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빛나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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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해 본 적 있으세요?

 초식하는 사자를.

 초원에 앉아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는 은사자를 말예요. 

 

'은사자 풀뜯어먹는 전설'이야기,

 어쩌면 이 소설은 그런 미묘한 의심과 신비 사이의 어떤 점에서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잡식을 하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인 제겐 초식을 하는 사자도, 극도의 편식을 하는 인간도 상상이 안되긴 매한가지 입니다만.

 그래도 읽는 맛나는 맛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침대 시트 다리는 여자, 쇼코와 별 보기를 좋아하고 음식 청소를 잘하는 남자 무츠키는 열흘 전에 결혼한 신혼부부다.

 이 부부에겐 결혼 할 때 명시한(서로에게) 특별한 자유가 있다.

 

애인을 만들 자유가 있는 부부.

 그 둘에겐 비밀이 있다. 끼리끼리.

 알코올 중독에 정서불안으로 조상태와 울상태를 오가는 쇼코와, 호모 무츠키.

 

이 소설은 단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더 빛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묘한 재료로 요리되는 이야기는 자칫 비리거나(난 비린 음식엔 무척 약하다, 이런 표현으로 다 표현 못할만큼!) 지독한 재료 특유의 향을 조절하는데 실패하거나해서 망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난 있는 힘껏 경멸한다.

 그것이 내가 그 이야기를 읽은 것에 대해 할 수 있는 최대의 불평이다.

 

하지만 재료가 기가막히게 조화되어 풍미를 더한 진미가 되는 일을 더 많이 본다.

 동성 연애자와 알콜 중독증상이 있는 정서불안자.

 그들은 특별히 치료가 필요한 '환자'는 아니다.

 그만큼 세상에 무수히 존재하는 잠재적 '환자'들을 포용할 수 있다.

 

부부와 그 친구들의 이야기인 이 소설은 그래서 의미를 더한다.

 부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초식남'이라는 종족이 유행했던 것 같은데, 그런 식이다.(초식남이란 이름은 들어봤지만 뭔진 잘 모르기에 얼버무리고 만다.)

 

 여자보다 남자가 좋은 남자의 이야기, 어쩌면 이젠 제법 흔한 이야기지만 아직까진 윤리적 관념에서 '호모'를 사위로 들이고 싶어하는 부모가 있을까?

 알콜 중독증상이 있고 정서적으로 불안한 며느리를 너그러이 받아줄 시부모는?

 

잠재적인 우울증 환자가 수십만 혹은 수백만이라는 현황이 현실의 수치다.

 많은 사람이 알콜에 의존적 경향이 있고, 특별한 성벽을 지니게 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그들이 '선'을 넘어서는 순간 그들은 '은사자'가 되어버린다.

 

색깔이란 무척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북극에 사는 북극곰은 흰색인데, 이것은 생존에 있어 필수적 조건이다.

 그들이 빨강이나 파랑 혹은 검정색이라면?

 사냥감은 그들을 피해 달아날테고, 사냥꾼은 그들을 쉽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본래 사자는 갈색이다.

 드물게 태어나는 '흰사자'가 있는데 그들은 일종의 돌연변이다.

 정상적인 사자들은 '비정상적인' 흰사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도 서로의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소외된 흰사자들은 초식이나 하다가 굶어 죽든 어쩌든 빨리, 보통보다 더 일찍 죽는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그리고 '정상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하지만 사실 무엇이 '정상'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언제까지나 다수가 '선'이고 소수가 '악'이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듯이 우리도 그들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어떤 태도가 정답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결말은 잔잔한 감동을 전해준다.

 

꺼려질 수 있는 '불편한 소재'를 빛나게 만든 힘은 그들의 빛나는 사랑과, 빛나는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본래 이런 이야기를 적을 마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적고보니 이런 이야기가 되어있다.

 왠지 "늘, 이런식이야."라며 내 마음이 툴툴 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다.

 아무렴 어떠랴 난,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고, 누구나 마음에 병 하나 혹은 두가지쯤 짊어지고 가는 모든 사람들을 보았고, 그 안에서 위로를 얻었으니.

 

좋은 이야기였다. 나도 아직은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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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 댄스 댄스 1부 - 운명의 미로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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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으로 세번째인 것 같다.

 

 이 막연한 추측의 근거는 하나는 제목은 기억하지만 그게 무슨 내용이었는지도 모를 만큼 오래전에 읽었기 때문이다.

  이러고도 읽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세번째라고 자신있게 말하기는 힘들다.

 

첫번째는 상실의 시대였다.

 제목만은 또렷한 이유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녀석이 며칠이나 들고 다니던 두툼한 책이 궁금해 덩달아 읽었던 기억까지는 생생하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어둠의 저편.

