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인간의 마음은 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마음으로 몸을 다스리지만 반대로 몸을 바로잡음으로써 마음을 잡을 수도 있다. 다산은 이것을 분명히 알았다. 다산은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몸을 바로잡았고, 몸이 흐트러질 때마다 마음을 다잡으며 위대한 업적을 이뤘다. 일생의 꿈을 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마음을 다잡고 몸을 바로잡는 수신을 이룰 때 꾸준하게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지치지도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간다면 이윽고 품었던 꿈도 이룰 수 있다.


(38)

또 한 가지 다산의 가르침은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공부를 쉬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시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산은 이렇게 가르쳤다. “이제 너희들은 폐족(무거운 죄를 지어 출셋길이 막힌 집안)이다. 그러므로 더욱 잘 처신해 본래보다 훌륭하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기특하고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폐족으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밖에 없다. 독서는 사람에게 가장 깨끗하고 중요한 일일뿐더러, 호사스러운 집안 자체는 그 맛을 알 수 없고, 시골에 자제들은 그 오묘한 이치를 알 수 없다. 반드시 어려서부터 듣고 본 바가 있고, 너희들처럼 중간에 재난을 겪어본 젊은이들이 진정한 독서를 할 수 있다. 그들이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뜻도 모르면서 그냥 글자만 읽어 내려가는 것은 진정한 독서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49)

개인의 수양은 물론 세상의 화평을 위해서도 음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덧붙여 음악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다산은 또 이렇게 말했다.

음악이 사라지니 형벌이 가중되고, 전쟁이 자주 일어났으며, 원망이 일어났고, 사기(詐欺)가 성행하게 되었다. 일곱 가지 감정(희로애락애오욕) 가운데 그 일어나기 쉬워도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 분노다. 답답하고 우울한 사람은 마음이 화평하지 못하고, 분노와 원한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 형벌을 써서 기분을 통쾌하게 하면 일시적으로 풀릴 수 있겠지만, 음악을 듣고 화평해지는 것만 못하다.”


(70)

다산은 이렇게 가르친다.

문장이란 무엇일까? 학식이 안으로 쌓여 그 아름다움과 멋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으면 몸에 윤기가 흐르고, 술을 마시면 얼굴에 홍조가 피어나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어찌 갑자기 이룰 수 있겠는가? 중화의 덕으로 마음을 기르고, 효우의 행실로 성품을 닦어, 공경함으로 지니고, 성실로 일관하되, 변함없이 노력해야 한다. 사서(四書)로 몸을 채우고, 육경(六經)으로 식견을 넓히며, 사서(史書)로 고금의 변화에 통달해야 한다.”


(83)

배움을 지식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하고, 출세와 영달의 도구로 생각하는 세태다. 하지만 덕으로 뒷받침하지 않는 지식은 오히려 자신을 망치고 집안과 나라를 망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맹자는 지식을 옳고 그름을 가리는 덕목(是非之心)’이라고 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도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다면 그를 배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하물며 옳고 그름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비겁하다. 공자는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입으로는 정의를 외치면서 정작 행동은 불의하다면 더욱 비난 받아 마땅하다. 가식과 위선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98-99)

다산은 직접 쓴 <여유당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병은 내가 잘 안다. 나는 용감하지만 지모가 없고 선()을 좋아하지만 가릴 줄을 모르며, 맘 내키는 대로 즉시 행해 의심할 줄을 모르고 두려워할 줄도 모른다. 그만둘 수도 있는 일이지만 기쁠 수 있다면 그만두지 못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꺼림칙해 참을 수 없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멋대로 돌아다니면서도 의심이 없었고, 장성해서는 과거 공부에 빠져 돌아설 줄 몰랐고 나이 서른이 되어서는 지난날을 깊이 뉘우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선을 끝없이 좋아했으나, 비방은 홀로 많이 받고 있다. , 이것이 또한 운명이란 말인가? 이것은 나의 본성 때문이니, 내가 또 어찌 감히 운명을 말하겠는가? 노자의 말을 보건대, “신중하라, 한겨울에 내를 건너듯이. 두려워하라 사방에서 에워싼 듯이라고 했으니, 이 두 마다 말은 내 병을 고치는 약이 아닌가? 대체로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뼈를 애듯 하므로 부득이 한 일이 아니면 건너지 않는다. 사방에서 이웃이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자기 몸에 이를까 염려하기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라도 하지 않는다.”


(130)

다산은 책을 접할 때 단순히 많이만 읽는 다독이 아닌 초서(抄書)를 강조했다. ‘초서란 책에서 중요한 부분을 뽑아서 직접 기록하며 책을 읽는 것이다. 당연히 느릴 수밖에 없다. 아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다산은 초서를 이렇게 설명하며 권했다.

