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놓고 보니 옛 생각이 난다. 아들이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이게 뭐야? 라는 질문을 하루 종일 입에 달고 살았다. 사물의 이름을 말해주면 고개를 끄덕이며 멈추는 경우가 있고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한겨울 아이와 방안에 갇혀 있을 때였다. 엄마, 무슨 소리야? 야쿠르트 병 굴러가는 소리야. 야쿠르트 병이 왜 굴러가? 바람이 불어서. 바람이 뭐야? ........ 궁색한 나는 아이의 얼굴에 훅~ 입으로 바람을 불어주었다. 녀석은 금방 얼굴에 화색이 돌았지만 곧 이어 바람은 왜 불어? 하고 물어온다. 이에 대한 답은 나는 아직도 궁색하다. 내가 좀 더 현명하고 지혜로웠다면 아들이 지금 물리학자로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에 다니고 있을 때 나와 네 살 차이 나는 남동생이 별이 왜 빛나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별이 왜 빛나느냐니? 빛나니까 별이지. 뭐 이런 식으로 대답했던 것 같다. 초등학생이 아니 내가 대답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 몇 개의 질문에 대답한 뒤였고 질문마다 답이 궁색해지자 나는 발칵 화를 냈던 것 같다. 동생은 그걸 왜 모르느냐고 나보다 더 화를 내면서 베개를 집어던지고 울고불고하는 바람에 하루 종일 싸웠던 기억도 있다. 왜 내게는 당연한 것이 그 아이에게는 숨이 넘어갈 만큼 답답했을까?


만약 아들이나 동생이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어왔다면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 대답을 할 수도 없었고 하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을 생각하니 깜깜하다. 그런 질문을 받지 않았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자. 시간이 무엇이냐에 답하기보다 시간의 시작은 언제인가, 끝이 있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 시간은 흘러간다고 하는데 정말 흘러가는 것일까?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상정하고 시간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미래로부터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런 걸까? 시간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정의들은 일단 접어두고 시간에 대한 과학적 이론들 먼저 살펴보자.


무수한 과학자들이 우주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고자 노력해왔다. 기원전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중심설로부터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거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까지 과학이론들은 수정과 발전을 거듭해왔다. 우주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단일한 이론을 만드는 것이 과학의 궁극적인 목표다. 그들의 접근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우주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알려주는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의 초기 상태에 대한 질문이다. 이 두 가지에 대해 현대과학은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설명한다. 일반상대성 이론은 중력과 우주의 거시적인 구조를 다루고 양자역학은 극도로 미세한 규모의 현상들을 다룬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다. 이것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주의 시작은 아주 작은 덩어리였고 빅뱅이 일어났던 시기가 우주의 시작이 된다. 그러니까 과학에서의 시간의 시작은 빅뱅이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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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는 어떤가? ‘하느님은 세계 창조 이전에 무엇을 하셨는가’라고 깊은 신비를 캐묻는 자에게 어떤 사람은 지옥을 준비해두었다고 답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런 심오한 질문을 한 사람을 비웃지도 말고 오류의 답도 하지 말며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대답하길 바란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마도 내 동생 같은 호기심 많은 동생에게 봉변을 당해보지 않았나보다. 그는 ‘주님은 모든 시대의 창작자이며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바로 주심이 만들지 않으신 무수한 시대가 어디서 와서 지나갈 수 있겠습니까? 또한 주심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시간이 과연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라며 하느님이 시간도 창조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는 시간도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창조의 순간 시간도 시작된 셈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끝은 언제인가? 이 질문에는 늘 종말론이 놓인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공식 E=mc²의 핵심 주장은 E=m, 즉 에너지=질량이라는 것이다. 태초에 에너지가 질량 쪽으로 밀어 넣어져 사물이 생겨났지만 그 끝은 질량이 에너지의 자리로 이동하게 된다. 그것은 10에 0이 99개가 붙을 만큼 먼 시간이지만 그 시간이 종말이다.