 누가 줘서 읽었던 책인데 본문이 대부분 구어체라 수월하게 읽혔다.

 아니면 그의 작품 대부분이 구어체였나? 하는 의문도 떠올려보며.

 

어찌되었든 댄스 댄스 댄스는 상실의 시대와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얼핏 본 것 같다.

 

짧은 나의 소견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묵직한 어둠을 배경으로 상실과 허무의 공포를 그려가는 것 같은 인상이 강하게 남곤한다.

 

사회의 흐름, 혹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 앞에 선 인간들의 혼란과 갈등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듯하다랄까?

 워낙 뛰어난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위력이란 단 몇사람의 등장인물로 시대의 단면을 분해하고 분석해서 우리 앞에 적나라하게 보여 줄 수 있는 능력인 것 같다.

 그 단면이 몸서리 쳐지도록 지독히 분명하고 또렷해서 되려 현실이 아닌 것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마져 어우러지는 것이리라.

 

사실 댄스 댄스 댄스라는 제목은 에? 무슨 제목이 댄스? 이런 같잖은 선입견과 함께 콧방귀를 자아냈으니 이런 부끄러울 때가 있을까?

 

 스텝을 밟기는 하지만 그 스텝은 사뿐하게 돌고 도는 발놀림은 아니었다.

  스텝 하나 하나가 모든 경계선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펼쳐지는 줄타기의 스텝이랄까?

 그런 위태로움이 가득한 스텝으로 이루어진 댄스였던 것이다.

 

 

나는 이루카 호텔의 꿈을 꾼다.

 그곳에는 4년전 '키키'라는 여자와 함께 보낸 수일의 추억이 있다.

 아내와의 갑작스런 이혼(그에게는) 후유증으로 세상과 단절된 채 지내던 수개월을, 고양이 '정어리'가 죽은 때를 기점으로 청산하고 사회로 돌아갈 결심을 한 그는 동업자였던 친구를 통해 자유기고가의 일을 다시 시작한다.

 

그는 그의 작업을 문학적 제설 작업이라고 불렀다.

 그의 일이 어느정도 궤도에 올라 안정을 찾아 갈 때 그는 한달을 기한으로 휴가를 내고 이루카 호텔을 다시 찾아갈 것을 결심한다.

 

다시 찾아간 이루카 호텔은 예전 모습은 간데 없는 최신식의 26층 호화 호텔로 변모해 있다.

 그가 이루카 호텔을 찾았던 본래 목적 자체가 목적지를 잃어버리자 그는 그대로 표류해버린다.

 

며칠 후 호텔 여직원 유미요시는 그에게 묘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완전한 어둠에 대한) 수일 후 우연히 그 또한 그 완전한 어둠으로 구성된 공간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 공간의 첫인상은 "두려움" 그는 두렵다고 생각하지만 유미요시가 이야기했던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겨 간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문과 마주하고, 그 문을 두드린다.

 

그 문 안에서 그는 어렴풋이 존재를 느끼고 있던 '양사나이'와 마주한다.

 양사나이는 그 어둠안에 있는 문 속의 공간이 그를 위한 공간이며 그가 잃어버린 것들과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것들이 모두 그곳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 공간들과 연결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그에게 '양사나이'는

"춤을 추는 거요"라는 말을 한다.

 그의 사고가 메아리 친다. "춤을 추는거야. 음악이 계속되는 한"

 

그 어둠 속의 공간은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닌 저쪽 공간이다.

 그리고 나는 현실의 이쪽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그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현실로 돌아온 그는 그의 삶의 스텝을 밟아 나간다.

 그가 갈구하는 깨달음의 단서인 것이 분명한 '키키'의 흔적을 쫓아 춤을 추기 시작한다.

 

얼마 후 더이상 이루카 호텔에 있어도 아무것도 진전되지 않음을 깨달은 그는 도쿄로 돌아오고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첫사랑'에서 중학교 동창 고혼다의 배드신 상대 배우가 '키키'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수 십년만에 재회한 고혼다를 통해 콜 걸 '메이'를 알게 된다.

 

동창 고혼다와 콜 걸 '메이' 또한 '키키'를 알고 있었지만 둘 모두 '키키'가 어느날인가 갑자기 꺼져버렸다고 이야기한다.

 '메이'가 '키키'와 연결 되어 있음을 깨달은 그는 '메이'와 헤어지며 명함을 건넨다.

 하지만 수일 후 '메이'는 호텔에서 살해된채 발견되고 발견된 명함으로 그는 조사를 받게 된다.

 '메이'의 죽음은 미궁에 빠지고 이야기는 급물살을 탈 준비를 한다.

 

도대체 '키키'는 어디로 간 것일까? '메이'를 살해한 것은 누구일까?

