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세상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 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벗겨 낸 세상의 비밀을 한 겹씩 먹으면, 어떤 비밀은 소화되고 흡수되어 양분이 되고, 어떤 비밀은 몸 구석구석에 염증을 만든다. 비밀의 한 꺼풀을 먹지 않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의 시스템은 그걸 먹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도록 설정되었다. 그러니 언젠가는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시기가 너무 이르면 소화하지 못해 탈이 나거나 목이 막혀 죽기도 하고, 너무 늦으면 비밀을 흡수하지 못하고 그대로 배출시켜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텅 빈 몸이 된다.


(49)

감정에 가라앉는 건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고, 무언가에 슬픔을 느꼈다면 그 슬픔을 다시 느끼지 않도록 원인을 분석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테면 현재가 울 때마다 미래는 현재를 울게 만든 원인을 찾아 없애는 식이었다. 놀리는 애가 있으면 찾아내 혼내거나 어른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며, 시험을 망쳤을 때는 울어 봤자 성적이 바뀌지 않으니 그 시간에 차라리 영어 단어나 외우고 수학 문제 하나라도 더 풀라고 말했다. 몇몇 친구는 그런 미래의 화법을 불쾌하게 여기거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나인과 현재는 그런 미래를 좋아했다.


(112)

찰나의 표정이란 감정을 가장 진솔하게 비추는 호수의 수면 같은 것이다. 조그만 충격에도 금방 흩어지고 만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한때, 잠시 생겼다 사라지는 마법 같은 것이다. 그러니 원망할 수가 없다. 미워할 수도 없고. 어쩌겠는가. 안쓰럽다는 걸, 불쌍하다는 걸, 가엾다는 걸, 애잔하다는 걸. 때때로 어떤 이들의 표정은 파도같이 잔잔하게 밀려오다 부서지고 흩어진다.


(118)

우연. 핑계로 쓰기는 좋지만 실상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 치사한 단어.


(119)

우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난다. 세상이 정말 정해 둔 것처럼. 쥐 죽은 듯이 기다리다가 해결사가 나타나면 그제야 소리친다. 꽁꽁 숨어 있다가. 평소에는 보이지도 않다가. 이렇게 갑자기.

정말 치사하게.


(189)

살아간다는 건, 적응한다는 건, 익숙해진다는 건, 버텨야 한다는 건, 존속한다는 건, 그러니까 끈질기게 존재한다는 건, 세계라는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무게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지한다는 건 지킨다는 것이고 동시에 버린다는 것이다. 지켜야 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버려야 하는 건 존재했던 모두다.


(376)

그렇게 어떤 일은, 죽음은, 억울함은, 호소는 한없이 뒤로 밀리고 밀려 세상 밖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걸, 그렇게 사라지지도 분해되지도 해결되지도 않은 상태로 우주를 떠돌게 된다는 걸 미래는 아직 모른다. 영원히 몰랐으면 좋겠지만 조금씩 알게 되겠지. 그걸 알아가는 게 살아가는 것이고, 나이를 먹는 거겠지. 그렇다면 이것도 알게 됐으면 한다. 세상 밖으로 밀려나는 건 온몸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 명이 막는 것보단 여러 명이 막는 게 더 좋다는 것, 무른 흙도 밀리고 밀리다 보면 어느 순간 아주 단단해진다는 것.


(411)

이 꽃이 처음 싹을 틔웠을 때는 이 세상이 지구였는지도 몰랐을 거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채 일단 있는 힘껏 세상 밖으로 나와 봤겠지. 물을 머금지 못하는 흙과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시선과 앞으로 겪어야 할 많은 시련이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다른 씨앗들처럼 일찍이 삶을 포기했을 텐데, 땅에 있을 때부터 나인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밖에 하지 못해 기어코 세상에 나왔다. 그렇지만 나인은 후회하지 않는다. 이 행성이 자신의 행성이 아니라는 걸 알아도 외롭지 않다. 후회한다고 해서 다시 땅속으로 기어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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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오늘 아침 강조하고 싶은 점은, 저는 현상황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책임은 클레오파트라에게 있습니다. 그 여자, 오로지 그 여자 탓입니다! 꾸준히 서쪽으로 진군한 사람은 클레오파트라지, 그 여자의 꼭두각시요 인형인 안토니우스가 아닙니다. 그가 추는 춤은 이집트의 춤입니다. 저나 로마나 무슨 짓을 했다고 육군과 해군의 위협을 받아야 합니까? 로마와 저는 우리의 의무를 다했을 뿐, 동방에 있는 안토니우스를 위협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서방을 위협할까요? 정답은, 우리를 위협하는 사람은 그가 아니란 겁니다! 그가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입니다!”


