야기해주는 책이 바로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이란다.

이 책의 장점은몰랐던 여러 책들을 소개받을 수 있었고, 유명한 작가들의 숨겨진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알게 되어 너희들이나 지인들에게 할 이야깃거리가 생겼단다. 그리고 때로는 어떤 책들은 피할 수 있게 솔직한 평을 만날 수 있었어. 이 책을 읽고 어떤 책을 피하겠다고 마음 먹었냐고? 가장 먼저 소개해준 <율리시스>라는 책이란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하는구나. 독서계의 양자역학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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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율리시스>에 관한 서평은 어렵고 재미없다는 것만 믿어야 하지 의외로 재미난다는 말로 선량한 독서가를 현혹하는 선동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정말로 <율리시스>를 읽고 이해한 지인이 있다면 다른 종교를 믿지 말고 그 분을 신으로 모셔야 한다. 그런데도 왜 독서의 고수들은 <율리시스>를 권하는가? 왜 우리는 <율리시스>를 읽어야 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율리시스>를 읽는다는 것 자체로 이미 당신은 독서가의 최고봉에 등극하기 때문이다. 이해 따위는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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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책이 어려워서, 독서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 신입회원에게 신고식으로 많이 선정되는 책이라고 하는구나. 호된 신고식용 책이지. 그런데 이 책이 왜 이렇게 유명하게 되었을까? 의문이 들 수 밖에 없겠지. 이 책이 출간하고 12년 동안 외설시비에 휘말려 금서로 지정이 되어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렇다 보니 독자들의 호기심이 최고조에 달했고, 금서에서 풀리지 마자 대박이 났다고 했어. 그렇게 유명해진 작품이라고 하는데, 정작 읽으려고 하면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그래서 이 책을 아빠는 읽지 말아야 할 책목록에 추가했단다. 그런데 너희들이 읽는 세계명작동화집에 <율리시스>가 있더구나. 외설 시비를 붙었고, 독서 고수들도 어려워서 읽기 어려운 책을 어떻게 각색했길래, 너희들을 위한 책으로 탈바꿈을 했을까? 궁금하더구나. 아빠도 어린이들을 위해 각색한 <율리시스>는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 책등에 스티커가 안 붙어 있는 거 보니까, 너희들도 아직 안 읽었구나.


1.

이 책에 여러 작가들의 에피소드도 소개해 준다고 했잖아. 많은 작가들의 에피소드들을 다 이야기해주기에는 시간이 없고몇 명 만 살짝

<진달래꽃>의 작가 김소월이 서른세 살에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단다. 그 아름다운 시를 쓰는 사람이 아편이라니뜻밖이었는데, 그가 극심한 관절염에 시달렸다고 하는구나. 그 관절염의 고통을 잊지 위해 아편을 했다고 하니, 안타깝구나. 그리고 살아 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하고 평생 가난한 시인으로 살았대. 하늘에서는 그가 많은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구나. 김소월의 <진달래꽃> 초판본은 총 4권인데 모두 등록 문화재에 등록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렇다면 그 책값이 만만치 않겠지?

지은이 박균호님은 책 사냥꾼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단다. 아빠도 책을 사긴 하지만, 희귀본이나 진귀한 책에게는 크게 관심은 없단다. 하지만 그런 희귀본에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엄청 매달리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더구나. 그런 책 사냥꾼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시리즈가 떠오르더구나. 고서나 희귀본에 얽힌 에피소드를 소설로 잘 버무린 책.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에서 소개했었던 나쓰메 소세끼 전집에 관한 이야기도 이 책에 살짝 소개되었단다.

오장환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시인을 이 책에서 소개해 주었단다. 그의 작품은 어떤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친일로 돌아선 동료 시인들에게 대판 비판하였고 아는 척도 안 했다는 사실에 멋진 분이라는 생각이 들더구나. 문학적으로 아주 뛰어난 작품을 남긴 사람이 있단다. 그런데 그 사람이 조국을 배신하고 친일을 했어. 그렇다면 그 나라는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맞을까. 그 사람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중에라도 반성하면서 조용히 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단다. 그리고 나라에서 그의 뛰어난 문학작품 보다는 조국을 변절하고 친일을 했다는 점을 더욱 부각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나서 문학관까지 지어주었다고 하니, 아빠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오장환 시인께서 비판한 서정주에 대한 이야기란다. 아빠는 앞으로 서정주는 잊고, 오장환 시인을 기억하련다. 그의 시도 한번 찾아봐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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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오장환 시인은 1937년 시집 <성벽>을 발표했으며 서정주, 이용익과 함께 당시 시단의 3대 천재로 불렸고 심지어 시의 황제라는 칭호를 듣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때 많은 문인들이 친일 성향을 보였지만 오장환 시인은 꿋꿋하게 지조를 지켰다. 서정주 시인과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함께 활동하면서 우정을 나눈 것이 <화사집>을 출간하는 인연이 되었다. <시인부락> 1936년 당시까지만 해도 문단에서 그럴듯한 명성이나 경력이 없는 서정주가 주도를 해서 창간을 한 소박한 시 동인지였다. 시 동인지에 주소지가 필요한지는 모르겠으나 오장환 시인도 <시인부락>에 대한 애착이 대단해서 <시인부락>의 주소지를 자신의 자택 주소로 삼았다.

