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은 왜 노잼도시가 되었나 - 성심당의 도시, 대전이 만들어진 이유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104
주혜진 지음 / 스리체어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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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 소도시로 이주하면서 서울에서 알고 지내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멀어졌다. 처음에는 드물게나마 안부를 물었지만 몇 년이나 지난 지금은 SNS나 우연히 연락이 닿은 지인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전부다. 이렇게 얘기하면 '소도시의 쓸쓸'이나 '지방의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겠구나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소도시 생활에 적응하고 나니 서울에서 살며 누리거나 누릴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편안함과 낯선 도시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불편과 어려움에 두루 익숙해진 지난 겨울 이 책을 알게 됐다.


 『대전은 왜 노잼도시가 되었나』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보고 '대전이 노잼도시'인 이유와 그럴 수밖에 없는 근거를 담은 책인걸까 생각하며 천천히 읽었다. 대전이 노잼도시로 불린다는 걸 이렇게 명확하게 인지한 건 처음이라 가벼운 충격과 궁금증이 생겼다.


 책은 크게 다섯으로 나누어 지방 도시, 노잼도시, 대전을 이야기한다. 처음은 현재 거의 모든 지역이 직면한 소멸이라는 이슈로 연다. 다음으로 검색과 SNS가 도시와 장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고, 세 번째로 노잼도시 대전을 분석한다. 네 번째로 분석의 결과물 중 '힙함'을 부각해 왜 힙하거나 힙하지 않은지 이야기 하고 마지막으로 '나만의 도시'라는 새로운 방향을 들여다 본다. 


 책은 검색어, 게시물, SNS 등의 콘텐츠 분석을 기반으로 작가의 경험과 생각을 이어간다. 기분이나 추측으로만 쓰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설득력을 얻었고 덕분에 대전 옆 더 작은 도시에 사는 나의 경험과 생각을 자극하는 부분이 명확해졌다. 


 우선 충남의 소도시 출신이라는 지방도시 출신인 나를 돌아보게 됐다. 지방 출신인 걸 숨기거나 부끄러워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디나이얼 지방출신'이라는 개념은 생소하지만 처음 대도시에 살게 되었던 무렵 실제로 뭔가 지방보다는 대도시가 좋아보이고 서울은 더 우위에 있는 듯 느꼈던 경험을 되살려냈다. 지방 출신인 게 잘못은 아니지만 뭔가 덜 좋아보였던 경험이 이 시대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강화되어서 지방에서 서울의 어느 지역, 어느 장소, 서울에 있는 어떤 카페나 식당 등을 모방하며 닮으려거나 따라가야 한다는 경향도 종종 체감한다.


 무엇을 해도, 어떤 것이 생겨도 서울에 비교 당하는 지방의 현실.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이 지금에 이르러 오히려 견고해져 있었다.


 대전뿐 아니라 거의 모든 지방 도시가 같은 처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서울이 아니면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소도시에서 살아가기를 택한 나로서는 서울을 동경하고 서울로 지향하는 주류의 분위기와 다른 비주류의 '나만의 도시'를 찾는 사람들의 챕터가 가장 흥미로웠다. 


 오래 전부터 도시는 생물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예전과 지금은 그 생각의 결이 달라졌다. 예전의 생물이 다양한 모습을 지닌, 다름과 새로움이라는 관점이 컸다면 지금은 태어나서 기쁘고 죽어감에 슬퍼하는 도시의 감정 관점에서 생물 같다고 생각하게 된 거다. 노잼도시로 남아서는 안 된다거나 다른 도시와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거나 살고 싶은 도시로 변모해야 한다거나 하는 슬로건에는 사는 사람이 없어지면, 재미가 없어지면, 매력을 잃어버리면 지도상에서 사라져 역사에서만 찾아볼 수 있게 될 거라는 불안이 읽힌다. 불안을 넘어 초조해 하고 두려워 하는 '감정'을 체감하게 되는 거다. 


 어떤 도시가 살아남을까.

노잼도시 이야기는 이런 질문으로 이어졌다.


 소도시에 살기로 하고 살아오며 더 확신하게 되는 게 있다. '나의 경험', '나의 기쁨'이 도시의 곳곳에서 살아있을 때 그 도시에 마음이 끌리고 더 살고 싶다고 느끼게 된다는 거다. 큰 쇼핑몰이 없다거나 백화점이 들어설 가능성이 없다거나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부재 같은 건 부수적 차원의 문제다. 내게는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어울리면 즐거운 사람들이 도시의 물리적 요소보다 중요했다. 친하게 지내던 이웃이 떠날 때가 가장 소도시를 떠나고 싶어지는 때일 거라 생각한다. 


 내 관점에서 '재미'는 소비의 요소다. 그리고 지방 정부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 도시를 소비하러 오도록 꾸미고 홍보한다.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그 도시에 살고 싶어지게 했던 매력이 사라지기도 한다. 대도시와 닮은, 어느 지방 도시에도 비슷한 게 있을 것만 같은 아류가 주류가 되기도 한다. 그럴 때 지방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은 도시가 재미없어진다고 느낀다. 이야기가 사라진 탓이다. 무난하고 평범하게 새로운 도시는 재미있는 도시가 될 수 있을까? 오늘은 몰라도 내일은 아닐 것이다.


