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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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을 한마디로 정리해보면 사물, 현상, 그리고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책이라고 해야겠다.

 

철학, 혹은 철학자라고 하면 어딘가 무척이나 난해하고 복잡하며 아주 높은 경지에 있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막연한 아득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사실 철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 고뇌들에 대한 사색과 사유의 과정과 결과이며, 철학자들은 그 누구보다 인간적인 존재였다고 하면 이상한 표현이 될까?

 

언젠가 읽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느꼈던 아득한 절망, 그 절망에 무척이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라는 제목은 나를 끌어당기기에 충분하고 남을 힘을 지니고 있었다.

 

현대의 철학자로 내가 가장 즐겨읽고, 좋아하며, 어떤 의미로 존경하게 된 이가 바로 알랭 드 보통이다.
 그의 철학에 대한 이해의 수준은 내가 즐겨 읽을 수 있을만큼 쉽고 평이하게 철학과 문학을 논하는 글을 써내는 능력이 증명하듯 대단히 높다.
 
학문과 출판의 올바른 현 위치를 안다고하기엔 나의 수준이 아직 너무나 편협하고, 부족함을 감수하고서도 이야기하자면 인문이 하나의 화두로 떠오르며 요즘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분야가 철학이 아닌가한다.
 
여기저기서 과거 철학의 역사에서 다루었던 화두들과,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한계, 분쟁, 몰이해를 아우르는 갈등들, 그리고 미래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닥쳐올 난관을 예측하고 그것에 대비하기 위한 분투가 시작된 것을 본다.
 우리는 예측 가능한 문제에 대해서는 무척 유연하고 무던히 반응하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터무니없게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급작스런 상황에 대한 반응은 너무나 한심스럽다. 그 문제가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농담 중에 이런 농담이 있지 않던가?

'집에 불이 났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서 119에 연락하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들이 묻는다. 119가 몇번이지요?'
 지금 훗하고 콧방귀 뀐 당신, 당신이 정말 자다깨서 화재를 인식했을 때도 그렇게 코웃음 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가?

 

내가 지금의 깜냥으로 이해할 수 있는 철학의 모습은 '재해대처요령'의 숙지와 닮아있다.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발생가능한 사건들이 언제라도 나를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든, 그러한 사실에 절망하든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달린 선택의 문제다.

 

아무래도 중반부 몽테뉴와 쇼펜하우어에서 "이게 뭔 소리지?"하는 의문의 종이 지나치게 쟁쟁거리며 머릿속을 울렸던가 보다.
 내가 언제부터 철학을 했다고 철학을 논하고 있으니. 에헴.

 

지금까지의 말을 결론 짓자면 철학은 단순하고 막연한 사고와 사유의 재료도, 산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삶과 아주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으며, 무척이나 실용적인 학문이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책 이야기를 해보자.
 추측컨데 이 책의 원제가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일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베르테르가 느꼈을 절망과 슬픔을 위로 해 줄 수 있는 내용들을 묶어내고 있기에 이러한 제목을 붙이지 않았나 싶다.

 

본문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에 어울리는 철학자들이 남긴 사유물과 철학자들의 삶을 뼈대로해서 알랭 드 보통의 해석이라는 살을 붙여놓은 형식이다.
 각 장의 주제는 1장 인기 없는 사람을 위하여 철학자 소크라테스, 2장 돈이 없는 사람을 위하여 철학자 에피쿠로스, 3장 좌절한 사람을 위하여 철학자 세네카,
 4장 부적절한 존재를 위하여 철학자 몽테뉴, 5장 상심한 사람을 위하여 철학자 쇼펜하우어, 6장 곤경에 처한 사람을 위하여 철학자 니체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사람들은 왜 베르테르가 기쁨의 위로를 받았을지 추측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크라테스와 세네카는 사형 당했다. 에피쿠로스는 오해 받았고,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외면당했으며 몽테뉴는 별종이었다.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예측가능한 절망 중에 가장 커다란 것은 죽음 일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사상이 꺽이지 않으며 의연하게 죽음과 마주하는 모습으로 되려 주위 사람의 슬픔을 무색하게하는 당당함은 어디서 왔을까.
 모두가 감추고 싶어하는 인간 존재의 부적절함을 되려 밝은 곳으로 끄집어내 자신의 모든 것을 인정하려 했던 별종은 어떤 시선을 감당해야 했을까
 온갖 난잡함으로 오해 받았던 쾌락에 솔직했을 뿐인 사람과 어쩌면 단지 외로웠던 것일 뿐인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정상에 올랐던 것일까?

