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문 안에서 - 나쓰메 소세키 최후의 산문집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문학의숲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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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소세키가 죽기 전해인 1915년 1월부터 2월에 걸쳐 역시 아사히신문에 연재되었다. 연재 1회 분량씩의 짤막한 글이 총 39편 실려 있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글을 적은 듯 문장은 담백하고 편안하지만 곳곳에서 죽음의 냄새가 묻어난다. 소세키는 1910년 인사불성의 위독 상태인 이른바 ‘슈젠지 대환’을 경험했고, 1914년 위궤양이 재발하여 한 달 동안 투병했다. 1915년 신년 연하장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썼다고 하는데, 소세키는 정말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자신의 집에서 기르던 개와 고양이, 어릴 적 살았던 마을, 할머니로 알고 있었던 생모에 대한 기억이 안타깝다. 또 고립되어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인간으로서 그동안 맺어온 인연들을 돌이켜 보는 소세키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바보 취급을 당했던 씁쓸한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의심이 많아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믿지도 않는 신을 상정한 그의 기도는 간절하기만 하다.

“이 세상에 전지전능하신 신이 있다면 나는 그 신 앞에 무릎을 꿇고서 나에게 티끌만한 의심도 끼어들 여지가 없을 만큼 밝고 맑은 직감을 주시어 나를 이 괴로움으로부터 해탈시켜 주기를 기도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민한 내 앞에 나타나는 모든 사람들을 맑고 향기롭고 정직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나와 그 사람의 영혼이 하나로 만나는 행복을 내려 주기를 기도한다.”

어쩐 일인지 나는 소세키의 이 기도가 상처받은 자의 자기 연민이 아니라 그렇게도 인간을 연구했지만 여전히 더 알고 싶은 것이 남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가 작품 속에 한 인물들을 창조해 낼 때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얼마나 고뇌했을까하는 생각을 하면 나도 모르게 울컥 콧잔등이 맵다.

“나는 지금까지 남의 일과 자신의 일을 이것저것 너저분하게 썼었다. 남의 일을 쓸 때는 가능한 한 상대방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데 마음을 썼다. 내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오히려 비교적 자유스러운 공기 속에서 호흡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자신이 가진 모든 속기(俗氣)를 남김없이 벗어던질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거짓으로 세상을 우롱할 만큼의 자만심은 없었다 치더라도 더 천한 부분, 더 나쁜 부분, 더 체면을 잃어버릴 만한 자신의 결점은 그예 발표하지 못하고 말았다. 성 어거스틴의 참회, 루소의 참회, 오피움이터의 참회, 그런 것들은 아무리 더듬어 가 보아도 참된 사실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서술할 수 없다고 누군가가 말한 적이 있다. 하물며 내가 여기 쓴 것은 참회가 아니다. 내 죄는 - 만일 그것을 죄라고 할 수 있다면- 지나치게 밝은 쪽에서만 그리고 있는 것이리라.”

소세키는 거짓으로 세상을 우롱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자신의 속된 기운을 작품으로 깨끗이 씻어버리려 한 모양이다. 그도 인간이었기에 비록 더 천한 부분, 더 나쁜 부분, 더 체면을 잃어버릴 만한 자신의 결점은 쓰지 못했지만 그가 얼마나 ‘참된 사실’에 다가가고자 노력했는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수필은 소설과 달라서 읽는 그대로 가슴에 와 얹힌다. 소세키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글을 읽으니 소설속의 주인공들이 줄지어 걸어 나올 것만 같다. 그리고 이제야 그 많은 주인공들 산시로, 다이스케, 소스케, 이치로, 선생님, 겐조, 그리고 이름 없는 ‘나’가 내 마음속에 돌올하게 살아난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랑스런 인물들을 창조해냈지만 여전히 자신이 그리고 싶었던 인간을 다 그리지 못한 것만 같은 나쓰메 소세키. 누구나 안아줄 수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안길 수 없었던 소세키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이런 나는 여전히 헤픈 여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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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0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헤픈여자는 그런게 아닐꺼예요.. 반딧불이님. ^^
그런게 헤픈여자면 좀 헤프면 또 어떨까요?


진실에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사람, 마음을 다해 세상을 살아보려 하는 이의 외로움과 고통을 그저 한 인간으로서 이해해주고, 공감해주고 싶은 반딧불이님의 저 깊숙한 마음이 글 곳곳에 드러나 저 또한 울컥합니다.

길지 않은 글 속에 인간이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많은 것들을 돌아보게되어요. 봄 바람이 좋은 아침이예요..반딧불이님.