(85)

한마디로 말해 안토니우스는 개별 전투를 지휘할 수 있는 있어도 전체 군사작전을 지휘하지는 못했다. 모든 게 잘되리라 여기는 그의 낙천적인 믿음은 끊임없이 등한시되는 병참과 보급품 문제에만 이르면 그를 저버렸다. 게다가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만족시키는 데 골몰한 나머지 장비와 물자에 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비위를 맞추느라 온 힘을 써버린 탓이었다. 그의 참모진에게는 이것이 약점 같아 보였지만, 안토니우스의 진짜 약점은 그가 클레오파트라를 죽이고 그녀의 군자금을 몰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를 향한 애정과 그의 정정당당한 승부 정신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197-198)

로마인들이,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이 민족이 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신격화했는지 말해주겠소. 그건 정말이지 로마인답지 않은 행동이거든. 사람들은 그를 사랑했소! 휘하 병사들이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 했다는 장군들은 많았지만, 로마와 이탈리아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 했던 이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밖에 없소. 그분은 포룸 로마눔을 걸을 때, 로마나 다른 이탈리아의 도시의 뒷골목과 빈 민가를 걸을 때 마주치는 사람 모두를 동등하게 대했소. 그들과 농담을 주고받고 그들의 소소한 넋두리에 귀를 기울이고 도움을 주려 애썼소. 수부자 지구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최하층민 무리 속에 있을 때면 그들의 일원처럼 행동했소. 그들의 은어를 사용하고 그곳 여자들과 잠자리를 했으며 그들의 냄새나는 아기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의 힘든 처지에 공감하여 울기도 다반사였소. 그러다 저 교만하고 지독한 속물들과 돈밖에 모르는 자들이 그를 살해했으니, 로마와 이탈리아 인민들은 그를 잃는 걸 견딜 수 없었던 거요. 바로 그들이 그를 신으로 만들었소, 원로원이 아니라! 실상 원로원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주도하에! – 어떻게든 카이사르 숭배를 진압하려 했지. 그래봤자 소용없었소. 그의 피호민이 군대였기에 나는 그분의 재산과 함께 군대도 상속받았소.”


(250)

옥타비아누스는 서른다섯 살로 일곱번째 집정관을 지내고 있던 1월의 열세번째 날 원로원을 소집했다. “이제 제 모든 권한을 내려놓을 때가 되었습니다. “ 그는 말했다. “위험은 지나갔습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 불쌍한 얼간이가 죽은 지도 2년 밤이 지났고 그를 추악하게 타락시켰던 짐승들의 여왕도 그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 시기 이후의 소소한 공포와 일시적인 두려움도 모두 사그라졌으며, 그것은 로마의 힘과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로마의 충실한 수호자였고 로마의 지칠 줄 모르는 투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원로원 의원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제 모든 속주를 포기하겠습니다. 곡물이 나는 섬들, 히스파니아, 갈리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아시아 속주, 아프리카, 키레나이카, 비티니아, 시리라 등입니다. 이 속주들을 로마 원로원과 인민의 손에 넘기겠습니다. 제가 유지하고 싶은 것은 저의 존엄, 그에 수반되는 전직 집정관이자 여러분의 원로원 최고참 의원으로서의 자격, 그리고 명예 호민관으로서의 개인적인 지위가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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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마케도니아를 바라보는 관점은 카이사르가 로마를 바라본 관점과 달랐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기 자신을 우선시했고,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보다는 스스로가 신이 되기를 꿈꾸었다. 물론 그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은 그의 죽음과 함께 멸망했다. 반면에 로마라는 제국은 한 사람이 죽는다 해서, 아니 여러 사람이 죽는다 해도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로마인은 한시적으로 태양의 자리를 차지할지언정 결코 자기 자신을 태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기 자신을 태양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도 그런 것인지 몰랐다. 그랬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그만의 태양을 원했다. 그리고 그의 태양은 로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 그의 태양은 로마의 것이 아니었다!


