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송곳니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노나미 아사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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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스터리 소설이지만 가족 소설을 읽으며 느끼곤 하던 가슴 한구석에 피어오르는 뭉클함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해준 이야기였다.

바람의 바람.

아주 간략히 정리해보면 이 다섯글자만이 떠오른다.

바람은 세상에 존재하는 공기의 흐름을 이르는 말이지만 사람의 의식의 흐름이기도 하다.

소망. 우리는 바람을 그런 이름으로도 부른다.

어쩔 수 없이 이 이름을 적어야겠다.

'질풍'

바람이 지니는 이름의 하나다.

왠일인지 이 이름을 보는 순간 이 이야기에는 수 없이 많은 바람이 등장해서 그 바람들이 이야기를 발생시키고 이끌어나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남녀 주인공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여 주인공 다카코의 남편은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서 이혼했다.

남 주인공(주인공이 질풍이 아니라면) 다키자와의 아내는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서 이혼했다.

여 주인공 다카코의 막내동생은 유부남과 바람이 났다.

엑스트라 마요는 '왕따'를 당하는 초등학생이다.

그녀는 아빠가, 선생님이 자신을 믿고 자신의 편이 되어주길 바란다.

70대 노인 데루코 여사는 관심받길 바라는 것 같다.

'질풍'과 '다카코'는 바람처럼 달린다.

바람나다의 바람과 바라다의 바람과 바람의 바람.

그래서 바람의 바람 이야기다.

무슨 다섯글자를 설명하는데 이렇게 많은 문자가 필요했는지 새삼 나의 간결하지 못한 글솜씨에 놀람에 경악을 더하며.

그리하여 내겐 '바람'이야기처럼 읽혔다는 얘기다.

하지만 바람이 늘 한겨울의 시리디 시린 바람뿐 인 것은 아닌 것처럼, 이들에게도 간간히 훈풍은 불어온다.

훈풍은 소통과 성취의 바람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바람 같다.

자유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가진 바람은 대신에 안정이나 평온의 이미지는 지니지 못한다.

불안함과 덧없음, 허전함과 공허함들 말이다.

이야기가 진행해가면서 희생자가 늘고 그에 더해 단서도 늘어난다.

실마리가 잡히고 점점 태풍의 핵에 가까워져 간다.

그러면서 거친 반전을 꾀하기도 한다.

희생자가 늘어야만 사건이 해결 될 수 있다는 얘기인가? 라는 묘한 공식을 떠올리며 그렇게 읽어나갔다.

바람은 지나치게 거세거나 갑작스럽게 불면 사람을 상하게 한다.

하지만 적당히 상쾌한 바람은 기분을 전환시켜주고, 적절히 시원한 바람은 땀을 시켜주며, 알맞게 따뜻한 바람은 시린 몸과 마음을 녹여준다.

철저한 복수의 '도구'가 사실은 가장 핵심적인 온기, 바람을 뜻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참 아이러니하다.

우리는 때로 배신, 절망, 상실, 허무, 고뇌, 고통, 괴로움, 슬픔, 아픔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과 맞닥뜨린다.

그것은 갑작스레 찾아든 한 겨울의 매서운 북풍 같고, 거센 태풍같아서 온 마음과 몸을 뒤흔들어 모든 것을 부숴버릴 듯, 모든 것을 빼앗아 갈 듯 온 몸과 마음을 휘감는다.

하지만 그 어떤 바람도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지는 못한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고, 여전히 희망과 소망을 품는다.

요즘 세상은 늘 한겨울처럼 매섭고 시린 바람이 불어드는 벌판을 걷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고 봄은 곧 올 것이고 봄 바람도 불어들 것이다.

참 아쉬운 것은 좋은 책, 많은 것을 느낀 책일 수록 그 감상을 제대로 전할 수 없는 일이 많다는 점이다.

이번에도 마음에 바람이 불어대는 통에 뭔가 제대로 적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이렇게 내 마음은 늘 바람 구덩이다.

그래서 여전히 난 실망하고 좌절하지만 바람이 불러오는 바람에 희망을 담아 온기를 잃지 않는다.

아직은 괜찮다. 그리고 앞으로도 괜찮으리라.

내 바램 바람따라 흘려보내니 희망의 바람아 불어라.