반딧불이 2010-07-10 19:29   좋아요 0 | URL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 소세키를 보면서 참 외로웠을거라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어요. 덧없는 순간이지만 누군가 그에게 이 세상이 참 따뜻한 곳이었다고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을거라는 생각을 해요.

참으로 오랫만에 바람도 맑고 햇살도 따스한 날입니다. 현대인들님 가슴에 이 햇살, 이 바람 담뿍 담기시길...

blanca 2010-05-02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세키가 이런 사람인줄 몰랐습니다. 더 천한 부분, 더 나쁜 부분, 더 체면을 잃어버릴 만한 자신의 결점을 쓰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그 모습이 더 숭고하고 고결해 보입니다. 작가는 그러한 것이군요.

반딧불이 2010-05-03 00:01   좋아요 0 | URL
작품을 읽을 때는 잘 몰랐었는데 소세키의 껍질을 한겹 벗긴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작품속에서 늘 거짓된 것, 꾸민 것을 싫어하는 주인공들을 그려냈는데 그게 바로 소세키 자신의 모습이었나봐요.

그리고 작가이기 이전에 외로운 인간이었다는 느낌이 마음을 짠하게 하더라구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5-03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후 나쓰메의 글들을 읽을 때 도움이 될 여러 얘기들을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반딧불이'님의 감상도 마음에 다가오구요.
저도 찬찬히 그의 소설을 읽어봤으면 좋았을텐데요. 헐레벌떡 읽어왔다는 생각을 더러 합니다.

반딧불이 2010-05-03 18:12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특별한 애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읽을수록 애정이 가서 이러다 소세키 빠~가 되는건 아닌가..염려도 되었었는데 닥나무님의 즐거운 딴지(?) 덕분에 저도 좀 더 공부할 기회가 되었어요. 저도 감사드립니다.

2010-05-03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03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리 2010-05-0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에야 반디님 서재를 찾아와서,추천도장 꾹 찍고 갑니다.
쌤의 따뜻한 열정 덕에 소세키를 읽어가는 시간들이 더 즐거워요. 늘 감사드리는 거, 아시죠?(전..퍼렁이여요ㅎㅎ)

반딧불이 2010-05-07 00:56   좋아요 0 | URL
유리님께서 소세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셨는걸요. 한걸음 한걸음 다가갈 때마다 행복했었다고 고백합니다. 저 역시 감사드려요. 퍼렁쌤~

프레이야 2010-05-10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빈딧불이님의 소세키에 대한 애정이 극에 달한 느낌이에요.
이 책도 담아갑니다.^^

반딧불이 2010-05-10 10:41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요즈음은 영화 리뷰전문가 같으셔요. 가끔은 저를 위해 문학관리뷰와 책 리뷰도 올려주셔요.
100년후를 기대하고 작품을 썼던 소세키가 기운빠져 있으니까 마음이 짠 하더라구요.
 
길 위의 생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이레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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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원제는 『道草(みちくさ)』이고 『한눈팔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었다. 번역자의 말에 의하면 道草는 두 가지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단순히 길가에 난 풀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길 가는 도중에 딴 짓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말이라고 한다. 책 내용으로 보자면 후자가 더 어울리는 제목 같다. 어떤 의미로 제목을 붙였든 이 소설은 소세키가 완성한 최후의 소설이며 유일한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자전적이라고는 하지만 어릴 적 두 번 씩 버려졌던 일이나 친가의 이야기는 거의 없다. 양가와 친가가 소세키를 사이에 두고 돈을 주고받은 사실들은 이미 고모리 요이치가 쓴 『나는 소세키로소이다』에서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은 소세키가 영국유학에서 돌아온 후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을 당시를 배경으로 주변 인물들과 아내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당시의 세계적인 공황도 문제였겠지만 소세키 주변의 인물들은 모두 소세키가 다달이 얼마간이라도 도움을 주어야 할 만큼 경제적으로 궁핍하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아내는 고집이 세고 히스테리를 심하게 앓는다. 소세키에게는 딸 다섯 아들 둘이 있었지만 이 책은 셋째 딸의 출산시기가 배경이니 아직 아들이 태어나기 전이다. 아들을 기다렸는지 셋째 딸이 태어났을 때 그는 ‘그렇게 같은 것만 낳아서 어떻게 할 셈이냐고 마음속으로 은근히 아내를 힐난’한다.