회원들 또한 서정주와 처지가 다르지 않은 무명 신인들로 김진수, 김달진, 오상원 등이었다. 부락이라는 명칭 또한 무슨 심오한 뜻이 아니고 그냥 여러 민가가 모여 사는 시골 마을을 뜻하는 그 부락이다. 시작이 미약했고 끝도 미약했으나 2호를 마지막으로 종간했다. 오장환은 미당이 친일 활동을 한 이후로는 교류를 끊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더라도 인사도 하지 않으며 친일파라고 대놓고 비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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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서가들의 고민거리 중에 공통점이 있는 것 같구나. 집에 책이 있는 줄 모르고 또 주문하는 일 말이야. 박균호님도 그런 경험이 많으신 것 같았어. 처음에는 당황하셨을까? 사실 아빠도 그런 경험이 있거든. 처음에는 당황한 적이 있거든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날 때는, 한 권은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곤 했단다. 아빠는 주로 알라딘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곤 하는데, 친절하게도 알라딘에서 이전 구매 이력이 있으면 알려준단다. ‘이 바보야, 너 책 이미 주문했었어그래서 중복구매를 사전에 막은 적이 있었지. , 그런데 아주 똑 같은 책이어야 하는 거야. 고전 같은 여러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는 알려주지 않는단다. 그리고 같은 출판사인데, 양장본과 반양장본인 경우도 안 알려준단다.

그래서 아빠가 같은 책인데 같은 출판사의 양장본과 반양장본을 같이 갖고 있는 경우도 있었어. 요즘은 긴가 민가 하는 경우는 구매 이력을 직접 조회해 본단다. 제목으로 조회가 가능하니까 말이야.

그런데 지은이 박균호 님은 그런 중복구매를 사고 방식을 전환을 통해 긍정정인 활동으로 생각하고 계시더구나. 중복 주문 덕분에 책을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을 두 번 누렸다는 것이지. 그리고 반전 멘트 하나 날리시고치매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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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좋은 책이란 이런 장점이 있는 것 같다. 독자에 따라서 너무나 천양지차의 매력과 경험을 느끼게 한다는 것. 어쩌면 내가 머리가 너무 나쁘기보다는 너무 좋은 책이라서 같은 책을 두고 개인에 따라서 극히 독특한 책 소개를 하게 만들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또 한편으로 같은 책을 두 번 주문하긴 했지만 두 번 모두 주문으로 이르게 하는 즐거움과 설레는 책 소개를 읽는 즐거움을 누렸으니 그리 손해는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혹시 의학용어로 치매라고 부르는 것은 아닌지 슬며시 걱정되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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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공감 가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 주자면, 러시아 소설의 등장 인물에 관한 이야기란다. 아빠도 러시아 소설을 읽을 때마다 곤욕을 치르는 것이 등장인물의 길이와 호칭이란다. 러시아 이름에 아버지의 이름도 들어가는 등 긴 이유에 대해 설명을 듣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긴 이름이 기억될 이 만무하단다. 더욱이 한 사람에 대한 호칭도 한 소설 내에서 여러 가지로 부르다 보니, 더 헛갈리는 것이지. 지은이께서 말씀하시기를 출판사의 가장 불친절한 행위 중 하나가 러시아 문학 작품을 내면서 이름을 정리해 주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구나. ㅎㅎ 어찌나 공감이 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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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출판사가 독자에게 하는 가장 불친절한 행위 중에 하나는 러시아문학 작품을 내면서 등장 인물의 이름을 따로 정리해주지 않는 것이다. 한국인 독자가 러시아 고전을 읽으면서 겪는 가장 불편함이 이름의 난해함이라고 생각한다. <도스또예프스키 전집>을 사랑하는 나는 2000년에 나온 초판, 2002년에 나온 신판, 그리고 2007년에 나온 수집가용 한정판을 모두 소장하고 있는데 읽는 것은 휴대성이 가장 좋고 표지가 예쁜 2002년판으로 읽었다. 표지가 뭉크의 그림으로 장신된 빨갱이버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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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었던 러시아 소설들은 대부분 책 앞 쪽에 등장인물을 정리해 준 것 같았어. 아빠는 책 읽을 때 왔다 갔다 번거로워서, 종이에 따로 등장인물 정리한 것을 그대로 옮겨 적어서 그 종이를 책갈피로 사용했던 적이 기억나는구나. 그런데, 예전에 어떤 출판사는 그런 책꽂이, 그러니까 소설의 등장인물을 정리해서 적은 책꽂이를 책과 함께 주었다고 하는구나. 정말 친절한 출판사로구나. 위의 책에서 발췌한 글을 다시 읽어보니, 지은이 박균호 님은 도스또예프스키를 정말 좋아하시는 분인 것 같구나. 전집을 판본 별로 다 가지고 계시다고 하니 말이야아빠도 도스또예프스키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빠가 가지고 있는 것은 빨간색 뭉크 그림의 표지는 서너 권뿐이니 말이야. 그것도 책 관리를 제대로 안 해서 책등이 다 바랬고 말이야. 어디 가서 도스또예프스키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하지 말아야겠구나.