 

사실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은 지적 갈증이었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고심하고 고뇌했으며 극복하고자했던 갈등들은 내게 크고 작은 파문을 일으켰지만 무지라는 벽에 막혀 잠재워졌을 뿐이다.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의 부재.
 인정 할 수 밖에 없는 뼈아픈 현실의 이름이었다.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하자고 소박한 목적을 두고 읽기 시작했지만 그 이상을 이해하고자하는 욕망은 전혀 사그러들지 않았다.
 이 후 내가 소크라테스나 세네카, 에피쿠로스,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를 읽게 된다면 그것은 지적 욕망의 발현, 욕심을 이루고자하는 목적의 다름이 아닐 것이다.
 
모르는 것은 낯설다.
 하지만 아는 것이 늘어 갈수록 모르는 것이 많아진다고 느껴진다.
 그럼에도 그 느낌이 결코 싫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기쁨'이라고 이름 지으련다.

 

이 책은 메모할 것이 많았던 책이다.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단서를 적거나, 구절을 적어두거나.
 하지만 그 어떤 메모도 이 책을 설명하는 말로 쓰기엔 부족해 보인다.

 

고대의 철학자가 흔히 과학자를 겸할 수 있었던 것이 사물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한 나름의 원리에 대한 가설을 세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 아닐까? 라거나 골치 아플 것 없는 삶을 사는 짐승을 위대한 철학자 몽테뉴가 한편으로는 부러워했다거나, 부유했지만 지독하게 염세적이었던 쇼펜하우어의 생애나,  어떤 철학자의 사상에 매료되었다가 어느 순간 경멸하게 되는 과정이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나,  행복과 불행이 둘이 함께 성장하거나 둘이 함께 성장을 멈추고 시시한 존재로 남게되는 자매, 혹은 쌍둥이와 같다거나 하는 메모들이 무슨 소용일까.

 

이해가 가면서도 난해하고, 난해해하면서도 팽개쳐버리지는 못하는 묘한 매력을 지닌 책이다.
 그런 점에서 무척이나 철학적인 책이 아닐까?

 

고매한 철학자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사상과 철학의 흐름과 목적이 결국은 우리와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느끼는 철학에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거부감을 희석해보고자 했던 의도는 아니었을까라며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우리의 삶은 매우 바쁘고 힘겹고 고된 일상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눈을 들어 정상을 바라보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지금보다 나빠지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좋아질 수도 없다.
 
우리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대비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 문제가 무척 갑작스럽고 돌발적인 상황에 발생하더라도 대체로 차분하고 의연히 대처하고 해결해 나가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무방비라고 이름 짓곤하는 상태에서는 너무나 무력한 것이 사실이다.
 
철학은 연습이지 싶다. 다른 이름으로는 훈련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행을 원망하며 괴로워하기보다 그 불행을 넘어 행복을 찾아갈 수 있는 잠재력을 기르는데 '철학'을 이용해보는 것은 어떨른지.

 


 철학의 임무는 우리의 바람이 현실세계의 단단한 벽에 부딪힐 때 가능한 한 부드럽게 안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130쪽

 

비가 내리면 당혹스러워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소나기와 친숙해지면 비가 내려도 분노의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132쪽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현실을 자유로이 만들어갈 수 있는 상황과 변화 불가능한 현실을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상황을 올바르게 구분하는 것이 바로 지혜. 170쪽

 

이성이 인간에게 자리 잡은 것은 우리를 고문하가 위해서라고 감히 결론 내려도 괜찮을까? 만약 우리가 지식을 얻게 된 결과, 그것을 얻지 않았다면 누릴 수 있었을지 모르는 평정과 안일을 잃게 된다면, 그리고 그 지식이란 것이 우리의 처지를 피론의 돼지보다 더 열악하게 만든다면 지식이란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92쪽

 

