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분 기적의 독서법 - 인생역전 책 읽기 프로젝트
김병완 지음 / 미다스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보는 순간 이것이 나를 위한 책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이것은 나를 위한 책이었음을 확인했다.

 

이 책속에는 책에 미쳐 집중적으로 독서를 했던 많은 사람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성공담을 추가로 적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장담하기를 "그들만큼의 독서를 한 후에도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내가 책임질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 자신감이 마음에 들었다.

 어떤 사실을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 것은 확실히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지닌다.

 그리고 거기에 현실적 증명이 따라붙는다면 이것은 더이상 도박이 아니라 확실한 지름길이라는 것도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었을만큼 저자는 많은 책을 단기간에 읽었다.

 그리고 그 집중적인 독서를 통해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다.

 오전 48분, 오후 48분 더하여 하루 100분 정도씩 꾸준히 독서에 미치면, 3년이면 1000권의 책을 읽을 수있으며 그 이후에는 전혀 달라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해본 것은 내가 읽었던 책을 헤아려보는 것이었다.

 대략 고등학교 때 3년간 200권, 대학교 다닐 동안 250권, 군대에서 150권, 이후에 150권정도 읽었나보다.

 전부 합쳐도 800권이 채 되지 않았다.

 14년간 그것밖에 못읽었다니 의외로 너무 빈약한 독서량에 실망해버렸다. 아아  OTL.

 

그건 그거고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어떻게 3년동안 1000권의 책을 읽을 것인가 그 비법을 전수 받으면 되는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일지 몰라도 이 책을 읽으면서 몇번이나 눈시울을 붉혀야했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책에 빠져 살 수 있음을 보면서 부러움과 아쉬움이 북받쳤던 것이다.

 

'비등점'이라는 말이 몇번이고 등장한다.

 독서를 이야기하는데 난데없이 뭔 '비등점'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비등점'은 중요하다.

 

왜 집중적인 독서 즉, 3년동안 1000권의 책을 읽는 것이 필요한 것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한 좋은 비유이기 때문이다.

 물을 끓이기 위해서는 비등점을 넘어설 때까지 계속해서 가열해야 한다.

 중간에 불을 껐다가 켜거나 99도에서 불을 끈다면 결국 물은 끓지 못한다는 것이다.

 독서도 이와 성질이 같아서 999권의 책을 읽었어도 1권을 더 읽지 않으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경지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1000권을 읽어도 그 기간이 너무 길어져버리면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저자가 비록 1000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이 숫자 그대로의 1000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최소한의 목표로써의 기준을 이해하기 쉽게 써놓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목표가 분명할 때 전진하는데 망설임이 적어진다.

 3년동안 하루 한권씩 1000권. 왠지 간단명료하고 단순명쾌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기적의 독서법, 집중적 독서가 필요한 진짜 이유는 '행복'을 위해서다.

 우리는 나빠질 것을 두려워해 더 나아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을 망설이곤 한다.

 한마디로 "나빠지지도 않지만 나아지지도 않는" 정체된 생활을 택해서 아무 것도 아닌 나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겐 그것이 불행이면 불행이었지 '행복'은 될 수 없었다.

 

난 오래 방황해야했다.

 공부를 할 때도, 일을 할 때도 항상 마음은 길을 찾지 못해 헤메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최초의 절망과 충격을 느꼈던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내가 타인으로 '대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은 나를 절망하게 했다.

 하지만 내겐 현 상태를 멈추는 것도 바꾸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늘 그렇게 변명해왔다.

 

하나뿐인 나를 찾아다녔던 것 같다.

 무엇을 통해 하나뿐인 나로 존재할 수 있는가를 늘 고민해왔던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지식은 책 속에 있다.

 방황의 끝에서 항상 책이 내 손에 잡혔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답을 원했고, 책이 내게 답해주려 했던 것이었나 보다.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최근에 와서다.

 

참 오래 책을 잊고 지냈던 것 같다.

 한달에 한권 두권 읽거나 말거나 한 달도 많았다.

 부끄러운 이야기다.

 

지난해 여름 어떤 책에서 그 동안 품어왔던 애매한 의문 중 하나의 답을 얻었다.

 그 때부터 다시 책을 파고 들었다.

 책을 파고 들 수 밖에 없었다. 내게 답을 줄 수 있는 것은 책 뿐이었으니까.

 조금씩 생각이 넓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책 속에서 기쁨을 찾고 즐거움을 느끼고 깨닫지 못했던 것들도 생각하기 시작했다.

 

1000권이라고 하면 무척 많은 책이다.

 하루에 한권도 읽지 않던 사람에겐 불가능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게 불친절하지 않다.

 정말 친절히 1000권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전해주고 있다.