3.

더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았는데 이제 그만해야겠구나. 너희들도 커서 나중에 한번 읽어보고, 지은이가 소개해 준 책 중에 읽어 보고픈 책이 있으면 한번 읽어 보렴. 그리고 너희들도 책과 관련된 추억이 생길 텐데, 그런 책과 관련된 추억들을 일기에 잘 적어 놓으면 좋은 추억 저장소가 되지 않을까 싶구나.

이 책을 다 읽고 책을 덮었는데, 책 앞면에 3 사분면 되는 부분에 길게 칼로 그어진 듯한 선이 있는 거야. , 이게 처음부터 있었나? 어디서 긁혔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1 사분면에도 비슷한 것이 있는 거야. 그래서 이게 책의 디자인의 일부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인터넷 서점에 조회를 해보니 똑 같이 있더구나. 책의 디자인이었어. 그런데 왜 저렇게 선을 그어 놓았을까? 궁금하더구나. 지은이 박균호님은 알라딘 인터넷 서점 블로그에서 활동 중이라 댓글 등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앞 표지에 그어진 선에 대해서 여쭈어 보았더니 친절하게 답변을 해 주시더구나. 날카롭게 모든 책들 다 와서 그은 것이라고 하더구나이상, .


PS:

책의 첫 문장 : 2020 2월 마크틴 하이데거의 <숲길> 2판이 출간되었다.

책의 끝 문장 : 책은 고구마 줄기처럼 여러 갈래의 인연과 즐거움을 우리들에게 선사한다.


임화는 조선의 랭보라는 찬사를 받으며 윤동주, 백석, 황순원과 일제 강점기 문화계를 대표하는 꽃미남 트로이카 중 한 명이었다. 시인으로서 임화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단편 서사시를 시도했다. 그가 쓴 단편 서사시의 대표작은 <우리 오빠와 화로>, <젊은 순라의 편지>, <어머니> 등이 있다. 문학비평가로서 임화는 우리나라 비평의 근간을 구축했다. 임화는 영화 주연배우로도 활약한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업적은 화려했지만, 말로는 불우했다.
24살의 나이로 마르크스 문학을 지향했던 카프의 서기장으로 활약하다가 광복이 되고 나서 박헌영과 함께 월북했지만, 남로당 숙청 작업이 한참일 때 미국의 스파이, 친일 행위, 반소련, 반공의 죄를 뒤집어쓰고 총살을 당했다. 북한에서 처형되었던 임화는 남한에서조차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는 문학가로서는 더 치욕스러울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 P235

백석의 시에 대한 가장 찬란한 찬사는 이런 수치보다는 그의 연인이었고 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주인공인 자야(김영한) 선생의 한마디다. 김영한 선생은 그 가치가 일천억 원에 달하는 대한민국 3대 요정인 대원각을 아무런 대가 없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여 사찰 길상사를 세우게 한 인물이다.
기부한 재산이 아깝지 않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1,000원 재산이라고 해봐야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해"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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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9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9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21-04-19 10: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재밌었어요. 아 근데 정말 아이들에게 이렇게 근사한 편지를 계속 쓰시다니 존경스러워요.
저희 집은 모두가 코믹버전이라 이런 진지한 얘기 자체가 안된다는..... ㅠ.ㅠ

bookholic 2021-04-19 23:36   좋아요 0 | URL
어차피 쓰는 리뷰를 그저 편지체로 쓸 뿐이랍니다~~^^
코믹 버전의 집이라... 제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집입니다... 부럽습니다~~
 