아이들도 산적한 일에 방해만 되는 존재일 뿐 각별한 정이 없었던 듯싶다.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흉이 남았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소세키는 제법 잘 생긴 얼굴이다. 그런데 그가 영국에서 돌아왔을 때 소세키를 마중 나온 딸은 ‘좀 더 멋진 사람일줄 알았다’며 옆 사람에게 소곤거렸다고 한다. 딸이 아버지에게 실망한 것처럼 아버지도 예뻤던 딸의 모습이 변해 있어서 실망한다. 둘째 딸에 대해서는 ‘턱이 짧고 눈이 큰 그 애는 푸른 바다 거북이가 둔갑이라도 한 듯한 모양’이라고 표현하며 ‘셋째 딸만 예쁘게 자라주리라는 기대는 아무리 욕심 많은 부모의 눈이라 할지라도 바라기 어려웠다’고 썼다.

천식을 앓는 누이, 병약한 형, 커다랗게 열린 동공으로 천장을 쳐다보고 있으면서 손에는 칼을 쥐고 있는 아내, 호시탐탐 돈을 뜯어 가려는 양부모, 내놓고 말하지 못하지만 역시 도움을 원하는 장인. 소세키 주변인물들은 모두 심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소세키의 도움을 받고 있다. 소세키는 제 지갑에 여유돈이라고는 없으면서도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남의 피를 빨 수 없어 제 피를 빠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열거하다보니 고급스러운 취미생활을 하며 별 걱정 없이 생활이 가능했던 <그 후>의 다이스케 같은 인물은 소세키의 희망사항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소세키 소설을 읽으면서 기대를 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래도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늘 어떤 식으로든 만족감을 가졌었다.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동안 읽어왔던 소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소세키 소설들이 모두 사건다운 사건하나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소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솔직히 소설적 재미는 없다. 대신 소세키에 대한 연민이 밀려왔다. 책을 다 읽고 나 후 옮긴이의 글에서‘완성된 최후의 소설’이라는 말을 봤다. 어느새 소세키의 소설을 다 읽었단 말인가, 문득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옮긴이는 학생들에게 소세키의 작품을 추천할 때 우선 <산시로>를 권하고 “나이 들면 <길 위의 생>을 읽으십시오. 인생이 무엇인지 알려고 한다면 지금 읽으십시오.”라고 꼭 주를 단다고 한다.  나는 그동안 읽어온 것이 소세키의 작품이었다면 <길 위의 생>은 소세키 자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품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작가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되었던 듯싶은데 이 책은 그런 작가에 대한 환상을 깨고 생활인 소세키를 정면으로 맞대면하게 해주었다. 환상은 깨졌지만 애착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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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8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8 2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기 위하여
마음
나쓰메 소세키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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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주인공 나는 방학 중 가마쿠라 해변에서 처음 선생님을 만난다. 도쿄에 돌아와서도 정기적으로 선생님을 방문하며 선생님과 꽤 친해졌다. 그러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간 사이 선생님은 나에게 두툼한 편지를 남겨놓고 자살을 한다. 선생님의 유서에는 자서전이라 할 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쓰여 있다.

외아들인 선생님은 스무 살 무렵 장티푸스로 거의 동시에 부모님을 잃는다. 부모님이 남긴 유산을 맡아 관리하던 작은아버지에게 배신당한 후 사람을 믿지 못하고 증오하는 등 신경쇠약에 걸리지만 하숙집 주인아주머니와 그 따님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병이 낫는다.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친구 K가 같은 하숙집에서 생활하게 되고, 주인집 따님과 삼각관계에 빠진다. K가 따님을 사랑하게 된 것을 알게 되자 선생님은 주인아주머니에게 따님을 달라고 하고, 주인아주머니는 며칠 후 그 사실을 K에게 알린다. 사실을 알고 난 이틀 후 K는 자살 한다. 이후 선생님은 따님과 결혼 하여 살고 있지만 아내는 K의 죽음이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친구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혼자 시달리며 자식이 없는 것도 천벌이라 여기는 선생님은 매달 한 번씩 친구의 무덤을 찾는다.

<마음>에는 많은 죽음이 등장한다. 아버지, 선생님, 친구 K, 노기대장, 천황, 아내의 어머니 등. 육체의 병으로 인한 죽음이 있는가 하면 정신 혹은 마음의 병으로 인한 자살이 있다. 유한한 존재로서 누구나 피해갈 수 없다는 데서 죽음은 일률적인 반면 각각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차별적이다. 특히 자살의 경우.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죽음으로서 말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죽음으로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하는 것은 남은 자의 몫이다.

노기대장, K, 선생님의 죽음은 모두 자살이다. 천황의 군인으로서 반란군에게 깃발을 빼앗긴 노기대장. 일본인의 무사도 정신에 따르면 이러한 불충은 할복을 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노기대장은 세이난(1878년 메이지 10년) 전쟁이후 35년 동안 죽을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천황이 서거하자 따라 죽는다. 그에게는 칼로 배를 찌르는 한 순간보다 지난 35년간의 세월이 훨씬 고통스러웠다는 점에서 할복보다도 더 잔인한 형벌을 스스로 치루고 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노기대장에게 있어서의 자살은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하는 행위로서의 자살이다.