자신의 마을을 떠나오자마자 그들은 마치 물을 떠난 고기같이 군다. 어디를 가나 자신들의 방식을 고집하고 낯선 것들을 저주한다. 그러다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면 그들은 그 만남을 축하한다. 까다롭고 과도한 신중함으로, 그들은 자신을 망토 속에 푹 파묻고는 미지의 나라와 접촉하지 못하게끔 단속하며 여행을 하는 셈이었다. 212쪽

 

몽테뉴는 흥미로운 지혜란 어느 인생에서나 발견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이야기들이 제아무리 소박하다 하더라도 옛날의 그 많은 책에서보다 우리 자신에게서 더 위대한 통찰력을 도출할 수 있다. 264쪽

 

모든 삶은 다 힘겹다. 그리고 그들 중 몇 명을 완성된 삶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달려있다. 모든 고통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희미한 신호다. 353쪽

 

우리 대부분은 곤경이라 부를 수 있는 이들 어린 싹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흔히들 고민이나 시기하는 마음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합당한 것들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감정에 봉착하면 그것들을 감정의 잡초로 여기고 제거해 버린다. 359쪽

 

그는 행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 목표에는 닿지 못했다 해도 그는 자신이 한때 갈구했던 그 대상을 결코 저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눈에 고귀한 인간 존재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비치는 것들을 끝까지 소중하게 여겼다. 말하자면 '더 이상 거부하지 않는' 어떤 존재가 되고자 애썼던 것이다. 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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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의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 이카가와 시 시리즈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임희선 옮김 / 지식여행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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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이거 어떻게 첫마디를 꺼낼까 꽤 고심하게 되는 아주 '생소한' 장르의 책.

 오늘 '볼 일'보러 갔던 인천에서 시간이 좀 남기에 도서관에 들렀었다. 

 그냥 여기저기 둘러보고 다니다가 문득, "아, '그거' 찾아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지요.

 

그래서 막연히~ 둘레둘레 둘러보다 생각난 이름이 '히가시가와 도쿠야'.

 뭐 부담없다길래. 쉽게 읽힐 것 같은 예감에 골라봤습니다.

 

 가방을 올려놓고 책을 세우고 의자를 당겨 앉았습니다. 그리곤, 앉은 자리서 한 시간여 만에 후딱 읽어치웠지요. 

 좀 더 정확히는 약 70분 정도?

 아마 '일미'라고 하는 장르의 매력의 하나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잘 읽힌다.'

 잘 읽히지 않는 책도 열심히 읽으려 노력하는 착한 독자인 저는(크흐흐) 물론 잘 읽히는 책만 찾아다니지 않겠지만, 잘 읽히지 않는  책에 지쳤을 때 한번씩 꺼내보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이 장르의 모든 책들이 오늘 읽은 '밀실의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와 같은 형태, 느낌으로 제게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간과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소설의 장점은 일단 짧고 단순하고 명료한 사건의 흐름(미묘~하고 복잡~했으면 난감했겠죠.)일 것 같아요.

 

줄거리를 이야기하면 혹시 아직 안 읽으신 분들께 죄송하니까 하지 말기로 하고.

 제가 범인을 눈치 챈건 등장부터 시큰둥~하니 사건 해결에 무관심해 보이던 스나가와 경부가 추리를 시작하고 조금 있다가 였습니다.

 물론, 트릭의 이름이나 형태는 참 코난을 보는 기분 이었다고나 할까요. 신선했습니다.

 

아.무.튼.

 뭔가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겠네요.

 그런데 줄거리를 얘기할 수 없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구요.

 으음. 하지만 이대로는 아쉬우니까 하나만 더 얘기해야지~하고 버텨봅니다.

 

사람이 죽게되는 사연도 참 많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게되는 이유도 참 많구나~ 하는 사실에 대해 한 번 눈길을 줬었다지요.

 

아무튼 읽히는 속도에 놀랐습니다.

 아, 내가 읽은 속도에 놀라야하나? 보통일까? 음.

 결국 정말 놀랍도록 잘 읽혔다. 가 결론인가 봅니다.

