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탱고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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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맨 부커상 수상작으로 이름이 제법 읽기도 쓰기도 어려운 생소한 작가 작품이다.


뭐, 책을 좀 읽으시는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실지도.


독특한 작품이었다. 

문자 그대로인데, 서사 방식, 전개 구조, 장의 구성이 색달랐다. 


지난 번 필립 로스 <에브리 맨>은 마지막 장을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었었다. 이 작품도 본의 아니게 처음 부분을 다시 읽게 됐는데 계기는 전혀 달랐다.


왜 그랬는지는 책을 읽은 사람들은 저절로 알게 될테니 밝히지 않기로 하고,


대표 키워드를 몇 개 뽑고 싶은데, 첫째는 ‘부활’이다. 과연 유명 문학상 답게 모호한 부분이 많아서 콕 짚긴 어렵지만 이 작품은 죽음과 부활을 다루는 거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종소리’다. 단순하게는 시작 종과 마치는 종이라는 열고 닫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겠고, 흥미를 돋우자면 죽은 자를 깨우는 종소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세 번째는 ‘감시’로 한다. 감시가 먼저인지 존재가 먼저인지 이 이야기만으로는 선뜻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배경이 궁금해지는 이야기인데 어떤 배경에서 쓴 건지 알게 된다면 억측이나마 추측을 시도해 볼 여지가 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거미’다. 이야기에 거미가 거듭 등장하는데(정확히는 ‘거미줄’) 보이지 않지만 모든 곳에 이어진 줄을 남긴다고 한다. 해충이 되어 박멸 대상이 된 개미와 달리 해충까지는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혐오하고 없애고 싶어할 곤충이 거미다. 거미는 날벌레들에게는 치명적인 적인데, 공중에 쳐진 거미줄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일단 걸리면 도망치려 발버둥 칠수록 감기는 성질이 있는 게 거미줄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거미줄에 얽히는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동명의 영화가 있다는데, 그게 7시간이 넘는 단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게 빠른 드물게 존재하는 작품이지 싶다.


읽고 난 직후라 아직 막연하게 느껴지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이게 뭔지 모르겠다고 고백해야만 하는 상황인듯하다.

 무슨 메시지를 담은 건지 감 잡기가 힘들다. 줄거리는 알겠고, 등장인물들의 성향이나 상황, 심경도 추측할만 한데 그 모든 걸 아울러 담은 결과물이 표현하고자 하는 게 뭔지 좀처럼 와닿지를 않는다.


독특하고, 수월히 읽히지만 다 읽고 나서도 뭔가 석연찮은 기분을 남기는 소설이다.


헝가리, 다뉴브 강, 폐허가 된 농장, 궂은 날씨, 불확실과 무지와 무력함, 부활이라는 기적.

난해했다.


표지가 두 가지다. 랜덤으로 발송된다는데, 검정이 왔다. 빨강이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이 소설에 입각해 생각해보면, 정말 빨간 표지는 존재하는 걸까?하는 의심을 해보게 된다.

악마에 홀려 탱고를 추는 꼴이 아닐지.

제목이 사탄 탱고인데, 솔직히 작품을 다 읽고도 제목의 의미조차 다 간파하지 못했다.

뭐, 아무렴 어떤가.

언젠가 시간을 내어 영화를 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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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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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작가'는 이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범위를 넓히면 '작가'로 인정받은 사람만이 아니라 '글을 쓰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하나만 적어두기로 합니다.


'쓴다'는 행위는 누군가의 말을 받아 적는 게 아닌 이상, 개인적이고 독립적입니다. 

제 아무리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작가라고 해도 쓰는 건 '자기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독백'. 

쓴다는 건 그런 겁니다.


그중에 누군가를 비난하고 모함하는 글, 사실을 날조하고 기만하는 글, 핵심을 흐리고 선동하는 글을 쓰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쓰는 이만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의심할 것인가 믿을 것인가는 엄연히 읽는 이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위 '좋은 글'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분별력.

진실된 글, 좋은 글은 감동도 주지만 안목도 높여줍니다. 