[이 감상은 북곰 서평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읽고 주관적으로 감상으로 작성된 감상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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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박완서 소설전집 10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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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궁금해하고 주목했던 것은 여주인공 '경아'를 누가 가질 것인가? 였다. 

 관심 두고 싶었던 것이 어지간히 없었나보다.

 

그런데 그녀의 막가파식 나몰라라 연애에도 사연은 있었던 거였다.

 그 사연은 후반부에 나온다. 

 

사연을 밝히는 것을 건너뛰고 이야기를 해보련다.

 

'죄의식''피해의식' 중 어느 것이 사람의 의식을 더 많이 점유할까?

 

94쪽. 난 쓰기를 그쳤다. 밤이 깊다. 밤은 텅 빈, 무엇으로도 충족시킬 수 없는 텅 빈 내일을 몰고 오리라.

        차라리 내일이 없었음 좋겠다.

 

'경아'는 변화와 생기를 원한다.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죄의식과 피해의식의 소용돌이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감추고 누르고 지우고 잊으면서 지내지만 늘 텅 빈 것 같은 마음 뿐이다.

 

그녀의 방탕하고 헤퍼보이는 연애(그것도 연애라면) 태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하는 마음만 봐도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혼란을 더한다.

 끝없이 갈구하지만 그것을 받지 않으려 거부하는 모순된 모습이 도대체 이해가 안가는 것이었다.

 

누가 그랬던가? 현재의 이유는 과거에서 찾으라고.

 그녀의 현재의 뿌리는 과연 과거에 있었다.

 너무 진하고 강렬한 그래서 충격적이기까지 한 그 '사실'을 봉인하기 위해 그녀는 변화와 생기도 함께 봉인해야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언젠가 마주해야 할 순간이 오는 법.

 그녀가 구했던 변화의 한 갈래길에서 그 '사실'과 마주치게 된다.

 

그녀에대한 감정은 이제 '연민'만이 남아버렸다.

 "그렇다고 내일을 포기하려하지 말아요. 내일은 백지, 그 무한의 가능성마저 없는 것으로 하지 말아요."

 닿지 않을 위로를 담아 응원도 보내봤다.

 

결국 여주인공 '경아'는 남편이 된 '태수'의 것이 된다.

 그럼에도 '태수'의 것이 된 '경아'는 반쪽 뿐이다.

 마지막까지 그녀는 죄의식에서도 피해의식에서도 놓여난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내게 이 소설은 너무 어려웠던 것이 아닐까 싶다.

 시대도, 그 시대의 여성도, 어머니도, 심지어 남성들도 난 무엇하나 알지 못한다.

 더구나 그 시대 서울이라니.

 난 지금의 서울도 모르는걸.

 

사람은 죄의식으로부터 도망치다보면 어느 순간 피해의식과 함께 길을 가게 되는 것 같다.

 그것은 나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나 역시 피해자다.

 결국 남는 것은 피해자뿐인 서글픈 결말.

 

내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경아'의 말에 내일에 대한 두려움과 내일이라도 달라질 것 없을 것 같은 회의, 그리고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담겨있었다면 난 그 말에 깊이 공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일이 오지 말았으면이라는 생각을 더는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일은 찾아와야 하기에.

 내일이 품고있는 무한한 가능성은 부정되어서는 안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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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저널리스트에게 - 최고의 전문가가 최고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Art of Mentoring 2
새뮤얼 프리드먼 지음, 조우석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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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이면서 자칫 집단사고의 맹목성에 붙들려 진실의 왜곡을 바로 볼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는 위험한 이야기 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에게 열려있지 않은 숨겨진 무엇, 혹은 비밀들을 흥미롭게 때론 지나치게 '밝힌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언론에 한 번 오르내리는 동안 수 없이 많은 추측과 억측 거기서 파생된 비난에 시달리게 되는 것을 수 없이 본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면 언제 그랬냐 싶게 관심은 끊기고 갈기발기 찢긴 피해자만 남겨진채 가해자 없는 행위는 잊혀진다.

 

이 책에는 제목 그대로 미래의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이들에게 전하는 당부와 조언이 담겨있다.

 특히 인상깊었던 부분은 '집단사고'에 대한 부분이다.

