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새만금 간척사업은 유사 이래 우리나라 최대의 토건사업으로 30년째 진행 중인 사업이다. 2050년까지 사업을 계속한다는 것이 정부의 계획이다. 그러나 정부의 계획대로 새만금사업이 진행된 역사가 없다. 앞으로 50년이 걸릴지 100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현재 새만금사업은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사업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최초에는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이후에는 동북아 경제 중심지로, 한중 경협특구로, 현재는 그린뉴딜 1번지로, 새만금 국제공항 건설로, 그동안 제대로 된 개발 없이 새만금사업은 표류해왔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전북도민들의 탐욕을 부추기고 기대감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사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업이 계속되는 한 시민사회의 새만금살리기 활동도 계속될 것이다. 새만금 살리기운동의 짐이 미래세대에게로 계속해서 이어질 전망이다. 개발과 성장 중심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평화로운 새만금이 언제 온 수 있을지, 걱정과 함께 기대를 품어본다.


(51)

신고리 5.6호기 패배의 후유증은 참으로 컸다. 그때까지 존재했던 탈핵 전국 조직이 다 와해되었을 뿐 아니라 향후 진로를 둘러싸고 탈핵진형을 두 조각내고 말았다. 전국공동행동은 경험 있는 활동가들이 모두 사퇴하고 나니 자연히 구심점을 잃고 흐지부지되고 말았고, 원전 5개 지역 활동가들이 모인 탈핵지역대책위마저 내부갈등으로 회의를 할 때마다 삐걱거렸다.


(70)

하버드 경영대학 명예교수인 쇼나나 주보프는, <감시자본주의의 시대>(2019)에서 구글의 이러한 자본 전략을 감시자본주의로 규정한다. 이 책에서 감시자본주의라는 용어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1. 인간의 경험을 무료로 추출하여 예측, 판매로 이어지는 숨은 상업적 행위의 원재료로 이용하려는 새로운 경제질서

2. 상품과 서비스 생산이 전지구적 규모의 새로운 행동수정 아키텍처(테크놀로지 구조)에 종속되는 기생적 경제논리

3. 인류역사상 전례 없는 부, 지식, 권력의 집중을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 악성 돌연변이

4. 감시경제의 토대를 이루는 틀

5. 19세기 및 20세기에 산업자본주의가 자연에 가한 위협에 견줄 만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위협

6. 새롭게 등장해 사회를 지배하려 들고 시장 민주주의에 갑작스러운 도전을 제기하는 도구주의 권력의 기원

7. 총체적 확실성에 근거해 새로운 집단적 질서를 부과하려는 움직임

8. 위로부터의 쿠데타에 상응하는 중대한 인권박탈, 즉 국민주권의 전복


(71)

여기서 주의할 점은 감시자본의 고객은 많은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사용자인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 자신이 고객의 지위를 누려야 할 것처럼 생각하지만 감시자본의 고객은 따로 존재한다. , 감시자본의 고객은 사용자의 행동잉여 데이터의 분석을 통해 만들어진 맞춤형 광고를 사가는 광고주이다. 구글은 사용자의 서비스 개선에도 데이터의 일부를 활용하지만 이보다 훨씬 많은 양의 데이터를 광고에 활용한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구글과 같은 감시자본에게 사용자는 행동잉여 데이터라는 원재료를 무상으로 공급해주는 자원일 뿐이다.


(72)

감시자본은 우리의 행동을 수집하고, 분석하고, 예측하여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시 우리의 행동을 유도하고, 조종하고, 통제해나간다. 우리는 구글에서 자신이 필요한 것을 검색한다 생각하지만, 실상은 역으로 우리가 구글에 의해 검색당하는 것이다. 감시자본 아래에서 우리는 자유의지를 지닌 주체가 아니라 수집, 분석, 추출의 공정에 던져진 재료로서 존재한다. 감시자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데이터로 전락한다.

감시자본의 이러한 도구주의적 권력 속성은 인간에게서 반성적 의미 작용을 빼앗아 동물적 존재로 격하시키민주적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간의 능력과 자기이해를 갉아먹으며 내부로부터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73)

감시자본은 우리의 경험과 행동을 데이터화하여 도구화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전혀 관심 갖지 않는다. 감시자본의 대상이 되는 순간부터 사용자 개인은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고 데이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극단적 무관심과 타자화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여기서 말하는 극단적 무관심이라는 것은 감시자본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주체인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같은 의미에서 감시자본주의하에서 우리는 자유의지와 존엄한 가치를 지닌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감시자본의 입장에서 우리는 그저 매 순간 구글의 검색창에 정보를 입력하고 페이스북의 좋아요를 누르며 인스타그램에 자신해서 사진을 올리는, 생체정보를 지닌 유기체일 뿐이다.