스티븐 호킹은 1000년 이내에 핵전쟁이나 지구온난화로 인해 인류가 멸망할 위기가 온다고 했다. 이를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우주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이고 만약 우주인이 지구에 먼저 도착을 하게 될 때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우주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시간’의 개념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우주가 시작되기 전의 시간에 대해 논하는 것은 마치 남극점에서 남쪽이 어디냐를 묻는 것처럼 의미 없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어쨌거나 빅뱅 이후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계속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다.


과학자들이 시간의 비밀을 밝혀낸다고 해도 또 수많은 학자들의 시간관을 섭렵해도 여전히 생물학적 시간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 아닐까. 인간은 ‘시간의 이빨’에 뜯어 먹히는 존재이고 그렇게 다 뜯어 먹히고 나면 다음 세대에게 시공간을 양보해야 하고 사라지는 존재. 어쩌면 인간은 시간이 쏘아버린 화살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겨누고 있는 과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날아가는 화살, 스스로 과녁을 결정할 수도 없는 화살. 어느 시인은 '사수는 두 개의 과녁을 노리지 않는다'고 했다. 시간은 나를 쏘며 무엇을 겨냥했을까?

 

 

중심을 쏘다/신용목

 

 

 

사수가 한쪽 눈을 감는 것은 과녁을 떠나는 그 영혼을 보지 않기 위해서다

 

어떤 형벌이 사수의 눈동자 속에

과녁의 동심원을 그렸을까

 

한입 어둠을 씹어먹는 허공의 아득한 중심에서

 

정확히 자신의 죽음을 겨누어 떨어지는, 빗방울

우산은 방패가 아니었다

 

바람 불 때마다 영혼의 부력으로 뒤집히는 중심의 테두리 그 팽팽한 시간 위에서

 

빗물이 명중의 제 몸 잠시 허공에 흩어놓을 때

 

한 발의 생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그리하여 저편

영혼으로 과녁을 치는 무지개,

 

중심을 산 너머에 숨겼으므로

 

검은 부리로 날아가는 새가 있다 구름 사이로

 

누구를 겨누어 저 달은 오늘도, 눈꺼풀 내려 촛점을 잡는 것일까

한쪽 눈을 감을 때마다 보이는

 

둥글게 갇힌 자신의 영혼 그리고

영원히 외눈인 해와 달,

 

사수는 두 개의 과녁을 노리지 않는다

 

 

 

 

 

덧 : ‘시간의 역사’라는 말이 성립 가능할까? 시간은 역사를 시간적으로 품을 수 있지만 역사는 시간을 시간적으로 품을 수 없고 의미적으로만 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제목은 ‘시간의 역사’라기 보다 ‘시간이라는 개념의 역사’가 더 알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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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1-1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만에 서재에 들려봅니다. 잘 지내셨나요?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최근에 브로노우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를 완독하고 난 뒤라 갑자기 과학사를
읽어보고 싶어지더군요. 그 중에 <시간의 이빨>도 읽어보려고 했었는데
읽어봐야겠어요. 오래 전에 호킹의 <시간의 역사>를 잠깐 읽어본 적이 있는데
시간의 역사라기 보다는 그냥 과학 법칙 설명서 같아요. 그 때 나이로는
그 책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이론을 설명하는 그림이 많아서
좋았는데 그림도 이해하지 못했답니다. ^^;;

반딧불이 2012-01-14 11:42   좋아요 0 | URL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cyrus님께서도 공부 열심히 하시고 책도 쉬지않고 있으시더군요. 새해에도 열정과 노력이 지속되시기 바랍니다.

<시간의 역사>은 우주의 본질을 밝히려는 노력들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고대 그리스로부터 최근의 초끈이론이나 양자물리학까지 설명이 되어있어요.
은 이 공식에 대한 전기라고 보시면 되는데 <시간의 역사>를 읽기전에 읽으시면 훨씬 도움이 되실거에요. <시간의 이빨>은 죽어가는 것에 대한 긍정, 혹은 찬사라고 해야할까요. 이 책은 좀 천천히 보셔도 될듯해요. 전공공부에 시간을 더 많이 쓰셔야하실 것 같아 노파심에 길어졌네요. 참고하셔요.