(99-100)

천만에, 그럴 리가. 그저 하나의 세계일 뿐이고, 우리는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것뿐이지. 이유를 일러 준 사람은 없다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지구에 존재했던 이유를 일러 준 사람도 없지 않나. 그러니까, 다른 지구 말이야. 자네들이 온 지구. 그런 이제 그 지구 이전에도 다른 지구가 있었는지 알 도리가 있겠나?”


(123)

못 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우리 지구인은 크고 아름다운 것들을 망치는 일에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집트 카르나크 신전 한복판에 핫도그 가판대를 세우지 않은 이유는, 그저 너무 외딴곳이라 대규모 상업단지 조성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집트는 지구에서도 작은 지역에 지나지 않지요. 그러나 이 행성은 모든 곳이 오래되었고 색다릅니다. 당연히도 이곳 어딘가에 정착해서 오염시키는 작업을 시작해야겠지요. 우리는 저 운하를 록펠러 운하라고 부르고, 저 산을 킹 조지산이라 부르고, 저 바를 듀폰해라 부를 겁니다. 그리고 루스벨트와 링컨과 쿨리지시키가 탄생하고 올바른 이름으로는 영영 돌아가지 못하게 될 겁니다. 제각기 적절한 이름이 있는 곳인데 말입니다.”


(141)

평범한 미국인은 어딘가 이상한 존재는 쓸모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시카고식 하수도 갖춰져 있지 않으면 사람 살 곳이 못 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해가 되나요! , 신이시여,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요! 그뿐 아니라 전쟁도 있지요. 우리가 떠나기 전에 한 의회 연설은 들으셨겠지요. 저들은 일이 잘 풀리면 화성에 원자력 연구 시설 겸 핵무기 보관소를 세 곳이나 건설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지어지면 화성은 끝장입니다. 이 모든 눈부신 것들이 사라질 겁니다. 화성인이 찾아와서 백악관 바닥에 술 냄새 풍기는 토사물을 쏟아 낸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142)

지구의 비뚤어지고 끝도 없이 계속되는 탐욕스러운 계획에 저 홀로 맞서야 하는 상황입니다. 저들은 그 지저분한 원자폭탄을 이리고 싣고 와서, 전쟁 기지를 확보하려고 싸움을 벌일 겁니다. 행성 하나를 이미 망쳤는데도 다른 행성까지 망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거지요. 다른 이들의 여물통에까지 오물을 쏟을 필요가 있습니까? 단순무식한 떠버리들 같으니. 여기까지 올라오니 놈들의 소위 문화라는 것뿐 아니라, 놈들의 도덕과 관습에서도 해방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는 놈들의 준거 규범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당신들을 전부 죽이고 홀로 살아가는 것뿐이겠지요.


(144)

우리는 신앙을 잃고 삶의 의미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술이란 것이 좌절 속에서 욕망을 분출하는 행위일 뿐이라면, 종교가 자기기만일 뿐이라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신앙은 언제나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제공했지요. 그러나 프로이트와 다윈 덕분에 이제는 전부 배수구로 쓸려 내려갔습니다. 우리는 과거에도 지금도 길 잃은 종족일 뿐입니다.


(146-147)

근원을 살펴보면 과학이란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기적에 대한 탐구에 지나지 않으며, 예술이란 그 기적의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과학이 미학을, 그리고 아름다운 존재를 파괴하도록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단순히 정도의 문제입니다. 지구인이라면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저 그림에는 사실 색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거야. 색채는 특정 물질의 입자가 특정 방식으로 배열되어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사실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으니까. 따라서 색채란 내가 목격하는 실체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거지.’ 하지만 훨씬 똑똑한 화성인은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훌륭한 그림이군. 영감을 받은 인간의 손과 정신에서 창조된 거야. 저 착상과 색채는 생명 그 자체에서 온 거지. 이건 훌륭한 작품이야.’