 

처음엔 한권도 힘들겠지만 그 시간을 견뎌내면 독서에도 가속이 붙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 요령, 요점을 발견해내는 요령을 얻고나면 더 즐겁게 수월하게 책을 읽어나가게 되고 그것이 나아가 여러가지 분야의 책들에 관심이 확장되는 단계에 이르면 생각과 의식 자체가 진화하는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막연하고 아득한 이야기 같을 수 있겠지만, 난 분명 그럴 것이라고 확신한다.

 꾸준히 집중적으로 여러분야의 여러 견해를 접하고 익히다보면 분명 그것은 하나의 개인을 완전히 개조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될 것이라는 것을.

 

너무 기쁜 마음에 들떠 좀처럼 진정되지를 않는다.

 너무 단숨에 읽어버린 것 같아 진정이 되면 찬찬히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

 

책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그 책이 가진 효과의 수혜자가 한정된 복권과는 전혀 반대라는 것이다.

 되려 많은 사람이 읽고 접할 수록 그 책의 효용과 가치가 커지는 신기한 성격을 가진 것이다.

 이것이 성공의 비결이라면 나 혼자 알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욕심이 난다.

 이 책은 내게 그런 책이었다.

 그렇기에 좋은 사람들에게,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좋은 책을 만나는 일은 늘 영혼이 즐거워 노래하는 것 같은, 봄날 겨우내 푸실해진 흙을 밟는 것 같은 두둥실한 느낌을 준다.

 이것이 행복이라면 내가 행복을 느끼기 위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독서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너무 행복한 책과의 시간이 또 기다려진다.

 

 

『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확실하고 쉬운 방법은 독서를 하는 것이다."

 

독서는 우리가 처한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것마저도 뛰어넘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돈이 없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책 속에 금은보화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실을 몸소 체험한 바 있다.

 지혜가 없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책 속에 지혜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장사를 하고 싶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위대한 상인이 되는 비법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발명가가 되고 싶다면 그래도 책을 읽어야 한다. 책속에 세상의 모든 것을 발명할 수 있는 원리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상가가 되고 싶다면 역시 책을 읽어야 한다. 그 속에 위대한 사상들이 숨죽이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기업가가 되고 싶다면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그 속에 위대한 기업가가 되는 방법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 29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부턴가 내 영혼이 책을 끌어당기는 것 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된 것 같다.

 계획하거나 의식하지 않고 그저 '그냥' 고른 책에서 최근에 읽었던 다른 책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이 느낌은 참 신기해서 마치 '지난 밤 꿈 속에서 그 책을 고르고는 보이지 않는 실을 이어둔 것 같은',  물고기를 낚은 강태공을 멀리서 보면 투명한 낚시줄은 보이지 않아서 끌려오는 물고기가 마치 허공을 날아 강태공을 향해 헤엄쳐가는듯 보이는 마법을 보는 것 같다.

 

어제 읽었던 책에서 이야기 하기를 양서를 골라서 읽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양서를 고르기란 쉽지 않고, 타인이 추천해준 책이라해도 내게 꼭 맞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기에 무조건 많이 읽는 사람에게 더 많은 양서가 찾아간다고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난 행운아다.

 소 뒷걸음질에 쥐잡듯 골라잡는 책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쏙 드는 것 뿐이니 말이다.

 

사실 이 책은 인터넷 서점의 특가 코너에서 무더기로 샀던 책 중의 한 권이다.

 사두고 2개월은 족히 지나버린 지금에야 읽게 된 것이 참 미안하지만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시기가 지금이었기에 지금서야 내 손에 닿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은 이 책의 저자인 포리스트 카터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책이라고 한다.

 원제가 '할아버지와 나'였다고 하는데 그 제목도 어울리긴 하지만 지금의 제목이 더 어울리는 이야기였다고 생각된다.

 

이야기는 '작은 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 체로키 인디언이 부모님을 여의고 난 후 음, 5년? 정도의 기간에 걸쳐 체로키 인디언으로 숲에서 자연과 함께 공생하는 삶을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 윌로 존, 파인 빌리 그리고 유대인 보따리상 와인씨를 통해 배우고 경험한 소소한 일상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를 읽다보면 왜 제목이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인지 알 수 밖에 없게 된다.

 

'인디언',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오기 전에 그 땅에서 낭비도 사치도 부의 축적도 없이 숲과 동물과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문자 그대로 평화롭게 살던 무던한 종적을 이르는 이름이다.

 백인들의 무자비함을 적나라하게 적어 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이 책 속에는 그들을 적나라하게 원망하는 이야기는 없다.

 되려 자신들을 그토록 괴롭히고 차별하고 멸시하는 백인들을 인디언들은 가엾게 여겼던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백인들에 대항해 칼과 활로 저항하고 전쟁에 참여했던 부족도 있었지만 많은 인디언들은 '순응'하고 그 원수같은 백인마져 용서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 '순응'이 무력과 강압이라는 폭력에의 무력한 '순응'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통해 이어져 내려온 천성적인 '순응'이라는 것은 기억해야겠지만 말이다.