프레이야 2012-01-13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시간이 쏜 화살인 저는 지금 어느 과녁을 향해 날아가고 있을까요?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알 수 있는 노릇일까요?
사수가 한 쪽 눈을 감는 것은 과녁을 떠나는 그 영혼을 보지 않기 위해서다!
멋진 싯구입니다.
반딧불이님 새해 인사드려요. 복 많이 받으세요.

반딧불이 2012-01-14 11:43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여전히 읽고 쓰고 계시더군요. 부럽습니다. 프레이야님께서도 복 많이 받으시고 책, 영화와의 행복한 시간이 새해에도 지속되시기 바랍니다.

비로그인 2012-01-14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렸을 때 전파사에 세로로 붙어 있는 TV를 보고 "엄마, 왜 소 자가 거꾸로 돼 있어?" 그렇게 물었다네요. 덜떨어졌다는 소리 좀 들었더랬습니다ㅎㅎ 이젠 전파사도 시간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네요...

반딧불이 2012-01-14 11:46   좋아요 0 | URL
하하..교정자로서의 자질이 이미 글자를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발현되셨군요.~ 찌릿찌릿 전파사. 한 시대가 마감 되었다시던 말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게 그 전파사였군요. 놀랍군요.
 

시간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엘리아데는 성(聖)의 시간과 속(俗)의 시간의 공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비대칭성이 지배하는 일상의 시간과 '나'와 '너'가 공존하는 대칭성의 시간을 말했다. 


신화에는 이들이 말하는 두 가지 시간이 공존하지만 현대인에게는 속의 시간과 비대칭성의 시간만이 존재한다. 엘리아데는 순환적 시간을 강조하면서 영원회귀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순환적 시간을 용납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 창조의 순간에 시간까지도 창조했다고 한다. 시간 역시 신의 피조물이라고 본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314-315)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시간을 인간의 심리작용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한때 현재였던 과거가 있을 뿐이고 현재일 미래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그는 과거는 기억이며 현재는 직관이고 미래는 기대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 뉴턴의 근대적 시간관, 시간은 공(空)하다고 말하는 불교의 시간, 과거 현재 미래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실재 하므로 현재란 이질적인 차원의 다양체락고  말하는 베르그송의 시간,  현재에 의해 과거는 불려오는 것이며 그것은 불려 올 때마다 변형되어 불려온다는 들뢰즈의 구멍난 시간 등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Yesterday was History, Tomorrow is Mistery, Present is Present. 라는 말도 Present가 중의적으로 쓰이면서 의미심장해지는 말 중의 하나이다. 반백년을 살아낸 지금에 와서 시간을 살펴보자니 좀 두렵다. 두려움은 실체를 모르는데서 오는 것이니 알고나면 두려움은 사라지겠지만 두려움의 등 뒤에 도사리고 있던 무서움이라는 괴물을 맞닥뜨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리스트를 만드는 것조차 두렵고 무섭구나.


  

필립 K 딕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는 검색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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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발견에서 신화와 은유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이철우 옮김 / 아카넷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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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이야기 2- 허구 이야기에서의 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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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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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 열여섯 소년, 거장 보르헤스와 함께 책을 읽다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산책자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2012년 첫 책으로 읽었다. 읽기 위해서 읽은 것은 아니다. 보르헤스가 시간을 어떻게 다루는지 궁금해 『픽션들』을 찾다가 보르헤스에 관한 책들을 모두 꺼내놓고 보니 이 책이 있었다. 찾아야할 책은 찾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새로 주문을 하고-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어쩌다 손에 잡혔는데 읽다보니 어느새 끝나 있었다.

 

리뷰를 써야한다는 부담감이 없으니 완독에 대한 부담도 없다. 그러다보니 이 책 저 책 손에 잡히는 대로 들여다본다. 쫓기지 않아 좋긴 한데 집구석이 엉망이다. 언제는 엉망이 아니었느냐마는 며칠 게으름을 피우다보면 책 폭탄을 맞은 집 같다. 소파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나면 까놓은 귤껍질처럼 소파위에 책이 쌓여있다. 꺼내온 곳에 다시 꽂아 넣는 일은 만만찮은 일이다. 해결방법은 하나. 그냥 마구잡이로 쌓아놓는다.