학문의 요령에 대해 전에 말했거늘, 네가 필시 이를 잊는 게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초서의 효과를 의심해 이 같은 질문을 한다는 말이야? 한 권의 책을 얻더라도 내 학문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은 뽑아 기록해 모으고, 그렇지 않은 것은 눈길도 주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비록 백 권의 책이라도 열흘 공부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266)

오늘날 지식 공부만 강조하는 세태에서 반드시 새겨야 할 지점이다. <악기>에 실려 있는 글이 상세하게 그 이유를 밝혀준다.

예와 악은 잠시라도 몸에서 떠날 수 없다. 음악을 이뤄서 마음을 다스리면 조화롭고 곧고 자애롭고 신실한 마음이 솟아난다. 조화롭고 곧고 자애롭고 신실한 마음이 생겨나면 즐겁고, 즐거우면 편안하고, 편안하면 오래가고, 오래가면 그것이 곧 하늘이고, 하늘이면 신령스럽다. 하늘은 말을 하지 않아도 신실하고, 신실하면 노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다. 음악을 이룸으로써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284)

맹자는 맑고 신선한 새벽의 기운인 평단지기(平旦之氣)를 말했다. 생명이 되살아나는 새벽은 낮과 밤을 지내는 동안 잃어버린 마음을 돌아보기 좋은 때다. 매일 그렇게 새벽에 깨어 스스로를 반추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할 수 있다면 조금씩 마음이 단단해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0)

새만금 간척사업은 유사 이래 우리나라 최대의 토건사업으로 30년째 진행 중인 사업이다. 2050년까지 사업을 계속한다는 것이 정부의 계획이다. 그러나 정부의 계획대로 새만금사업이 진행된 역사가 없다. 앞으로 50년이 걸릴지 100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현재 새만금사업은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사업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최초에는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이후에는 동북아 경제 중심지로, 한중 경협특구로, 현재는 그린뉴딜 1번지로, 새만금 국제공항 건설로, 그동안 제대로 된 개발 없이 새만금사업은 표류해왔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전북도민들의 탐욕을 부추기고 기대감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사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업이 계속되는 한 시민사회의 새만금살리기 활동도 계속될 것이다. 새만금 살리기운동의 짐이 미래세대에게로 계속해서 이어질 전망이다. 개발과 성장 중심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평화로운 새만금이 언제 온 수 있을지, 걱정과 함께 기대를 품어본다.


(51)

신고리 5.6호기 패배의 후유증은 참으로 컸다. 그때까지 존재했던 탈핵 전국 조직이 다 와해되었을 뿐 아니라 향후 진로를 둘러싸고 탈핵진형을 두 조각내고 말았다. 전국공동행동은 경험 있는 활동가들이 모두 사퇴하고 나니 자연히 구심점을 잃고 흐지부지되고 말았고, 원전 5개 지역 활동가들이 모인 탈핵지역대책위마저 내부갈등으로 회의를 할 때마다 삐걱거렸다.


(70)

하버드 경영대학 명예교수인 쇼나나 주보프는, <감시자본주의의 시대>(2019)에서 구글의 이러한 자본 전략을 감시자본주의로 규정한다. 이 책에서 감시자본주의라는 용어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1. 인간의 경험을 무료로 추출하여 예측, 판매로 이어지는 숨은 상업적 행위의 원재료로 이용하려는 새로운 경제질서

2. 상품과 서비스 생산이 전지구적 규모의 새로운 행동수정 아키텍처(테크놀로지 구조)에 종속되는 기생적 경제논리

3. 인류역사상 전례 없는 부, 지식, 권력의 집중을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 악성 돌연변이

4. 감시경제의 토대를 이루는 틀

5. 19세기 및 20세기에 산업자본주의가 자연에 가한 위협에 견줄 만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위협

6. 새롭게 등장해 사회를 지배하려 들고 시장 민주주의에 갑작스러운 도전을 제기하는 도구주의 권력의 기원

7. 총체적 확실성에 근거해 새로운 집단적 질서를 부과하려는 움직임

8. 위로부터의 쿠데타에 상응하는 중대한 인권박탈, 즉 국민주권의 전복


(71)

여기서 주의할 점은 감시자본의 고객은 많은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사용자인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 자신이 고객의 지위를 누려야 할 것처럼 생각하지만 감시자본의 고객은 따로 존재한다. , 감시자본의 고객은 사용자의 행동잉여 데이터의 분석을 통해 만들어진 맞춤형 광고를 사가는 광고주이다. 구글은 사용자의 서비스 개선에도 데이터의 일부를 활용하지만 이보다 훨씬 많은 양의 데이터를 광고에 활용한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구글과 같은 감시자본에게 사용자는 행동잉여 데이터라는 원재료를 무상으로 공급해주는 자원일 뿐이다.


(72)

감시자본은 우리의 행동을 수집하고, 분석하고, 예측하여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시 우리의 행동을 유도하고, 조종하고, 통제해나간다. 우리는 구글에서 자신이 필요한 것을 검색한다 생각하지만, 실상은 역으로 우리가 구글에 의해 검색당하는 것이다. 감시자본 아래에서 우리는 자유의지를 지닌 주체가 아니라 수집, 분석, 추출의 공정에 던져진 재료로서 존재한다. 감시자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데이터로 전락한다.