 

대략 여기까지가 상권의 내용인데 상 하권의 내용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 놓는 것을 참아 낼 수 있을리가 없고, 재주도 없으니 나머지는 직접 읽는 것이 좋겠다.

 하긴 내가 적어놓은 줄거리로 이 책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는 않지만.

 

 

상실의 시대의 연장이라는 말을 납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이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온통 상실과 허무 투성이다. 거기에 노골적이기까지 한 어둠.

 

그럼에도 그는 그 모든 것의 연결점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스텝을 밟아가며 춤을 춘다.

 신비한 소녀 '유키' 외팔이 시인 '딕 노스' 완벽한 친구 '고혼다' 유능한 사진 작가인 '유키의 엄마 '아메'

 그 외의 등장인물들 모두가 무엇인가 상실한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그가 있으면서 모두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무슨 역설일까?

 

자본주의를 꼬집는다고 할까?

 자주 등장하는 말 중 하나가 '경비로 처리되거든'이다.

 심지어 콜 걸에 대한 화대까지 '경비' 처리 되어 세금 공제가 된다.

 하하하하하하하. 이건 정말 앙천대소할 일이 아닌가?

 

꿈도 없고 사랑도 없다. 그런데 돈은 있다.

 그의 완벽한 중학교 동창인 '고혼다'는 자신은 거의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유명한 배우인 그에게 실제로 손에 넣지 못할 것은 거의 없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시계는 물론이고 훌륭한 식사와 온갖 여자까지.

 

하지만 그는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것은 손에 넣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을 손에 넣으려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하는데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면 그것 또한 잃어버리게 된다는 지독한 딜레마.

 

한번에 소화하기가 내겐 너무 벅찬 작품이다.

 하지만 읽는 것은 전혀 벅차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스텝을 따라 음악이 멈추지 않는 한 계속 춤을 추다보면 자신과 연결된 것을 찾아내는 그의 모습과 함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남았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음악이다.

 

늘 그의 풍부한 음악적 지식에는 놀라움을 멈출길이 없다.

 지난 번에 읽었던 작품에서는 온통 클래식으로 배경음악을 깔더니 이번엔 락과 올드팝이다.

 

각 장면에 어울릴 것으로 판단한 음악들을 골라 적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 장면을 상상하면 떠오르는 음악이라니.

 작가적 재능과 함께 그의 풍부한 음악적 해석 능력에 경의를 표한다.

 

주인공 어록 : 나는 별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다만 농담이 재미없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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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대제국들
짐 마셀로스 엮음, 박경혜 옮김 / 푸른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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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으며 재인식 하게 된 사실이지만, 불과 몇 세기 전까지 세계의 지배자는 유럽이나 아메리카가 아닌 아시아였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은 이미 충분히 찾았다.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그렇게 생각한다.
 

 
아시아의 대제국하면 역시 제일 앞에 세울 것은 칭기즈 칸의 몽고다.
 아시아 전역 뿐 아니라 유럽의 턱밑까지 정복했던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대제국.
 그것이 그의 제국 앞에 붙은 가장 평범한 수식어다.
 
책 속에서는 칭기즈 칸의 부상에서 시작해 칭기즈칸 이후의 제국의 상황, 몽골 제국의 군사제도, 일반 정치, 법, 그리고 쇠퇴와 해체의 배경과 과정을 비교적 간략하게 핵심을 적고 있다.
 그리고 몽골 제국의 위대한 점과 쇠퇴와 해체 이후 세계에 미친 영향들을 하나하나 짚어준다.
 
워낙 거대했고 강대했던 만큼 제국의 해체 후에 새롭게 들어선 제국이나 이미 존재했던 제국, 그리고 유럽에까지 그 영향은 강렬하게 남았음을 알 수 있다.
 

 

 
책 속에서는 칭기즈 칸의 정복자의 면모 뿐 아니라 지배자로써 자질이 돋보이는 '어록'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워낙에 위대한 제왕의 독존적 능력을 지닌 강력한 제왕 통치하의 빠른 확장과 부흥은 확고한 후계체제와 정책의 부재로 이어졌고 칭기즈 칸 사후 수 많은 내전과 제위 쟁탈의 빌미가 되어 빠른 제국이 분열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칭기즈 칸의 제왕의 자질은 정복자의 면모 뿐 아니라 통치자의 면모에서도 돋보였다.
  그는 수 많은 왕국과 부족을 통합하면서도 유연한 통합책을 사용하여 그들의 종교와 사상을 존중함으로써 제국 안에 그들을 포용할 수 있었다.
  또한 실효성 있는 정책에 대해서는 망설임 없이 실행하여 신하들의 신뢰와 충성을 끌어냄과 동시에 제국의 원활한 통치를 끌어냈다.
 