선생님은 친구 K를 자신의 하숙집으로 불러들여 물질적으로 심정적으로 돌봐주고 있다. 하숙집 주인아주머니와 그 따님의 도움으로 K는 안정을 찾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숙집 따님을 사이에 두고 K와 선생님은 삼각관계에 빠진다. K로부터 따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게 된 선생님은 K 몰래 주인아주머니에게 딸을 달라고 하고 아주머니는 그 사실을 K에게 전한다. 소식을 들은 이틀 후 K는 자살한다. 선생님은 K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자책하는 삶을 살아간다. K의 자살은 사랑의 실패 때문일까? 선생님의 배신 때문일까? 사랑의 실패나 친구의 배신은 선생님만 알고 있는 표면적인 이유이다. K는 본가와 양가로부터 의절 당하고 곤궁한 생활을 선생님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K는 육체를 채찍질함으로써 영혼이 빛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고통 속으로 몰아가는 성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외부적 요인들은 오히려 그를 정신 지향적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K가 자살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자신이 지향하는 바와는 상관없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여자라는 존재. 통제되지 않는 세속적 욕망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은 유서의 마지막에 남은 먹으로 쓴 것처럼 보이는 ‘더 빨리 죽었어야 했는데 왜 지금까지 살아있었을까’하는 의미의 글귀다. ‘더 빨리’라는 말이 선생님과 따님의 관계를 알게 된 이틀 보다는 훨씬 더 일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K는 자신의 정신을 배신하는 몸과 마음에게 진 자신을 구차하게 여겨 스스로 단죄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은 또 일본인들의 물질주의에 대한 경멸이나 죽음 그 자체가 정신의 승리라고 여기는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선생님은 K가 아가씨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자 서둘러 아주머니에게 딸을 달라고 한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또 빼앗길 수 없다는 강박과 그것을 지키겠다는 욕망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 불러온 결과는 참담했다. 소중한 것을 지켜냈다는 안도감보다 K를 배신했다는 죄책감, 증오의 대상으로 여기던 작은아버지와 다르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사회에 나아가지도 않고 자신을 채찍질 하면서 K에 대한 속죄감으로 살고 있다가 천황의 서거소식과 노기대장의 순사 소식을 듣는다. 선생님은 메이지의 탄생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메이지의 가장 강한 영향을 받은 마지막 세대임을 자각한다. 그리고 ‘메이지 정신’에 순사하겠다고 결심한다. 선생님이 말하는 ‘메이지 정신’은 무엇일까?

가라타니 고진은 ‘메이지 정신’을 ‘메이지 10년대에 있었던 다양한 가능성’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메이지 20년대에 정비되고 확립되어 가는 근대 국가체제 안에서 배제되어 있던 다양한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은 메이지 20년의 정신이 메이지 10년대의 정신과는 이질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고유의 메이지 정신이 변질되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나 메이지 정신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환기시키기 위해 자살을 할 만큼 선생님은 목적 지향적 인간도 사회적 인간도 아니다. 어쩌면 선생님은 후기 메이지 정신이 초기 메이지정신을 배반하는 것에 강한 혐오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다만 나의 추측일 뿐 ‘메이지 정신’에 대한 정확한 의미는 소세키만이 알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살을 결심하기까지 인간은 다분히 이성적일 수 있지만 자살을 실행하는 되는 순간은 또 다분히 감정적이기도 하다. 노기대장의 순사소식을 들었을 때 선생님은 그가 죽은 이유는 납득이 잘 안되지만 자살보다도 더 고통스러웠을 살아온 날에 대해 강한 동질감을 느낀다. 선생님은 노기대장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다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그리고 변질 되어가는 메이지 정신을 지켜보는 일에 종지부를 찍어야했을 것이다.

세 사람의 죽음은 각각의 의미를 가진다. 노기대장의 순사는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이고, K의 자살은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단죄의 의미가 강하며 죽음 그 자체가 정신의 승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선생님의 자살은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이면서 동시에 더 이상 배신을 지켜볼 수 없다는 자의적 결단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세 사람의 죽음은 ‘나’에게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마음』은 처음 주인공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마지막 부분은 선생님의 유서로 끝난다. 편지로 남겨진 유서가 이 소설에서는 워낙 큰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주인공 ‘나’는 자연스레 잊혀지고 만다. 그러나 잊혀 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무의미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소세키는‘나’의 육체적 아버지는 그 근원에 맞게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죽는 것으로 처리했다. 또 정신적 아버지라 할 선생님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 이렇게 거의 같은 시기에 두 아버지를 잃게 만든 소세키의 의도에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은 각자의 몫일 것이다. 또 한가지 기억해두어야할 것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것은 과연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그것은 육체도 정신도 아닌 바로 마음이라는 것.