(216)

제 생각에는 모든 행성마다 저마다의 진실이 존재할 듯합니다. 언젠가 특별한 날이 찾아오면 그 모든 진실이 퍼즐의 조각처럼 짜맞춰질지도 모르지요. 참으로 영혼을 뒤흔드는 경험이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페러그린 신부님. 이곳의 진리도 지구의 진리만큼이나 진실되며, 서로가 대등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속 다른 행성으로 걸음을 옮기며 진실의 조각을 그 총합에 더해 나가야 합니다. 언젠가 새로운 날의 광명 앞에 온전한 진실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말입니다.


(407)

나의 삶의 방식을 태우고 있는 거다. 바로 그 삶의 방식이 지금 지구를 깨끗이 태우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정치인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해해다오. 어쨌든 나는 과거에 주지사였고, 정직하다는 이유로 저들의 증오를 샀던 사람이니까. 지구의 삶은 결국 최선의 결과를 내놓지 못했단다. 과학은 우리 모두를 너무 빨리 앞질러 달려갔고, 인간은 기계의 황무지에서 길을 잃고 아이들처럼 온갖 소도구며 헬리콥터며 로켓 따위 예쁘장한 물건들에 사로잡혀 버렸지. 잘못된 요소에 심취했어. 기계를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라, 기계 자체를 본질로 여기게 된 거다. 전쟁은 갈수록 커지다가 마침내 지구를 죽여 버렸지. 아무 소리도 안 나는 라디오는 그런 의미란다. 우리는 그런 모든 것에서 도망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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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8개월 28일 밤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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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각 출판사 별로 책회원을 운영하는 경우가 있단다. 아빠도 처음으로 문학동네라는 출판사의 북회원에 가입해 보았단다. 연회비가 있긴 했지만, 북회원에 주는 여러 가지 혜택이 있어 가입해 보았단다. 북회원에게 주는 혜택 중에 생일을 즈음하여 책을 선물해 준단다. 리스트 중에 마음에 확 와 닿는 책이 없어서, 신간이고 저자가 유명한 사람이라서 이 책을 골랐단다. 살란 루슈디. 이 사람은 <악마의 시>라는 작품의 저자로 이 책으로 한때 도피 생활을 하고 자신의 모국인 인도에서 입국 금지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본 적이 있단다. 그리고 대표작으로는 <악마의 시> 이외에 <한밤의 아이들>이란 작품이 있는 것까지만 아빠가 알고 있단다. 그의 책을 읽어 본 적도 없어. 한 번 읽어보겠다고 이 책을 선택했단다.

며칠 뒤 생일 축하 메시지와 함께 책이 도착을 했고, 이제서야 읽었단다. 책 제목 <2 8개월 28일 밤>. 이 기간을 날수로 하면 1001일이 된다고 하는구나. 그러니까 1001일의 밤. 어디선가 익숙하지? 그래, 바로 그 유명한 천일야화에서 모티브를 따 온 책 제목이란다. 천일야화라고 해서 어떤 이들은 1000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천일은 1001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천일야화는 천 하룻밤의 이야기라는 뜻이 된단다.

그런데 아빠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 2 8개월 28일에서, 2년에는 윤년이 끼지 않은 365일짜리 2년이라고 쳐도 8개월은 시작하는 날짜에 따라서 날 수가 달라진다고 말이야. 1 1일부터 시작한 2 8개월 28일하고, 3 1일부터 시작한 2 8개월 28일이 날 수가 다르다는 거지아빠가 더해보니까 1 1일부터 시작한 2 8개월 28일(윤년이 끼면 안됨)은 1001일이지만, 3 1일부터 시작한 2 8개월 28일은 1003일이구나. 아빠가 딴지를 걸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직업병인 것 같구나. 별거 아닌 것을 의심하는 병. 제목을 보고 1001일을 저렇게도 쓸 수 있구나, 작은 놀라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아빠는 굳이…’ 이런 생각이 들었어. 아마도 책이라도 아빠의 취향에 맞아 재미있게 읽었다면, 제목 가지고 딴지를 안 걸었을 텐데, 책도 아빠의 취향에도 맞지 않았단다.

읽기도 힘들었어. 아빠의 독서 능력이 뛰어나지 못해서 작가의 의도가 잘 모르겠더구나. 그 유명하다고 하는 위에서 이야기한 그의 대표작들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도 확 줄어들었단다. 이 책을 재미있게 잘 읽은 이들도 많이 있더구나. 그 분들이 읽고 쓴 리뷰를 읽어보면서, 아빠가 파악하지 못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 보기도 했단다.

 

1.