 

아무튼 아무튼만 적게되는 묘~한 독서 감상문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왠지 등장인물들이 다들 안쓰럽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왜였을까요?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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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기술 - 당신의 가치를 높여주고 성공을 보장하는 주옥 같은 잠언 251가지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차재호 옮김 / 서교출판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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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끌려 사들인 책이면서도 "지혜에도 기술이 필요한거야?"하는 의문을 계속 던지게 했던 책이었다.

 지혜도 머리에 가슴에 그저 품고 있는 것으로는 불완전 한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말이다.

 

이야기에 앞서 알랑알랑 거리듯 우리를 달래며 친절하게 지혜를 가르쳐줄 책을 찾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만두기를 부탁한다.

 간단히 말하면 그런 기대를 가지고 이 책을 편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잠언들이 역모라도 꾸미는 모양을 하고 있을테니 말이다.

 

제법 이런 부류의 책들에 익숙해져간다고 생각하고 있던 와중에 한편으로는 날벼락 같은 이야기도 들어있었으니 말이다. 떠올리니 푸후훗 웃음만 난다.

 

적극적이고 적나라하며 공격적이고 하지만 현대에 무척 유용할 그야말로 능숙한 처세에있어 칼자루를 쥐고 휘두를 수 있는 잠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작자인 발타자르 그라시안이라는 분은 17세기 사람이다. 지금으로 400년도 더 된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지혜가 현대에 완벽히 부합될 수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며 이것이 우리가 지혜라고 칭하는 것들의 불가변성이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새삼 놀람을 금치 못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결코 뒤틀리지않는 가치, 그 훼손되지 않는 도도함이랄지 당당함이 기억에 남는다.

 

지혜는 진화를 거듭하는 것 같다.

 그것이 변하는 시대를 대하는 유연함.

 지혜는 인류에 종속된 피조물이 아니라 이미 독립적이고 독보적인 위치를 획득하고 되려 우리를 지배하는 능력을 얻은듯 하다.

 

그만 책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지혜를 비유하자면 가장 적절한 것이 '칼'이 될 것 같다.

 아무리 훌륭한 지혜라도 잘못 사용하면 '칼'의 '칼날'을 잡은 것과 같이 스스로를 상처 입히게 된다.

 하지만 적절히 쓰인 지혜는 '칼'의 '칼자루'를 쥔 것과 같아서 마음껏 원하는 것을 요리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지혜의 기술』이다.

 

한마디로 적절히 능청떨며 능수능란하게 인관관계를 컨트롤 하는 방법, 눈치채지 못하게 혹은 싫어하지 않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들을 이용하고 지배하는 색다른 시각의 잠언의 실용성에 고개가 절로 '절래절래' 흔들어졌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술수를 쓸 때는 상대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필요하다면 다소간의 편법을 쓰는 것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난받을 일은 아랫사람에게 시키고 당신은 칭찬받을 일만 해라.

 

몇가지만 들어봤지만 이런 식이다. 오! 얼마나 적나라한가. 얼마나 솔직한가.

 그리고 얼마나 유용한가.

 

하지만 현명한 독자라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악의적이고 몰양심적으로 이 책에 쓰여진 '지혜의 기술'을 남용해도 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관점에서 암묵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에서 효율을 누리라는 것이다.

 

선함을 완전히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이미 지혜라고 부를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다.

 

사실 총 5장으로 구성된 형식인 이 책은 현실적 처세와 용인술, 용인되고 용납될 수 있는 편법과 술수가 담긴 지혜와 스스로 마음으로 경계하고 다스려야 할 것을 짚어주는 교훈적 지혜를 두루 담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충격받은 이야기만 늘어놓았던 것은 아마, 색달랐기 때문이리라.

 규격을 파괴하는, 파격적인 지혜 이야기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던가 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이 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한 우유부단해서 남을 위한다고 자신을 상처입히고 힘겹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지헤로운 배려가 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가치를 부여해본다. 점잔빼지 않고 현실적이며 실용적인 지혜들에.

 

 진정한 지혜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게해준 책이었다.

 

놀라던 와중에 어제 읽었던 책과의 연관성을 발견했다면 난 스토커 기질이 있는 것일까?

 오늘의 책이 내게 일러준 사실은 결국 책과 지식은 시대와 국적을 초월해 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분명 우리 사람들도 통해 있으리라.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새로운 지혜의 발명이 아닌 잊혀지고 가려진 지혜의 발견이 아닐까?"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내 감상이 너무 어수선해 본문의 발췌로 대신한다.