다만 이 책의 몽골 제국에서 발견한 아쉬운 점은 고려를 완전한 속국으로 그린 지도와 역사적 사실과 다른 내용이다.
 고려와 몽고의 첫 대면은 거란족을 함께 퇴치한 것에서 시작되었고, 그 후 계속되는 몽고의 조공 요구에 반발하여 국경지역에서 몽고 사신 저고여가 피살 된 것을 빌미로 삼아 몽고의 장군 살리타이가 1231년에 1차 전쟁을 하게 된다.고 배웠던 것 같다.
 이 책에서 칭기즈 칸은 1227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오는데 위의 지도에는 고려라는 이름도 없을 뿐 아니라 칭기즈 칸 사망 전에 고려가 몽고에 정복 된 것처럼 나와있다.
   이것 만은 바로 잡혔으면 한다. 왜? 우리나라에서 출간 된 책이니까라고 하면 안될까?
 
 
명나라는 원나라 이후 최후의 한족 제국이다.
 

 
 명의 초대 황제인 홍무제는 본래는 홍건적에 가담했던 장수로 용인술과 정치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사회, 정치, 경제, 군사적 방면에서 거의 완벽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황권을 강화한다.
 
명나라의 인재 등용 방법은 과거제도 였으며 진사되는 과정이 무척이나 복잡하고 경쟁이 심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신사'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명나라 시대다.
 
'신사'는 과거를 통해 고위직에 나갈 수 있었던 권력 계급, 지방의 사족들이었다.
 긴 세월을 넘어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에 만연한 공직에 대한 갈망이 여기서 오지 않았나 싶다.
 과거급제만 하면 모든 것이 보장되던 시대, 단번에 특권층으로 도약할 수 있는 인생역전극에 그 당시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었을까?

 
강성했던 명 제국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사례 중 하나가 정화의 해외 원정이다.
 정화가 해외 원정에 사용했던 함선은 크기도 배수량도 엄청났다고 한다.
 총 5회에 걸쳐 페르시아, 멀리는 아프리카까지 이르렀던 정화의 원정도 영락제 사후 대양 원정 정책의 포기로 끝이 난다.

 

 
화려함과 거대함의 극치를 이루는 자금성과 만리장성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만리장성을 처음 쌓기 시작한 것은 시황제였지만 명대에 쌓은 것에 비할바가 아니라고 한다.
 명대에 쌓은 장성의 길이가 총 965킬로미터에 이른다니 정말 말도 안나온다.
 
크메르 제국이라는 이름은 무척 낯설다.
 아시아에 그런 나라가 있었어?
 하지만 802년부터 1566년까지 약 800년 동안 동남아시아에 군림했던 유서깊은 왕조로 우리에게는 앙코르와트로 알려져 있는 제국이다.
 

 
크메르 제국은 초기와 중기까지도 제국이라기보다는 왕국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안정되어있는 시기에는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사원짓기에 열심이었다.
 가만히 왕위의 흐름을 살펴보면 왕조의 교체가 비교적 잦은 것을 발견 할 수 있었다.
 혈족의 단일 계승체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계승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으로 여겨졌다.
 
크메르의 기록은 거의다 종교적인 것으로 해외 무역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아 중국에서 발견된 사절단 파견에 대한 사료는 크메르 경제에 대한 아주 희귀한 기록이라고 한다.
 

 

아래가 앙코르와트.
 
워낙 대외적인 분쟁이나 교역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저렇게 거대하고 웅장한 건축물을 세울 수 있는 기술과 자금이 있었음에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점이 말이다.
 하지만 열심히 수 많은 사원을 건축해둔 덕에 현재 우리가 그들의 유적을 볼 수 있는 것일테니 어찌보면 다행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스만 제국은 호전적이며 정치 사회적으로 잘 정비된 강력한 제국이었다고 한다.
 
 

 
읽으면서 가장 흥미진진하다고 느꼈을 만큼 역동적이고 화려하면서 강력했던 제국이었다.
 현재는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분열 독립되어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루마니아 그리고 터키 등의 국가로 존재하고 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무척 많지만 그중 눈에 띄는 사실은 '투르크'라는 말이다.
 난 그동안 오스만 뒤에는 투르크가 붙어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투르크'라는 말은 무식한 아나톨리아의 무슬림 농민들을 지칭하는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의 위용은 강력한 해군 함대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패배를 몰랐으며, 패배 했을 때도 재건이 무척 빨라 5개월만에 완전 무장된 150척의 함대를 건설할 정도였다고 한다.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조직하고 동원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으로 오스만 제국의 잠재력을 엿볼 수 있었다.
 
강력한 군사력 뿐 아니라 완성도 높은 건축물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위력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오스만 제국의 톱카프 궁전.(방어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뛰어난 전망을 자랑한다.)
 