 질문을 떠올리게 하고 질문의 대답으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매력과 재미를 되새길 수 있게 한다는 지점에서 이 책은 적당하다. 재미 없어서 떠나고 싶은 사람에게도 이 책에서 제시한 방법은 시도해 볼 만 하다. 무엇보다 어디에 살고 있든 도시의 일부가 아닌 도시가 내 삶의 일부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읽어 볼 만 하다. 서울 역시 세계로 시야를 넓혀 보면 지구의 어느 지방이라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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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
메리 파이퍼 지음, 안진희 옮김 / 위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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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 '나'였던 날이 있다.

어디 가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고,

'나'가 누구인지, 어떤 모습으로,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를 먹이고 나를 키우고 나를 살찌우며 나 스스로 생각하며 나로 호흡하면서도 그 모호한 정체를 밝히지 못한.


세상 속 사람들을 오래 살피고 관찰해봐도 그 안에 나는 없었다. 

때때로 닮은 사람을 보거나 만난 날은 있다. 

 '어쩌면'.

불행한 과거, 잘된 미래, 다행스러운 오늘의 '나'가 아닐까 싶은 추측을 늘어놓게 되는.

결론은 항상 '저건 내가 아니다'였다. 

닮은 줄 알았던 건 언제나 섣부른 기분의 문제.

자꾸만 속으로 침잠하면서 '나'를 찾고, '나'와 마주할 방법은 멀어지는 듯했다.


이제는 습관이 가져온 우연한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읽던 책에서 어린 나, 조금 더 자란 나, 어쩌면 내일의 '나'일 것만 같은 이야기와 만난.


 오늘을 사는 사람들 이야기보다 옛날이라고 뭉뚱그리는 과거 사람들 이야기에서 더 많은 '나'를 찾았다.

평론가나 교수, 전문가가 쓴 글보다 어느 이름 없는 독자가 쓰다만 감상이 더 마음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렇게 오늘에서 먼 과거에서, 유명보다 무명에서 '나'를 만나는 길을 찾아다니다 닿은 자리가 지금 여기인 셈이다.


 여전히 이름난 누군가가 남긴 추천사 보다 작은 책방을 지키는 이의 한 마디가 더 강하게 책과 나를 이어주고 있다. 서울 지하철 6호선 마포구청 역 근처의 작은 책방 '그렇게 책이 된다'에서 만난 책들처럼.


 오늘은 그중 하나,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다.


우선순위 문제겠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경제적 안정이 심리적 안정에 우선하는 듯 보인다. 

물론 경제적 안정은 심리적 안정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다. 하지만 둘 사이에 명확한 선후관계, 특히 경제적 안정이 우선될 때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가 존재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었을 때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릴 가능성이 높아지는 게 아닐까.


 심리적으로 불안한 사람, 스스로가 스스로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 주위 사람이나 주변 환경에 쉽게 휘둘리는 사람들은 흔히 나약하다고 여겨졌다. 나약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믿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결국 자기 자신도 타인도 쓸모없다고 믿어버리기 쉬웠다. 

 강하고, 당당하고, 뚜렷한 사람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 

섬세함이나 신중함, 모호함은 때때로, 어느 영역에서만 '재능'으로 인정받거나 '쓸모'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쌓은 시간의 결과가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세상이다.

'불안'으로 함축되는 아픈 세계.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를 읽으며 '심리치료'를 생각했다.

나는 심리치료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우리 사회는 또 어떤지 궁금해졌다.

내게는 심리치료라는 말보다 '심리상담'이나 '정신과 상담'이 더 익숙하다.

섣부른 결론이겠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정신이나 심리 역시 의학이라는 전문 영역에서 전문가가 환자를 '치료해 주는' 진단과 처방 개념에 치우쳐있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더 강해진 건 저자의 생각, 이야기에서 여러 번, 거듭, 반복해서 언급되는 말이 이런 맥락이기 때문이다.

우리 심리치료사들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특별하다거나 내담자보다 우월해서 치료사의 자리에 있는 게 아님을 자신에게나, 자신에게 조언을 듣는 사람에게나 거듭 일깨우고 있는 거다.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는 심리치료사인 메리 파이퍼가 심리치료사 과정을 준비하는 대학원생 로라에게 쓴 편지 형식의 글을 묶은 책이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 전하고자 하는 마음과 의지를 다양한 사례와 인간 심리를 꿰뚫는 작가들의 문장을 통해 전한다. 


 주목할 부분은 자신을 치료자라거나 전문가라며 권위를 세우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실수할 수 있는 여지와 불완전한 판단의 위험, 내담자와의 공감과 소통에 무게를 두고 있는 거다. 