 

보르헤스는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왜 저런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우연과 무질서의 법칙에 대한 믿음’이 보르헤스의 서재에는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내게도 저런 믿음이 있을까? 글쎄다. 읽었던 책을 다시 찾을 때 어디쯤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을 보면 무질서의 법칙이 내게도 있기는 한건가? 되는대로 책을 쌓아놓는 데서 생기는 가장 창조적인 기능은 계통도 맥락도 없이 쌓아 놓은 책의 제목을 훑으면서 책제목만으로 시를 한 편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은 온통 책에 관한 이야기다. 세계적인 독서가로 알려진 알베르토 망구엘이 움직이는 도서관으로 알려진 보르헤스에 관해 쓴 글이니 오죽하랴.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보르헤스가 서점에서 일하던 망구엘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한 것은 망구엘의 나이 열여섯 살 때이다. 보르헤스는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고 망구엘은 학교에서 보르헤스의 시와 문장으로 공부를 하는 나이였다.

 

“문장을 해체해보면 그의 작품이 얼마나 단순하고 명쾌한지, 동사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명사와 어우러지고 구문과 구문이 맞아 떨어지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빈도가 떨어진 형용사와 부사의 사용은 일상적인 단어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 해냈지만, 새로움보다 더 놀라운 건 정확함이었다.”

 

나도 이런 공부 해보고 싶다. 그래서 놀라고 감탄하고 싶다. 최근 영어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부럽기 짝이 없다.

 

보르헤스가 폭력배나 불한당을 높이 평가한 것은 그의 책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보르헤스는 워낙 책을 좋아해서 책의 표지를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책을 골라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세계를 한 권의 책으로 알았고 친구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책을 읽듯 독자의 입장을 취했다고 한다. 나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건 지난한해를 돌이켜보면서 내가 읽었던 모든 책들이 결국은 사람에 대한 이해로 귀결이 되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환상문학에도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영역에 종교와 철학과 고등수학을 포함시켰다고 한다.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나는 그와 친해지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찾다가 찾다가 결국 못 찾아 새로 주문한 책 『픽션들』에서 이것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나는 정말 아는 바도 없고 관심도 없는 분야다. 아무래도 올해는 환상문학이나 SF 소설 등에 관심을 두어야 할 듯싶다. 일 때문이었지만 지난해 후반기 로맨스소설을 읽어야 했다. 도무지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인지 로맨스소설이 내게는 낯설기 짝이 없었다. 세 번을 읽어야 했던 책도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몇 번을 읽어도 여전히 재미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맨스 소설을 읽는 일이 내게는 전혀 로맨틱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사정과 맞물려 삶이 나를 농락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곤혹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결국 ‘일이니까’라는 말로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섣달그믐에 하는 일이 향후 몇 달 동안의 활동이 된다고 하는 말을 친구로부터 들은 보르헤스는 이 충고를 충실하게 지켰다고 한다. 섣달그믐날 나는 산에 다녀왔고 공들여 메일을 한통 썼고 시집을 읽었다. 그리고 ‘성전’이니 ‘대행자’니 ‘소드 마스터’니 하는 이상한 용어들이 난무하는 판타지 소설을 읽어야했다. 이쯤 되면 새해 몇 달 동안의 내 앞날은 이미 정해 진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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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1-04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 모양이죠? 원하시는 결과를 얻기 바랍니다. 망구엘의 책에는 보르헤스의 그림자가 어려 있어서 그가 희대의 행운아인 듯싶다가고 나름대로 고충이 많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반딧불이 2012-01-04 17:34   좋아요 0 | URL
네 후와님. 어쩌다보니 네이버에 연재되고 있는 장르소설 검토하는 일을 하게되었어요. 팔자에 없는 로맨스소설들을 원도 한도 없이 읽게 되네요.

저는 망구엘의 글을 처음 읽는데 글을 참 잘쓴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얼핏보면 쉬운것 같은데 씹을수록 맛이 나는 글이네요.