거짓과 기만이라는 진흙 속에서 사실과 진심이라는 진주를 알아볼  있게 하죠.


 조지 오웰의 글은 좋습니다.

매우, 몹시, 대단히 좋습니다. 

놀라운 건, 글보다  좋은  조지 오웰의 삶이라는 겁니다.


<나는 왜 쓰는가>는 조지 오웰이 남긴 많은 에세이에서 스물아홉 편을 뽑아 먼저  순서로 모아둔 책입니다.

제목이 '나는  쓰는가'라서 글 쓰는 기술을 알려주는 책인가 싶어 샀다는 분들도 계시던데, 그분들조차  착오, 착각이 기쁨이 됐을 만큼 오웰의 글은 아름다웠습니다.


스물아홉 편의 에세이에는 조지 오웰의 삶, 생각과 함께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조지 오웰의 글이 좋은 이유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조지 오웰은 단순히 '기록된 역사'를 가져다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직접 뛰어들어 보고, 듣고,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썼습니다. 

사실만 담았다면 지금만큼 조지 오웰을 좋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웰의 글에는 사랑과 애정이, 소외되고 잊힌 자들을 향한 진심이 담겨 있기에  좋아졌던 거죠.


 연대순으로 실린 오웰의 에세이를 읽어나가다 보면 이때쯤 어떤 작품을 썼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확인해보면 어김이 없습니다. 


 조지 오웰은 인도에서 태어나 식민지 경찰로 버마에서 근무했으며, 사회주의자로서 카탈로니아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조국 영국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무조건 감싸는  아니라 애정 어린 질책과 정당한 비판의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트럼프 취임  미국에서 다시금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는 <1984년>과 대표작인 <동물 농장>이 단순히 디스토피아나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들여다보니 영국 사회를 비판하는 메시지도 적지 않았습니다. 

 균형 잡힌 시선과 넓고 깊은 사유, 과감히 현장으로 뛰어가는 결단력과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해낼  있는 능력까지. 조지 오웰 같은 작가는 좀처럼 다시 만나기 어렵겠죠.


 <나는 왜 쓰는가>는 작가를 꿈꾸는 이가 읽어도 좋겠지만, 정책을 세우고 실행하는 관료들과 정치인들에게 더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위한 정치, 누구를 위한 나라, 어떤 목적의 전쟁, 무슨 의도의 사상.

약자들,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향하는 조지 오웰의 따뜻한 마음을 그들은 알아야만 합니다.


 솔직히  감상문은 너무 쓰기가 어렵습니다.

아직 무엇을 쓰는  능숙하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책을 읽으며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를 잊어버린 탓입니다. 

벌써  번이나 쓰기를 그치고 다른 짓을 하다가 돌아왔는지 모릅니다. 

이런 미숙함이 부끄럽지만 조금만  적기로 하겠습니다.


 <나는  쓰는가>에서  문장만을 꼽으라면  문장으로  생각입니다.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 또한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
<나는  쓰는가> 중


오웰의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했습니다. 대부분 잊었지만 분명한  언어와 생각, 어느 것도 타락해서는  된다는 겁니다. 

 요즘 세상은 '어쩔  없다'며 자꾸만 생각의 타락을 정당화합니다. 타락한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교묘하게 뒤틀린 언어를 가져다 쓰고는 합니다.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키고, 타락한 언어가 다시 생각을 타락시키는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직시해 봅시다. 

조지 오웰이 전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던 조국 영국을 직시한 것처럼요.

수년간 불가능할 것만 같던 비정상의 정상화. 

우리는 너무나 간단히, 허탈할 만큼 쉽게, 그러나 그만큼 기쁘게 변해가는  보고 있습니다.


생각이 달라진 것. 

모든 시작은 생각하는 주체가 달라졌다는  하나였습니다. 

그들이 쓰는 언어를 봅시다. 

우리는 이제 이해할  있습니다. 

모국어처럼(이전의 그들도 물론 모국어를 쓰기는 했습니다만) 우리는 간단히   있습니다.