 또한 저자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제네럴리스트를 자청하고 더 많은 내담자를 상대함으로써 더 많은 돈을 벌기보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시간을 쓰라고 조언한다.  

무엇보다 심리치료사가 마법사가 아니며 내담자 자신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렇게 이제 막 심리치료사의 길에 들어서는 이에게 염려와 자부심, 사랑을 담은 편지는 한 해, 네 계절을 돌아 끝을 맺는다.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를 읽으며 만난 나는 과거의 나이기도 하고, 지금 혹은 내일의 나일 수도 있는 '나'다.

우울함을 호소하는 이에게 가장 자주 권하는 방법인 '적당한 운동'이나, 글쓰기에서 실제로 큰 도움을 받은 경험도 되살아났다. 


'자기'와 '나', '우리'를 둘러싼 일상에 고민하는 이라면 누구든 읽어봐도 좋겠다.

 

책을 만나는 과정, 책과 만난 장소, 책을 선택한 이유가 중요하지 않던 때가 있다.

거의 모든 책과의 만남이 취향과 경험이라는 관성의 레일 위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관성은 편안하고 안전한 선택을 보장할 수 있지만 의도치 않게 의외의 '나'와 만나는 기회를 빼앗을 수도 있음을 안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의외의 선택을 하기엔 지나치게 신중한 편이라 그럴 수도 없다.

그렇기에 책방을 지키는 책방지기의 선택과 추천이 큰 의미가 될 수 있다.


자기 안에서 '나'를 찾기는 몹시 힘이 든다.

애쓰고 노력한다고 해서 찾을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책은 '나'와 만나는 방법 중에 가장 수월하고 믿을만한 수단이다. 

자신에게 태만하지 않는 한 노력에 배신당하는 경우도 적다. 


시시때때로 손에 닿는 책을 펼치길,

손에 닿지 않은 책도 발길 닿는 곳에서 집어 들길.

이야기 안에서 종종, 때로, 반드시 만날 '나'와 이야기 나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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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한 세상 을유세계문학전집 96
레이날도 아레나스 지음, 변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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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루스트의 마들렌, 세르반도의 용설란

이제부터 이야기하는 건 '정답'이 아니라 '방법 중 하나'라는 걸 먼저 밝히기로 한다.

어떤 책, 어떤 이야기들에는 특별한 접근 방식이 요구되기도 하니까.

 일단 달려들어 시작하는 걸 말릴 필요 없고, 자기에게 더 알맞은 과정을 거쳐  더 나은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누군가의 방법을 참고하는 일마저 필요 없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굳이 숨길 필요도 없으니 덧붙이자면 '나는 지금 겁을 주고 있는 거다'.

스페인 어를 모르니 제목 <현란한 세상>이 얼마나 적확하게 뉘앙스와 의미를 반영한 건지 판단할 수 없지만 '현란하다'는 건 '난무하다'와도 통한다. '난무'는 어지러운 모양을 의미하고 어느 한 지점, 시간, 주제로 수렴하지 않는 듯 보일 수도 있다는 거다.

 그림으로 이야기하자면 소실점이 명확해서 시선의 방향이 분명한 경우와 달리 시선이 작품 사방으로 분산되는데 각각으로 분산된 시점 어디서부터 시작해도 끊김 없이 나름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만한 경우다. 

  이 감상은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어디를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알 수 없게 되는 때. 

현란한 혼란 속에 길을 잃었을 때에 도움이 될지 모를 방법 하나를 남기려는 의도임을 밝혀둔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은 화자를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이끌며 이야기를 시작하게 한다. 레이날도 아레나스가 <현란한 세상>을 시작하며 던진 단서는 '용설란'이다. 정확히는 1980년 7월 13일로 날짜가 명시된 작가의 말에 나오는 단서다. 아마 그전까지 작가가 숨겨둔 수수께끼를 제대로 풀어낸 사람이 없었거나 자기 작품을 둘러싼 억측에 가까운 문학 평론가들을 비웃어주기 위해 적은 게 아닐까 싶다.


 여기에 마르셀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언급한 건 <현란한 세상>의 주인공 세르반도 수사를 과거 혹은 미래의 어느 기억 혹은 순간으로 이끌어 가는 장면 속에 등장하며 세르반도 수사의 운명을 빗대거나 암시하기 때문이다. 

 용설란이 뭔지 모르는(나처럼) 사람을 위해 덧붙이자면 용의 혀를 닮았다 해서 용설이라 이름 붙인 난이다. 10년 이상 꽃이 피지 않아 1세기 만에 꽃이 핀다고 과장되어 회자되고 있다고(실제로 어느 뉴스 방송을 보니 '100년 만에 핀 꽃'하는 식으로 큰 화제가 되고 있었다). 용설란의 꽃은 용설란의 죽음 혹은 사멸을 의미한다. 꽃을 피운 용설란이 죽기 때문이다. 


 도다 세이지는 <이 삶을 다시 한번> 속 하나의 에피소드에서 식물이 꽃을 피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얘기한다. 