이 책의 이야기는 1195년에서 시작한단다. 이븐 루시드라는 위대한 철학자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나중에 어떤 분의 리뷰를 보니, 이븐 루시드라는 인물은 실존 인물이라고 하더구나. 이븐 루시드가 원래는 나랏일을 했는데, 뭔가 잘못을 해서 유배 생활 같은 것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열 여섯 살의 소녀 두니아가 찾아왔단다. 사실 이 두니아의 정체는 사람이 아니었어. 마계라고 부르는 상계에서 사는 마족(魔族)이었어. 그들에게 있어 지구는 아랫세상, 하계였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두니아는 마족의 공주였단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둘은 사랑을 했고, 2 8개월 28일 동안 아이들을 참 많이 낳았단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많아야 3번 임신할 수 있는 기간이지만, 두니아는 마족이기 때문에 인간과는 달랐어. 아무튼 많이 낳았다고 했어. 이슬람 국가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칼리프가 루시드에게 사면복권을 해주어 그는 두니아를 버리고 다시 왕궁으로 떠났단다. 그리고 그 후 일 년 뒤 이븐 루시드는 죽고 말았지. 하지만, 두니아는 인간이 아니고 마족이니, 영생의 몸을 가지고 있어 쭉 살았단다.

세월은 흘러 흘러 현재까지 흘렀어. 두니아와 그의 후손들이 세계 곳곳에 살고 있었어. 그 후손들은 자신의 조상이 마족이라는 것을 몰랐어. 그들에게 신체적 특징이 있는데, 귓불이 없는 것이 특징이었단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은 책 전반부에 간단히 요약되어 설명이 되어 있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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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 책은 마족의 위대한 공주였던 어느 여마신, 벼락을 마음대로 부려 번개공주라 불리며 오래전에, 우리가 12세기라고 부르는 시대에 한 인간 남자를 사랑했던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녀의 수많은 후손에 대한 이야기이며, 기나긴 세월이 흐른 후 그녀가, 이 세상에 돌아와 잠시나마 다시 사랑에 빠졌다 전쟁에 나서는 이야기다. 또한 여러 마족, 남성이든 여성이든, 날아다니든 기어다니든, 선하든 악하든 도덕 따위에는 무관심이든, 아무튼 온갖 마족에 대한 이야기이며, 2 8개월 28일 밤, 다시 말해서 천 날 밤 하고도 하룻밤에 걸쳐 이어졌던 위기의 시대, 혼란의 시대, 우리가 괴사(怪事)의 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 그 시대가 끝난 후 이미 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 시대가 우리 모두를 영원히 변화시켰다. 다만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우리의 미래가 말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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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이제 그럼 두니아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현재 세상의 이야기를 해 보자꾸나. 전 세계에 엄청나게 큰 홍수가 일어나서 곳곳에서 피해를 많이 입고, 사람들도 많이 죽었어. 60대 노인 정원사 제로니모가 있었어. 그런데 대홍수가 지나간 다음, 제로니모의 몸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단다. 지표면에서 아주 살짝 떠 있는 거야.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떠 있는 높이가 높아졌단다. 이게 사는 데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니었어. 10센티미터를 떠서 다닌다고 생각해보렴.. 화장실에서 큰일을 볼 때도 얼마나 불편하겠니상상만 해도

대홍수 다음에 이상한 능력이 생긴 건 제로니모뿐만이 아니야. 지미라는 나트리지 히어로의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실제 형상이 되어 나타나곤 했어. 그리고 어느날 자신의 방에 웜홀이 생겨서 그곳을 통해 두니아가 찾아왔어. 그리고 지미에게 그의 정체를 알려주었지. 위대한 철학자 이븐 루시드와 마족의 후예라고제로니모, 지미를 비롯한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앞서 이야기한 마족 공주 두니아의 후손들인 것이란다. 그런데 이 웜홀이라는 것을 통해 두니아만 온 것이 아니고, 마계의 다른 마족들도 지구로 몰려 들었단다. 지미가 살고 있는 곳이 뉴욕인데, 뉴욕 한복판에 웜홀을 통해 마족들이 온 것이었어. 그 마족들이 그런데 착한 애들이 아니야. 마계에서 못된 짓만 하는 흑마족들이었어. 그 흑마족들은 웜홀을 통해 지구, 그러니까 하계에 와서 전쟁을 선포했단다. 마계(상계)와 지구(하계)의 전쟁. 일명 이계 전쟁.