 내가 이 책의 핵심을 잘 뽑아냈기를 바라며.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자신의 적조차 이용할 줄 안다면 정말 지혜롭다고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적은 날을 잘 세워둔 칼과 같다. 칼날을 만지면 상처를 입지만 칼자루를 쥐면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된다. 87쪽

 

지혜로운 사람을 곁에 둬라. 지혜로운 사람이 지닌 은은한 향기는 주변으로 퍼져나가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지혜로운 사람을 부하로 부리면 자신이 훌륭해진다. 그들이 내놓는 업적은 당신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드는데 일조하며, 그들의 조언은 당신을 항상 깨어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현명한 아랫사람을 인정할 수 있는 윗사람이 되어라. 아랫사람이 뛰어나다고 해서 윗사람의 명성이 손상을 입지는 않는다. 105쪽

 

자신의 분노를 지배하는 사람이 되어라. 분노를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을 알면 남을 상대할 때 큰 도움이 된다. 홧김에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 한 마디는 지옥의 불덩어리처럼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든다. 147쪽

 

남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만큼 내면의 목소리에도 유의하라. 자신을 가장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점을 이해하고 나면 왜 그것을 고쳐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큰 것부터 고쳐나가라. 그러면 작은 결점들은 저절로 없어진다. 152쪽

 

진실은 몸에는 좋지만 먹기는 꺼려지는 쓰디쓴 약과 같다. 달콤한 말로 치장하지 않으면 진실은 상대의 심장으로 곧장 날아가 굳게 박혀버린다. 진실을 말할 때는 아주 조심스러워야 하며 어떤 경우에라도 전부를 사실대로 털어놓아서는 안된다. 그것이 자신과 상대방을 동시에 배려하는 지혜다.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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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한 거의 모든 것들 - 3천년 동안 철학자들을 난감하게 만든 시간에 대한 수수께끼들
스튜어트 매크리디 엮음, 남경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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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보람이 있는 책. 들이있다.

 무엇인가 묵직하게 머리나 가슴에 남아서 밑거름이 되고, 기초가 되어 남을 것 같은 책 말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시간에 대한 거의 모든 것들》을 싣기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책이다.

스튜어트 매크리디와 또다른 일곱 명의 시간과 관련된 분야(두뇌, 고고학, 과학, 언어, 목사, 심리학, 신학)의 전문가들의 글을 함께 엮어 만들어진 이 책은 우리가 '시간'하면 떠올릴 궁금증들을 깊숙히 파고들어 풀어 설명해주고 있다.

 

전문적인 용어와 배경 과정들을 이해하며 읽기위한 노력을 기울여야하는 번거로움(?)은 있었지만 정말 통쾌하게 웃으면서 읽은 부분도 있었을 만큼 재밌는 책이기도 하다.

 편하게 책의 앞에서 뒤로 이어지는 내용을 조금씩 들어가며 이야기를 해나가기로 하자.

 

1장과 2장은 조금은 진부하고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으로 여기게 되는 시간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인간, 식물, 곤충, 동물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생체 시계와 시계유전자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결론적으로 확실한 것은 아니고 밝혀진 것도 있고 앞으로 밝혀내야 할 것도 있다는 얘기라 그냥 술술 읽어버리고 넘어갔다.

 

선사 시대 사람들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3장부터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웃음이 나온 이유가 다름이 아니라 3장의 결론이 결국 선사 시대 사람들이 남긴 유물이나 유적들의 용도는 확실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들의 추측에 불과한 것이 대부분이고, 분명하다고 확신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우연의 일치에 의한 착각이었다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일들이 종종 생긴 것이 기억났던 거다.

 

간단한 예로 요강에 대한 오해를 들어보자.

 참 예쁜 요강이 많다. 그렇기에 요강을 모르는 사람들은 요강을 분명 장식품이나 귀한 도자기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단순한 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유물과 유적에 대한 무모한 추측이 불러올 수 있는 난감한 상황을 떠올리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으리요.