꽃을 피우지 않는 방법은 적당한 환경을 갖추고 알맞은 영양과 물을 공급하는 거다. 반대로 생각하면 적당히 가혹한 환경을 만들어주면 꽃을 피울 거라는 거다. 


 용설란과 꽃을 피우는 방법을 조합하면 <현란한 세상>에서 들려줄 세르반도 수사의 삶의 굴곡을 들여다볼 마음의 준비 1단계가 갖춰지게 된다. 한 번은 꽃을 피우고, 그 과정이란 어쩌면 몹시 가혹할 수 있으며, 두 번은 없으리라는 예감과 함께.

누구의 삶을 들여다보든 다르지 않을 텐데 마음의 준비 2단계는 인내심을 갖는 거다. 끝날 때까지 이야기를 따라가며 듣는 노력이 요구된다.

마지막 3단계는 다시 돌아가 보는 수고까지 감수할 수 있다고 마음먹을 필요를 인정하는 거다. 종종 어떤 이야기들은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끝나지 않고 처음으로 돌아가 몇 페이지에서 몇십 페이지까지 다시 읽을 때 조금 더 이해가 깊어지기도 한다. 

 <현란한 세상>도 그랬다.


여기까지가 내가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현란한 세상>을 읽은 방법이다. 

떠올리고, 예감하며, 마지막까지 동행하다 나 홀로, 스스로의 의지로 처음으로 돌아가 본 거다.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보이는 맥락이 있었다.


 <현란한 세상>은 세르반도 테레사 데 미에르 수사의 삶을 담은 이야기다. 실존 인물일 수도 있는 이 인물이 남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했다고 하는데, 이런 얘기를 들으니 실존하지 않았을 듯하다는 생각에 무게가 실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멕시코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세르반도 수사는 유아기에 일어난 사건들에서 도망치듯 집 안에 박혀 있다 종소리를 따라 떠나게 된다. 그렇게 떠나 여행을 하다 어떤 신부와 만나게 되고 신부와 함께 어떤 도시에 이른다. 도착한 도시에서 어떤 부인이 화형에 처하는 모습을 보고 방황하듯 헤매다 수도원에 닿게 되는데 이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야말로 타락 그 자체다. 음란하고 천박하며 구역질 나는 짓을 태연하게 벌이고 있던 거다. 이 타락에 함께 하기를 거절한 죄로 감옥에 갇히는데, 이 거절 혹은 반항 또는 투쟁과 감옥, 탈출이 이야기에서 다양한 이유, 모습, 결과로 반복되고 되풀이된다.

 이러한 타락한 유혹을 이겨내며 자신의 신앙을 좇던 세르반도 수사는 운명적으로 과달루페 성모에 관한 계시를 받아 설교를 하게 되는데 이 설교가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평생 쫓기게 된다. 거기에 덧붙여 세르반도 수사는 왕족과 권력자들 앞에 굴복하거나 하는 일 없이 신념으로 맞서게 되는데 그들이 노여워하는 게 당연하고 세상 어디에나 권력자 혹은 왕족이 없는 곳이 없었기에 어디로 도망치든 핍박받으며 쫓기지 않는 날은 기대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소설은 내내 의식의 흐름을 따라 시간과 공간을 거스르거나 뒤집기도 하고, 상상 속에서나 벌어질 일들을 태연히 현실로 그려내기도 하면서 수십 년의 시간을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유난히 복잡해지는 이유는 이 의식의 흐름 속에 사회와 세태, 세계에 대한 비관과 비판, 풍자와 폭로가 섞여 들기 때문이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다양한 메시지, 단어와 문장에 숨겨둔 암시와 묘사들을 다 이해하려고 욕심을 부리면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 이야기가 되는 반면, 어떤 장면이나 부분을 잘라내어 풀어볼 때 의미가 분명 해지는 부류의 소설이 되는 거다. 


 줄거리는 한 줄로도 줄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집을 떠난 세르반도 수사가 평생 동안 겪은 핍박과 수난으로 굴곡진 삶과 혁명 완성을 위해 싸워온 이야기'.


간단하지 않은 게 당연하다.

평생은 하루나 이틀, 한 해나 두 해가 아니고 핍박과 수단은 한두 번이 아닌 데다 이유도 가해자도 다르며 어떤 혁명을 위해 언제, 무엇과 누구를 위해 싸웠는지를 한 두 문장으로 풀어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익히 배웠듯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동시에 권력자의 과거와 현재다. 권력에 맞섰던 한 개인의 투쟁을 온전히,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권력자는 없을 것이므로 문제가 더 어려워지는 거다. 투쟁한 사람 본인이 남긴 회고록이라면 더더욱 불분명한 부분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제목 그대로 '현란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던 거다.


 내가 할 수 있던 건 마지막까지 수사의 이야기를 견디고 따라간 것과 한 번 더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다시 들어본 것 정도다. 덧붙여 몇몇 문장에서 단어를 건져 올려 연결해보는 시도 정도일까?