소세키의 작품을 읽으면서 가능하면 다른 이론서들은 참고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작품을 다 읽고 난 후에 내 나름대로 선행자들의 의견과 어떻게 다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을 읽으면서 끝내 이론서를 들여다보고 말았다.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 그리고 『그 후』를 번역한 윤상인의 『문학과 근대와 일본』이었다. 고진의 글은 설득력있고 치밀했지만 동의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소세키가 ‘『마음』이라는 비극적인 작품에서 과거를 강렬히 환기시킴으로 거기서 이별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조심스러운 발언은 내 의견과 같은 것이어서 한편으로는 기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윤상인의 글은 고진의 글보다 성글다는 느낌이 강했고 언어의 표피적 의미에만 천착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책이 제목에 어울리게 문학과 근대와 일본에 대한 많은 것을 담고 있어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두고두고 참고할 것으로 판단된다.

 
 

 

 
<마음>의  다른 판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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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4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4 1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0-04-24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읽고 반딧불이님의 리뷰로 정리가 되는 느낌입니다. 저는 <마음>이 <그후>보다 더 단순하고 완결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소세키가 더 많은 것들을 담으려 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읽고 갑니다.

반딧불이 2010-04-24 19:21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소세키 책 중 가장 리뷰를 쓰기가 어려웠어요. 여러가지 이야기거리가 많았지만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은 역시 '죽음'의 의미였던 것 같아요. 긴 글 읽으시느라 애쓰셨네요.

바밤바 2010-04-24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세키 소설의 등장인물을 보며 숨기고팠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할 때가 있답니다.
김기림 시인의 '바다와 나비'라는 시에 나오는 나비처럼 세상의 파도에 허우적대고 있는 근자인데 소세키는 이미 그러한 삶을 겪고 글로 남겼네요.
좋은 리뷰입니다.^^

반딧불이 2010-04-24 19:14   좋아요 0 | URL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하는 건가요?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지는 않으셔야할텐데요.
'나의 소년 시절은'으로 시작해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는 '길'이라는 시를 참 좋아했어요.

고맙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4-25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라타니는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서도 잠깐 나쓰메를 언급하죠. '고백'의 양식을 말하며 당시 작가들과 다른 모습을 보인 나쓰메를 꽤 호의적으로 말하던 기억이 납니다. 말씀하신 <언어와 비극>도 꼭 읽어봐야겠네요.
저는 윤상인 교수의 책을 호의적으로 봤는데요.동의하는 부분도 꽤 있었구요. 나쓰메를 비판적으로 읽는 연구자가 별로 없는 현실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는 작업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반딧불이 2010-04-25 21:31   좋아요 0 | URL
근대문학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소세키이고보니 고진의 책에서 여러차례 언급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언어와 비극>에서는 '소세키의 다양성'이라는 제목으로 소세키의 글의 다양한 양식을 다루었습니다. 소세키를 보는 고진의 관점은 새로웠지만 '선생님'이 자신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다가 K의 등장으로 알게된다는 부분은 잘 동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전에 말씀하신 <그 후>의 공로병 이야기가 나와서 꼼꼼하게 확인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인용한 부분과 제가 읽은 책의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르더군요. 보다 더 치밀한 근거로 주장이 뒷받침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다른 부분들은 제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구요.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웅진 출판에서 1995년 5월 25일 발행한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01'초판본으로 '꿈 열흘 밤'과 '마음'이 같이 묶인 <꿈 열흘 밤, 마음>이다. 박유하의 번역이다.  이후에 '마음'만이 따로 출판되었다.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 그러면서도 자신의 품에 들어오려 하는 사람을 팔을 벌려 껴안아 주지 못하는 사람 - 그가 바로 선생님이었다. -64 

 
     

 

   
 

 사랑이 갖다 주는 만족감을 맛보고 있는 사람은 좀더 따뜻한 말을 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 하지만 말입니다, 사랑은 죄악입니다. 당신은 그걸 알고 있습니까? -79

 
   

 

   
 

 나는 내 자신조차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스스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겁니다. 자신을 저주하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는 거죠. -83

 
   

 

   
 

 전에 그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의 머리에 발을 올려놓으라고 시키는 겁니다. 나는 미래에 모욕당하지 않기 위해, 현재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은 겁니다. 나는 지금보다 더 외로울 미래의 나를 견디기 보다, 외로운 현재의 나를 참아내고 싶은 겁니다. 자유와 자립과 자아에 넘치는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모두가 그 대가로서 이 고독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될 겁니다. -84