감시자본의 이러한 도구주의적 권력 속성은 인간에게서 반성적 의미 작용을 빼앗아 동물적 존재로 격하시키민주적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간의 능력과 자기이해를 갉아먹으며 내부로부터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73)

감시자본은 우리의 경험과 행동을 데이터화하여 도구화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전혀 관심 갖지 않는다. 감시자본의 대상이 되는 순간부터 사용자 개인은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고 데이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극단적 무관심과 타자화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여기서 말하는 극단적 무관심이라는 것은 감시자본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주체인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같은 의미에서 감시자본주의하에서 우리는 자유의지와 존엄한 가치를 지닌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감시자본의 입장에서 우리는 그저 매 순간 구글의 검색창에 정보를 입력하고 페이스북의 좋아요를 누르며 인스타그램에 자신해서 사진을 올리는, 생체정보를 지닌 유기체일 뿐이다.


(124)

농민 중심의 민중 자치는 근본적으로 흙(지구)과의 건강한 관계를 기초로 한다. 그것은 농민이 볼 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흙이 만물을 살려내는 기본 바탕임을 직관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한 톨의 곡식처럼 한 줌의 흙도 소중하다. 이런 겸허한 자세가 전제되지 않으면 공동체는 어렵다.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을 실천할 수 있어야”(<녹색평론> 창간사) 좋은 삶이나 공동체의 전망이 열린다.


(135)

풀뿌리 민주주의개념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풀과 뿌리는 비바람과 폭설에 쓰러지고 파묻히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생명력이 있다. 5월의 신록조차 한겨울과 초봄의 갈색 잎들 사이로 풀뿌리가 뿜어내는 기운을 받아 하나씩 새잎을 튀운 결과다. 새 손톱이 헌 손톱을 멀어내는 손톱갈이를 하듯, 새 잎사귀가 헌 잎사귀 사이로 돋아나며 해마다 산천갈이를 한다. 그러나 헌 잎사귀는 단지 새 잎사귀로 교체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썩어 거름이 됨으로써 새 에너지원이 된다. “희생 없이는 우정도 없다던 선생의 말처럼 지난가을 낙엽들이 거름이 됨으로써 풀뿌리와 신록을 살려낸다. 나아가 풀뿌리 그 자체는 서로 얽히고설켜 아무리 뜯기고 짓밟혀도 한두 가닥 살아남아 한사코 일어선다. 바로 이런 면들이 우리가 그토록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까닭이다.


(142)

시인 지망생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1965년 서울대 영문학과에 입학하는데 영문학에 큰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생의 문학론집 <대지의 상상력>(2019) 서문에 따르면, 서양적인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 그리고 영어를 익히면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맹목적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영문과의 한 연구실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줄 강력한 언어와 만납니다.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 새는/온 하늘을 분노로 떨게 한다. / 주인집 대문 앞에 굶주려 쓰러진 한 마리 개는 / 제국의 멸망을 예고한다.” 다름 아닌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였습니다. 그날 이후 영문학도는 블레이크의 근원적 상상력과 철저한 민중성, 그리고 예언자적 풍모(정직성)에 사로잡힙니다. 선생이 보기에 블레이크는 민중적 전통에 입각해 억압적 부르주아체제에 대하여 가장 근본적인 비판에 도달한 근대 최초의 지식인이자 사상가였습니다.


(147)

“<녹색평론>은 이른바 발전혹은 진보의 이름 밑에서 인간생존의 사회적 자연적 토대를 끊임없이 훼손하는 일체의 움직임, 논리, 사고, 제도, 관행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는 늘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했고, 동시에 어떻게 하면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고 공정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구축할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 왜 우리가 민주주의의 심화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를 끊임없이 이야기해왔다.” 선생이 단호한 어조로 밝힌 <녹색평론>의 정체성과 지향점은 곧 김종철 문학의 그것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생의 문학은 전환의 문학이었습니다. 근대문명을 넘어 생태문명으로 전환하는 모든 과정과 부문에 적극 개입하는 모든 형태의 문학.


(176)

김종철 선생은 가난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그것은 물론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깨끗하고 품위 있는 가난으로, 그런 가난이야말로 우리의 인간성을 고양시키는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물 마시고 나물 먹고 그러면서 달을 희롱하는 따위의 안빈낙도하고는 다르다. 선생이 말하고자 한 것은 늘 어울려 일하고 즐기는 삶의 중요성이었다. 물론 우정과 환대에 기초한 그런 삶을 꾀하더라도 생태학적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 가난은 그 조건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필수적이다. 말하자면 공생공락의 혹은 공생공락을 위한 공빈론인 것이다.