그 시도를 조금 보여주는 걸로 감상을 끝내야겠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감상까지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버리고 마는 기분이라서 말이다. 일단 감상은 여기서 끝이 난다.


 참고로 <현란한 세상>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들 혹은 역사의 비극 중 몇 가지를 적어보면 이런 거다.

'아메리카와 흑인 노예'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

'타락한 가톨릭 수도사들(ex 소돔)'

'혁명의 탈을 쓴 권력의 찬탈'

'멕시코 독립'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등등.


연결해본 건 이런 부분을 이런 식으로다.


영원한 것 - 현실 
영원한 것은 서열이 있거나 명백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중략) 현실을 하나의 각도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각도에서 본다. 그런 상황고 각도에서 사실주의의 피해자들을 도외시해야 한다면 그것이 무슨 현실이겠는가? 
15페이지
패스(pass) - 악행 
모든 수련 수사들이 옷을 벗은 채너에게 인사하려고 다가갔을 때 무언가 네 안에서 '패스(pass)'했고 수많은 빛으로 부서졌지.(중략) 악행은 즐기기를 원하는 그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얽매이는 예속성과 영원한 의존성에 있다는 것을 너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47페이지
권력 - 죄인
권력을 가진 자와 죄인은 성서의 언어로 볼 때 동의어다. 
70페이지
연료 - 흑인
"연료 = 기관사가 외친다 - 연료가 없으면 도착할 수 없습니다."그리고 스물아홉 칸의 객차 한 칸이 텅텅 빈다. (중략) 그래서 흑인들을 사용하죠, 그들은 풍부하니까요. 이미 말씀드렸듯이 석탄과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이죠. 
279페이지
사기 - 완성
그를 다시 미치게 만드는 소란한 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그의 전 생애 동안 사기를 당했다고 느꼈다. (중략) 모든 문명(모든 혁명, 모든 투쟁, 모든 목적)의 목적은 별자리의 완성, 변함없는 조화에 도달하는 것이다. 
355페이지


감상을 마친 지금에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었을 때,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읽을 수 있을지 스스로 의문을 품었다.

며칠, 몇 주를 미루고 다시 미뤘다. 무슨 투쟁, 무슨 혁명, 무슨 고난을 위해 읽어야 하는가? 스스로에게 자꾸 물었다. 로맹 가리의 소설 감상을 쓰면서 '문학 해석이 시대 해석'이라 적었었다. 이 소설, <현란한 세상>을 해석해낼 현실의 단면, 단서들이 필요했달까. 

 서사에 몰두했을 때 단면은 보이지 않았고 자꾸만 단서들을 놓쳤다. 그도 그럴 게 이 소설 속 시간은 묘하게 길면서 복잡한 데다 앞으로나 뒤로나 한쪽으로 흐르고 있지 않았다. 수백 년 전 이야기를 했다가 수십 년 전 이야기로 건너뛰는데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전히 살아있거나 죽어가거나 죽어있는 거다. 

 서술의 주어도 자꾸만 달라진다. '나'였다가 '너'였다가 '그'가 되기도 한다. 누가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야기의 주체조차 분명하지 않은 셈이다. 


 시간이 뒤섞이고, 화자는 불분명하며, 분명 멕시코와 스페인,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와 미국이라는 실존하는 나라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음에도 어떤 역사의 단면인지 명확하게 밝히지도 않는 이야기. 주인공 세르반도 수사의 주적, 주된 핍박자로 등장하는 레온이니 누구니 하는 사람도 실제 존재했던 누군가를 빗대고 있는 듯하다는 정도를 추측해볼 수 있을 뿐 부족한 역사 지식으로 단서조차 붙들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읽기 어려운 게 당연했던 게 아닐까.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있는데 <뻬드로 빠라모>, <백 년 동안의 고독>이 가장 비슷하겠고, 훨씬 수월하고 재밌게 읽은 경우로는 나보코프의 <절망>이나 빅토르 팔 레빈 <P세대>와 닮았으며, 어렵기로는 모옌 <열 세 걸음>도 만만치 않았던.


 재밌으면서 신기한 건 다시 읽어보고 싶은 소설 리스트에 올리고 싶은 소설이라는 거다. 단순히 난해해서, 이해하기 어려워서 다시 읽어보고 싶다기보다 다음에 다시 읽는다면 그때는 조금 더 다른 걸 보고, 생각하며, 더 많이 이해하고 느낄 수 있을 듯하다는 기대를 품게 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절실히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문학을 해석하고 그에 비추어 시대를 해석하는 데 능숙하기는 어렵지만 스스로의 지금을 들여다보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친다고 느낀다. 나는 조금 더 문학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긴장을 풀고, 해석이나 이해에 얽매이지 않으며 이야기를 이야기 자체로 즐길 수 있게 될 때, 조금 더 나은 감상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현란한 세상을 읽는 동안 마음은 무거웠고 머리는 복잡했으며 눈은 어지러웠지만 그 또한 좋았다.