 

'체로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디언 부족의 이름이다.

 '체로키'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고, 그 영혼을 감지했고, 그 영혼과 소통을 통해 풍족하지는 않지만 모자라지도 않는 자신들에게 있어 필요한 만큼에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살았다.

 그것은 한 순간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자연을 존중하고 생명을 아끼며 사랑하는 마음을 배우고 가르쳐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물질문명에 물들어버린 우리들은 그들을 볼 때 미개하고 가엾고 미련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배운 것, 교육의 관점 자연과 사람 세상을 대하는 자세 자체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인디언' 그들만이 가진 신비한 영적 능력들(나무, 바람, 물,  산짐승, 들짐승 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밤 하늘의 별을 통해 수백리 거리를 뛰어넘어 약속된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은 본래는 우리도 지녔던 것이었으나 물질 문명에 물들어 완전히 잊혀져 버린, 잃어버린 능력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했었다.

 

'인디언'들은 특별히 정규적인 교육체계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무엇을 강요하거나 하지 않지만 그들의 삶 자체를 통해 배우고, 어울려간다.

 

그들의 배움의 과정만큼 신기했던 것은 고난을 대하는 태도였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겪었을 때 정말 죽을만큼 괴롭고 힘들어하게 되는 이유는 그 일을 나라는 존재와 동일시 해버리기 때문이다.

 쉬운 예로 돈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난 슬프다.

 

사실 생각해보면 '돈'을 잃어버렸다고 내가 기분 상할 이유는 없다. 뭐, 그 돈이 정말 중요한 수술비라든가 급히 갚아야하는 빚을 갚기위한 돈이었다면 안타깝고 슬플 수 있겠지만 그것은 돈을 잃어버려서 슬픈 것이 아니라 그 돈으로 수술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임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인디언의 영혼을 분리하는 방식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몸의 마음이 있고, 영혼의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몸의 고통과 영혼의 고통을 분리할 수 있었고, 몸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심지어 죽음에 이를지라도 영혼은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이번 생이 끝나더라도 다음 생에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열살도 되자 않은 어린 '작은나무'가 백인 목사에게 모진 매를 맞게 되는 일화가 나오는데, 우리 보통 사람들이었다면 엉엉 울다 기절해버렸을 것이다. 등에서 피가 흘러 신발에 고일 만큼 맞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작은나무'는 울지도 기절하지도 않는다. 몸에서 영혼을 떼어 놓는 비법을 썼기 때문이다.

 

이것은 극단적 예일 것이고, 우리는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재주는 익히기 힘들 것이다.

 

다만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 슬픔, 고난, 곤란, 시련을 본래의 나와 겹쳐놓고 생각해서 괴로움에 빠지는 일은 하지 말도록 하자.

 우리 영혼의 짐을 굳이 무겁게 만들지 말자.

 

인디언들은 '교육'에 대해서 두 가지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기술, 다른 하나는 가치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는 가치라고하면 돈의 가치를 중시할 뿐 진정한 가치는 외면해버리고 그런 자세로 기술을 배우다보니 문제가 자꾸 불거지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에서는 "가치를 무시한 채 현대적이 되면 사람들은 그 현대적인 것을 오용하게 된다."고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발전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빠른 성장에 치중하다보니 균형을 잃고 올바른 가치를 견지하지 못한 상태로 기술을 운용하다보니 사회는 패륜으로 물들고 정치는 부패의 연속선 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부는 편중되고 집중되어 빈부의 격차가 날로 커지는 가지면 가질 수록 불행해지는 삶을 향해 달리는 브레이크 없는 무시무시한 열차에 올라버린 모양새가 지금의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자연과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 세상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작은나무'와 체로키 인디언 그리고 '작은나무'를 사랑한 모든 존재들의 이야기에 담긴 영혼을 따스히 해주는 온기가 추운 겨울 우리들의 영혼도 따뜻이 안아주길 바래본다.

 

"그게 이치란 거야.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져야 한다. 사슴을 잡을 때도 제일 좋은 놈을 잡으려 하면 안 돼. 작고 느린 놈을 골라야 남은 사슴들이 더 강해지고, 그렇게 해야 우리도 두고두고 사슴고기를 먹을 수 있는거야. 흑표범인 파코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 너도 꼭 알아두어야 하고." 26쪽

 

반면에 링거는 예전에는 뛰어난 사냥개였지만 지금은 너무 나이를 먹었다. 이제는 꼬리를 질질 끌고 다녀 볼꼴 사나운데다 옛날만큼 잘 보거나 듣지도 못했다. 할아버지가 링거를 모드와 짝지어준 것은, 링거가 모드를 도울 수 있게 하여 나이가 들어도 자신이 여전히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이 일은 링거에게 뿌듯한 자신감을 갖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옥수수밭에서 일하는 계절이 되면 링거는 목을 한껏 치켜세운 채 네 다리를 씩씩하게 내딛으면서 주위를 돌아다니곤 했다. 43쪽