(197)

독재로부터 벗어나 선거대의제로 목소리를 찾게 된 민중이 느끼는 환희에 대해서는 언제나 언론에 크게 보도가 된다. 그러나 혹은 나중에 이들 가운데 실망감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뉴스가 되지 못한다. <이코노미스트>(2009 11 4일 발행)의 한 기사는, 대부분의 공산주의국가들이 몰락하고 20년이 지난 뒤 시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사해보았더니 오직 절반만이 서구식 자유와 자본주의로 전환된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러한 전환으로 인해 혜택을 본 것은 보통사람들보다 기업과 정치 엘리트들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꼬마요정 2021-07-29 2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만금 기사 봤는데 너무 끔찍했어요ㅜㅜ 죽어가는 늪이 가슴 아프더라구요. 제발 개발 좀 그만하면 좋겠다 생각했어요ㅠㅠ

bookholic 2021-07-30 05:20   좋아요 1 | URL
새만금... 새만금... 오래 전부터 들어온 지역이라서 개발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말에 놀랐습니다. 무엇을 위한 개발인지 모를 개발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이젠 정말 멈췄으면 좋겠네요...
 














(314-315)

미국에서는 강꼬꾸징(韓國人)이니 조센징(朝鮮人)이라는 게 없었어. 왜 내가 남한 사람 아니면 북한 사람이 돼야 하는 거야? 이건 말도 안 돼! 난 시애틀에서 태어났어. 우리 부모님은 조선이 분단되지 않았을 때 미국으로 갔고.” 피비가 그날 하루 동안 편협한 대우를 받았던 일들 가운데 하나를 소리 높여 이야기했다. “왜 일본은 아직도 조선인 거주자들의 국적을 구분하려고 드는 거야? 자기 나라에서 4대째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말이야. 넌 여기서 태어났어. 외국인이 아니라고! 이건 완전 미친 짓이야. 네 아버지도 여기서 태어났는데 왜 너희 두 사람은 아직도 남한 여권을 가지고 다니는 거야? 정말 이상해.”


(327-328)

솔리, 솔리. 그러지 마. 변명할 필요 없어. 조선인들에게는 일반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 너희 아버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파친코를 선택한 게 분명해. 아마 훌륭한 사업가겠지. 네 포커 기술이 무에서 나왔다고 생각해? 네 아버지는 후지나 소니에서 일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회사에서는 조선인을 고용하지 않잖아. 알지? 어이, 컬럼비아 대학생 청년, 사실 너도 고용해줄지도 의심스러워. 일본의 많은 곳에서는 아직도 조선들을 교사와 경찰, 간호사로 고용하지 않아. 넌 돈을 많이 버는 데도 도쿄에서 방을 빌릴 수도 없잖아. 빌어먹을 1989! , 네가 그 모든 것을 공순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잘못된 거야. 난 일본인이지만 멍청하지 않아. 미국과 유럽에서 오랫동안 살았어.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태어난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에게 하는 짓은 미친 짓이야.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야. 너희들은 혁명을 일으켜야 해. 그런데 그다지 항의를 하지 않잖아. 너와 네 아버지는 이 나라에서 태어났어. 그렇지?”


(361)

일본은 절대 변하지 않아. 외국인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내 사랑, 넌 언제나 외국인으로 살아야 할 거라고. 절대 일본인이 되지 못해. 알겠어? 자이니치(조선인)는 여행을 떠날 수 없는 거 알지? 하지만 너만 그런 게 아냐. 일본은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도 다시 받아주지 않아. 나 같은 사람들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지. 우리는 일본인인데도 말이야! 난 병에 걸렸어. 오래된 무역회사를 운용하는 어떤 일본이 남자한테서 옮은 병이야. 그 남자는 죽었어.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 여기 의사들도 내가 떠나버리기를 바라고 있어. 잘 들어, 솔로면, 넌 여기 머물러야 해.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안 돼. 네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야 해. 부자가 되면 무엇이든 원하는 걸 할 수 있어. 하지만 아름다운 솔로몬, 저들은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아.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나가 솔로몬을 노려보았다. “내가 말한 대로 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

알렉세이는 도스토옙스키의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이름이지만 그중 대표를 꼽으라면 역시 그의 마지막 작품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알렉세이를 들어야겠다. 까라마조프 씨네 막내아들이자 참으로 비현실적이어서 기이하게 다가오는 캐릭터. 모두의 벗이자, 형제 같은 사람. 남녀노소 불문, 한 번이라도 그를 만나면 금세 사랑하게 만드는 마성의 남자. 누군가를 어떤 이유로도 비난하지 않으며, 그가 모든 이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믿게 만드는 사람. 그렇기에 부도덕하기 짝이 없는 그의 혈육들도 알렉세이만은 자신들과 다른 카테고리에 넣는다. 그러곤 모두 그에게 고백하고, 이해받길 원한다.


(48)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프로가 되는 지름길이며 또 그것만큼 인생에 도움이 되는 조건도 없다. 그렇게 산다 해서 모든 일이 잘되진 않겠지만 모른 채 산다면 자신을 더 힘들게 할 선택을 하게 될 것만은 분명하다. 잘 맞지 않은 회사에 아무 문제의식도 없이 입사하고 퇴사하기를 반복했던 나처럼 말이다.