이 부분을 읽다 보면 어떤 영상이 하나 떠오르더구나. 너희들도 아빠랑 비슷한 장면이 떠오를 것 같은데, 어떠니? 그래, 영화 <어벤져스>가 떠오르더구나. 티노스의 후예들이 뉴욕 하늘에 만들어진 구멍을 통해 물밀듯이 내려왔잖아. 어벤져스 맴버들이 온갖 노력으로 무찔렀지. 그것처럼 이 소설에서도 흑마족들이 지구를 점령하려 온 것이야. 그러면서 그들은 온갖 자연 재해를 만들어냈고, 사건 사고를 일으켰고, 미스터리한 사건을 만들었단다. 어쩌면 지금 온 세계를 일 년 넘게 휩쓸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도 그들의 짓일지 몰라.

두니아는 마족의 공주라고 했잖아. 그리고 두니아는 마족의 착한 쪽인 백마족이었단다. 이후 소설은 흑마족과 두니아를 비롯한 백마족과 두니아의 후손들이 힘을 모아 흑마족과 전쟁을 겨루는 이야기가 펼쳐진단다. 그 와중에 두니아와 정원사 제로니모는 사랑에 빠지고 말이야.. 그리고 이 전쟁의 승리는 두니아가 이끄는 백마족의 승리로 끝나지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아빠는 크게 감명 받지 못했던지라, 아주 간단히 이야기를 해주는 것으로 독서 편지를 마치마. 한 작품으로 작가를 평가하면 안 되겠지? 다시 알라딘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을 검색해 보니, 평점이 무려 9.4로구나.. , 아빠가 뭘 잘못 읽은 것인가독서 내공이 아직 너무 부족한 것인가. 저 평점에 공감을 못하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 (jinn), 즉 마족(魔族)의 본성에 대란 기록은 허다하지만 정작 알려진 사실은 매우 적다.

책의 끝 문장 : 그리고 괴팍한 일면을 완전히 없애버리지는 못했기에 때로는 악몽이라도 꾸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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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15 00: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천일야화가 1000일이 아니라 1001이었군요. ㅋ 오늘도 하나 배우고 갑니다^^

bookholic 2021-04-15 22:00   좋아요 2 | URL
그런데 아라비안 나이트는 왜 1001일이었을까요?^^

mini74 2021-04-15 18: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1003일. 은근히 그런게 신경에 거슬리죠.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bookholic 2021-04-15 22:04   좋아요 3 | URL
ㅎㅎ 많이 거슬립니다...

오거서 2021-04-21 19: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흑마족이 지구를 점령하기 위해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뜨린 것일 수 있다면 마족의 본성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ㅋㅋㅋ

bookholic 2021-04-21 23:02   좋아요 0 | URL
코로나 바이러스의 시작과 정체가 정말 궁금해요... 어디서 이런 못된 것이 나왔을까요..ㅠㅠ
빨리 사라지길 얼마나 빌어야 하는지....
코로나 잘 피하시고 즐거운 봄날 되시길 바랍니다.^^
 














(40)

가깝다면 가까운 곳에 운석이 떨어졌는데 십 년이 지나서도 기행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연해주의 시골 마을에 불덩어리 같은 운석이 떨어질 무렵, 그는 평양에서 조선민주당을 이끌던 고당 선생을 모시고 있었다. 고당 선생과는 인연이 깊었다. 선생은 오산학교에 재직하던 시절 기행의 집에서 하숙을 했고, 몇 년 뒤 그가 오산고보에 입학했을 때는 교장을 맡고 있었다. 해방이 되어 소련인들을 상대할 일이 많아지자 고당 선생은 고향 정주에 머물던 기행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통역 겸 비서로 삼았다. 그때만 해도 기행은 고당 선생이 곧 남쪽의 인사들과 함께 민주공화국을 만들면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하리라고 생각했다. 이제 돌이켜보면 순진한 생각이었지만, 그땐 다들 그랬다. 모두가 모두의 선의를 믿었다.


(81)

시대의 눈보라 앞에 시는 그저 나약한 촛불에 지나지 않는다. 눈보라는 산문이며, 산문은 교시하는 것이다. 당과 수령의 말은 눈보라처럼 휘몰아치는 산문이다. 준엄하고 매섭고 치밀하다. 하지만 시는 말하지 않는다. 시의 할일은 눈보라 속에서도 그 불꽃을 피워 올리는 데까지다. 잠시나마 타오르는 불꽃을 통해 시의 언어는 먼 미래의 독자에게 옮겨붙는다.