(145)

이 모든 생각을 하는 와중에 클레오파트라의 마음속에 남자이자 애인으로서의 마르투스 안토니우스는 단 한 차례도 수면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그걸 어떻게 손에 넣을지 궁리하기에 바빴다. 안토니우스와 함께했던 시간은 마음 깊숙한 곳 어딘가 남은 희미한 기억 속에서 퍽 유쾌한 기분전환이긴 했지만, 최종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염증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단 한 번도 안토니우스에게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수단일 뿐이었다. 그녀는 그를 통해 잉태했고, 나일 강이 범람했으며, 카리사이온은 결혼할 누이와 그를 도울 남동생을 얻었다. 지금 단계에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권력뿐이었다. 그러니 클레오파트라는 그가 가진 권력의 일부를 뜯어내야 했다. 어려운 주문이야, 클레오파트라.


(237)

저는 결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동방의 일을 말씀드려야만 합니다. 즉 임페라토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일입니다. 우선 로마는 필리피 전투 직후, 그러니까 약 6년 반 전에 그가 동방의 트리움비르 직을 얻은 후로 공세를 거의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로마, 이탈리아와 섬들의 트리움비르인 제가 방금 일부 세금을 감면할 수 있었던 것은 제 자신이 노력한 결과입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도움이나 기여는 전혀 없었습니다. 앞쪽과 중간 벤치의 어느 분이 벌떡 일어나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처단한 제 작전을 위해 배 120척을 기여했다고 말씀하시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그 배들을 빌미로 로마에 돈을 요구했습니다. , 정말로 로마에 돈을 요구했습니다! 얼마나 요구했냐고요? 4 4천 탈렌툼입니다. 의원 여러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보물창고 내용물의 40퍼센트에 달하는 액수죠! 나머지 6 6천 탈레툼은 제가 아니라 로마가 가져갔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저는 받은 것이 없습니다! 로마로 들어간 자금은 엄청난 공적 부채와 상환과 곡물 공급 관리에 쓰였습니다. 저는 로마의 종이며, 로마의 주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로마로부터 이익을 보는 경우는 그 이익이 유서 깊은 관습일 때뿐입니다. 안토니우스의 배 120척은 한 척당 360탈렌툼이 들었으며, 그가 빌려준 것이지 제공한 것이 아닙니다. 5단 노선 한 척의 값은 100탈렌툼이지만 우리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함대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고는 비어 있었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처리하기 위한 우리의 작전을 일 년 더 미룰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이름으로 저는 그 착취에 동의했습니다. , 정말이지 착취입니다!”


(357-358)