 

집단 사고의 맹점 혹은 폐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용기라는 저널리스트의 덕목을 갖추어야만 한다.

 사실 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지 타인의 말을 옮겨 전할 뿐인 무책임하고 수동적 보도 행위는 우리를 진실에서 더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

 

저명한 누가 이야기 한 것이니 틀릴리 없다, 혹은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으니 이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기존의 신념체계를 원점에서 검토하고 그것을 뒤집을 용기가 없기에 그들은 앞선 이를 단지 뒤따른다.

 

'언론플레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생겼었나?를 생각해보니 과거 박정희 정권이 차용했던 3S 정책이 떠오른다.

 이른바 '독재 정권' 시절이었기에 가능했을 그 정책이 지금은 모습만 바꾸어 더 교묘히 암약하고 있지는 않은가.

 

저자는 미국의 부시 정부의 미디어 조작과 방송 정책에 대한 감독 행위가 시민들의 언론에 대한 신뢰도 추락에 크게 기여했다고 이야기한다.

 현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확실히 수긍이 가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의 '마녀사냥'적 언론 보도는 극한에 다다른 것 같다.

 '아님 말구' 하, 어이없는 한숨 밖에 나올 것이 없는 그것도 변명이라고.

 

하지만 저자는 언론의 신뢰도 추락의 책임이 단지 국가 뿐 아니라 언론 자체, 그리고 열린 사고를 하지 않는 대중에게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현재 우리나라 대중의 사고 행태는 위험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 옛날 '냄비 근성'이라고 비하됐던 금새 끓어올랐다 금새 식어버리는 일부 대중을 선동하는 것으로 그들은 목적 달성을 앞당긴다.

  대중에게 사실에 근거한 열린 사고가 요구되는 이유다.

  언제까지 휘둘리고 휘말릴 필요는 없다.

 

이 주제가 요즘 우리나라를 시끄럽게 하기는 소리가 내 귀에도 어쩔 수 없이 들어와 이야기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었다.

 

이 책이 집단 사고의 위험이나 언론의 신뢰도 추락의 책임을 묻는 이야기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람직한 저널리스트에게 요구되는 덕목과 기사를 쓸 때의 자세, 그리고 작성 기법 등에 주목하고 있다.

 

진정한 저널리스트라면 현장을 뛰어다니며 진실을 밝히고 그것을 올바로 전해야 한다.

 타인의 이야기를 단순히 옮길 뿐이라거나, 압력을 받아 굴절 된 기사를 작성하는 것은 진정한 저널리스트가 지닐 덕목에서 한참 어긋난다.

 

기사쓰기와 더불어 논픽션 글쓰기의 주의사항도 몇가지 적고 있다.

 사실을 쓸 것.

 결국 그 이야기다.

 논픽션을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가미한 픽션은 때로 사람들을 열광시키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국 밝혀지고 그들은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된다.

 

많은 기술적 측면도 적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기자의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다.

 언론은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을, 세상을, 그리고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힘도 그들은 가지고 있다.

 

악용되어서는 안되는 언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저널리스트' 들이다.

 양심적이고 올바른 그들의 자세만이 진실을 알리고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게 한다.

 

혼란과 혼돈의 시기다.

 진정한 언론의 바른 힘을 보여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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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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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생이 '정리'를 시작해야 할 시기에 들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기 자신의 삶의 흔적을 글로, 이야기로 정리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또 책을 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이야기하는 이가 있었다.

 

유난스럽기까지한 '흙'에 대한 애정과 애착 그리고 그리움들, 기어이 베어낸 '목련'에게 전하던 '제발 흙으로 돌아가 달라는 부탁' , 먼저 간 이들을 보내는 글, 이 생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하여 이 생에서 만난 책과 이야기,

무엇보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제목까지가 놀랍도록 담담하게 쓰여진 '한편의 유서'를 읽어 내려가는 듯한 느낌과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면 너무 뻔한 이야기가 될까?

 

책을 읽는 내내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던 기묘한 느낌의 제목에, 혹시 이 생에서 못 가본 길이라면 저 생에서의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박경리 선생님이 그러했듯 자신의 마지막을 언제나처럼 무던히 보내려 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떻게 보면 난 참 사람의 생과 사에 대해 무관심하다.