유체이탈, 얼버무림, 횡설수설, 묵묵부답, 침묵일관. 

우리는 이러한 행동에 '비정상'이라는 언어를   있게 됐습니다. 


조지 오웰은 거의 모든 에세이에서 약자들, 노동자들을 향한 애정을 드러냅니다.

<1984년>에서 윈스턴 스미스가 '노동자들만이 희망'이라고 믿었듯 현실의 조지 오웰 역시 그들만이 희망이라고 믿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마음이, 사랑이, 애정이 <나는  쓰는가>에 담겨 있습니다.


저는 종종 이렇게 묻고는 합니다.


"나는 왜 읽는가?"

이런 만남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앎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깨지고 부서지는  반갑기 때문입니다.

부끄럽고 반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나마 닮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를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쓰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가, 쓰는 이는 세계와 시대와 역사의 산물입니다. 

어떤 글, 무슨 이야기를 쓰는 많이 쓰는지를 보면  세계와 시대를 이해할  있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아픕니다. 

가볍고, 말랑하며, 위로와 위안, 힐링을 위한 언어가 넘쳐흐릅니다.

언어는 생각을 타락시킬  있다고 했습니다.

언제까지나 휘말려 다니지 않기 위해, 우리는 중심을 잡아야만 합니다.


 무엇이 좋은 글이고, 무엇이 좋지 않은 글인지.

어떤 글이 진실이고, 어떤 글이 거짓인지.

어떻게 진심과 기만을 가려낼지.

 판단은 언제나 독자의 몫이자 책임입니다. 


 혼란한 시기일수록 안목과 통찰력이 간절해지기 마련입니다.

지금이 그런 시기라는   말할 필요가 없겠죠.


 어린 시절을 회상한 <정말, 정말 좋았지>라는 에세이에서 오웰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는 누가 저지르는 무엇이기만 한 게 아니었다. 누구에게 그냥 일어날 수도 있는 무엇이었던 것이다.
<나는  쓰는가> 중

불가항력처럼 착각이 강요되는 날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지 말 것이며, 세상의 밝음뿐 아니라 어두움, 표면과 이면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안목을 지니시기를.

 그 안목을 키우는데 오웰의 통찰이 도움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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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마카롱 에디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심영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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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이 내 책을 건성으로 읽는 게 싫다."

유명한 소설 도입부에 적은 작가의 목소리입니다. 어떤 작품인지 예상하고 계신가요?

 문장이 담긴 작품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입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린 모자 그림. 
하나뿐인 장미. 
길든 여우.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 
기다림의 설렘과 떨림. 
정말 아름다운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이고, 비록 작가가 어린이였던 어른에게 바치기는 했지만 어린이들도 쉽게 읽을  있다는  생각하면 새삼 깊은 사유와 감성에 놀라게 됩니다. 

 인생책이라고 정말 좋다고 얘기하고 다녔으면서, 서너 번은 읽었으면서, 앞서 적은 문장이 마음에 와 닿은 순간이 없었다는 사실. 

이번에야 마치 처음 읽은 것처럼 발견하고서는 '생텍쥐페리가 이런 말도 했네.'하며 조금은 놀라고 말았던 일.

  아닐 수도 있지만 조금은 충격적이라고 느꼈던 건, "잘 읽고 있는가?"하는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뭐, 어떤 작품을 읽고 무얼 느껴야 하고, 어떤  발견해야 한다는 식으로 정해진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소망이랄까, 욕심이랄까, 아쉬움 같은  있어요.

좋은 작품이기에  풍부하게 보고, 느끼고, 알고 싶다는 원초적인 바람들요.


 워낙 좋은 작품이니 찬사를 보태봐야 신화에 덧칠하는 셈밖에 되지 않을 테고, 그래서 이번에는 처음   같은 문장  개를 적기로 합니다.


첫 번째는 "나는 사람들이  책을 건성으로 읽는  싫다."입니다.

진지하게 말하는데 건성으로 듣는다면 속상하고 기분이 나빠지기도 하죠. 