 

나는 자연에서, 어머니인 모노라에게서 태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산에 온 첫날 밤에 할머니가 노래하신 것처럼 자연 속의 모든 것을 형제자매로 가질 수 있었다. 230쪽

 

선물을 받는 쪽은 자신이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받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선물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거나 하는 짓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었다.  238쪽

 

어떤 사람들은 계속해서 주는 것을 즐긴다. 그렇게 하면 받는 사람보다 자신이 잘났다는 허세와 우월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로 해야 할 일은 받는 사람의 자립심을 일깨울 수 있는 작은 뭔가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252쪽

 

만일 이런 가치들을 배우지 않으면 기술면에서 아무리 최신의 것들을 익혔다 하더라도 결국 아무 쓸모도 없다, 사실 이런 가치들을 무시한 채 현대적이 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그 현대적인 것들을 잘못된 일, 부수고 파괴하는 일에 더 많이 쓴다고 하셨다. 261쪽~262쪽

 

"자신이 여전히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33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통섭의 식탁 - 최재천 교수가 초대하는 풍성한 지식의 만찬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과 소통하고 말겠다! 라는 외침을 내놓은지 4개월이 되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늘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과 말들로 나를 괴롭게 만드는 존재들로 늘 거북하거나 혹은 귀찮은 존재들에 불과했다.

 하지만 깨닫고 보니 내가 그들을 떼어놓은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서 떨어져나간 모양새가 되어있었다.

 결국 괴롭고 슬픈 것은 나 혼자. 외톨이가 되어 갔다..

그리고 결국 그런 삶에 질려버렸다.

 

그래서 소통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낯 바꿔서 어제와 전혀 다른 나~! 쨘! 하기는 또 어색하고 무안해서 내 안에서부터 바꿔나가기로 했다.

 그 이후로 다시 시작한 것이 독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를 안에서부터 바꿀 수 있는 자극과 가르침이 될만한 것은 '책' 이외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무슨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벽에 부딪혀 버렸다는 것이다.

 다시 머리를 굴렸다.

 오랜만에 안쓰던 쪽으로 생각의 물고를 터보려했더니 그 물고 뒤에 잡다히 걸리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좀처럼 트이지를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해보기로 했다.

 소셜네트워크의 시대. 인터넷 속에는 내공이 깊은 독서가들이 참 많다는 사실을 어디선가 주워들었었다.

 그러고보면 뭐든 주워듣고 볼 일이다. 그 것으로 막혔던 물고가 시원하게 터져나가는 것을 느꼈으니 말이다.

 

이제 조금 시야를 넓혀보기로 하고 보니 다시 막막하다.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왜 읽어야 효율을 감동을 기쁨을 배움을 깨달음과 변화를 더 크게 만들 수 있을 것인지.

 

요즘 낯설지만 점점 자주 눈에 띄는 단어가 있다.

『통섭』이라는 말이 바로 그 것이다.

 내 가진 깜냥으로 해석해보면 조화, 융합과 비슷한 의미인 것 같다.

 

이 책 '통섭의 식탁'을 간단히 말하면 '생각했다, 노렸다, 얻었다, 읽었다, 알았다'의 과정의 연쇄였다.

 생각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였고, 노린 것은 인터넷의 서평 이벤트였고, 읽은 것은 물론 '통섭의 식탁'이었고 알게 된 것은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할 것인가 였다.

 이만하면 참 잘한 독서 아닐까싶다.

 

나름의 질문을 가지고 읽었고, 그 나름의 질문에 답을 얻었으니 내게 있어 최고의 독서라고 해도 틀리지 않겠다.

 

지은이인 최재천 교수님은 스스로를 '책벌'이라고 칭할 만큼 책을 가까이하고 욕심내는 사람이다.

 파벌, 재벌, 학벌 등의 말이 가지는 '벌'의 부정적 이미지를 넘어서 책을 즐기고 아끼고 욕심내는 새로운 '벌'을 이야기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인 만큼 독서의 내공이 얕을리가 없다.

 

본래 생물, 동물과 관련된 연구를 업으로 삼는 교수인 그는 "알면 사랑한다!"라는 알듯 말듯 한 좌우명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말하길 "자연도 알아야 사랑하고 보호하게 되는 법이다."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통섭의 식탁'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사람들이 알고 아끼고 사랑하게 될 수 있도록 해줄 책들에 대한 '추천사'를 모아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제목도 제법 특이하지만 구성도 특이하다.