카이사리온은 어머니의 한계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왜 안토니우스한테서 로마인다움과 독립성, 판단력을 박탈하려 애쓰는지도 알았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만이 어머니를 만족시킬 터였고, 그런 그녀에게 로마는 적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로마 같은 명실상부한 패권 국가가 전쟁 없이 그녀에게 굴복할 가능성은 없으니까. , 그가 조금만 더 나이가 많았더라면! 그러면 진짜 대등한 자로서 클레오파트라와 대면하여 그녀가 그를 위해 원하는 것을 그는 원치 않는다고 대담하게 말할 수 있을 텐데. 지금까지 카리사리온은 어머니에게 자신의 감정을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어린애의 생각이라고 무시해버릴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한 번도 진짜 어린애였던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조숙한 지력을 닮았고 어릴 적부터 왕의 지위를 보유한 카리사리온은 피바다에 빠진 굶주린 개처럼 지식을 빨아들였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배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고, 필요할 때 바로 기억해낼 수 있도록 저장하고, 한 주제에 관해 충분히 지식이 축적되면 분석했다. 그러나 그는 권력에 현혹되지는 않았는데, 아버지도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끔씩 카이사리온은 아버지도 그랬을 거라고 추측했다. 카이사르가 올림포스 산만큼 높이 솟은 이유는 그저 그러지 않으면 추방당하고 로마의 기록에서 모든 언급이 삭제될 처지였기 때문이라고. 그건 카이사르로서는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아려고 그렇게 애쓰진 않았다, 왠지 카이사리온은 그걸 알 수 있었다. 내 아버지, 내가 아장아장 걷던 아기였을 때 본 그의 얼굴을, 훤칠하고 강인한 그의 몸을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너무도 보고 싶은 나의 아버지. 안토니우스는 훌륭한 사람이지만 카이사르가 아니다. 지금 내게 조언을 해 줄 아빠가 필요하지만, 이뤄질 수 없는 바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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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당신이 미다스보다도 더 갈망하는 황금의 아주 작은 일부를 제공받는 대가로 말이죠. 이봐요, 안토니우스, 좀 솔직해져요! 날 이곳으로 부른 건 로마 내전 탓에 당신의 멋진 동방이 파산 지경에 이르렀고, 그 탓에 어느 순간 이집트가 거대한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보였기 때문이잖아요. 말은 똑바로 하세요!” 그녀는 톡 쏘듯이 말했다. “이집트의 황금은 이집트 소유예요. 이집트는 로마의 우호동맹국이고 로마와 협약을 위반한 적이 없어요. 이집트의 황금을 원한다면 당신은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 내게서 강제로 빼앗아야만 할 거예요. 그리하려고 해도 결국 실망하게 될 거고요. 델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작성했던 한심한 미술품 목록은 거대한 황금알 더미에 포함된 하나의 황금알일 뿐이에요. 그 황금알 더미는 꽁꽁 감춰져 있어서 당신은 절대 찾아낼 수 없을 거예요. 그것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나와 내 사제들뿐인데, 당신이 우리를 고문한다 해도 아무것도 알알아낼 수 없을 거고요.”


(194)

섹스투스는 동방을 자기 몫으로 선택한 안토니우스의 근시안적 판단을 믿을 수 없었다. 지성이라는 게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동방이 함정이라는 것을, 끔찍한 낚싯바늘에 매달린 미끼용 황금이라는 것을 눈치챌 터였다. 이 세상의 지배권은 이탈리아와 서방을 다스리는 사람에게 넘어갈 터였고, 그 사람은 옥타비아누스였다. 물론 그것은 가장 힘든 일, 가장 인기 없는 일이었기에 레피두스는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6개 군단을 얻어 아프리카로 황급히 달아났다. 그곳에서 때를 기다리며 더 많은 병력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 역시 멍청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옥타비아누스는 망설임 없이 가장 힘든 임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장 무서운 상대였다.


(241)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그런 유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불명예나 추방령보다 내전이 더 끔찍했다. 또한 그에게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보장해주는 군사적 천재성도 없었다. 옥타비아누스의 방식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존엄을 서서히 갉아먹어, 그가 더는 위협요소가 아니게 될 정도로 그 존엄을 밑바닥까지 추락시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는 옥타비아누스의 별이 점점 하늘 높이 올라갈 터였고, 안토니우스가 아닌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일인자가 될 터였다. 하루 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니므로 오랜 세월이 걸릴 터였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그 오랜 시간을 감내할 수 있었다. 그는 안토니우스보다 스물한 살 어렸다. , 수년 동안 이탈리아 사람들을 먹이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퇴역병들에게 땅을 마련해주기 위해 고생할 일을 생각해보라!