솔직함이 두드러지는 문장이라, 새삼 생텍쥐페리의 순수함을 다시 떠올리게 되네요. 

누군가가 읽어준다는 것만으로도  보람을 느낄  있지만, 읽은 느낌이나 생각을 전해준다면  기분 좋은 그런 인지상정의 아주 기본적이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진지함.

 입이 하나고 눈과 귀가 둘인 이유는 적게 말하고 귀 기울이며, 두루 살피라는 의미라고 하죠.

읽는 즐거움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금은 진지하게 읽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두 번째는 "넌 모든 걸 혼동해…… 모든  뒤섞어버린다고!"입니다.

비행기 고장으로 사막에 불시착한 상태에서 수리는 진전이 없는데 어린 왕자가 장미꽃 얘기를 하자 '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얘기를 가볍게 넘겨버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어린 왕자는 화가 나서 외치죠. "꼭 어른들처럼 말하네!"라고요.


어른들이 말할 때 모든 걸 혼동하고 뒤섞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는 물음에 답이 마땅치 않을 때, 핑계나 변명이 궁색할 때 얼버무리듯 모호하게 말하곤 하죠. 

아이들은 그렇게 돌려서 말하거나 일부러 모호하게 말하거나 애매하게 굴지 않습니다. 

오히려 명료하죠. 

 대표적인 어른들의 말은 정치가의 말하는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체이탈 화법'으로 대표되는 결국 무슨 말인지 아무 말도 아닌 복잡하고 무의미한 말들을 자주 쓰죠. 

뜨끔해하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분들이 특히.


세 번째는 "나는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없었다.  자신이 아주 서툴게 느껴졌다. 나는 어떻게 해야 어린 왕자에게 가닿을  있는지, 어디에서 그에게 다가갈  있는지   없었다. 눈물의 나라는 그렇게나 신비로운 곳이다."입니다.

 양이 장미꽃을 먹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장미꽃 한 송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태도가 일으킨 분노로 어린 왕자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나'는 비행기 수리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잊고 어린 왕자를 다독이고 달래죠. 

 특히 마음이 끌린 부분은 '눈물의 나라'의 신비입니다.  

 '눈물의 나라'는 뭘까요. 

눈물이 시작되는 곳? 아니면 눈물이 만나 섞이는 곳? 그것도 아니면 눈물의 근원이 되는 감정 혹은 위로?

결과적으로 보면 생텍쥐페리는 눈물의 나라에 닿은 모양입니다. 어떻게 하면 어린 왕자를 위로할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위로하는  성공했으니까요. 

 친구가 됐죠. 기적처럼. 

솔직히 진정한 친구가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진정한 친구끼리는 눈물에 국경이 나뉘어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겠습니다. 슬픔의 근원, 아픔을 달래는 방법은 머리로 알아낼 수 없는 거겠죠. 마음을 담지 않고는 마음에 가 닿을 수 없다는 것. 

기억해야겠네요.


마지막으로  번째는 "그가 가로등을 켜는  마치 별이나  하나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것과 같아. 가로등을 끄면 꽃이나 별이 잠드는 거고. 아주 아름다운 일이야. 아름답기 때문에 쓸모 있는 일이고."입니다.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름답기 때문에 쓸모 있'다는 말에 얼마나 동의하나요?

쓸모가 있기에 아름답다는 말이  동의하기 쉬운 가요?

비슷하지만  생각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미 발견하셨는지도 모르겠네요.

근본이 어디에 있는 하는 문제입니다. 근본은 다른 말로는 의미 혹은 가치라고 적을 수도 있겠죠.


'아름답기 때문에 쓸모 있다'는 생각에서는 '쓸모'가 목적이 아니라 아름다움에서 생겨난 결과입니다.

'쓸모가 있기에 아름답다'는 생각에서는 '쓸모'가 목적이고 아름다움이 결과죠. 

간단히 말하면 후자의 생각은 쓸모가 있는 것만 아름답다는 겁니다. 

 어린 왕자에 따르면 어른들의 생각이죠.

