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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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움베르토 에코라는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 그에게는 수백, 수천, 수만 권의 책이 될만한 앎이 있었지만 그 역시 함께 사라지고 만다. 개인의 사라짐이 세계에 어떤, 얼만큼의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그의 경험, 그의 지식, 그가 얻었을 깨달음, 가르칠 수 있었을 누군가들. 

  그러나 그는 죽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하는 가정은 의미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행위는 그의 앞선 다른 책 보다 최후에 남긴 한 권의 소설을 읽는 일. 단지 그뿐이다.


 대학 때 학위를 마치지 못한 결과 변변찮은 신문의 기자와 대필작가 자리를 전전하던 마흔아홉의 콜론나는 시메이라는 남자의 제안으로 「도마니」, '내일'이라는 뜻을 지닌 신문 창간을 준비하는 일을 시작한다. 창설자는 콤멘다토레라는 재계의 유력자로 상위 계층에 편입하고자 하는 의지와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신문사를 활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재밌는 건 그들이 준비할 「도마니」 신문에는 내일이 없다고 정해져 있다는 거다. '내일이 없다'는 말을 풀어 설명하면 신문은 창간을 준비하기(준비하는 '척'하기)는 하겠지만 실제로 창간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진실은 콜론나와 시메이, 이 이야기를 읽는'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다. 신문 창간 준비에 참여하게 된 여섯 명의 기자들과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 집단, 단체는 모른다. 


 콜론나는 동시에 시메이에게 이런 제안도 받는다. 자신의 책을 대신 써달라는 거다. 신문 창간을 준비하는 '척' 하면서 시메이의 책을 써줌으로써 이중으로, 단기간에 거액을 벌 수 있다는 제안. 어떻게 생각하면 그 의도와 결과가 '의심스러운 일'을 콜론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는 40년 전부터 이미 실패자였으므로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이야기는 1992년 4월 6일에 시작해 두 달 후인 6월 6일에 절정에 이르러 그 얼마 후쯤 끝이 난다. 두 달 남짓, 우리가 2016년에 경험했듯 그 시간이면 세상을 뒤집거나, 세상이 뒤집히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말했듯 '현실은 허구를 뛰어넘는다'는 말은 진리임이 다시 증명된다.


『제0호』출간 예정 소식을 들었을 때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하나는 "드디어 출간되는구나."라고, 다른 하나는 "왜 이제야 출간되는 거지?"였다. "왜 이제야 출간되는 거지?" 하는 의문의 뒤에는 또 다른 의문이 이어졌는데, "재미가 없어서 그런 거 아니야?"다. 

 결과를 먼저 얘기해버리자면 '재미가 없어서'는 아니라는 거다. 출판사의 사정이거나 혹은 당시 한국 사회의 혼란 혹은 이 소설 내용과도 겹쳐볼 수 있는 어떤 메시지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어떤 메시지인지는 뒤에서 언급하게 될 수도 있고, 이 소설을 읽고 당시 상황을 떠올려보면서 스스로 알아차리게 될 수도 있다. 


 그리 길지 않은(움베르토 에코의 다른 장편들과 비교하면) 소설 분량에 비하면 목소리를 내는 인물들이 '많다'고 느꼈다. 심지어 지면을 많이 차지하지 않은 비중 없어 보이는 인물들조차 존재감이 작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건 이 소설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고 있지만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는 현실과 사실과 진실들. 현실과 사실과 진실을 교묘하게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의 합법적이고 공개된 '암약'. 그러니까, 현실이 허구의 상상을 뛰어넘는 반전과 놀람과 충격이 될 수 있게 하는 기이한 장치.


 비범한 평범이라고 해야 할까, 평범한 비범이라고 해야 할까. 

의외라면 의외인데 이 소설을 읽으며 떠올린 소설이 두 권 있었다. 한 권은 조지 오웰『1984』고 다른 한 권은 올더스 헉슬리의『멋진 신세계』다. 조지 오웰이 만든 세계는 공포와 통제, 제약과 제한이 진실을 쥐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무제한의 쾌락을 제공함으로써 현실의 고통을 지워버린다. 이 소설들을 떠올린 이유는 결과적으로 두 작품 모두 누군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사람과 세상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부자유와 부자유의 자유. 

 현대인들에게는 무한한 자유가 있다. 원칙적으로는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데 제약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어 보이는데 『제0호』를 읽으면서 그 이유 중 하나 혹은 여럿이 '이거다' 싶었다. 


 지금부터 당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식상할 얘기를 하려고 한다. 누군가 혹은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자유로우며 제 멋대로 행동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생각할 수 있다'고 믿게 하고 싶어 한다. 어떤 사건이나, 일, 이슈에서 눈을 돌리게 만들기 위해, 뭉쳐야 할 사람들이 편을 나누어 다투거나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하며 흩어지게 만들기 위해 약간의 '조정'을 하기도 한다. 그건 이미 잘 알고 있듯 어떤 사람 혹은 언론사가 내놓는 의견이나 기사일 수도 있고, 광고일 수도 있으며, 영화나 드라마, 유튜브 속 영상일 수도 있다. 과거의 알력 다툼에 불을 붙일 수 있는 해묵은 논란이나, 지역감정, 별 것 아닌 꼬투리 잡기, 흠집 내기, 국외 어딘가에서 벌어지거나 벌어지고 있던 전쟁이거나 좋은 이미지였던 연예인의 의외의 일탈 혹은 스캔들, 수십 년째 이어지는 주택난, 주가 폭락. 이런 식의 나열은 더 길게, 얼마든지 늘일 수 있을 정도로 많다. 