 마치 만찬을 즐기듯 코스로 나누어 둔 독특한 모양으로 책들을 모아두고 분류해 둔 것이다.

 이런 형식의 책이 모든 사람의 식성에 맞을런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에 페이지 배경에 사각형이나 줄무니가 들어가서 활자와 겹쳐보이는 페이지들을 제외하고는 제법 식성에 맞았었다. 하긴 내가 잡식성이라 어지간해서 식성에 안맞을리가 없지만 말이다.

 

책 머리에서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이 책은 '과학자의 서재'라는 책에서 미처 진열하지 못한 다른 책들의 소개가 모아져 마련된 책이다.

 '과학자의 서재'라는 책을 읽지 못한 것이 아쉬운 부분이지만 지금은 '통섭의 식탁'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서론이 무척 길어져버렸지만 나의 감상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얻은 결론은 "알아야 사랑하겠구나."였다.

 

 나름대로 독특한 구성을 통해 책을 묶어두었는데 이런 조금은 식상하고 진부하기까지한 감상이 나온 것은 어쩔 수 없다.

 정말 말 그대로 "알아야 사랑하겠구나."라고 생각했으니.

 

통물과 생물을 주로 연구하는 분야에 계신 교수님이라 그런지 자연과 생태 생물들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뜨겁고 무척이나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가 예사로 치부하는 일들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나, 우리가 보호해야 할 생물들과 그 정당성을 일깨울 수 있는 이유들을 이 책 속에 소개된 책들을 통해 배울 수 있겠구나" 싶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동안 잡식이라고 해놓고선 극도의 편식을 일삼아 왔던 나의 빈약한 독서의 영역 문제였다.

 '통섭의 식탁'에 소개된 150권이 넘는 책 중에 "아, 이 책~ 나 읽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책이 다섯권이 되지 않았다.

 아, 안타깝다. 그래서 전부 메모했다. 이 책 속에 한번이라도 이름이 나오는 책 제목 전부를.

 

사실 메모했다고 당장 읽기 시작하게 될 것 같은 만만해보이는 책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이야기가 떠오른다.

 '기획 독서'

 

우리는 보통 취미, 혹은 취향에 따라 책을 고르고 읽는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사고 영역을 제한하게 되는 족쇄가 될 수 도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나도 그랬다.)

 독서가 괴로움이 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불과 두달 전까지도.

 그럼에도 저자인 최재천 교수님은 '기획 독서'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기획 독서'가 통섭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라면서 말이다.

 

'통섭'을 쉬운 말로 하면 '짬뽕'혹은 '비빔'이 될 것이다.

 갑자기 뭔가 없어보이는 말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사과 말씀을 전하며, 우리나라의 비빔밥과 우리가 밥상에서 밥과 반찬을 먹을 때의 그 불규칙적인 조합을 들어 "우리 나라가 어쩌면 섞는 것 하나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제일 잘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한 최재천 교수님의 말을 더해본다.

 

책은 효용성에 따라 읽는 사람 모두에게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에서 그치는 책이 있는가하면, 그 책을 읽고 그 책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효용성에 급격한 격차가 발생하는 특별한 책이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전적으로 후자에 속하는 유형으로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잠재능력을 가진 책일 수도 있고, 에이 뭐 이런 책이었어? 하며 어딘가에 처박히는 처량한 신세가 될 수도 있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내용은 책들을 추천하는 글들로 이루어져 있고 주로 생물학과 과학에 관계된 서적들임을 이야기해두기로 한다.

 조금 전문적인 내용도 들어있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 대부분이겠구나 싶은 제목들이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지은이의 말을 조금 적어본다. 

 "과학의 대중화 보다 대중의 과학화" 

 

요즘 서투르게 과학의 대중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단순히 교양 위주의 과학 서적들이 판을 치고 있어 궁극적으로 과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효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역효과가 나타나고 있기에 섣불리 수준을 낮추어 과학을 대중화 하기보다 대중의 수준을 조금 높여 대중을 과학화 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일이라는 것이다.

 

지당한 말씀이긴 한데, 이 말에 대한 호응이 뜨거울지 비난이 뜨거울지는 잘 모르겠다.

 

이쯤에서 슬슬 결론을 생각해야겠다.

 

이제 세상은 새로운 형태의 인재를 원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인재가 바로 '통섭형 인재'다.

 하나의 학문에 그치지않고 다른 학문들에도 조예를 가져야만 두루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인재가 된다는 것이다.

 한창 산업이 발전하던 시대에는 이른바 '평생 직장'이 모두의 목표였다고 한다면, 지금은 '십년 직장'을 목표로 해야 하는 상태고, 이 후에는 그보다 더 짧은 기간에 직장, 직업이 달라질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지은이는 예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발전과 개발을 명목으로 행하는 환경에 대한 무자비한 파괴 행위를 멈추지 않으면 반드시 찾아올 재난, 재앙들도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영원하지 않은 유한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에게 너무 가혹한 모습을 보인다.