(74-75)

물론 성숙한 인간이라면 죽는 순간까지 섣불리 자기 생각을 말하기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살피며 진상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 역시 성숙한 인간이 되고 싶다. 하지만 시대가 계속 변하고 있다는 사실, 그 변화 속도를 내가 따라가지 못해 때로 꼰대적 발상과 발언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받아들이기로 했다.


(102)

나는 자신만의 소박한 일상을 잘 지켜 나가면서도 품위 있고, 지적이며, 편안하고 자유롭게 관계를 맺는 이를 몇 알고 있다. 나는 그 사람들이 내적 자산을 비교적 쉬이 갖출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온 이들보다 대단해 보이고, 그래서 그들을 만날 때마다 질투하고 부러워한다. 그렇게 부러워하다 보면 나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말은 어쩌면 틀렸다. 부러우면 이기는 건지도 모른다.


(171)

UCLA에서 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참가자들에게 호감에 관련된 500개가 넘는 형용사에 점수를 매기게 했다. 다음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한 형용사는 무엇일까?

(1) 지성적인(intelligent)

(2) 타고난 매력이 있는(attractive)

(3) 사교적인(gregarious)

(4) 진심의(sincere)


(182)

솔직함은 그 내용이 자기 자신일 때 빛을 발한다. 타인의 장점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도 호감을 얻는 방법이겠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용기에 타인의 마음은 더 크게 움직이지 않을까. 상대에게 자신도 진심을 내보여도 안전하겠단 느낌을 주니 말이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고 싶다면 자기 자신을 잘 알 것, 그런 자신을 받아들일 것, 솔직함의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둘 것.


(193)

도스토옙스키 소설을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을 긴 풀 네임, 약칭, 여러 애칭으로 불러서 누가 누구인지 판단하는 데 시간이 걸리도록 하는 불친절함, 하루 이틀 밤 이야기를 1000쪽 이상의 분량으로 풀어내는 집요함과 심오함에 임하기가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대체 내가 왜 이 인간 소설을 이렇게 파고 있나 회의감을 느낄 즈음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날 대체 뭘로 보는 거냐며 뒤통수를 한 대 쳤다. <스쩨빤치코보 마을 사람들>이란 소설을 통해서였다.


(206)

도스토예스키 장편 <노름꾼>은 여러 가지로 유명하다. 장편 <죄와 벌>을 쓰는 동안 27일 만에 완성했다는 것, 그것도 구두로 완성한 소설을 속기사 안나가 문자로 옮겨 출판사로 넘겼으며, 그 뒤 도스토예스크의 청혼으로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것, 이 소설을 쓸 당시 작가 자신도 도박으로 인해 돈에 쪼들리며 급하게 완성했다는 사실 등 제목만큼이나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다.


(214)

그렇다고 해서 삶의 주도권까지 내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직장에서 누군가 나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해서 내 삶까지 좌우하려 할 때, 즉 내 삶의 주도권이 본인에게 있는 양 굴려 할 때 거절할 만한 지혜와 배짱은 필요하다. 그러자면 우선, 내 인생의 모든 행운과 불운을 스스로 만들어 가고 감당하겠다는 주인 의식이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나는 아직 멀었단 걸 알았다. <노름꾼>의 가정교사의 대처에 정말 놀랐으니 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7-21 08: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곧<스쩨빤치코보 마을 사람들> 읽으려고 하는데 뒤통수를 쳤다니 완전 기대되네요. 저도 이책 도선생님 책 다 읽고 읽어봐야겠어요 😊

페넬로페 2021-07-21 09:10   좋아요 3 | URL
다른분들은 어떠셨는지 모르지만 전 이 책 넘 재밌게 잘 읽었어요^^

scott 2021-07-21 14:53   좋아요 3 | URL
이책 컨셉도 좋고 도끼 선생님 작품과 사회인으로 마주 하게 되는 문제점들(개인과 조직)과 연결 시킨 점들이 좋았습니다.



bookholic 2021-07-22 05:05   좋아요 3 | URL
저도 도끼 선생님의 작품들을 많이 읽고 이 책을 읽었으면 더 공감했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오래 전에 읽은 두어권이 전부라서...
뭐, 그렇지 않아도 나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도끼 선생님들의 책들을 좀 많이 읽고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11)

한 공기의 사랑이다. 그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한 공기의 사랑을 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모든 사랑은 정말 사랑했다!”라는 나의 정신 승리는 가능하게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온갖 고통을 가하는 끔찍한 일이다. 심지어 나를 사랑하면 세 공기든 네 공기든 한 가마든 먹어야 한다고 그를 압박한다. 세 공기, 네 공기의 밥을 지은 자신의 수고를 내세우면서 말이다. “당신을 위한 나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말아줘. 그러면 나는 정말 슬플 거야.” 어느새 그의 배고픔과 포만감보다 나의 수고가 핵심이 되고 만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사랑은 이제 사랑의 궤도를 이탈해 공회전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애지중지(愛之重之)하지 않게 되니까. 애지중지하는 마음은 그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 한마디로 그를 내 뜻대로 부리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28)