 
   

 

   
 

그러다가, 결국은 내 과거를 병풍처럼 당신 앞에 펼쳐 보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당신을 존경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당신은 남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신경쓰는 일 없이, 내 가슴으로부터 어떤 살아있는 것을 끄집어 내려고 하는 결심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내 심장을 깨고 거기에 흐르는 따뜻한 피를 빨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스스로 내 자신의 심장을 깨서, 그 피를 당신의 얼굴에 끼얹으려 합니다. 내 심장의 고동이 멎었을 때, 당신의 가슴에 새로운 생명이 깃들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185 

 

 
   

 

   
  냉철한 머리고 새로운 사실을 말하기보다, 뜨거운 혀로 평범한 견해를 말하는 편이 진짜 살아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피의 힘으로 몸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말은, 공기에 진동을 전할 뿐 아니라, 보다 강한 것에 강하게 부딪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0  
   

 

   
  육체건 정신이건 우리들의 능력은 전부 외부의 자극에 의해 발달하기도 하고 망가지기도 하는 것이겠지만, 어느 쪽이건 간에 자극을 점점 강하게 해 줄 필요가 있는 건 물론이어서, 잘 판단하지 않으면, 아주 험악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도 자신을 물론 옆사람도 모르고 있게 될 우려가 생깁니다. -236  
   

 

   
  나는 또다시 인간의 죄를 깊이 느꼈습니다. 그 느낌이 나를 매달 K의 무덤으로 가게 만듭니다. 그 느낌이 나로 하여금 장모님의 간호를 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느낌이 아내에게 잘 하라고 명령합니다. 나는 그 느낌 때문에, 길 가는 모르는 이에게 채찍질 당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이런 단계를 지나는 사이에, 남에게 채찍으로 맞기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때려야 한다는 기분이 듭니다. 나는 할 수 없이, 죽었다는 생각으로 살아가자고 결심했습니다. -307  
   

 

   
  그런데 한창 더운 여름에 메이지 천황이 서거 했습니다. 그때 나는 메이지의 정신이 천황에서 시작되어 천황에서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강하게 메이지의 영향을 받은 우리들이 그 뒤에 살아남아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시대에 뒤처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아내한테 그렇게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내는 웃으며 상대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생각했는지, 갑자기 나한테 그럼 순사라도 하면 되지 않느냐면서 놀렸습니다. -309  
   

 

   
  그리고 나서 약 한달이 지났습니다. 장례식날 밤, 나는 언제나처럼 서재에 앉아, 예포소리를 들었습니다. 나한테는 그 소리가 메이지 시대가 영원히 사라졌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것은 노기 대장이 영원히 떠난 것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호외를 손에 들고 나도 모르게 순사다, 순사다 하고 말했습니다. -310  
   
   
 

 세이난 전쟁이라면 메이지 10년이니까, 메이지 45년까지는 35년의 거리가 있습니다. 노기 대장은 이 35년동안 죽자 죽자 생각하며 죽을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한테 있어서, 이제까지 살아온 35년이 고통스러울지, 아니면 칼로 배를 찌른 한 순간이 고통스러울지, 어느 쪽이 고통스러울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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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4-19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말씀하신 판본으로 책을 보았습니다.
박유하 교수는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분이시더군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편집위원 세미나 사진에서 여자분인 걸 알게 되었답니다.

반딧불이 2010-04-19 13:00   좋아요 0 | URL
헉..여자분이시군요. 그것참. 왜 저나 나무님은 그분을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을 했었을까요? 재미있는 현상이네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4-19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박유하 교수는 독도와 위안부 할머니 관련한 묘한 발언으로 회자되기도 했죠.
오에 겐자부로의 최신작도 번역했던데, 번역은 참 유려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뚱딴지 같은 발언으로 회자되기 보단 번역으로 유명해졌으면 좋겠네요.

반딧불이 2010-04-19 20:57   좋아요 0 | URL
나무님께서는 참 많은 걸 알고 계시네요. 번역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책을 읽으면서 이거 번역한 거 맞아? 하는 심정으로 보게되는 경우였어요. 유려하다는 말씀에 공감해요.

그런데 나무님은 남자분 맞으시죠?

파고세운닥나무 2010-04-20 12:37   좋아요 0 | URL
네, 남자입니다.

반딧불이 2010-04-20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후에 허걱~ 하고 놀랄일은 없겠군요.
 