 결론은 단순한데 말이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은 걸 알고 있다. 알아야 할 진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얘기다. 또 다른 결론은 그럼에도 속고 있다는 거다. 매일, 매 순간 속고 또 속고 있다는 거다. 준비를 잘하고 있건, 얼마나 많이 알고 있건 상관없이 속고 있다는 거다. 


 "나는 속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얘기하고 싶은 건 이거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건 거짓이 아니라, 너무 많은 진실 혹은 사실이다."


진실은 아무리 충분히 알고 있어도 부족하다. 모든 사실을 알 수 있는 사람, 모든 진실을 간파할 수 있는 사람은 단언하건대 없다. 극단적 회의주의자들, 모든 걸 의심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조차 속는다. 내가 속고 당신이 속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할 수 있는 건 없나.

필요한 건 현명한 무뎌짐, 무덤덤함, 냉담이다. 


 물고기 양식장에 가본 적이 있다. 하루 몇 번, 일정한 시간에 사료를 주는 모양인데 수면에 사람 그림자가 어리고, 사료가 물에 닿는 순간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수조 안에 든 물고기 전부가, 아마 힘이 센 녀석일수록 앞에서, 먼저 달려들어서 한 덩어리처럼 된다. 혹여라도 수조 바닥에 떨어지는 사료는 없다. 딱 그 시간에, 적당한 만큼의 사료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당연히 더 먹는 녀석은 더 크고, 못 먹는 녀석들은 못 큰다. 그래서 '분리'가 이루어진다. 더 큰 녀석은 더 큰 녀석들끼리, 작은 녀석은 작은 녀석들끼리. 저마다의 수조에서 비슷한 일이 매일, 매 순간 반복된다. 

 결과는?

그 물고기들은 모두 횟집의 접시나 우리 집 식탁에 오른다. 그러나 이건 '양식장의 물고기'의 사정이다. 바다의 물고기의 사정은 조금 다르다.


 바다의 물고기는 스스로 먹이를 찾는다. 먹을 때가 있는가 하면 굶기도 한다. 수온도 때마다 달라진다. 포식자, 적, 위험도 곳곳에 널려 있다. 먹이와 미끼를 구분하는 현명함을 익힌다. 물론, 거대한 그물에 잡혀 캔이 되거나 산채로 혹은 냉동되어 식탁에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양식장의 물고기와는 엄연히 구분되는 자기의 삶을 산다.


앞서 얘기했듯『제0호』는 「도마니」 신문, 번역하면 내일신문 창간을 준비하는 두 달 남짓되는 시간을 담고 있다. 당연히 언론의 부작용을 떠올리게 하고 경계하게 하며 정보의 과소가 아닌 과다한 정보에 의한 진실의 익사를 일깨운다. '선동한다'는 말은 특정 정치 세력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과거의 이야기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소식, 기사, 정보는 그 수여자를 자극하고 선동할 수 있는 여지를 품고 있다. 일일이 휘둘리다가 스스로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이 쓰는 최후의 소설에 어떤 '비밀 메시지'를 담았던 걸까. 

무언가를 '경고'하고 싶었던 걸까?

일깨우려던 걸까?

겁내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우려고 했을까?

세상 어디나 다 비슷하다고 설득하려고?

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는 설명하지 않으며, 국적도 다르고, 게다가 죽었다. 

중요한 건 타인의 과거나 현재, 미래가 아닌 '나의 현실, 현재'를 발견하게 한다는 거다. 지금은 한두 가지, 다음에 다시 읽게 된다면 어쩌면 두세 가지로 늘어날 수도 있는 진실들을 '재발견'하게 했다.


 정확히 말하지만 '재발견'이다. 

너무 많은 걸 보고, 듣고, 알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매번 '정말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음을 깨닫는 재발견까지.


 이 소설은 이탈리아의 현실, 역사적 사실을 참 많이 담고 있다. 실제로 몇 개는 검색 해서 찾아봤는데 모두 '사실'이었다. 


그래서 오늘의 다짐은 이거다.

"거짓에 속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진실에 속는 일은 되도록 없게 하자."

이래 놓고 또 잊겠지마는, 다시 떠올리게 되겠지.

무기력해지지 않도록, 지치지 않도록, 적당히 무디고 무덤덤하고 냉담하게. 


 『제0호』는 이탈리아의 현실, 역사 속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있을지도 모를 인물'이 아니라 '있었을 인물'들이 등장한다. 가정된 상황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는 거다. 그래서 납득한다. 소설에 앞서 인용하는 한 문장을.


 그 페이지에는 이렇게 써 있다.

"연결하기만 하라!"

그러니까, 이 소설은 어떤 현실, 지면에 인쇄되었거나 누군가 말한 사실들을 연결하는 것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다. 허구를 뛰어넘는 현실. 

잊어버렸다가도 어느 순간에 떠올리게 되는 "현실은 허구를 뛰어넘는다"는 생각을 증명해냈다는 듯이.


덧붙임 : 그나저나 책을 급하게 만드셨나 몇 군데에 명백한 오탈자 혹은 잘못된 표현과 오탈자로 의심되는 부분들이 보인다. 1쇄 많이 찍으셨을텐데, 왜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는 건지. 독자들이 다 잊고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안이하다,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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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1-10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든 생각인데, 원제 대로
<누메로 제로>라고 제목을 뽑았으면
어떨까 싶네.

<제0호>라고 하든 <누메로 제로>라고
하든 그 뜻은 설명을 들어야 아니깐.

대장물방울 2018-11-12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네요. 정말 무슨 말이야 하게 되는 건 같으니까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