 우리 기준에서, 우리 위주로, 현재 상태에서 생각하고 계획하고 실행한다. 

 그러다보니 오래도록 이어지던 조화가 깨어지고 생태계도 생물의 다양성도 깨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재해, 혹은 재난, 기상이변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보내는 것은 자연일까? 아니면 우리 스스로가 불러들인 것일까?

 그런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담고 있지 않으면서도 생각할 수 밖에 없게 만들고 떠올릴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신기한 책이었다.

 

 "알면 사랑한다!"라는 그 말이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우리와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해도 일체의 해가 나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안일함 때문이다.

 

우리는 조금 더 자연과 생명과 세상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사랑해야 한다.

 생판 모르는 남을 사랑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알아야 사랑하던 미워하던 할 것 아닌가? 모르는 것이 약이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아는 것이 힘이고 아는 것이 사랑인 시대인 것 아닐까?

 

고대의 학자들을 보면 철학과 의학과 건축 미술을 두루 익히고 있었다.

 그것이 어느 순간부터 세분화 되고 자신의 분야에만 정통하면 최고가 될 수 있는 시대로 변화했다.

 어느 시대에나 필연적인 변화에 대한 요구가 있다.

 서서히 떠오르는 '통섭'이라는 화두가 그 필연적 요구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했던 책이었다.

 나의 무관심의 영역에 잠들어 있던 것들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주는 좋은 계기가 된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이제 우리 "알고 사랑해보자."

 

 

시애틀의 추장의 연설문 :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 온 것들을 당신들도 당신들의 아이들에게 가르치십시오. 이 대지가 우리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ㆍㆍㆍㆍ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대지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가 대지의 일부라는 것을. ㆍㆍㆍㆍ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이 땅의 아들딸 모두에게 벌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 생명의 그물을 엮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그 그물을 이루는 하나의 그물코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 생명의 그물에 저지르는 일은 곧 우리 자신에게 저지르는 일입니다." 236쪽~23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잃어버린 여행가방 - 박완서 기행산문집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밀린 숙제를 해놓는 기분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어나간다는 것이 내겐 좀처럼 맞지 않는구나 하는 일을 이런 형태로 다시금 깨닫게 될 줄야.

 

왠지 왕성한 여행가는 아닐 것 같은 박완서님의 기행 산문집이라기에 사봤다.

 왕성한 여행가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어디서 왔는지 따져 물을 필요도 없이 그냥 느낌이니 뭐라 할 말은 없다.

 그런 분은 여행에서 무엇을 보고, 보려하고, 느끼고 어떤 이야기를 적어 내려갔을까하는 궁금증에 샀던 것 같다.

 

뭐 일일이 책을 살 때 이유를 달지 않는 것이 내 습성이니 굳이 이유를 적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세상에 있을 때 그분의 작품들을 많이 읽지 못하다 세상을 떠나신 후에야 이렇게 읽게되는 것에 대한 대상도 없는 송구스러움 탓은 아닐까 싶어진다.

 왜 떠나서 없어진 뒤에 찾게 되는가?하는 허허로운 질문과 함께 첫 장을 넘겼던 것 같다.

 

과정을 무시한 목적지 위주의 여행.

 책 앞머리에 그녀는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여행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되도록 목적지에의 가장 빠른 교통편을 강구하고, 주변 풍경을 가능한 빨리 스쳐 도달하는 것.

 그러고는 여행이 갖는 휴식과 전환의 의미를 잃고 단지 일정에 끌려다니다 지쳐서 돌아오게 되는.

 소소하지만 살아있는 여행을 하지 못했음을 두고 바보 여행이었다고 그녀는 이야기하고 있다.

 

뭔가 이런저런 의미의 아쉬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던 이야기로 기억 될 것 같다.

 다른 이야기는 미뤄두고 그녀가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 티베트 이야기나 적어보련다.

 

알고 있겠지만, 티베트는 독립국가가 아니다.

 과격한 의미로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듯, 티베트는 중국의 지배하에 있다.

 이 사실은 그녀가 티베트를 여행하는 동안 그 나라에 보내는 시선과 그 나라에 발견하게 되는 사실들을 받아들이는 중요한 잣대가 되고 있다.

  빈번히 등장하는 티베트 안의 한족에 대한 삐딱하기까지 한 시선이 일제 시대 지배층인 일본인을 대하듯 하던 것처럼 말이다.

 

뭔가 흐름을 쉽게 타버리는 나는 그만, 그 감정의 흐름에마저 훌렁 올라서는 괜시리 중국이 미워지기도 했다.

 안타까운 것은 구걸하는 티베트인들의 이야기다.

 조금 번화한 시내라는 곳엔 어디든 구걸하는 티벳인들이 있다.