쉽싸리 2012-01-04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는 놓여난 덕분?인지는 몰라도 중간에 흥미가 반감되거나, 번역이 어렵거나 하면 읽다가 마는 경우가 부쩍 늘은것 같아요. 물론 보르헤스 같은 믿음이 있어서 그런건 아니구요. ^^

새해 좋은일 많이 만드시길 바랄께요...

반딧불이 2012-01-04 17:38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뵈요. 쉽싸리님. 새해 내내 평안하시고 행복하십시오.
저는 이제 흥미없는 글, 번역이 어려워 이해 안되는 글. 이런책 이제 그만 보려고해요. 이런책보다 흥미있는글 재미있는 글, 쉬운 글을 읽는 것이 훨씬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새해에도 좋은 글 보여주세요.

맥거핀 2012-01-04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로는 어떤 느낌이셨는지 모르지만) 산에 다녀오고, 메일을 공들여 쓰고, 시집을 읽고,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도 꽤 괜찮아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일주일의 거의 대부분은 하루에 반을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나머지 시간들에는 영화관 스크린 앞에 앉아있었던 듯 합니다. 저보다는 그래도 나아 보이지 않나요..그래서 가끔 눈을 너무 혹사한다는 느낌이 있어요...^^;) 저도 책을 좀 보고 그래야 하는데, 못보고 쌓아둔 책이 너무 많아요. 한두챕터 읽고 던져둔 책도 많구요. 보르헤스처럼 저나 반딧불이님이나 좋은 책을 많이 만나는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반딧불이 2012-01-04 20:22   좋아요 0 | URL
하하..맥거핀님. 이거 뭐 도토리 키재기 하시는것도 아니구...
저도 컴퓨터 앞에 있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컴으로 메일쓰고 파일로 된 판타지 소설 읽고...저도 하루중 컴퓨터앞에 매달려 있는 시간이 너무 많아요. 급격히 시력이 떨어진 이유가 바로 컴퓨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누가 더 나은 시간을 보내는지 맥거핀님과 경쟁하고 싶지 않아요. ㅋㅋ 좋은 책 읽으시고 좋은 영화 보시고 같이 나누는 시간이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래요.
 

  

 

인류학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역사를 살펴보는 동안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단어가 몇 개 있다. ‘신화적 상상력’ ‘야생의 사고’ ‘대칭성 사회’ ‘유동적 지성’ ‘불교’ 등이다. 학자마다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로 정의하고 있지만 이러한 말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고대인들의 세계관이다. 고대인들은 자연과 인간이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들은 동물과 결혼을 할 만큼 대등한 관계였다. 인간이 도구를 만들어 쓰기 시작하면서 문명의 진보를 이루었고 이것은 점점 더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멀어지게 만들었으며 끝내 자연은 정복해야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원래 자연과 인간은 분리된 것이 아니었기에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오면서 인간이 정복한 것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 그 자체였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우려를 표명하고 그 나름대로의 새로운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 대안 중의 하나로 신화적 상상력이 놓여있다는 것이 거칠지만 내가 짚은 맥락이다. 물론 여기에는 국가의 탄생이나 그와 밀착된 종교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역사, 정치, 이념, 종교 등 거대담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어쩌면 무관하려고 애쓰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즈음에서 지진아처럼 내가 깨닫는 것은 이러한 것으로부터 무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예수의 탄생을 기원으로 하는 서기 2011년의 10월 마지막 주를 살고 있고, 서울 시장 선거를 앞두고 투표권을 행사해야한다. 박원순을 찍으면 나는 소위 말하는 ‘강남좌파’가 되고 만다. 오직 주소지가 강남구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역사의식도 정치의식도 거대한 이데올로기도 가지지 못했다고 믿고 있는 사람 중의 한명이지만 내가 ‘지금, 여기’를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가장 역사적이고 가장 정치적이며 가장 이념적이면서 또한 가장 보잘 것 없는 이 시대의 구성원이고 주인공이다. 야스퍼스의 말을 빌린다면 나는 ‘역사에서 빠져나와 무시간적인 것 속으로 도피 할 수’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이것은 내가 새로 직면한 나의 ‘한계상황’이다.