'장미꽃  송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장미꽃은 얼마든지 있으니까.'라는 식입니다.

아름다움은 하나의 '가치'입니다. 가치는 '부여하는 것'이죠. 

같은 것, 흔한 것이라도 내게 의미가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아름다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소한 물건이라도 소중한 사람이 선물해줬다면 아름다울  있습니다.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죠. 

쓸모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중한 존재가 전해준 것이기에 아름다울  있다는 거죠.

  쓸모가 있기에 아름답다의 예를 생각해보면 이런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습니다.  사람은 가난해서 금반지도 겨우 선물합니다. 다른 사람은 부자라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죠. 절대적인 가치로 따진다면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반지가  겁니다. 쓸모가  크니까요. 어떤 쓸모인가? 단순하게는 금전으로 환산할  있다는 쓸모의 차이부터 무척 큽니다. 비교하기 어렵죠. 

 하지만 금반지를 선물한 사람의 사랑이 더 작은 건 아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동등하면 동등했지 어느 쪽이 작다고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더 좋은 일'을 갖기를 원합니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좋은 일은 편하고, 돈을  많이 버는 일이죠. 하지만 보람 있고, 의미 있으며, 가치가 있는 일이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즐겁게 계속할  있는 일을   있다는   행복입니다. 누군가 시켜서 마지못해 해야 한다면 괴로움이  크겠죠. 단지 돈만을 위해 일한다면 자신이 쓸모 있는 일을 한다고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름답기 때문에 쓸모 있는 일'

평생을 이런 일들만 하며 보내고 싶은 바람입니다.


어린 왕자는 자기 별로 돌아갑니다. 소행성 B612호로요. 

장미꽃과 다투고 자기 별을 떠난 어린 왕자는 일곱 개의 별을 돌며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 나누며 깨달음을 얻어갑니다. 성장하죠. 

  

 아이는 성장하면 바빠집니다. 처리해야 하는 중요한 일들 너무 많아서  틈도 없죠. 그렇게 성장해서 어른이 되지만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완전해지는  아닙니다. 오히려 성장해야  이유가 늘어나죠. 

  

 우리는 너무 많은  잊고 살아갑니다. 

소중한  보지 못하고 지나칩니다.

정말 중요한  뭔지 알지 못합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눈물 흘려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번은 그런 경험을 했을 테니, 모르는  아니라 잊어버린 셈입니다. 

사랑은 책으로 배우지 말라고 하죠. 

그렇더라도 사랑을 책으로 깨우지 못할  없을 겁니다.

그래서, 건성으로 읽어서는  되는 건지도 모릅니다. 

생텍쥐페리가 서운해합니다. 


이렇게 말했다니까요.

"나는 사람들이 내 책을 건성으로 읽는 게 싫다."


글자를 세심히 살펴 읽으라는 말이 아닐 테죠.

 안에 담은 마음을 들여다봐달라는 부탁 아닐까요.

간단하지 않지만, 나의 마음이 당신의 마음에 닿을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는. 

그런 의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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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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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 절망하는가?

완벽하다 믿었던, 완전하다 여겼던 완성의 순간을 눈앞에 뒀을 때. 

단 한 줄, 한 단어.

너무나 하찮은 실수.

 순간에 인간은 완전한 절망 속으로 침몰한다.


종종 인간은 유혹받고 이끌린다.

터무니 없는 기대.

완전 범죄의 가능성에.


 완전 범죄에 성공한 경우는 알지 못하지만 '거의 성공한 경우'는 제법  알고 있다.

나보코프의 <절망>이 그러하고,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그러하다.

비록  '성공'이 망상이나 환상  이야기라 해도, 그들은 '완전 범죄'를 '거의' 손에 넣었다.

그들은 실패한다.

너무나 사소한, 그러나 결정적인 '실수'로.