 그 구걸을 견디다 못해 한 사람에게 돈을 건넸다가는 몰려드는 구걸부대에 둘러싸여 오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티벳에서 연민은 약점이 된다.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약점이 된다는 것은 참 서글펐다.

 

구걸티벳인들에 대한 이미지는 마지막 즈음에 전환을 맞이하지만 그렇다고 서글픔마저 전환되지는 않았다.

 

야크똥 이야기나 조금하다 이야기를 마쳐야겠다.

 티베트는 고산지대다 보니 나무가 적다못해 없단다.

 수목한계선을 넘어선 시점에서 나무는 커녕 풀도 구경하기 어려워 적나라한 바위와 흙이 티베트의 전경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그러다보니 난방에 사용할 연료가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야크똥이다.

 

야크는 황소가 조금 더 크고 북실한 것 같은 생김이라는데 화려하게 치장한 것도 황소와는 다른 점일 것 같았다.

 그 야크의 배설물 야크똥은 집집마다 담장이란 담장엔 찰싹붙어서 잘 말려져서 저장했다 연료로 쓰인단다.

 온 담장마다 틈도 없이 붙어있을 야크똥을 상상하는 재미가 제법 찰졌다.

 

아아, 왠지 읽었다고 이야기하기가 부끄러울만큼 머릿속에서 정리되질 않는다.

 무슨 르포를 읽은 것 마냥 티베트의 현재 현실도 아닌 몇 년 전의 이야기만 전해 들어 애잔함과 씁쓸함 서글픔만 남은 것처럼.

 먹먹하고 막막하고 쓸쓸하다.

 

달라이라마의 행복론에서 인도로 망명한 14대 달라이 라마는 그런 서글픔을 전혀 품고 있지 않았음을 떠올려본다.

 중국은 티베트의 독립운동에 군대까지 동원해 유혈진압도 서슴지 않고, 티베트 인들은 가진자에 대한 당당한 요구든 단지 구걸이든 관광객들을 쫓아다니고, 한족들의 이주로 이젠 티베트인보다 한족이 더 많아지고, 그럼에도 그들의 깊은 신앙은 변함없고.

 달라이라마는 무엇에서 희망을 보고 무엇에 희망을 걸고 있던 것일까?

 나이든 여류작가의 눈을 통해 본 티베트는 희망적 풍경에도 너무나 황폐하고 절망적이었다.

 그들은 십수년 후에도 한족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들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그들의 문화를 기억하고 독립된 나라로 존재했던 시대를 그리워할까?

 

옴마니반메훔을 풀면 '연꽃 속의 보석이여'라는 말이 된다고 한다.

 암울한 시대에 읇는 옴마니반메훔은 어떤 바램을 담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연꽃이고 무엇이 보석인가.

 진흙속에서도 고결한 꽃을 피우는 연꽃이 지금 그들이 처해있는 진흙탕같은 세상에서 기다리는 희망이라도 된다는 것일까?

 그 연꽃 속의 보석이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조예도 없는 염불에 괜히 골몰한 시간이기도 했다.

 

한국인이 한국말로 쓴 여행기가 나를 이토록 당황스럽게 만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조차 떠올릴 수 없음을 부끄러워하며 그만 마쳐야겠다.

 

그냥 "옴마니반메훔"

 

 

가서 또 한 번 놀란 것은 그들이 그동안에 더 잘살게 돼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종이와 일회용품의 낭비가 이젠 조금도 놀랍지 않은 나자신에게 놀라고 만 것이다. 25쪽

 

아무의 눈치도 볼 거 없다 해도 자연의 눈치만은 봐야 하는 것은 인간의 최소한의 법도다. 흐르는 큰 강물에는 양심의 가책 없이 오줌을 깔길 순 있지만, 하루 한 통이나 고일까 말까 한 옹달샘물에 오줌을 누는 것은 짐승만도 못한 짓이다. 25쪽

 

이방인이 티베트에서 장려한 사원과 수많은 불상을 보는 일은 눈에는 최고의 사치요 충격이었지만 그 이상은 되지 못했다. 마음의 평화나 기쁨은 못 느꼈다. 호화와 사치를 극한 불상과 이 땅의 극빈층하고 저절로 대조가 되니까 불상에서 느끼고 싶은 자비를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205~20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본래 내가 읽어야 할 것이 아니라 공지영님의 딸 위녕양이 읽어야 할 편지들이라 꼭 훔쳐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소소한 이야기들 보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발췌되어온 책들의 제목을 적는 것에 더 열심이었던 책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딸에게 보낸 응원의 편지들이 책이 되어 우리들까지 응원하는 메세지가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나만의 '엄마'이길 바라고 나만을 응원해주는 '엄마의 편지'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욕심을 우리 독자들에게 양보해준 딸 '위녕'양의 호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읽어야지 싶었다.