이렇게 강력했던 오스만 제국이 붕괴하게 된 원인은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이어진 저항이었다고 한다.
 제국은 정부 조직을 근대화 했으나 경제 및 사회적 기반이 부족했고 계획성 없는 경제 개혁은 계속되는 전쟁과 내란, 인적 경제적 자원의 점차적인 고갈, 강대국의 경제적 정치적 압력에 대응하기에 불충분 했던 것이다.
 
제 1차 세계 대전 후 분열된 오스만 제국은 1923년 터키의 국민 영웅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저항군이 아나톨리아를 탈환하고 술탄제와 칼리프제를 폐지하면서 터키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그 시대의 막을 내린다.
 
오스만 제국은 유연성 있고 실용적이며 상대적인 관용으로 투르크, 그리스, 쿠르드, 슬라브, 헝가리, 알바니아, 아랍인들과 같이 여러 종교와 언어를 가진 이들을 오랫동안 지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역사적인 제국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경제, 문화의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낸 업적은 부인할 수 없다고 저자는 적고 있다.
 
페르시아의 사파비 제국은 이슬람권 이란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페르시아의 국가라고 한다.
 

 
 
사파비 제국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로 뛰어난 건축과 예술작품 들이었다.
 현재에도 이란의 양탄자는 최고급품으로 취급된다고 듣기도 했거니와 그들의 모스크로 대표되는 건축물들은 감탄을 자아낸다.
 

 

 
아마 그림으로 그렸다고해도 이렇게 그려 낼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도시 형태를 띌 정도로 거대한 광장이다.
 메이단에나크시에자한(세계광장)
 
영국인 토마스 허버트는 이스파한을 방문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메이단 광장은 의심할 여지없이 다른 어떤 곳 못지않게 넓고 쾌적하며 향기롭다. 남북으로 1000보, 동서로 200보 이상의 규모로, 파리의 로와얄 광장이나 영국의 거래소와 유사하나 여섯 배는 더 크다."

이 모든 것이 풍부한 물자와 인력 그리고 강력한 권력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인도의 무굴제국은 우리에게 타지마할로 익숙하다.
 

 
사파비 제국이 이슬람의 시아파의 왕조라면 무굴은 이슬람의 수니파 왕조라고한다.
 힌두교가 주를 이루던 남부 아시아를 지배하였던 제국으로 몽골제국의 티무르의 후손이 시조라고 한다.
 
타지마할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강력한 왕권과 풍부한 물자 그리고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찬란한 건축문화를 꽃피웠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마지막 아시아의 제국은 일본이다.
 씁쓸한 감이 없지 않지만 분명 한 때 거대하고 강대한 제국이었던 일본을 이야기한다.
 
페리제독에 의해 강제로 개항하게 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거치며 제국주의의 면모를 갖추게 되고 서구 열광과 함께 식민지 건설, 영토확장에 열을 올린다.
 섬나라라는 공간에 늘 갇혀 있던 탓이었는지 일본은 대륙으로의 진출을 늘 갈망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반도와 중국 동남 아시아를 노리곤 했다.
 

 
195쪽의 미국 외무부 관리 해롤드 마틴의 평가가 뼈아프다.
 일본이 조선에서 거둔 성공은 불쌍한 조선의 정부 및 사회, 상업에 대한 개혁과 진보를 의미한다. 청일 전쟁에 대한 일본의 승리는 조선인들의 동양적 나태와 미신, 무지, 외세 배척에 대한 압력을 의미한다. 이는 일본이 대표하는 현대 문명과, 중국이 대표하는 야만적이고 절망적인 구태의연함의 충돌이다.
 
사실 난 이 부분은 편집으로 빼주었으면 싶다.
 왜냐하면 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객관적인 척하면서 자기들 좋을 대로 해석한 이런 말을 내가 왜 읽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왜 불쌍하다는 것인가? 우리가 왜 야만적이고 절망적인 구태의연함의 대표가 되어야하는 것인가?
 이것만은 아니올씨다.
 
일본이 분명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성공이 세계에 아시아의 위용을 떨친 일이 될지라도 우리가 용서할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짧았던 일본 제국의 영광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과 함께 막을 내린다.
 
일본이 세계 대전의 희생자라고 주장하는 대목이 나온다.
 원폭이 가져온 전쟁의 궁핍이 희생자라는 의식과 전쟁 기억 상실증을 만들어 냈다고 많은 역사가들은 이야기한단다.
 자신들의 만행은 다 잊고, 원폭을 투하한 미국에 대한 피해의식이 자신들이 되려 희생자라는 의식을 낳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여전히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풀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하지만 오늘은 접어두기로 한다.
 이 책은 그들과 우리의 감정을 담고 있는 책이 아니라 다만 객관적 존재로서 제국 일본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마지막 장은 제국의 종말이라는 이름으로 앞서 소개된 아시아의 제국들의 쇠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한때 동양을 신비롭고 위대한 세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이 불과 몇 세기 전부터 미개하고 덜떨어진 세계처럼 여기고 지배와 착취를 자행했다.
 