과거 독재 시절, 시대에 걸맞게 학교에는 사랑의 매라는 것이 있었다. 학생들을 미워해서 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때린다는 체벌의 논리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선생님이 학생들의 종아리에 매를 대는 순간 아이들의 고통이 느껴진다면, 과연 선생님은 계속 매를 댈 수 있을까. 한 대 두 대 때리면 때릴수록 아이들의 아픔이 느껴진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계속 때릴 수 있을까? 아내에 대한 사랑, 남편에 대한 사랑, 아이에 대한 사랑, 후배에 대한 사랑 등 타인에 대한 사랑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은 타인의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다시 말해 타인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의지이자 감정이기 때문이다.


(31)

사실 모든 생명체의 고통을 느끼고 그것들을 사랑한다면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하면 먹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자기 자신을 죽이게 된다.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우리는 배고픔의 고통을 견디다 굶어 죽을 테니 말이다. 식물도, 토끼도, 사슴도, 독수리도, 늑대도, 그리도 인간도 생명체다. 식물을 살리려고 토끼를 죽여서도 안 된다. 토끼를 살리려고 늑대나 인간을 죽여서도 안 된다. 엄청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사슴과 늑대가 동시에 배고픔의 고통을 토로한다면 싯다르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난감한 일이다. 어쩌면 이 딜레마, 이 난감함, 이 애절함, 그리고 이 간절함 속에서 산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일체개고의 진정한 의미, 혹은 고통의 기원이 아닐까.


(34-35)

내가 옆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최소한 그 사람이 나 때문에 더 힘들지 않게 하는 일이다. 존재한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고통을 가중시킬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메를로-퐁티의 최소 폭력의 논리가 고통에 대한 감수성에 기초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세계가 모두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고통을 완화시킬 수는 있다. 결국 죽을 때까지 우리는 걷지 힘든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나의 고통과 타자의 고통을 동시에 최소화할 수 있는 어떤 균형을 매번 찾아내야만 하는 길, 균형을 찾는다 해도 그것이 진정한 균형인지 여전히 의문이 남는 그런 개운치 않은 길 말이다.


(41)

진짜 사랑이 열정적인, 그리고 자발적인 노동을 낳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배부르면, 사랑하는 사람이 지인과 행복한 담소를 나누면, 사랑하는 사람이 건강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힘차게 잘 걸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명랑하면, 우리는 고맙기만 하다. 진짜 사랑할 때에는 질투라는 감정이 상대적으로 약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이 완화되었는지 여부뿐이기 때문이다. 잊지 말자. 질투심이 강해질수록 우리의 사랑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66-67)

놀이의 삶에는 근사한 표어가 주어진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표어이다. 반면 노동의 삶에도 그에 어울리는 표어가 있다.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라는 표어다. 이는 연애 시절과 결혼 생활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연애 시절에 우리는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상대방에게 몰입한다. 가장 좋은 음식을 사주고 값비싼 선물도 아끼지 않는다. 오늘 그 사람을 기쁘게 해주지 않으면 내일은 다시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면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하염없이 미루기 쉽다. 대출을 갚아야 하고 아이들 양육비도 생각해야 하니, 맛있는 스파게티나 여행 등 오늘의 행복을 속절없이 미루게 된다. 오늘이 수단이 되고 내일이 목적이 되는 순간, 오늘은 수단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83-84)

이렇게 현재의 삶을 수단으로 만들고 내일의 삶을 목적으로 만들면, 오늘의 행복은 계속 내일로 미루어지고 만다. 이런 식으로 반복하다 삶의 끝자락에 이르게 되면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행복한 적이 없다는 후회가 밀려올 것이다. 물론 이런 후회는 금방 사라질 수도 있다. 죽음 이후의 피안이나 이데아 세계, 혹은 기독교의 천국이 바로 눈앞에 있다고 마지막 기대를 걸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은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잘못된 생각, “오늘보다 내일이 더 중요하다는 기만적인 생각은 충만하고 아름다운 현재의 삶을 좀먹는 독약과도 같아.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은 영원을 꿈꾸면서 무상을 직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헛된 사유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114-115)

모든 존재는 영원하거나 불멸하지도 않고 동시에 순간적이거나 찰나적인 것도 아니다. 바로 이것이 제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실상(實相)’이다. 결국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영원과 불멸이라는 한 극단과 순간과 찰나라는 또 다른 극단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바로 이것이 싯다르타가 말한 중도(中道)의 의미다. <가전연경>에서 싯다르타는 산스크리트어로는 카차야나, 한문으로는 가전연(迦旃延)이라는 이름의 제자에게 말한다.