(301)

그래, 신들을 도발하면 어찌되는지 잘 알겠지? 옥타비아누스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자문했다. 나는 저급한 감상주의를 혐오해왔어. 큐피드의 화살에 맞아 여자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주장하는 사내들을 나약한 인간으로 여겼지. 그런데 여기 내 가슴팍에 화살이 꽂혀 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헤아릴 수 없이 사랑하게 되었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어떻게 내가, 늘 이성적이고 초연하던 내가 지금까지 믿어온 모든 것과 상치되는 감정에 굴복한단 말인가? 그 여자는 어느 신이 내려보낸 환영이었어. 그랬어야만 해! 그렇기 않고서야 어떻게 내가! 나는 이성적이고 초연한 사람이라고! 그런 내가 어떻게, 어떻게 사랑이라는 감정의 파도에 이리도 휩쓸린단 말인가? , 그녀는 내 마음을 완전히 흔들어놓았어! 그녀의 괴로움을 내가 모두 짊어지고 싶었어. 그녀에게 키스를 퍼붓고 싶었어, 여생을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어! 리비아 드루실라. 저 가식적인 속물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아내. 저 쓰레기통 분가에서 나온 또다른 클라우디우스 집안 남자. 클라우디우스 가문에서도 풀케르 분가는 기이하고 독자적이며 비정통적인 집정관과 감찰관 들을 배출한 반면에 네로 분가 출신들은 그저 하등 볼품없는 인간이었다. 네로도 그랬다. 오만하며 고집 세고 시시한 인간.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간청한다고 자기 아내와 이혼해줄 인간이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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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이렇게 위험하고 힘든 환경에서도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떠나지 않고 있는 이유를 묻자, 그는 레바논이 전쟁 중이라 해도 사람은 살아야지요. 아이들에게 예방접종도 해야 하고요. 나는 이스라엘이고 팔레스타인이고 따지고 싶지 않아요. 사람이 살아야 싸우기도 하는 것 아닙니까. 난 최소한 사람을 살리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의사니까요.”라고 대답해서 내 눈에 눈물이 고이게 했단다. 그분은 내가 만난 의사 중에 가장 아름다운 분이었어. 너희 세대가 자라서 마하르처럼 훌륭한 의사가 많이 나오길 바란단다. 그의 말대로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이니 팔레스타인이니 해도 사람이 살아야 싸움도 하는 거야. 사람의 생명이 우선이라는 것을 실천하는 그를 보며 아마도 레바논 전쟁의 해답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단다.


(41)

탈레반은 우리말로 이슬람 신학생이라는 뜻이야. 가장 엄격한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라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믿는 거지. 샤리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야. 여성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가려야하고, 도둑질을 하거나 간통하면 공개 처형을 해. 지구상에는 이 샤리아 이슬람을 믿는 나라가 여럿 있어. 아프가니스탄뿐만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나 수단, 소말리아도 샤리아를 믿거든.


(73)

이슬람교는 무함마드가 1500년 전 창시한 종교란다. 그런데 마함마드가 632 6 8일 메디나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 그 때 이슬람 사람들은 엄청나게 당황했어.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무함마드의 장례식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회의가 열렸어. 그때까지 해도 이슬람은 종파가 따로 있지 않은 하나의 교단이었는데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에서 서로 다른 후계자를 내세웠단다. 메카의 이슬람 사람들은 무함마드와 가장 친하고 신뢰받는 친구인 아부 바크르를 후계자이자 지도자로 추대했지. 아부 바크르를 지도자로 선택한 사람들이 바로 수니파란다. 그러나 메디나에서는 무함바드의 딸 파티마와 결혼한 알리가 선거를 통해 무함마드의 후계자이자 이슬람 지도자로 선출되었어.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와 그의 지지자들이 만든 거란다. 말하자면 무함마드 친구파가 수니파이고, 무함마드 사위파가 시아파야.