 더하여 에필로그에 적어둔 엄마에게의 편지를 읽으며 두 모녀가 참 닮았구나 싶은 생각을 한 것은 나만의 이야기일까?

 

사실 이야기 내내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그래서, 언제 수영장에 가실건가요?!"하는 것이었는데 마지막의 마지막인 작가 후기에 결국 수영장에 갔다만 슈퍼가 되어있더라 그래서 못갔다는 얘기로 끝나고 있었다.

 

이런이런 참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고 딸을 생각하는 엄마의 애틋한 마음들이 눈에 보이는 듯 했지만, 그러면서도 오늘은 이런 이유로 수영장에 못가고 저런 까닭에 못갈 것 같고 이러다보니 가면 안될 것 같고 하는 이야기에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덧붙여 "오늘도 좋은 하루!"라는 반복되는 끝맺는 말이 마치 주문이나 기도처럼 들려 애틋함을 더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살아가는 것과 살아지는 것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

 오늘까지 30년을 살았다. 나는 30년을 산 것일까 아니면 똑같은 1년을 30번 산 걸까하는 물음.

 지금을 살아가라는 말.

 

요즘 수없이 읽고 듣고 보는 그래서 이젠 진리처럼 마음에 새겨져가는 그 말들이 책속의 이야기에 멋대로 끌려가기 시작하게 만들었다.

 

메모해둔 책 제목을 열거해보면 <얀 이야기 - 얀과 카와카마스>, <새들은 페루에가서 죽다>, <소박한 기적>, <열정>,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시민의 고백>, <팡세>, <어떻게 당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정도다.

 

가만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책도 몇 권 눈에 띈다.

 떠넘겨받듯 받은 책들에 한권, 한참전에 사둔 책 한권, 오래전에 읽었던 책 한권.

 아마 곧 혹은 머지않아 다른 제목의 책들과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은 필연적 예감을 해본다.

 

이 책의 제목인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라는 말은 맥팔레인이라는 노교수가 손녀 릴리에게 전하는 편지 <손녀딸 릴리에게 주는 편지>속의 이야기에 나오는 말이었다.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테니 너는 두려워 말라며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라고 말하는 든든한 할아버지와 같은 말을 인용해 딸에게 응원의 편지를 띄우는 엄마, 시대와 세대 인종을 넘어선 어떤 깊고 끈끈한 사랑이 느껴졌던 것 같다.

 

들을 때는 그 말이 옳든 그르든 관계없이 '잔소리'가 되어버리는 부모님의 말씀들이 왜 이렇게 한 다리를 건너서 대면하게 되면 쉽사리 납득하고 마음에 새겨지는 조언이 되는지 알 수 없음을 떠올리며 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다.

 

살아가는 것과 살아지는 것의 경계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현재에 안주하느냐 앞으로 나아가느냐의 선택에서 주저앉는가 아닌가가 될 것 같다.

 어떤 편지 속에 담긴 이야기에 '설사 여기 괴로움이 있다해도 그것이 내가 아는 것이라면 더 나았다.'는 말이 있었다.

 그 이유가 참.

 "고통보다 더 두려운 것은 미지이다."라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의 미지에 뛰어드는 것이 두려워 익숙한 현재의 고통을 계속 겪는 것.

 

현재 고통스러워도 그 고통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에 그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다고 해도 그 미지의 방법에 도전하는 것보다 이미 알고 있는 고통을 계속 겪는 것을 선택하고 멈춰서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거기서 멈춰서는 순간 우리는 살아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야한다. 그리고 살아가는 인생을 그들은 응원할 것이라고 한다.

 살아지는 인생은 응원해도 소용없는 그저그런 널리고 널린 인생으로 가는 이미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처럼 시시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편지에 적었던 작가의 마음이란,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바라는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포기하게 되는 다양성있는 인생과 창조적인 삶에대한 아쉬움이 아니었을까.

 있는대로 스펙을 올리기위해 모두가 달리길 원하는 출세가도에 합세하기 위해 전력질주하지만 그 끝이 꼭 행복으로 이어져있는 것은 아닌 그저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젊음에대한 안타까움은 아니었을까.

 

너무 작가가 수영장에 가게되는 날에만 집중했나보다.

 제대로 읽어낸 기분이 들지 않는다.

 살아가야 한다는 것, 미지를 두려워하기보다 현재에 안주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 올바른 '표상'을 지녀야 한다는 것.

 오늘은 이정도만 마음에 새긴 것으로 만족하기로 해야겠다.

 

너무 많은 것을 얻으려고 욕심을 내면 하나도 건지지 못하게 되고 만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오늘부터 내 오랜 상처들을 치유해 나가야겠다. 상처가 대물림 되는 이유가 그것이 치유되지 않았았기 때문이라면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