“’모든 것은 존재한다.’ 카차야나야! 이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카차야나야! 이것도 또한 하나의 극단이다. 카차야나야! 두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여래는 중도로써 하나의 가르침을 설한다!” 모든 것은 존재한다는 극단은 모든 존재에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자성이 있다는 입장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입장을 상견(常見)’이라고 부른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극단은 모든 존재가 어떤 연속성도 없이 끝없이 변화한다는 입장이다. ‘단견(斷見)’이라고 불리는 입장이다.


(130)

먼저 영원할 듯한 것에서 작은 변화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영원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가 그 대상에 관심과 애정을 기울일 가능성은 줄어드는 말이다. 아내와의 관계나 남편과의 관계, 혹은 친구와의 관계가 예전 같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미세한 변화를 포착하려고 노력하라. 돈독하던 관계에서도 조금씩 균열이 생기는 것이 보일 수도 있다. 어제와 다름없이 보이는 부모님, 아내, 남편, 아이의 얼굴에서 변화를 읽으려고 노력하라. 작은 주름 하나, 깊은 한숨 하나, 작은 새치 하나, 작은 어둠 하나를 찾아낼 수도 있으니 말이다.


(151-152)

카페에서 스마트폰을 잃어버린 남자의 사례를 통해 번뇌망집이 그 정체를 드러낸다. 카페에서 스마트폰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하다. ‘스마트폰을 카페 의자에 둔 것이 맞을까?’ ‘스마트폰을 카페 점원이나 손님들 중 누군가 가져간 것은 아닐까?’ 등등, 번뇌란 이런 것이다. 스마트폰의 없음을 경험하자, 그의 뇌리에는 사라진 스마트폰이 떠나지를 않는다. 그는 허탈해하며 카페에서 나와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미 없어진 스마트폰이야. 없는 건 없는 거지. 잊자!’ 하지만 스마트폰의 없음을 받아들이려 할수록 없어진 스마트폰에 대한 기억은 더 강해질 뿐이다. ‘잊자, 잊아라는 생각이 오히려 사라진 스마트폰을 떠오르게 하니 말이다. 바로 망집이다.


(176)

성숙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은 단순하다. 성숙하면 자신이 강해지고 자신이 많은 것을 가지게 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아끼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아파하게 된다. 간혹 아이들은 엄마가 아파서 밥을 못 해주면 짜증을 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는 엄마가 아플 때 혼자 라면을 끓여 먹는다. 바로 이때 아이는 나이와 상관없이 성숙했다고 할 수 있다. 아이의 마음이 타인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고요한 물처럼 작동한 것이다. 비록 아이지만, 이 순간 아이는 부처다. 자신의 배고픔이 아니라 엄마의 아픔에 사무쳐 있기 때문이다.


(197)

조금 도식적일 수 있지만 편의상 정리해보자면, 생성을 설명하는 데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 다양한 연들이 존재를 만든다는 연기의 논리’, 둘째로 하나의 원인과 많은 조건들이라는 인연의 논리’, 그리고 셋째로 하나의 원인과 하나의 결과라는 인과의 논리가 그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인과의 논리는 인연의 논리로부터, 혹은 저 멀리 연기의 논리로부터 단순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가지 논리는 지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어느 논리에 따라 살아가느냐에 의해 우리의 삶은, 우리의 미래는,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진다. 육아나 교육의 사례로 세 가지 논리의 상이한 효과를 생각해보자.


(216)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세상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너무나 쉽게 만성화된 슬픔, 고질적인 우울 속에 갇히게 된다. 행복과 기쁨이 더 이상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앞으로 앞으로삶을 밀어붙이면 알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이 부재하기에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하나의 인연이 끝나야 다른 사람과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이별이 절벽으로 떨어지는 수평선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앞으로 앞으로걸어나가면, “앞으로 앞으로배를 수평선 쪽으로 밀어붙이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다.


(227-228)

매달린 절벽은 사실 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놓으면 죽을 것 같다고 믿는 집착의 대상일 뿐이다. ‘매달린 절벽은 사람마다 다르다. 젊음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집일 수도 있고, 아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사랑일 수도 있고, 우정일 수도 있고, 타인의 인정일 수도 있다. 아이를 잡지 않으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사람에게 아이에게 그렇게 집착하지 말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권고하는 사람도 돌아보면 돈이나 건강을 매달린 절벽처럼 붙잡고 집착할 수도 있다. 또한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사람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려 해서도 안 된다. 그럴수록 그 사람은 더 억세게, 저 집요하게 매달린 절벽을 잡으려 할 테니 말이다.


(241)

독일 철학자 슬로터다이크(1947~) <냉소적 이성 비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성숙한 능력은 예스의 유일하게 타당한 배경이 되며, 이 둘을 통해 진정한 자유의 윤관이 비로소 뚜렷해진다.” “예스가 힘이 있으려면 라고 외쳤던 경험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스는 굴종의 표현이 아니라 자유의 표현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예스라고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244)

멈출 수 있어야, 혹은 그만둘 수 있어야 자유다. 멈출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고, 관계를 단절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라고 할 수 있어야 하고, 멈출 수 있어야 하고,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럴 때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당당해지고, 그만큼 우리는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게 된다. 멈출 수 있는 자유를 가슴에 품을 때, 그가 누구이든 상대방은 우리를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가슴에 사표를 품고 있는 직원에게 사장이 어떻게 갑질을 할 수 있을까? 캐리어를 들고 집을 떠날 수 있는 아내에게 남편이 어떻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학위쯤이야 우습게 여기는 학생에게 교수가 어떻게 사역을 시킬 수 있을까?