 

4장부터는 본격적으로 시간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간다.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부분이기도 한데 현재의 달력 시스템이 어떤 과정과 역사를 거쳐 언제부터 통용되었는지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물론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레고리력이고, 1년은 열두 달, 365일, 일주일 7일, 하루 24시간으로 되어있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열두달이 되었는지, 왜 1년이 365일이어야 하는지, 일주일이 왜 7일인지, 하루가 24시간으로 되어있는지 궁금해 한 적은 없었나?

 윤달, 윤달하지만 여전히 생소한 윤달이 왜 생기는지, 타원형 궤도를 가지고 공전하고 자전축이 기울어 있는 상태로 불규칙적인 회전을 하고 있는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떤 원리에서 매년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절기, 같은 계절을 맞이 할 수 있는지 궁금했던 적은 없었나?

 

그 모든 물음의 대답이 여기 적혀있었다. 오, 신기해라.

 

가장 신기했던 것을 적어보면 우리가 익히 쓰고 있는 토, 일, 월, 화, 수, 목, 금요일의 요일명이었다.

 이 7요일의 기원은 '로마의 공화력'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본래는 지구에서 먼 행성부터 가까운 행성 순으로 요일을 정했기에 토, 목, 화, 일, 금, 수, 월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의 공화력에서는 주를 7일로하고 각각의 날을 24시간으로 나눈 후 각각의 시간을 관장하는 신을 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토요일의 1시는 토성신(말하자면) 2시는 목성 3시는 화성 4시는 태양 5시는 금성 6시는 수성 7시는 달 8시는 다시 토성 9시는 목성 10시는 화성 11시는 태양 12시는 금성 13시는 수성 14시는 달 다시 15시는 토성신 16시는 목성 17시는 화성 18시는 태양 19시는 금성 20시는 수성 21시는 달 다시 22시는 토성 23시는 목성 24시는 화성이 되고 다음날 1시가 화성의 다음인 태양 즉, 일요일이 되는 식으로 쭈욱~ 적어나가면 토, 일, 월, 화, 수, 목, 금요일이 된다는 것이다.

 

마치 미리 짜놓은듯 탁탁 맞아들어가는 것을보며 짜릿함을 느꼈다.

 

오 놀라워라! 역시 로마! 하는 생각을 한건 나 뿐일까? 

 내가 이렇게 뭉뚱그려 적어놓은 것이 되려 책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릴까 두렵다. 참 재밌는 책인데.

 

그럼 이런 것은 어떨까?

 불과 60년 전까지도 중국은 그레고리력이 아닌 자신들의 구달력을 사용했었다는 사실.

 그들은 그 때 우리와 같은 날을 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시대 같은 시간을 살면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전혀 놀랍지 않아면 조금 생각해볼 일이다.

 가까운 북한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주체력을 사용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와 같은 시간을 살고 있지 않은 이상한 사람들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까?

 

5장에서는 고대의 다양한 시간 개념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류의 위대함이 엿보였던 부분은(흥! 위대하신 인간님) 타원형 궤도와 기울어진 지구의 축의 영향으로 달력이 자꾸 어긋나자 내놓은 방안을 적어놓은 부분이었다.

 현명하게도 인류는 "가상의 평균적 태양의 운동을 가정하는 단순한 해결법"을 적용한다.

 단순한 해결법이란 일단 공전 궤도를 완전한 원형으로 한다.(이때는 천동설이었기에 지구를 중심으로 다들 돌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지구가 기울어 있는 축을 똑바로 세워 공전궤도와 수직이 된 상태를 가정하는 것이다.

 

그렇게하면 계절력과 태양력이 어긋남없이 잘 돌아갈 수있다나? 거기에 오차를 보완하기 위한 윤달을 넣은 것이 위대한 그레고리력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왜 그렇게 오차에 집착해야 했나 궁금했는데 그들의 나름의 사정은 나중에 설명되기는 하더라.

 

아무튼 나를 무척이나 흥분시켰던 현대의 현재 형태의 달력과 시간이 '정해지기'까지의 과정을 보는 것은 유쾌했다.

 

6장부터 8장까지는 시간과 시계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시간의 기원과 형태에 대해 흥미로운 사실들이 담겨져 있었다.

 우리에게 시계가 없을 때 수탉이 우는 소리가 시계역할을 했던 것을 떠올린 것이 제법 우스웠다.