(124)

농민 중심의 민중 자치는 근본적으로 흙(지구)과의 건강한 관계를 기초로 한다. 그것은 농민이 볼 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흙이 만물을 살려내는 기본 바탕임을 직관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한 톨의 곡식처럼 한 줌의 흙도 소중하다. 이런 겸허한 자세가 전제되지 않으면 공동체는 어렵다.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을 실천할 수 있어야”(<녹색평론> 창간사) 좋은 삶이나 공동체의 전망이 열린다.


(135)

풀뿌리 민주주의개념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풀과 뿌리는 비바람과 폭설에 쓰러지고 파묻히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생명력이 있다. 5월의 신록조차 한겨울과 초봄의 갈색 잎들 사이로 풀뿌리가 뿜어내는 기운을 받아 하나씩 새잎을 튀운 결과다. 새 손톱이 헌 손톱을 멀어내는 손톱갈이를 하듯, 새 잎사귀가 헌 잎사귀 사이로 돋아나며 해마다 산천갈이를 한다. 그러나 헌 잎사귀는 단지 새 잎사귀로 교체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썩어 거름이 됨으로써 새 에너지원이 된다. “희생 없이는 우정도 없다던 선생의 말처럼 지난가을 낙엽들이 거름이 됨으로써 풀뿌리와 신록을 살려낸다. 나아가 풀뿌리 그 자체는 서로 얽히고설켜 아무리 뜯기고 짓밟혀도 한두 가닥 살아남아 한사코 일어선다. 바로 이런 면들이 우리가 그토록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까닭이다.


(142)

시인 지망생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1965년 서울대 영문학과에 입학하는데 영문학에 큰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생의 문학론집 <대지의 상상력>(2019) 서문에 따르면, 서양적인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 그리고 영어를 익히면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맹목적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영문과의 한 연구실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줄 강력한 언어와 만납니다.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 새는/온 하늘을 분노로 떨게 한다. / 주인집 대문 앞에 굶주려 쓰러진 한 마리 개는 / 제국의 멸망을 예고한다.” 다름 아닌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였습니다. 그날 이후 영문학도는 블레이크의 근원적 상상력과 철저한 민중성, 그리고 예언자적 풍모(정직성)에 사로잡힙니다. 선생이 보기에 블레이크는 민중적 전통에 입각해 억압적 부르주아체제에 대하여 가장 근본적인 비판에 도달한 근대 최초의 지식인이자 사상가였습니다.


(147)

“<녹색평론>은 이른바 발전혹은 진보의 이름 밑에서 인간생존의 사회적 자연적 토대를 끊임없이 훼손하는 일체의 움직임, 논리, 사고, 제도, 관행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는 늘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했고, 동시에 어떻게 하면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고 공정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구축할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 왜 우리가 민주주의의 심화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를 끊임없이 이야기해왔다.” 선생이 단호한 어조로 밝힌 <녹색평론>의 정체성과 지향점은 곧 김종철 문학의 그것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생의 문학은 전환의 문학이었습니다. 근대문명을 넘어 생태문명으로 전환하는 모든 과정과 부문에 적극 개입하는 모든 형태의 문학.


(176)

김종철 선생은 가난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그것은 물론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깨끗하고 품위 있는 가난으로, 그런 가난이야말로 우리의 인간성을 고양시키는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물 마시고 나물 먹고 그러면서 달을 희롱하는 따위의 안빈낙도하고는 다르다. 선생이 말하고자 한 것은 늘 어울려 일하고 즐기는 삶의 중요성이었다. 물론 우정과 환대에 기초한 그런 삶을 꾀하더라도 생태학적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 가난은 그 조건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필수적이다. 말하자면 공생공락의 혹은 공생공락을 위한 공빈론인 것이다.


(197)

독재로부터 벗어나 선거대의제로 목소리를 찾게 된 민중이 느끼는 환희에 대해서는 언제나 언론에 크게 보도가 된다. 그러나 혹은 나중에 이들 가운데 실망감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뉴스가 되지 못한다. <이코노미스트>(2009 11 4일 발행)의 한 기사는, 대부분의 공산주의국가들이 몰락하고 20년이 지난 뒤 시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사해보았더니 오직 절반만이 서구식 자유와 자본주의로 전환된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러한 전환으로 인해 혜택을 본 것은 보통사람들보다 기업과 정치 엘리트들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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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1-07-29 2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만금 기사 봤는데 너무 끔찍했어요ㅜㅜ 죽어가는 늪이 가슴 아프더라구요. 제발 개발 좀 그만하면 좋겠다 생각했어요ㅠㅠ

bookholic 2021-07-30 05:20   좋아요 1 | URL
새만금... 새만금... 오래 전부터 들어온 지역이라서 개발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말에 놀랐습니다. 무엇을 위한 개발인지 모를 개발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이젠 정말 멈췄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