 게르만은 독일 출신의 초콜릿 사업가다. 사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사실은 파산 직전이다. 어느날 게르만은 공원에서 잠들어 있는 부랑자를 보고 깜짝 놀란다. 부랑자가 마치 자기와 '쌍둥이'이기라도 하듯 '닮았기 때문'이다. 운명처럼 그의 뇌리에 사특한 계획이 수립된다. 실행할지 말지는 운명이 정할 일이다. 운명이 이끈다면 계획은 실행될 테고, 실행된다면 성공은 확실하다. 완벽한 계획, 완전한 범죄다.  <br /> <절망>은 파산 직전에 놓인 게르만이 부랑자 펠릭스를 만나며 시작된다. 계획을 실행할지, 계획은 이루어질지, 두 사람은 정말 '완벽하게 닮은' 것인지. 정신을 똑바로 붙들고 읽어야 한다.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br /> 아차, 앞에서 스포일러를 해버렸군.


 조금 엉뚱한 생각이지만 5장쯤을 읽기 시작했을  문득 <맥베스>가 떠올랐다.

욕망과 유혹에 굴복해 주군을 살해하고, 결국 파멸해  비극의 주인공 맥베스.

국적도 시대도 신분도 다르지만, 게르만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맥베스의 환영은 짙어졌다.


 게르만은 곤경에 처해있다. 

사업은 곤란을 넘어 파산 직전이고, 사랑하는 아내는 자기보다 가난한 예술가 나부랭이에게 끌리는  보인다. 우연히 마주친 부랑자는 자기를 너무나 닮아, 완전히 동일 인물이라고 해도 의심할 수가 없다. 

유혹의 시작이다. 

 맥베스는 충성스러운 기사다.

전쟁에서 승리했고, 왕이 죽고나면, 어쩌면 왕위에 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적이 나타난다. 지금 해치우지 않으면 왕위의 영광은 영원히 멀어지리라. 

유혹의 시작이다.


 게르만은 고민한다.

 것인가,  것인가.

부랑자를 속여보려고 했지만 간단히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계획은 실패다. 최악의 인간이다. 게르만은 도망친다. 그러나 운명은 놓아주지 않는다. 기어코 운명은 펠릭스를 게르만의 앞으로 다시 이끈다.

 맥베스는 고뇌한다.

 것인가,  것인가.

미련한 욕망을 떨치고 내려놓으려고도 생각해보지만 마녀들은 유혹한다. 운명은 너의 것이라고. 쐐기를 박은  아내다. '지금이에요, 해치워 버려요!' 맥베스는 물러설 자리가 없다.


게르만은 후회한다.

완벽했다고, 그보다 나은 선택은 없다고 위로한다. 

그러나 실패다, 이보다  처참한 실패는 있을  없다.

  줄,   단어가 게르만을 파멸시킨다.

아니다.

실제로 게르만은 파멸한지 오래다. 부랑자 펠릭스와 마주친 순간, 이미 파멸해 있었다.


 맥베스는 후회한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스스로를 저주한다. 

그러나 전쟁이다. 여자가 낳은 사내는 맥베스를 해치지 못한다. 

무적의 맥베스.

 사람,   명의 사내를 몰랐다. 

그는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 

이미 운명은 준비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이런 이유로 나는 <절망>을 읽으며 <맥베스>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실제로 등장하는  <죄와 벌>  라스꼴리니코프요, 푸쉬킨의 시인걸.

터무니 없는 오독이다. 

오독의 즐거움의 중독이다.


 열여덟, 러시아 혁명의 참화 속에 러시아를 떠나는 나보코프를 떠올린다. 

스물셋, 극우 테러리스트의 총에 아버지를 잃는 나보코프를 상상한다.

뒤틀리고 비꼬인 천재, 불신과 망상, 어쩌면 복수를 꿈꾸는 청년을 그려본다.

자신만만한 동시에 나약하며, 당당함과 비굴함을 천형처럼 품은 언어 유희의 마법사를 읽어나간다.


 무엇이 남는가?

절망이다. 

읽어도 읽어도 내가 무엇을 읽는지조차 확신하기 어렵다. 

아니다. 솔직히는 터무니 없이  읽었다는  안다. 

   읽어 넘기고는,  분,   분을 생각해보고는 오만하게 질문을 던지다니.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고.