 

9장과 10장 11장은 시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돌아봄의 장이었지 싶다.

 특히 11장은 우리가 목을 매는 '시간'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시간을 준다.

 과거는 지나갔기에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없으며 현재는 무엇인가 남기기엔 너무 짧다.

 결국 우리가 목숨을 거는 현재라는 시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처럼 정확하게 짜여지고 정해진 시간을 살지 않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미개하고 하찮은 부족들도 별다른 불편함없이 잘 살아가고 있더라.

 시간하나에도 얼마나 많은 또 깊은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의미가 깃들어있는가하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은 참 씁쓸하기도 했다.

 

우리가 꿈꾸는 타임머신은 그저 꿈같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우리가 과거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미래에 간다고해도 현재가 달라지지 않는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과거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과거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날아가서 그 과거를 바꾸면, 현재의 내가 과거로 날아가서 그것을 바꿀 필요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비효과'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수 없이 과거로 되돌아가던 남자 주인공이 결국 어머니 뱃속에서 스스로 탯줄로 목을 조이는 장면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참 오랜 시간을 거치며 많은 공을 들여 완성시켜놓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결국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시간인지 알 수 없게 된 현대의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써 진정한 시간의 의미를 발견해내야만 하는 때가 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며 늘 미래를 쫓는다. 우리의 현재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수 많은 철학자들이 지난 3000년간 이 문제를 두고 고민해왔다고 한다.

 그만큼 어렵고 복잡하다는 뜻이겠지? 싶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우리는 생각하는 갈대인걸.

 

진정 우리가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 것을 발견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가 보내는 시간이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되지 않을까 싶다.

참 많은 것이 담겨있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그러면서 즐거웠던 시간 보낼 수 있게 해준 책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해본다.

 

 

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 선사시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장소로 여겼던 곳은 자연 세계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69~70쪽

한 해 안에서의 계절 변화와 한 해에서 다음 해로 넘어가는 과정을 규칙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태양력의 장점은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아주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당시 아테네는 중앙화된 제사와 축제를 통해 동맹시들을 통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111쪽

 

인류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사회들을 우리 사회에 비추어 판단 하거나, 우리가 이룬 업적을 잣대로 삼아 다른 사회들의 발전 정도를 측정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그런 발상은 근거를 가지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현대의 토착민 사회들이 볼 때 사고 체계도 그 나름대로는 철저하게 일관적이고 타당하며, 해당 사회에서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한단느 사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수많은 인간 사회들이 각기 나름대로 주변 세계를 이해하고, 그 이해를 토대로 환경에 어울리는 최선의 행동을 결정하는 다양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면 안된다. 비록 그들의 사고방식이 서구 세계에 지배적인 사고방식과 크게 다르다 하더라도 다양한 환경 속에서 그 사회들이 발전하고 번영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57쪽

 

 

이 책을 읽는 동안 고등학교 시절 아무 것도 모르면서 친구가 가지고 온 '나비효과'에 대한 책이나 '상대성이론'에 대한 책을 깝죽대고 읽고서는 나름의 견해를 나누던 기억과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를 두고 다른 것은 다 진화론이라고 쳐도 그렇다면 최초의 빅뱅을 일으킨 엄청난 에너지는 어디서 왔느냐?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은 어디서 생긴 것이냐? 하는 답도 없는 이야기를 쉬는 시간이면 지치지 않고 해대던 때가 떠올랐다. 후후. 참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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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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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신경숙 작가님의 모르는 여인 출간 기념 낭독공감에 다니러 갔을 때 싸인 받으며 구입한 책을 이제서야 읽었다. 

 11월 29일 그날 지하철에서 50쪽 정도를 읽고서는 그냥 미뤄뒀던 것.

 왠지 냉큼 손이 가질 않았다.

 작가를 너무 가까이서 만났던 것이 잘못이었다.

 정말 작가와 독자는 큰 강을 두고 마주서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가까운듯 멀리 있었어야 했을 것을.

 

나를 멀어지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작가를 가까이서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이야기를 듣고보니 그 작품에 대한 어떤 고정된 견해가 생겨버린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선입견이랄까?