(249)

몸과 마음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면 우리는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몸과 마음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면 주인이 아니라 노예의 삶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301)

무엇이든 애지중지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어쨌든 애지중지하는 대상은 그 존재만으로 우리 삶을 기쁨으로 물들이고, 우리 삶에 의미를 제공하며, 우리 삶을 활기차게 한다. 어떤 것도 아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봐라. 삶은 짙은 잿빛으로 우울하게 변할 것이고, 그러한 삶을 사는 우리는 심각한 우울과 무기력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문제는 애지중지하는 대상이 인간일 때 발생한다. 타인을 아낀다는 것은 그를 대신해 그의 수고를, 그의 고통을, 그리고 그의 노동을 감내하며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짐을 짊어지고 심지어 그 사람을 업으면서도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끼는 사람을 최소한 한 명 가진 셈이다.


(303)

아끼는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소중한 사람이다. 아끼는 사람이 무언가 해주기를 원하는 순간, 아낌의 관계는 무너지고 그 자리에 너저분한 거래 관계가 들어선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도 이만큼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이제 상대방이 나의 애지중지하는 모든 행동을 일종의 부채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아낌의 관계는 막장을 향해 치닫고 만다. 이런 비극을 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아끼는 사람을 반려견이나 반려묘처럼 보는 연습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물을 가져다 달라고, 밥을 해달라고, 쓰레기 봉투를 버려달라고, 청소를 해달라고 할 수도 없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아듣는다 해도 쫑긋한 귀와 해맑은 눈, 그리고 네 다리를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327)

우리 각자에게 아끼는 대상이 어머니일 수도, 아버지일 수도, 아내일 수도, 남편일 수도, 아일 수도, 친구일 수도, 반려견일 수도, 반려묘일 수도, 아니면 화초일 수도 있다. 아끼는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의 행복에 있어 한 공기의 연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농부의 물꼬 트기처럼 이 한 공기의 연을 우리가 채우지 못하면, 아끼는 사람의 삶은 불행에 빠진다. 그러니 좋은 공기, 맛있는 음식, 쾌적한 잠자리, 따뜻한 태양, 싱그러운 바람, 아름다운 음악, 근사한 영화, 멋진 식당, 의사와 간호사, 친구들 등등이 아끼는 사람에게 건강한 연이 되어줄 때, 우리는 충분히 쉬어야 한다. 잘 쉬고 맛있는 것을 먹고 잠도 잘 자야 한다. 우리게는 한 공기의 연을 채워야 할 때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333)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아이를 아끼기 때문에 노심초사하며 아이가 잘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영어 학원에 보내고 태권도를 가르치고 수영 강습도 받게 하고 피아노도 가르치고 방학마다 여행을 가고 캠핑도 간다. 문제는 엄마가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원해야만 한다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 혹은 언젠가 아이가 원할 수도 있다고 자신이 믿는 것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아이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고, 웃음과 미소를 점점 잃어가게 될 것이다. 반대로 간혹 우리는 아이를 방임해서 키워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엄마도 있다. 김을 매지 않아 잡초들에 둘러싸인 벼처럼, 아이는 경쟁적 교육 환경, 왕따를 시키는 차별적 문화,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에 둘러싸여 시름시름 앓게 될 것이다. 결국 엄마는 아이가 잘되기를 바라되 지나치게 관여해서는 안 되고, 관여하지 않되 완전히 잊어서는 안 된다.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완전히 알 때까지, 혹은 엄마가 아이가 원하는 것을 알 때까지, ‘조장사이 혹은 물망물조장사이 그 어딘가를 지키며 균형을 잡아야 한다.  아끼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다.


(342-343)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이만하면이라는 말로 가늠할 수 있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다. 사랑했거나 사랑하지 않았거나, 제대로 살았거나 그러지 못했거나, 행복했거나 행복하지 않았거나, 자유롭거나 자유롭지 않았거나, 이제 이만하면이라는 말을 우리 삶의 사전에서 지우도록 하자.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 재산이나 소비수준과는 무관하게 전적으로 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잘 사랑하려면, 제래도 살려면, 정말 행복하려면, 그리고 자유로우려면, 우리는 이만하면이라는 전체를 붙인 너저분한 자기만족과 정신 승리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아직까지 제대로 영위하지 못했다고, 아직도 부족하다고 이야기하자. 그래야 우리에게는 제대로 사랑하고, 제대로 살아가고, 제대로 행복하고, 제대로 자유로울 수 있는 희망이 생길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