(85)

그 때에도 보름이면 이 세상은 달빛으로 가득차지 않겠나? 달이야 거기 사람이 있든 없든 찼다가 이지러지는 그 자연의 법칙을 반복하겠지. 그런 무심한 것이 자연이라는 것도 모르고 인간들은 거기게 정을 둔단 말이지. 마치 해와 달이 자기 인생을 구원해주기라도 하듯이 말이야. 오로, 우리의 태양이시여, 영원한 달님이시여, 라고 찬양하면서. 하지만 해와 달은 그 누구의 인생도 구원하지 않아. 우리도 그런 자연을 닮아 노래는 들리는 대로 들으면 되고, 춤은 보이는 대로 보면 되는 거지, 좋으니 나쁘니 마음을 쏟았다 뺏었다 할 필요는 없었던 거야.


(85)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 어떤 시를 쓰지 않을 수 있는 것,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사람이 누를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


(117)

사전에서 세상의 뜻풀이는 이렇게 고쳐야 해요. 영원한 것은 없는 곳이라고.


(164)

숲이 비어 있는 것을 보는 사람도 시인이고, 폐허가 꽉 차 있는 것을 보는 사람도 시인이지요. 저는 모든 폐허에서 한때의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 시를 씁니다. 괴링이 이끄는 독일 폭격기가 육백 대나 날아와 포탄을 쏟아부었을 때, 스탈린그라드는 영원히 불타는 줄 알았어요.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죠. 밤은 낮처럼, 낮은 밤처럼. 물은 불처럼, 불은 물처럼. 악은 선이 되고, 선은 악이 됐죠. 그게 바로 전쟁, 지옥의 풍경이에요. 그렇게 몇 달 뒤 꺼지지 않을 것 같았던 불이 꺼졌을 때, 도시는 완전한 폐허가 됐죠. 그 폐허를 응시하는 일이 시인의 일이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164-165)

전쟁은 인류가 행할 수 있는 가장 멍청한 일이지만, 그 대가는 절대로 멍청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나요? 전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평화를, 상처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회복을 노래할 수 있나요? 전 죽음에, 전쟁에, 상처에 책임감을 느껴요. 당신 안에서 조선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죽음에 대해 당신도 책임감을 느껴야만 해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죽어가는 단어들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


(189-190)

이 날짜만 그대로 두고 책에 실린 자음과 모음을 해체해 다시 조립한다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누가 어떻게 조립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행은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언어의 세계를 떠날 수 없었다. 평생 혼자서 사랑하고 몰두했던 자신만의 그 세계를.


(190-191)

수령이 문학에서 낡은 사상 잔재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라고 교시를 내린 뒤, 전국의 도서관과 도서실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이 소장중인 책들 가운데 반당 반혁명 작가의 책들을 회수해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거기서 불타는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였다. 당연히 서로의 주장은 엇갈리고, 지향점은 다르고, 문체는 제각각이다. 그렇게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현실은 그 무수한 세계가 결합된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또 추악한 세계가 있다. 협잡이 판치는 세계가 있고, 단아하고 성실한 세계가 있다. 어떤 세계는 지옥에, 또 어떤 세계는 천국에 가깝다. 이 모든 세계가 모여 다채롭고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현실 전체가 몰락하는 것이다. 당과 수령, 그리고 그들의 충실한 대리인인 병도는 자신들이 조립한 언어의 세계만이 리얼하다고 말하지만, 수많은 세계를 불태우고 남은 단 하나의 세계라는 점에서 그들의 현실은 한없이 쪼그라들다가 스스로 멸망하리라.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리얼리즘이란, 그런 언어와 문자가 스스로 실현되는 현실을 말한다. 거기에는 당과 수령은 물론이거니와 기행의 자리마저도 없는 것이다.


(228-229)

아무리 준비해도 모자란 겨울나기에 비하자면, 봄 준비는 마냥 기다리는 게 일이었다. 봄은 아기 걸음이고, 먼빛이고, 올동말동이니까. 4월 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사흘이 지나면 강에서는 쩍쩍 소리 내며 버그러지는 얼음장 위로 흙탕물이 넘실거렸다. 새벽이면 골짜기 안으로 안개가 부잇하게 감돌아 돈사(豚舍) 네모 등의 가스불빛이 까물거렸고 아침햇살이 빗살처럼 번져나면 새들의 노랫소리가 흥겨웠다. 겨우내 얼어 있던 흙으로 틈이 생겨 봄볕이 스며들면 오랑캐꽃과 살구꽃과 진달래가 피어나 단조롭던 흑백의 구릉을 환한 빛으로 물들였다. 마을에 물레방아가 내걸리고 소달구지가 지나갈 즈음이면 개울가로는 처녀들이 바구니를 들고 둥글레며 쑥 따위를 캐러 다녔다. 그렇게 삶은 다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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