 책 속의 이야기를 음미하기 전에 내 미숙한 독서력은 작가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들 예를 들면 "등장인물의 이름은 최대한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 무의미한 것으로 지으려 한다."는 얘기와 같은.

 모든 것이 아직 내가 올바른 독서라는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음이 원인이라 누굴 원망할 수도 없으니 그 이야기들이 조금 잊혀질 때까지 미뤄두는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로 들어가자.

 이야기는 '정윤'이라는 여자에게 걸려온 '이명서'의 전화 한통화로 시작된다.

 그들의 은사 '윤교수'가 위독하다는 내용의.

 

굳이 말해보자면 이 이야기는 '정윤'과 그녀의 대학 친구 '이명서', '정윤'의 소꿉친구 '단이', '이명서'의 소꿉친구 '윤미루', '윤교수'의 사랑과 좌절과 기억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참 많은 소설을 읽었다고 생각해왔는데 요즘들어 소설 읽기가 힘이 든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 이야기 속에서 가장 많이 본 것으로 기억되는 말이 아마 '언젠가'인 것 같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가장 의미를 두고 행하는 것이 '걷기'

 가장 의미심장한 말은 '크리스토프'

 이 이야기 속에서는 참 많은 죽음이 그려져있다.

 '정윤'의 엄마는 병으로, '정윤'의 소꿉친구 '단이'는 군에서 사고로, '윤미루'의 언니는 분신 후 투신 자살, '윤미루'는 굶어죽었고, '윤교수'도 병으로, '윤교수'의 과거 여자친구는 목을 매 자살했으며, '윤미루 언니의 '그사람'은 실종(죽은 것으로 추측) 되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등장하는 이야기에 '죽음'은 이렇게 눈에 띄게 그려져 있음에도 젊은이들 사이에 흔할 것 같은 '사랑'은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드러날 듯 드러날 듯 어떤 희망적이지만 분명하지 않은 공허한 약속 '언젠가'라는 말들로 그 열기를 희석시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있지만 그것이 청춘남녀의 뜨겁게 타오르는 듯한 열기있는 사랑은 아닌 아련하고 공허한 그래서 허무하게까지 느껴지는 약속들만 두드러져버리는 그런 쓸쓸한 느낌 말이다.

 

이 이야기 속에 사랑은 분명 담겨있다는 것을 안다.

 여러가지 형태의 여러 사람의 사랑이 등장하는 것을 안다.

 하지만 사랑이야기를 하자니 알송달송하기만하고 아득하니 허허로운 기분이 되는 것 같아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다.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라는 사람을 아시는가?

 '윤교수'의 질문이다.

 

그는 힘이 장사로 어린 예수를 업고 강을 건넜던 사람이라고 한다.

 처음엔 어린 아이라 가볍게 업고 강으로 들어간 크리스토프는 갑작스럽게 불어난 강물에 힘겨워한다.

 거기에 갈 수록 무거워지는 예수를 간신히 강 건너편에 내려놓았단다.

 

다시 '윤교수'의 질문이다.

 우리는 크리스토프일까 그 등에 업힌 아이일까?

 

'윤교수'는 답한다.

 우리는 크리스토프 일 수도 있고 그 등에 업힌 아이 일 수도 있다.

 

이것은 역설이라고하며 '차안과 피안'을 이야기 한다.

 

왠지 알송달송한 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해답이 될 것 같은 부분이라 기억이 난다.

 

'윤교수'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모두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강은 물살이 거세고 깊기에 우리는 무엇에든 의지해야만 건너갈 수 있다고도 한다.

 

나의 곤란과 힘겨움을 지탱해주는 어떤 사람과, 그 어떤 사람의 곤란과 힘겨움을 지탱해주는 내가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하면 사랑일까.

 

왠지 죽음이 그득한 이야기 속에 사랑, 사랑만 찾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죽음이 단순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것 같은 확신이 있다.

 사랑했다.

 

정리가 되지 않는 갑갑함에 그냥 생각나는 단편적 단어들을 늘어놓으며 이야기를 끝내련다.

 업어주기, 걷기, 언젠가, 우리 오늘을 잊지말자, 크리스토프, 소나무에 쌓인 눈털기, 귀머거리 고양이 에밀리, 에밀리 디킨슨.

 죽음 죽음 죽음,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만큼 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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