물론, 의미하는 바는 다르지만 나에게는 권력이 없으므로 그 죄가 무겁지 않을 것임에 안도할 수 있었음을 포함하여.

우리는 종려나무 숲에서 온다. 우리는 종려나무 숲에서 오지 않는다. 나와 두 명의 쌍둥이는 종려나무 숲에서 온다. 나 혼자 종려나무 숲에서 오는데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
- 내 생각인데 이 소설의 첫문장은 여기서 시작된다고 본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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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물방울 2019-04-15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개 반을 주고 싶었다.
이 소설에 대담하게 별 다섯개를 쏟아준 분들에 감탄한다.
나는 뭐, 그렇다. 그만큼 즐기려면 아직 좀 멀어 보인다.
 
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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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움베르토 에코라는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 그에게는 수백, 수천, 수만 권의 책이 될만한 앎이 있었지만 그 역시 함께 사라지고 만다. 개인의 사라짐이 세계에 어떤, 얼만큼의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그의 경험, 그의 지식, 그가 얻었을 깨달음, 가르칠 수 있었을 누군가들. 

  그러나 그는 죽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하는 가정은 의미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행위는 그의 앞선 다른 책 보다 최후에 남긴 한 권의 소설을 읽는 일. 단지 그뿐이다.


 대학 때 학위를 마치지 못한 결과 변변찮은 신문의 기자와 대필작가 자리를 전전하던 마흔아홉의 콜론나는 시메이라는 남자의 제안으로 「도마니」, '내일'이라는 뜻을 지닌 신문 창간을 준비하는 일을 시작한다. 창설자는 콤멘다토레라는 재계의 유력자로 상위 계층에 편입하고자 하는 의지와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신문사를 활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재밌는 건 그들이 준비할 「도마니」 신문에는 내일이 없다고 정해져 있다는 거다. '내일이 없다'는 말을 풀어 설명하면 신문은 창간을 준비하기(준비하는 '척'하기)는 하겠지만 실제로 창간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진실은 콜론나와 시메이, 이 이야기를 읽는'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다. 신문 창간 준비에 참여하게 된 여섯 명의 기자들과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 집단, 단체는 모른다. 


 콜론나는 동시에 시메이에게 이런 제안도 받는다. 자신의 책을 대신 써달라는 거다. 신문 창간을 준비하는 '척' 하면서 시메이의 책을 써줌으로써 이중으로, 단기간에 거액을 벌 수 있다는 제안. 어떻게 생각하면 그 의도와 결과가 '의심스러운 일'을 콜론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는 40년 전부터 이미 실패자였으므로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이야기는 1992년 4월 6일에 시작해 두 달 후인 6월 6일에 절정에 이르러 그 얼마 후쯤 끝이 난다. 두 달 남짓, 우리가 2016년에 경험했듯 그 시간이면 세상을 뒤집거나, 세상이 뒤집히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말했듯 '현실은 허구를 뛰어넘는다'는 말은 진리임이 다시 증명된다.


『제0호』출간 예정 소식을 들었을 때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하나는 "드디어 출간되는구나."라고, 다른 하나는 "왜 이제야 출간되는 거지?"였다. "왜 이제야 출간되는 거지?" 하는 의문의 뒤에는 또 다른 의문이 이어졌는데, "재미가 없어서 그런 거 아니야?"다. 

 결과를 먼저 얘기해버리자면 '재미가 없어서'는 아니라는 거다. 출판사의 사정이거나 혹은 당시 한국 사회의 혼란 혹은 이 소설 내용과도 겹쳐볼 수 있는 어떤 메시지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어떤 메시지인지는 뒤에서 언급하게 될 수도 있고, 이 소설을 읽고 당시 상황을 떠올려보면서 스스로 알아차리게 될 수도 있다. 


 그리 길지 않은(움베르토 에코의 다른 장편들과 비교하면) 소설 분량에 비하면 목소리를 내는 인물들이 '많다'고 느꼈다. 심지어 지면을 많이 차지하지 않은 비중 없어 보이는 인물들조차 존재감이 작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건 이 소설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고 있지만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는 현실과 사실과 진실들. 현실과 사실과 진실을 교묘하게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의 합법적이고 공개된 '암약'. 그러니까, 현실이 허구의 상상을 뛰어넘는 반전과 놀람과 충격이 될 수 있게 하는 기이한 장치.


 비범한 평범이라고 해야 할까, 평범한 비범이라고 해야 할까. 

의외라면 의외인데 이 소설을 읽으며 떠올린 소설이 두 권 있었다. 한 권은 조지 오웰『1984』고 다른 한 권은 올더스 헉슬리의『멋진 신세계』다. 조지 오웰이 만든 세계는 공포와 통제, 제약과 제한이 진실을 쥐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무제한의 쾌락을 제공함으로써 현실의 고통을 지워버린다. 이 소설들을 떠올린 이유는 결과적으로 두 작품 모두 누군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사람과 세상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부자유와 부자유의 자유. 