행인 대산세계문학총서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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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 때, 형님은 쿨쿨 자고 있었습니다. 이 편지를 끝마친 지금도 역시 쿨쿨 자고 있습니다. 나는 우연하게도 형님이 자고 있을 때 쓰기 시작하여, 우연하게도 형님이 자고 있을 때 글을 마치는 나를 묘하게 생각합니다. 형님이 이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으면 왠지 무척 행복할 거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동시에 만약 이 참에서 영원이 깨어나지 않으면 왠지 한층 슬플 거라는 느낌 또한 듭니다.

 
   
 

『행인』의 마지막 부분이다. 내가 이 마지막 단락을 읽은 건 지난 4월 13일 새벽 3시 4분이었다. 그리고 울었다. 주인공 이치로가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시멘트 바닥에 엎어져 까진 무릎처럼 아직까지도 마음이 쓰라리다. 양은냄비 풀죽 끓듯 변덕을 부리는 날씨는 입안을 껄끄럽게 했고 천안함 소식들은 쓰라림을 보태주었다. 이 계절 내내 듣고 있는 베토벤의 소나타도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어제 오늘 아파트 주변과 양재천에는 벚꽃이 절정이다. 내가 평생 먹어도 남을 분량의 팝콘 이 튀겨지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포라로이드 카메라와 디카를 가지고 나가 사진을 찍었다. 개나리 벚꽃 흐드러진 도로를 배경으로 현상되어 나오는 내 얼굴이 마음과 달리 화사하기까지 하다. 내 마음을 배반하는 내 얼굴이라니! 수상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몸이나 마음이 스스로를 배반한다고 수상히 여긴 건 내가 아니라 이치로였고 소세키였건만, 그의 불안한 영혼이 내게 건너오기기라도 했단 말인가.

소세키는 내게 눈물을 선물했고, 그동안 잘 유지되어왔던 작가와 독자의 객관적 거리는 무너져 내렸다. 슬픔이 찾아왔다고 해도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는 법. 안쓰럽고 측은한 마음을 여미기 위해 선무당 푸닥거리 같은 이 글을 적는다. 혹시라도 소세키가 백 대 후의 독자로 예감한 사람 중의 하나에 나도 끼어들 수 있다면 그의 불안과 우울을 위해 이 글을 소지 올리는 심정으로 적는다. 
 

소세키의 소설 중 제목을 왜 이렇게 지었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첫 작품이다. 그동안 보아온 책들은 제목에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아도 좋을 만큼 내용을 대변하는 것이 많았다. 그렇지 않으면 제목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친절한 설명이 붙어있었다.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산시로> 등은 그냥 책의 내용인지 제목인지 달리 구별할 필요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서로 묻어가는 제목이다. <그 후>는 연재 예고문에서 도쿄대학생이던 ‘산시로’의 ‘그 후’의 모습을 쓴 것이기에 <그 후>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했다. <문>은 소세키가 아무 제목이나 정해보라고 하자 모리다 소헤이와 고미야 도요다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아무데나 펼쳐보고 눈에 띄는 문이라는 단어를 골랐다고 했다. <피안 지날 때까지>는 설날에 시작해서 피안(일본에서는 춘분, 또는 추분 절기의 전후 7일간을 피안이라 칭함)지날 때까지 쓸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지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단순하게 지어진 그간의 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행인』은 왜 제목을 이렇게 지었을까 궁금하게 만드는 책이다. ‘행인’이라는 말 자체의 뜻이 일본이나 한국이나 ‘가는 사람’, 혹은 ‘지나가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크게 어긋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주인공 이치로에게 꼭 맞는 제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치로에게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결국 지나가는 사람, 즉 행인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모두 관계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결국은 혼자이다. 그러니 너는 나에게 나 또한 너에게 행인일 뿐인 것이다.

『행인』은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뛰어난 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이치로의 동생 지로가 화자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지로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남녀의 이야기를 지나가는 듯이 이야기 한다. 오카다와 오카네, 오사다와 사노, 미사와와 미친 여자,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맹인 여자 그리고 형으로부터 형수와의 관계를 의심받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들 남녀가 관계 맺는 방식은 제각기 다르다. 서로 간에 적당히 절충하면서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가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결혼을 했지만 정신이상으로 집을 나와 엉뚱한 남자를 남편으로 착각하고 살다 죽은 여자도 있다. 그런가 하면 형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뛰어난 학자이지만 불안증에 시달리며 주변 사람들과는 관계가 원만치 못하다. 특히나 그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만한 자기 아내와도 소통이 안 되고 결국은 아내를 의심하게까지 된다.