 터무니 없다. 

그러나 읽기는 즐거웠다. 

혼란스럽기까지  언어 유희와 의식의 흐름이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자신과 자신의 힘과 운과 운명의 인도를 믿고, 너무나 거침 없이 파멸로 나아가는 게르만.

 터무니 없는 자신감이, 확신이 우스운만큼 나를 괴롭게 한다.


 단  줄도,   단어의 실수도 있어서는  된다. 

 줄이,  단어가 모든  망쳐놓으리라.

그러나 나는 나에게 관대해져야만 한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천재는,

오직 천재만이,

  줄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특권을 지닌다.


'절망'은 나의 몫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터무니 없는 감상을 거리낌 없이 마칠 수 있다.

끝.


-아아, 나는 얼마나 오만한가. 

-그런들 어떠한가.

-쓴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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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어느 왕국에 두 명의 공주가 있었습니다. 언니 이름은 엘사, 동생 이름은 안나입니다. 엘사에게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는데, 얼음 마법을 쓰는 거였죠. 종종 엘사는 마법을 써서 안나와 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행히도 안나가 엘사의 마법에 맞아서 병이 들죠. 엘사는 자책하며 안나와 거리를 둡니다. 마법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마법을 두려워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얼어붙은 듯한 시간이 흐릅니다. 오랜 시간이. 그리고 운명의 날, 안나는 처음 만난 이국의 왕자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엘사는 깜짝 놀라죠. 하지만 안나는 사랑 한다며 결혼하겠다고, 운명이라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엘사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엘사는 얼어붙은 마음으로 도망칩니다. 길고 긴 겨울, 겨울 왕국의 시작이죠.


 앞서 적은 건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의 이야기입니다. 소설 <운명과 분노> 이야기를 할 것처럼 굴어놓고는 엉뚱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으니 조금은 당황하셨을까요. 

 전혀 달라 보이지만 두 이야기는 닮아 있습니다. 

트라우마가 품고 있는 두려움과 운명 앞에 놓인 인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요.


 <운명과 분노>는 두 남녀의 이야기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랑과 축복 속에서 자란 남자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환상의 세계가 부서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자신을 잊기 위해 방탕한 생활을 시작하죠. 

남동생의 탄생으로 불안해지기 시작한 여자는 남동생의 죽음과 함께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세상에 기댈 곳도, 의지할 데도 없이 내팽개쳐지죠. 

 여자는 자기 힘으로 공부를 하고, 등록금을 만들어 대학에 갑니다. 

남자는 대학에 갑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두 사람은 같은 대학에 다녔고, 졸업을 앞두고 처음 만난 날 결혼을 약속합니다. 

 여자의 이름은 마틸드, 남자의 이름은 로토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새긴 상처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서로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죠. 감추려고 한 건 아니지만 굳이 밝히지 않은 채 두 사람은 삶의 동반자가 됩니다. 

 트라우마를 품고 사랑을 시작한 거죠. 


<겨울 왕국>에서 엘사는 마법 능력을 숨깁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존재'를 두려워하는 법이니까요. 게다가 엘사에게는 사랑하는 여동생을 상처 입힌 기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에게 이야기할 수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슬픔을 함께할 수도 없습니다. 모두 통제되지 않는 마법 때문이었죠. 엘사는 통제되지 않는 마법을 미워하면서도 두려워합니다. 마법을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사람으로, 착한 아이로 남아야 하니까요.


 <운명과 분노> 속 마틸드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한계까지 자신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죠.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도 누구에게 다가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타인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혹독할 만큼 엄격하게 행동하죠. 그런 마틸드에게 유일하게 예외가 된 사람이 로토입니다. 빛이 나는 남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남자, 모두에게 사랑받는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남자죠. 엘사가 마법을 감춘 것처럼 마틸드는 과거와 속마음을 감춥니다. 로토가 떠날까 봐 두려웠거든요. 