 현대인들에게는 무한한 자유가 있다. 원칙적으로는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데 제약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어 보이는데 『제0호』를 읽으면서 그 이유 중 하나 혹은 여럿이 '이거다' 싶었다. 


 지금부터 당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식상할 얘기를 하려고 한다. 누군가 혹은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자유로우며 제 멋대로 행동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생각할 수 있다'고 믿게 하고 싶어 한다. 어떤 사건이나, 일, 이슈에서 눈을 돌리게 만들기 위해, 뭉쳐야 할 사람들이 편을 나누어 다투거나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하며 흩어지게 만들기 위해 약간의 '조정'을 하기도 한다. 그건 이미 잘 알고 있듯 어떤 사람 혹은 언론사가 내놓는 의견이나 기사일 수도 있고, 광고일 수도 있으며, 영화나 드라마, 유튜브 속 영상일 수도 있다. 과거의 알력 다툼에 불을 붙일 수 있는 해묵은 논란이나, 지역감정, 별 것 아닌 꼬투리 잡기, 흠집 내기, 국외 어딘가에서 벌어지거나 벌어지고 있던 전쟁이거나 좋은 이미지였던 연예인의 의외의 일탈 혹은 스캔들, 수십 년째 이어지는 주택난, 주가 폭락. 이런 식의 나열은 더 길게, 얼마든지 늘일 수 있을 정도로 많다. 

 결론은 단순한데 말이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은 걸 알고 있다. 알아야 할 진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얘기다. 또 다른 결론은 그럼에도 속고 있다는 거다. 매일, 매 순간 속고 또 속고 있다는 거다. 준비를 잘하고 있건, 얼마나 많이 알고 있건 상관없이 속고 있다는 거다. 


 "나는 속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얘기하고 싶은 건 이거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건 거짓이 아니라, 너무 많은 진실 혹은 사실이다."


진실은 아무리 충분히 알고 있어도 부족하다. 모든 사실을 알 수 있는 사람, 모든 진실을 간파할 수 있는 사람은 단언하건대 없다. 극단적 회의주의자들, 모든 걸 의심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조차 속는다. 내가 속고 당신이 속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할 수 있는 건 없나.

필요한 건 현명한 무뎌짐, 무덤덤함, 냉담이다. 


 물고기 양식장에 가본 적이 있다. 하루 몇 번, 일정한 시간에 사료를 주는 모양인데 수면에 사람 그림자가 어리고, 사료가 물에 닿는 순간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수조 안에 든 물고기 전부가, 아마 힘이 센 녀석일수록 앞에서, 먼저 달려들어서 한 덩어리처럼 된다. 혹여라도 수조 바닥에 떨어지는 사료는 없다. 딱 그 시간에, 적당한 만큼의 사료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당연히 더 먹는 녀석은 더 크고, 못 먹는 녀석들은 못 큰다. 그래서 '분리'가 이루어진다. 더 큰 녀석은 더 큰 녀석들끼리, 작은 녀석은 작은 녀석들끼리. 저마다의 수조에서 비슷한 일이 매일, 매 순간 반복된다. 

 결과는?

그 물고기들은 모두 횟집의 접시나 우리 집 식탁에 오른다. 그러나 이건 '양식장의 물고기'의 사정이다. 바다의 물고기의 사정은 조금 다르다.


 바다의 물고기는 스스로 먹이를 찾는다. 먹을 때가 있는가 하면 굶기도 한다. 수온도 때마다 달라진다. 포식자, 적, 위험도 곳곳에 널려 있다. 먹이와 미끼를 구분하는 현명함을 익힌다. 물론, 거대한 그물에 잡혀 캔이 되거나 산채로 혹은 냉동되어 식탁에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양식장의 물고기와는 엄연히 구분되는 자기의 삶을 산다.


앞서 얘기했듯『제0호』는 「도마니」 신문, 번역하면 내일신문 창간을 준비하는 두 달 남짓되는 시간을 담고 있다. 당연히 언론의 부작용을 떠올리게 하고 경계하게 하며 정보의 과소가 아닌 과다한 정보에 의한 진실의 익사를 일깨운다. '선동한다'는 말은 특정 정치 세력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과거의 이야기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소식, 기사, 정보는 그 수여자를 자극하고 선동할 수 있는 여지를 품고 있다. 일일이 휘둘리다가 스스로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이 쓰는 최후의 소설에 어떤 '비밀 메시지'를 담았던 걸까. 

무언가를 '경고'하고 싶었던 걸까?

일깨우려던 걸까?

겁내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우려고 했을까?

세상 어디나 다 비슷하다고 설득하려고?

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는 설명하지 않으며, 국적도 다르고, 게다가 죽었다. 

중요한 건 타인의 과거나 현재, 미래가 아닌 '나의 현실, 현재'를 발견하게 한다는 거다. 지금은 한두 가지, 다음에 다시 읽게 된다면 어쩌면 두세 가지로 늘어날 수도 있는 진실들을 '재발견'하게 했다.


 정확히 말하지만 '재발견'이다. 