 아직까지 누가 세상을 떠났다해서 그가 떠난 슬픔에 절로 눈물이 흘렀던 적이 없던 것은 그 사실이 떠오를 때마다 기묘하게 마음을 비튼다.

 그것이 내 모짊의 한 면일 것이다.

 

한국 여류 문학의 큰 별들이 잇달아 떨어졌다.

 하지만 별은 떨어졌음에도 되려 더욱 큰 빛으로 남아 더 밝게 빛나고 있음이 느껴진다.

 그들의 죽음이 슬픈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글을 읽을 수 없음이 아픈 것.

 그것이 솔직한 감상이 될 것이다.

 

이 생의 마지막 즈음에도 여전한 상상력과 풍부한 감성, 여전한 표현이 참 절절하게 와 닿는다.

 남은 이들을 위한 당부도 잊지 않고 남기고 있다.

 

그분 스스로 자신의 삶을 멋지다고 느끼셨을지 모르겠지만 참 멋지게 살다 가신 분이다.

 너무 아름다운 삶을 지닌 분이다.

 못 가봤던 길을 가셨으니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나셨을까?

 

언제나 마당 있는 집, 흙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이야기들을 적어오셨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다는 말씀도 수긍할 밖에.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낸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 할 것 천지였다."는 이야기에 자신의 시선에서 세상과 사람들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해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남기시고도 이해 못 할 것 천지라하시면 전 어째요?라며 볼멘 소리도 해봤다.

 

흉내를 내보기로 한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도 아직 전혀 모르겠어 늘 좌충우돌 우왕좌왕하거늘, 내가 못 가본 길을 어찌 떠올리며,

 그 못 가본 길의 아름다움을 그릴 수 있을까?

 

바라고 원하건데 나도 나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준비를 시작하는 날에 부디 내가 못 가본 길을 떠올리며 그 아름다움을 상상해내길.

  그 아름다움에 비해 바래지도 않는 삶을 살아낼 결심을 지금의 내가 세우고 이루어가기를.

 

  그러면 내가 살아낸 세상, 내 삶이 오직 내게만 보이는 빛을 내며 명멸을 반복하더라도 나 언제나 여전히 행복할 것 같으니.

 

 

늦었으나 고인의 명복을 빌며 못 가본 길은 아름답던지요? 하며 친한 척 물음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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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오름 2012-02-22 0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대장물방울 2012-03-13 01:1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고인의 명복을 빌어요.
 
집단 기억의 파괴 - 흙먼지가 되어 사라진 세계 건축 유산의 운명을 추적한다
로버트 베번 지음, 나현영 옮김 / 알마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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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덴프로이데'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독일어로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뜻이다.

 

이 책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건축물들에 대한 만행을 기록한  책이다.

 그 역사는 멀게는 고대 가깝게는 현재까지 이어져있다.

 

중반을 넘어서면서 느낀 것은 오직 처참함, 참혹함, 추잡함 따위와 함께 찾아오는 후회였다.

 "읽지 말았어야 했다. 모르는 것이 나았다. 그들의 위선에 가운데 손가락을 선사하리라."

 

이 책에서 자주 등장한 단어들을 적어보면 파괴, 살육, 학살, 청소, 살해 따위다.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이미 처참함과 참혹함을 품고 있다.

 

불편한 진실의 폭로가 요즘의 대세인 모양이다.

 위키리크스의 각국의 비밀문서 폭로로 시작된 역사의 뒷면, 어둠의 역사들.

 

인정하든 부정하든 기억되었든 망각했든 이 책의 내용물은 분명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엔 무척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다.

 

보스니아의 내전, 이스라엘, 세계 대전 중의 폭격에 얽힌 뒷 이야기들, 터키, 미국과 영국, 독일, 중국 등의 국가가 혹은 국가에서.

 과거에 저질렀거나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집단 기억의 파괴'를 위한 기도, 즉 '인종 청소'와 '문화 말살' '살육과 파괴'를 다루고 있다.

 

양립할 수 없는 적대관계에 있는 대상에 대한 흡수, 혹은 배제, 아니면 말살하려고 마음먹은 그들은 대상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부정한다.

 그들의 인종, 문화, 언어,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말살하는 과정에서 그들에겐 어떤 죄책감도 망설임도 없다.