(116-117)

체첸의 독립으로 막대한 석유 이권을 잃고 싶지 않았던 러시아는 9.11 테러 직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는 것을 눈감아 주었단다. 그 대신 체첸의 반군 지도자가 국제 테러 조직과 연관 돼 있다며 체첸을 탄압하는 데 대한 미국의 동의를 얻어 냈어. 이로써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고, 러시아군은 거리낌 없이 체첸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 냉전 시대에 라이벌이던 미국과 러시아가 이렇게 죽이 잘 맞는 친구가 된 것은 중동의 석유 통제권을 장악하려는 미국과 체첸의 석유 통제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덕분이란다. 미국이 러시아의 체첸 인권 탄압을 외면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187)

전쟁이라 하면 우리는 폭격으로 집이 날아가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장면만 떠올리지. 그러나 전쟁의 비극은 그뿐만이 아니야. 전쟁의 상처는 보이지 않는 곳에 더 많이 있단다. 미군의 폭격이 아니었다면 네다는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다 채우고 태어났을 테지. 네다의 부모는 한 달 동안 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네다를 잃고 말았단다. 네다는 아랍말로 이슬을 뜻하는데, 아이는 그렇게 이슬처럼 사라져 갔단다. 아마 네다의 이름은 이라크 민간인 사망자 명단에도 들어가 있지 않을 거야. 지금도 나는 그 가족이 한 달간 네다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 전쟁은 그렇게 사람들 가슴속에 큰 상처를 남긴단다.


(211)

문제는 양쪽의 극단주의자와 정부야. 이들은 서로 비난하고 시민의 안전을 볼모로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정치를 하는 거야. 나는 진심으로 이들이 정치적인 문제를 뒤로하고 양쪽의 시민 목소리와 노력에 귀를 기울여 주었으면 해. 어렵겠지만 이제는 서로 미사일을 주고 받는 통에 아이들이 무서워서 학교를 가지 못하고 엄마들이 아이들을 걱정하는 세상을 만들지 않게 노력해야 해. 그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 싸우지 않고 평화로워질 거야. 그러려면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함께 지혜로운 해답을 찾기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해. 지구 저편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우리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진심 어린 관심을 보여 준다면 훗날 그들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264-265)

미국은 콜롬비아에 파나마운하 건설권을 요구했어. 정치적으로 힘이 약한 콜롬비아 정부는 미국의 정부는 강요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미국에 파나마운하 건설권을 승인해 주었지. 그러자 콜롬비아 의회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고, 심기가 불편해진 미국은 1903년에 파나마가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선해 버렸어. 느닷없이 콜롬비아가 둘로 쪼개진 거야. 오늘날 파나마는 그렇게 탄생한 나라란다. 콜롬비아는 미국에 파나마와 운하 건설권 모두를 빼앗기고 말았지.


(268)

마르켈탈리아 정글에 모인 게릴라들은 국민 복지를 가장 먼저 생각해서 길을 닦고 아이들이 다닐 학교를 세웠어. 그리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원주민과 흑인, 빈민, 여성 편에 섰지. 하지만 콜롬비아 정부는 그들은 국제 공산주의의 첩자들이라고 몰아세우며 소탕 작전에 열을 올렸어. 요즘에는 테러리스트라는 말이 싸워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되지만 당시는 냉전 시대니까 공산중의라는 말이 싸워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되었지. 공산주의나 테러리즘 이런 말들은 어쩌면 미국이 싸워야 하는 이유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것인지도 몰라. 이 논리 뒤에는 항상 미국의 지원이 있었단다. 미국은 공산주의 국제적 확산을 막는다는 이유로 콜롬비아의 게릴라를 없애기 위한 플랜 콜롬비아계획을 세웠어. 케네디 대통령 시절부터 지금까지 콜롬비아에 적용되고 있는 플랜 콜롬비아는 게릴라 축출을 명목으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콜롬비아의 석유를 노린 거야.


(297)

나는 수 치 여사를 보며 아무리 민주화 투사라도 정의를 제대로 보고 배우지 않으면 언제든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수 치 여사는 아웅 산의 딸로서 살았고 영국에서 공부했지만 인권 의식을 제대로 배우지는 못한 듯해.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야. 세계는 민주화 투사의 배신이라고 말하지만 원래부터 수 치 여사는 로힝야족의 인권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었던 거이란다. 세상 사람들은 수 치 여사가 모든 것이 훌륭한 거라고 막연하게 기대했으니 배신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정의는 머리로 알더라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단다. 그래서 엄마는 너희에게 정의인권을 제대로 잘 알려 주고 싶어. 배우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그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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