우리는 단지 서구 열강 제국주의의 희생자요 피해자가 아니다.
 한때는 세계를 호령했던 강대한 아시아의 한 조각이다.
 
지금은 대부분 잃어버렸지만 과거의 영광을 기록한 책들의 가치마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긍지와 영광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다루지 않더라도 우리에겐 우리들의 제국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에게만 찬란하고 뛰어난 문명과 강대한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우리가 강했고 현재 우리가 조금 약한 것 뿐이니 이 구도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역사가 가지는 자부심과 민족혼을 깨우는 자극이 되었던 책이라, 이 책과의 만남이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이 감상문은 네이버 북카페 이벤트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상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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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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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현자의 돌 연성하기.

 

이렇게 적어보지만 뭔가 팍~! 와닿지를 않는다.

 

줄거리를 적어보기로 한다. 이 과정은 정말 심혈을 기울여야한다.

 

 이야기는 대학에서 신학 수업을 하던 수도사인 니콜라가 어떤 서적 '사본의 일부'를 손에 넣게 되면서 시작된다.

   그 '사본의 일부'를 보며 그는 전부를 읽고자하는 학문적 열의를 갖게 되고 수소문 하던 중, 지인의 이야기를 따라 리옹으로 가게 된다.

   리옹으로 간 그가 만난 주교는 이곳에서는 그 책의 원본을 찾기 어려울 것이므로 피렌체로 가보라고 한다.

   그러면서 '연금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도움이 될 것이라며 가는 길에 어떤 마을에 있는 '연금술사'를 찾아가 보라며 그쪽 수도원에 소개장을 써준다.

 

 그가 소개장을 들고 찾아간 수도회의 주교는 술과 여자를 금하지 않고 음식을 절제하지도 않는 그 시대에 만연한 타락한 군상이다.

  그는 자신은 신경 쓸 것 없으니 마을 한 구석에 있는 '연금술사'를 찾아가는 것은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

  

화자가 만난 '연금술사'의 이름은 피에르 뒤페였다.

 처음 피에르를 만난 화자는 그의 모습과 분위기에 감동한다.

 그에게서 범접하기 어려운 고고함과 자신만의 편협한 의지를 굽히지 않는 괴팍함, 세상 누구와도 교합하지 않는 성격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신의 위대함'이라는 막연했던 관념을 그렇게도 생생하게 실체로써 드러내 보여준 인간의 모습을 결단코 본 적이 없었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처음 피에르와 마주하고는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횡설수설하지만 피에르는 특별한 대답도 말도 건네지 않고 자신의 실험을 계속할 뿐이다.

 

며칠간 그는 피에르를 찾아가 그의 서가의 책을 읽고 피에르는 자신의 실험을 계속하고 이따금 대화하기도 하지만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던 중 이단 심문관 자크 미카에리스가 그를 찾아와 피에르 뒤페의 실체에 대한 의심을 이야기한다.

 화자는 그를 변호하려는 말을 하려하지만 결국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자크는 피에르와 가까이 하지 말라며 은근한 경고를 하고 돌아간다.

 

어느날인가 우연히 피에르를 찾아가던 화자는 숲 속으로 향하는 피에르를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게 뒤를 쫓게 된다.

 그리고 그를 따라 들어간 동굴에서 안드로큐노스를 보게 된다.

(안드로큐노스는 플라톤의 향연에도 등장하는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은 원래 두 성이 한 몸에 결합되어 있었으나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졌고 그 후 서로 떨어진 반쪽을 그리워하게 되었다고 함)

 우연인지 그 즈음부터 마을엔 간헐 열병이 돌기 시작하고, 거인을 보았다는 소문과 그 거인이 폭우와 냉해를 몰고왔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한 명 두 명 열병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마을 사람들은 마녀탓이라며 마녀를 잡아 들일 것을 탄원한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안드로큐노스가 모습을 드러내고 이단심문관 자크는 안드로큐노스를 포획해 간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을 사람들은 계속 죽어나가고 냉해와 폭우도 계속된다. .

 다만 거인이 나타나지 않게 된 것으로 안드로큐노스가 마녀가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마녀가 잡혀갔음에도 재앙이 멈추지 않자 이번에는 서둘러 마녀를 죽일 것을 요청하고 이례적으로 한달여 만에 분형이 유죄 판결과 분형의 집행 명령이 내려진다.