 

그렇기에 배제대상의 건축물은 그들이 지었다는 이유 혹은 그들이 살던 도시 혹은 국가에 지어져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유죄'다.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의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다.

 또 하나 과거가 아닌 현재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 사례는 중국의 티벳 학살이다.

 

형태는 다르지만 그들은 대상의 완벽한 박멸을 원했다.

 그들의 역사와 사상 그 무엇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철저히 박해하고 파괴했다.

 

그것이 이루어진 과정을 눈으로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인간적인 분노'가 이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들에게 그들은 '인간'도 무엇도 아니었다.

 이건 정말, 정말 아니다.

 

하지만 독일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죄의식을 갖고 있다.

그에 반해 중국은 어떠한가? 여전히 탄압하고 억압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강요하면서 티벳인을 죽이고, 부리고, 말살해 가고있다.

 

역사적으로 등장했던 모든 건축물 파괴자들 인종청소자, 살육자, 문화 말살자들의 의도는 단지 그들의 역사를 지우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또 다른 목적으로 건축물의 파괴를 행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의 이름은 '테러리스트'다.

 

'테러(Terror)'는 공포, 혹은 두려움을 의미한다.

 현재에도 세계 각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테러 활동의 목표는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심어주기 위함이다.

 

전쟁 중에는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전쟁과 무관한 민간인의 집 혹은 교회 역사적 건축물 등을 폭격하기도 한다.

 폭격당한 적은 같은 방법으로 보복함으로써 되갚아준다.

 결국 남는 것은 공포와 혼란 그리고 파괴 뿐이다.

 

모르는 척 해왔던 파괴와 살육 차별과 핍박들의 현장들이 머릿 속에 떠오르고 또 떠올랐다.

 중국이, 이스라엘이, 터키가 미국이, 영국, 탈레반들의 행위의 의도가 분명히 보였다.

 

그것은 깨달음을 주기보다 서글픔과 아픔만을 떠올리게 했다.

 

이 책의 집필 의도가 불편한 진실들, 과거와 역사 속에서 가해 당사자들이 부인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폭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과거에서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파괴 행위들에 대한 염려와 경계 그리고 그만 멈추어 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독일은 좋은 모범이 되어준다.

 그들은 "그들의 과오를 새기고 과오에 대한 건축 기록을 남기기로 결정한 유일무이 한 나라다"라고 책 속에서 저자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보스니아의 내전에서 불타버린 도서관 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있다고 한다.

 "기억하고 경계하라."

 

자신들의 과오 혹은 오점을 많은 사람들, 많은 나라들은 가리고 감추고 모르는 척하려한다.

 부서져버린 역사적 기념물들을 복원하는 것에 급급한 나머지 자신들의 역사마저 망각하려 하기도 한다.

 

기억을 위조하기 위해 폐허에 위조된 역사를 다시 세울 것인가?

 망각위에 파괴된 건축물을 올려 상실감을 달랠 것인가?

 폐허를 쓸어버리면서 자신들의 과오도 함께 쓸어낼 것인가?

 

인정하고 기억하고 경계할 일이다.

 너무 쉽게 우아한 복제물을 통한 위조를 선택하는 것은 안될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철거된 과거의 유물이 있었다.

 "조선 총독부  중앙청"으로 사용되었던 국립중앙 박물관이 그 대상물이다.

 

그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보존과 철거 사이에서 논쟁을 벌였던 것으로 안다.

 우리는 그 건물을 철거함으로써 과거의 치욕에서 자유로워졌을까?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국가에 대한 분노로 국보 1호인 숭례문을 전소시킨 사례도 있다.

 그가 미워하고 원망한 것은 '국가'였지만 그가 불태운 것은 소중한 우리의 역사, 우리의 문화재였다.

 

우리 안에도 그들, '파괴자들'의 속성은 존재한다.

 

그러니 진정 '기억하고 경계할 일이다.'

 

 힘겹다고 치욕스럽다고 해서 부정하고 망각해버리면 우리의 역사는 우리의 손으로 부정당하고 만다.

 무겁고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한 후유증으로 지금도 마음이 떨리지만, 외면되어서는 안 될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기에 의미 깊었던 책으로 기억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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