 이제 마틸드에게는 로토뿐입니다. 로타가 마틸드의 전부죠. 마틸드는 로토의 엄마조차 자신에게서 로토를 빼앗아갈 수 없다고 믿습니다. 운명이 훼방하지만 않는다면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할 수 있었을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상적인 존재, 천생연분으로서 말이죠. 그러나 운명은 두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운명은 언제나 겁내고 두려워하는 이들의 발목 붙잡기를 즐기니까요.


'트라우마'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정신에 남아 영구적으로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일컫는 말입니다. 극적인,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는 치유되지 않는 상처죠. 

 <겨울 왕국> 엘사가 마법으로 안나를 상처 입힌 기억이 트라우마입니다. 오래오래 마음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고 끊임없이 상처를 키우게 만들죠. 

 <운명과 분노>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로토에게 트라우마가 됩니다. 마틸드에게는 어린 시절 전부가 트라우마죠. 


 로토의 분노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거듭되는 불행과 불운 앞에 좌절하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로토의 곁에 있는 마틸드는 분노의 화신이라도 된 것처럼 항상 분노하죠. 로토 몫의 분노까지 자기 것으로 삼은 것처럼요. 언제나 불안에 떨며, 상처 입은 들짐승처럼 자기 내면으로 숨어드는 마틸드는 언제까지나 다섯 살 어린아이로 남습니다.


 <겨울 왕국>에서 엘사의 두려움, 분노를 치유하는 건 사랑입니다. 언제나 지키고 싶었던 존재의 헌신, 희생이 기적을 일으키죠. 그리고는 동화처럼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운명과 분노>는 동화가 아니죠. 소설이기에 현실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할 수도 있지만 더 엄격하고 혹독한 이야기입니다. 운명은 마틸드를 절망의 바닥에 떨어뜨릴 때까지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거죠.


 저는 트라우마를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마음에 담고 살아가죠. 치유되거나 치유되지 않은 채, 해소되거나 해소되지 않은 채, 행복을 되찾거나 여전히 불행한 채 그렇게들 살아가는 거죠. 이들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다고, 언제나 행복한 웃음을 웃지 않는다고 병들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기에 트라우마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죠. 

 사람은 누구나 더 나아지기 위해 애쓰는 동안 방황하기 마련입니다. 괴테가 말했듯이요. 

트라우마라고 말해버리면 그 앞에서 손 쓸 수 없이 무력해질까 봐 두려운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성장, 방황, 애쓰는 과정이라고 고집스럽게 이야기하고 싶어 지기도 하죠.


 트라우마는 사람을 솔직할 수 없게 만듭니다. 겁내게 만들고 두려워하게 하죠.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는 순간에도 말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후에는 원망과 분노만이 앙금으로 남죠.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트라우마의 폐해입니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 영원한 고통이라는 저주. 더더욱 트라우마를 인정할 수가 없죠. 


내면의 아이를 자라게 하고,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트라우마는 극복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전적으로 '나'를 신뢰하는 지지자가 필요합니다. <겨울 왕국> 속 엘사의 사랑스러운 동생 안나와 같은 존재 가요. 하지만 그런 존재를 만나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운명과 분노>에서 마틸드가 조금 더 용기를 냈다면 로토는 그런 마틸드를 더 아끼고 사랑했을지도 모릅니다. 누가 뭐라든 두 사람은 '운명의 연인'이었으니까요.


분노한다는 건 출구가 불확실하거나 없는 동굴로 자기를 이끌고 가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닫게 하며, 입을 막게 만들죠. 철저하게 고립되려고 하면서, 세계로부터 오는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모순이 분노에는 담겨 있습니다.


 기이한 건 <운명과 분노>가 해피엔딩인지, 새드 앤딩인지, 열린 결말인지 모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명백하건만 모호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왜인지.


  운명에 분노하든지, 운명 앞에 무력하기만 한 스스로에 분노하든지, 그런 운명으로 몰아간 세상과 사람들에 분노하든지, 그 분노는 언젠가 나를 집어삼키게 됩니다. 그러니 분노를 경계하시길. 불태우기 위해서는 불살라질 각오가 있어야 함을 잊지 마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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