 

형 집행 당일 끌려온 안드로큐노스는 참혹한 몰골을 하고 있지만 어느순간 그의 몸에서 그윽한 향기가 풍겨나온다.

 사람들은 그 향기를 맡는 순간 혼란에 빠지며 자신들의 바램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에 불안해한다.

 자크는 서둘러 형을 집행하려하고 안드로큐노스를 십자가에 매달고 불을 붙이지만 불이 타올라감에도 마녀는 괴로움을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하고, 불길은 거세어져서 안드로큐노스를 육박해 간다.

 그리고 그 순간 '일식'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재앙의 징조라며 공포에 떤다.

 

불길은 타올라 안드로큐노스를 삼키고 그 순간 보이지 않던 거인이 나타난다.

 음, 여기부터는 참 몽환적이면서 환상적인 열락과 환희?의 순간이 표현되는데 마치 소설 '향수'의 궁극의 향기를 맡은 사람들이 집단 환각에 빠져 무아지경에 들듯한 그런 느낌이라고 표현하면 가장 가까울 것 같다.

 

모두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거인도 안드로큐노스의 형체도 남아있지 않다.

 다 타고 '재'만이 남았다.

 

하지만 피에르는 그 재 속에서 붉은 돌을 꺼내 집어 넣으려 한다.

 이것은 자크에게 저지 당하고 그 역시 포박되어 이송된다.

 

수년 후. 주교가 된 화자는 로마에 가던 길에 자크 미카에리스의 이름을 발견하고 그를 찾아가 피에르의 그 후를 묻는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채 무척 변해버린 그를 뒤로하고 돌아온다.

 그 길에 예전 그 마을에서 피에르에게 식료품을 대던 절름발이 대장장이인 기욤을 만나 피에르가 감옥에서 죽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최근, 그는 연금술의 연구를 시작했다.

 피에르의 죽음을 확인하고 난 후에야.

 

 

이렇게 줄거리를 적는 것은 솔직히 재주도 없고 재미도 없다.

 

중세의 기독교는 무척이나 타락해 있었다.

 자신들에 반하는 이들은 종교재판을 통해 처벌했고 돈을 받는 것은 부지기수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에 바빴던 시기였다.

 성적으로도 문란해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이름 있는 주교요 수도사들이었다.

 

이런 배경에서였을까?

 철학의 갈래인 연금술에 심취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 기억으로 분명 연금술은 철학의 사고 과정과 무척 닮아있고 많은 철학자들이 연금술에 심취했었던 것으로 아니까 말이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안드로큐노스와 연금술 그리고 현자의 돌 일 것이다.

 결국 '연금술사' 피에르는 안드로큐노스를 화형시킴으로써 현자의 돌을 연성하지만 써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것은 '이단'이기에 용인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안드로큐노스가 피워냈던 그윽한 향기와 환상에서 보였던 모든 시간의 교차와 감각의 체험들은 한결같은 메세지를 던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거부하는 것, 기다리면서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곁에두고도 알지 못하는 것들이랄까?

 삼류 소설이라고 했으면 난 아마 헹~! 하면서 이게 뭐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일본 유수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이라는 이름이 마음 한구석을 붙잡는다.

 

이런 것이 아닐까?

 타인들의 해석, 그들의 시선, 주류의 흐름에 반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느끼는 것, 보는 것, 깨닫는 것마저 외면하고 마는 세태.

 찾아온 구원조차 그저 두려워하며 거부하는 무지함들.

 

너무 빨리 읽어버리지 않았나? 그래서 놓친 것이 있는 것은 아닌가?

 왠지 겉핥기 식으로 간만 본 것 같아 미안한 소설이다.

 다음에 이 작가의 작품을 다시 만나게 되면 그 때는 조금 더 성의를 담아 읽어주리라.

 이 작가 아직 젊으니 또 쓸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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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카타야마 쿄이치 지음, 안중식 옮김 / 지식여행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내겐 어떤 의미로 특별한 책이다.

 

 우스운 것은 그 사람에게 주었을 이 책이 언제, 어느때 내게 돌아와 있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처음 내 손에 들어왔던 것처럼 여전히 있었다

 

사실 난 슬픈 이야기는 질색이다.

 타인의 아픔, 슬픔을 전해 듣는 것은 내 슬픔에 비할 것이 못된다.

 난 그렇게 되어먹은 놈이다.

 

아마 아직은 살에 닿을듯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마주한 적이 없어서일테지만 현실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이런 내가 모질게 보일 때도 있지만 그들이 오열하는 슬픔을 공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슬픈 이야기 앞에서는 너무 쉽게 수문을 열어버리는 못난 눈물샘도 내 것이다.

 늘 울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듯이 그들의 슬픔에 공명하는 나의 눈물을 막을 도리가 없다.