너무 많은 걸 보고, 듣고, 알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매번 '정말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음을 깨닫는 재발견까지.


 이 소설은 이탈리아의 현실, 역사적 사실을 참 많이 담고 있다. 실제로 몇 개는 검색 해서 찾아봤는데 모두 '사실'이었다. 


그래서 오늘의 다짐은 이거다.

"거짓에 속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진실에 속는 일은 되도록 없게 하자."

이래 놓고 또 잊겠지마는, 다시 떠올리게 되겠지.

무기력해지지 않도록, 지치지 않도록, 적당히 무디고 무덤덤하고 냉담하게. 


 『제0호』는 이탈리아의 현실, 역사 속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있을지도 모를 인물'이 아니라 '있었을 인물'들이 등장한다. 가정된 상황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는 거다. 그래서 납득한다. 소설에 앞서 인용하는 한 문장을.


 그 페이지에는 이렇게 써 있다.

"연결하기만 하라!"

그러니까, 이 소설은 어떤 현실, 지면에 인쇄되었거나 누군가 말한 사실들을 연결하는 것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다. 허구를 뛰어넘는 현실. 

잊어버렸다가도 어느 순간에 떠올리게 되는 "현실은 허구를 뛰어넘는다"는 생각을 증명해냈다는 듯이.


덧붙임 : 그나저나 책을 급하게 만드셨나 몇 군데에 명백한 오탈자 혹은 잘못된 표현과 오탈자로 의심되는 부분들이 보인다. 1쇄 많이 찍으셨을텐데, 왜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는 건지. 독자들이 다 잊고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안이하다,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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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1-10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든 생각인데, 원제 대로
<누메로 제로>라고 제목을 뽑았으면
어떨까 싶네.

<제0호>라고 하든 <누메로 제로>라고
하든 그 뜻은 설명을 들어야 아니깐.

대장물방울 2018-11-12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네요. 정말 무슨 말이야 하게 되는 건 같으니까욬
 
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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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한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른다고 한다.
내 마음도 모르는데 남의 마음을 어찌 알 수 있는가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꾸만 타인의 마음을 아는듯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오래 걸려 읽었다. 
일단 초반에 배경을, 인물을, 시간을, 공간을 세밀하게 설정하는데 조금은 질린 탓이 컸다. 장편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치밀하달까.

중간을 넘기면서 이야기에 속도가 붙었다. 읽는 속도도 빨라졌다. 
마지막 즈음에는 새벽까지 읽어서 마쳤다.

처음 느낌으로 상당한 혹평을 했다. 다 읽고 난 후에는 생각이 조금 바뀌어서 그래도 괜찮았다 생각했다.

아쉬움은 있다. 지나치게 치밀했다는 느낌 탓일까. 오히려 추리소설의 구성에 닮아 있다는 인상이 남았다.

무수한 복선을 깔아 둔다. 
인물, 사건, 시간, 공간 등 다방면으로 촘촘히.
후반, 소설로는 종반으로 가면서 깔아둔 복선을 회수한다. 지나간 서술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왜 그렇게 적었는지 납득하게 된다. 

여기서 하나의 아쉬움이 생긴다.
소설은 제목부터 <경애의 마음>이다. 하지만 소설의 구성과 결과에서 받은 인상은 마음, 감정보다는 구조, 이성으로 짜맞춘 이야기라는 거였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때로는 의외여도 좋았을 설정들이 너무 질서정연하게, 한치의 틈도 없이 맞아 떨어져 만들어지는 결말.

중반 이후, 그러니까 주인공 상수의 페이스북 페이지가 겪는 곤란에서부터 결말까지 예상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이건 성공인걸까, 실패인걸까.

성실하고도 꼼꼼히, 그러니까 열심히 쓴 소설이구나 하는 느낌은 마음 한 구석에 짠한 여운을 남겼다. 

첫 장편 소설이었으니, 다음에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지.

읽던 도중 계속 거슬리던 게 외래어 표기였다. "김금희 작가가 원래 이런 식으로 썼나?"하며 몇 부분을 넘어갔다. 그러다 문득 찾아온 깨달음.

아하! 이 소설, 창비였지?

(너무, 너어~무 창비)

그랬다. 창비였다. 창비만의 독특하지만 거슬리는 외래어 표기가 눈에 밟혔던 거다. 뭐, 출판사 방침이니 그러려니 하고 억지 이해를 했으나, 작가는 납득한 걸까 하는 생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사람 마음이란 참 어렵다.
이 소설 화자처럼 모든 마음의 갈등, 방향, 변화를 모두 알 수 있다면 조금은 수월하겠다. 그러나 역시 그리 즐겁지는 않으리라.

여지가 없이 화자가 읽어내는 대로 움직이는 인물들의 마음, 이야기의 흐름이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내내 내키지 않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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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1-10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 책 두 번이나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결국 읽지 못하고 반납했네
그래... 아무래도 인연이 아닌 듯.

대장물방울 2018-11-12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번 시도해서 겨우 읽었어요크크 안 샀더라면 언제 읽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