그는 인간의 불안은 ‘앞서 가기만 하고 멈출 줄 모르는 과학의 발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그의 불안은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맥박이 뛰는 불안이다. 그의 마음은 집 없는 거지처럼 하루 종일 여기저기를 헤맨다. 그는 마음이 너무나 불안하게 떠돌아다니는 탓에 무엇이든 움직이지 않는 것이 그립다. 그의 불안을 잠재울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 나이가 되도록 학문만을 한 탓에 사람을 다룰 줄 아는 기교는 배우지도 못했다고 한다.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게 되지만 아내는 때릴수록 얌전해져서 자신의 인격의 타락만을 증명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이제 그는 죽거나, 미치광이가 되거나, 종교를 갖거나 해야 할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 이치로의 선택은 어떤 것이 될까?

소세키는 이치로라는 이지적으로 완벽한 인간을 만들어놓았다. 그가 만들어 놓은 이치로는 연구하는 인간이긴 하지만 실행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지의 칼날위에 서있지만 감성의 그네를 탈 줄 모른다. 그는 타인에게 다가갈 때에도 가슴으로 가다가지 못하고 머리로 다가간다.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 났고 교양을 연마하였지만 그는 고독하기 그지없다. 이것이 소세키가 그리는 반성하지 않는 근대의 전형적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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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4-19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오늘 로베르브레송의 '무셰트' 라는 영화를 특별상영했는데 가정과 사회 모두에게서 소외받고 착취당하는 14살 소녀 무셰트는 결국 자살을 하고 마는 영화였어요. 모두들 서로를 착취하고 차별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주 지극히 행인일 뿐이었던 그 영화에서 그녀는 결국 죽음을 택했어요.<이치로는 어느쪽이었을까요?-저도 궁금해지네요..>

반딧불이님께 눈물을 선사한 소세키, 그의 언어와 이야기들과 함께 한 겨울이 지나고 봄을 맞으신 지금의 사진 속 모습에서, 마음과 다른 이질감을 느끼셨네요. 그리고 아직도 그 슬픔 속 여운이 가라앉아 계신듯 글에서 느껴집니다.

반딧불이 2010-04-19 01:05   좋아요 0 | URL
요즈음 같은 날은 영화든 책이든 작가가 주인공을 죽이는 건 보고싶지 않은데 말이에요. <행인>에서 자기 마음에 갇힌 남자를 만들어 꼼짝 못하게 해놓고는 다음 작품인 <마음>에서는 결국 소세키도 주인공을 죽이지요.

이 리뷰로 푸닥거리를 해서인지 조금 낳아졌어요. 현대인들님. 사진은 정말 제가 생각해도 아이러니였어요. 벚꽃 탓이었다고...그냥 꽃을 탓해봅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4-19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늘 밋밋한 제목을 달던 나쓰메가 이 소설엔 꽤 의미있는 제목을 단 것 같습니다. 나쓰메는 왜 늘 밋밋한 제목을 달았을까요? 고양이의 마음(<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을 猫心이라잖아요? 이걸 학자의 자세라고도 하던데, 늘 주의 깊게 사람과 사물을 관찰하지만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거리를 두는 나쓰메의 태도가 제목마저도 밋밋함을 갖게 한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의 소설 가운데 이 소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반딧불이 2010-04-20 00:00   좋아요 0 | URL
사람과도 세계와도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일본인들의 문화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어요. 또 소세키 개인의 문제로 보면 그가 어릴적 양자로 왔다갔다하면서 제대로 이름을 갖지 못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거라는 생각도 들구요.

지금까지의 소설들이 세계(근대)와 자아의 대립구도였다면 <행인>은 인간 내면의 문제를 그리는 쪽으로 옮겨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또 만약 소세키가 이치로에게 자신의 내면을 투영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규정하려 하지 않았을까....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4-20 11:02   좋아요 0 | URL
저도 말씀하신대로 갈등의 위치가 좀 옮겨졌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이 일본인들에게 정전의 위치를 가졌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언급하신대로 일본의 문화가 이 소설 속에도 충분히 담기니까요.
일본의 국민소설로 <행인>을 읽는 게 우리에겐 덜 부담스러울 듯 합니다. <마음>보다는요. 물론 가타부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요.

반딧불이 2010-04-20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생각은 좀 달라요. 소세키를 일본의 국민작가로 명명하면서 <마음>을 정전으로 든다면 그건 너무 정치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과 아버지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주인공 '나'에게 초점을 둔다면 그건 분명히 과거와의 단절이잖아요. 어쩌면 소세키는 육체적 아버지와 정신적 아버지, 모두와의 결별을 선언한 것일수도 있을거란 생각을 해봐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4-20 13:19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단절을 단절로 보지 않는 정치적 행위를 일본인들이 하니까요. 그게 문제일 터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