 

현실의 죽음은 그저 하나의 현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되려 실감하지 못하는 현실이란 참 우습기까지 하다.

 

이야기의 여주인공은 백혈병이다.

 완전한 불치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치율이 높은 것도 아니고 환자와 가족에겐 무척 힘겨운 병인 그 백혈병이다.

 

146쪽.

아키 : "난 말이야, 지금 내 안에 모두 있다고 생각해."

 겨우 입을 열어 그녀는 말을 고르듯이 이야기했다.

 "모두 있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아. 그러니까 부족한 것을 신께 빌거나 저 세상이나 천국에 바랄 필요는 없어.

   왜 그러냐면, 전부 있는걸. 그걸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 : "내가 아키를 좋아하는 마음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니까, 죽고 나서도 분명 계속 있는 거네."

 

이들의 이야기는 너무 자연스럽게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보고 있는 내가 더 슬퍼지게 만든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불안과 공포를 넘나들며 깨달을 수 있는 이야기일까?

 모든 것이 내 안에 있기에 더는 부족한 것도 바랄 것도 없다는 이야기가, 단지 그것을 찾아 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 없는 세상을 꿈조차 꿀 수 없는 사람이 그 사람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죽고 나서도 분명 계속 있는 것이라고, 내 안에 여전히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니 된 것이라고 납득해도 되는 것일까?

 

이래서 이들의 사랑은 더욱 애닯다. 그들의 의연한 사랑이 더욱 슬프고 아프다.

 

아키는 12월 17일, 사쿠타로는 12월 24일. 그 둘의 생일이다.

173쪽.

나 : "그렇다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나서 아키가 없었던 적은, 지금까지 단 일초도 없었어."

      "내가 태어난 이후의 세계는 전부 아키가 있는 세계였던 거야."

      "나한테 있어서 아키가 없는 세계는 완전히 미지의 세계이고, 그런 것이 존재할지 어떨지조차 모르겠어."

아키: "괜찮아. 내가 없어져도 세계는 계속 존재해."

 

지금까지 그녀가 없는 세상을 꿈조차 꿀 수 없었던 그에게 그녀가 없을지도 모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아무것도 없는 세계' 전부였던 사람이 없는 세상이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일까?

 아니, 정말 그래도 그렇게 계속 존재해도 괜찮은 것일까?

 

그럼에도 계속 존재한다는 그녀의 믿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들의 사랑은 끝을 향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달려가는데, 바보같이.

 

221쪽.

나 : "그녀는 죽었다. 시신은 태워져서 뼈가 되었지. 그 뼈를 나는 이 손으로 붉은 사막에 뿌리고 왔다. 그런데도 그녀는 있어.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아. 착각 따위가 아니야. 어쩔 수 없는 감각이야. 꿈 속에서 자신이 하늘을 날고 있는 걸 부정할 수 없듯이 그녀가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어. 아무리 증명할 수 없어도 그녀가 있다고 내가 느끼는 건 사실이야."

 

나는 소리지르지 않는다.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그저 그 사실을 이야기할 뿐이다.

 비록 친구는 애처로운 모습으로 나를 보지만.

 

아키는 죽었다. 나는 남았다. 그리고 슬픔도 남았다. 아픔도 슬픔과 함께 남았다.

 할아버지는 반대로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죽었다. 아키가 남았다. 그리고 슬픔도 남았다. 아픔도 슬픔과 함께 남았다.

 지금 나는 아키를 대신해 살고 있는 것이라고.

 

바보같이 눈물 흘릴 이야기라는 것을 알기에 공공장소에서는 읽지 않는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의 감상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과 그다지 다르지 않으리라.

 

그저 서럽도록 슬프지만 아프지는 않다. 눈물은 나지만 슬프지도 않다.

 이렇게 앞뒤 맞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밖에 없게끔 나를 흔들어 놓는다.

 

책을 읽다 바짝 마른 낙엽 두 장을 발견했다.

 겨울에 샀던 책인데, 언제 누가 넣어두었던 것일까?

 

정말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도, 사랑도, 기억도 나의 미래까지도.

 내가 해야하는 것은 회상이나 상상 기도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을 찾아내는 일.

 

보물찾기라고 이름짓고 싶은 탐험뿐이다.

 슬픔이 슬픔으로 끝내 남으면 그것은 아프고 아프다.

 슬픔도 숙성되면 온화함이 되는 것일까?

 아픔도 무르익으면 상냥함이 되는 것일까?

 

아픔과 불안과 슬픔과 상실, 이야기에서 배운다.

 오늘은 마냥 감정적이 되고 싶은 날이었다.

 

세상에게서, 이야기 속에서 감정을 배우는 난 감정적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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