야스퍼스는 인류가 이런 한계상황에 부딪혔을 때 ‘차축 시대’가 열렸다고 본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인류 곳곳에서 사상가들이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공자, 맹자, 노자가 道를 물었고, 붓다는 번뇌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짜라투스트라와 그리스의 비극도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 이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유하고 있는 근본 범주들은 모두 이때에 생겨난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전체 속에 있는 존재로 알게 되었고, 자기 자신을 참으로 알게 되었으며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었’ 듯이 나 역시 나 자신을 연구대상으로 문제 삼을 때 나의 차축시대가 열릴 수 있을까? 그보다는 우선 내 생의 좌표를 설정하는 것이 우선 아닐까?

‘한계상황’은 고대인들의 ‘겨울’과 다르지 않은 듯싶다. 그들에게 겨울은 단지 사계절의 겨울의 의미를 넘어 공포와 죽음, 초자연적인 힘, 생명 가진 것들의 유한성 등 폭넓은 의미로 범람했을 것이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힘 앞에서 우리는 몇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초자연적인 힘 혹은 절대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걸할 수도 있고 그 힘에 대항하여 주술을 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레미 숲의 사제처럼 스스로 황금가지를 꺾어 나를 죽이고 필요할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법을 강구하기 이전에 요구되는 것은 자신의 한계상황을 적나라하게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겨울로 상징되는 한계상황은 어느 누구라도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도 지났다. 곧 겨울이 잇대어 올 것이다. 겨울은 철이 없다. 한여름에도 겨울은 온다. 내 외로움의 관절이 삐걱이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겨울은 언젠가는 끝난다. 밤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동짓날 밤의 끝자락에서 이미 봄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이 어김없이 진행되듯이 생의 겨울도 인류의 겨울도 예외 없이 진행되어 머지않아 얼음이 풀리고 봄이 올 것을 믿는다. 그러나 막연한 믿음만으로 이 겨울을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야스퍼스를 빌려오자면 ‘나 자신은 어디에 서고자 하며 무엇을 위하여 일하고자 하는가 하는 것을 물을 때다.’ 삶의 좌표, 생각의 좌표를 정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랴.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참작하고 고려하고 끝내는 훔쳐서 ‘사랑’이라는 결론을 내려 본다. ‘은혜’나 ‘자비’는 다분히 종교적이다. 기독당이 어떻고 빤스 목사가 어쩌구 하는 것도 꼴불견이고 국가의 탄생에 대한 견제로서 불교가 탄생했다고 하지만 지금의 불교에서 그런 뜻을 헤아리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랑 또한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울리히 벡이 지적했듯이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인 동시에 『위험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내 사랑은 다시 막막하다. 

이 막막한 사랑 앞에서 내가 찾아든 것은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이었다. 그는 사랑을 ‘미지의 무엇을 지속시키려는 욕망’이고 ‘삶의 재발명’이라고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사랑은 공간과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때로는 매몰차게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사랑에서 가장 첨예하게 맞닥뜨리는 것은 타자와의 차이다. 차이를 가진 타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함께 존재하는 것. 그리고 이것을 창조적인 것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 즉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가능할까? 정 반대의 속성을 가진 것들의 차이는 인식의 단계부터 시작되어야할 것이다. 나와는 전혀 다른 것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나를 무화시켜야 한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 이해를 통해 결국 다다르게 되는 곳은 나 자신이었다. 이전의 나와는 또 다른 ‘나’다. 재발명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재발명 되어야 할 것은 사랑이지 ‘나’가 아니잖은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어쩌면 이해의 폭은 넓어졌는지 모르겠지만 끝내 스스로를 무화 시키는 사랑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건가?
이런 막막함 앞에서는 그저 막막하기만 할 뿐이구나.


 

우산을 들고도
 

 

발치에 강이 깊은데 돌미나리 타들어간다
척박한 땅을 움켜쥐고 헝클어진 뿌리들
오랜 집착을 끊듯 걷어내고
맨드라미 모종하는 호미가 붉다

미나리와 맨드라미의 거리
빗겨가는 생의 거리를 서성이는 동안
칸타타처럼 빗방울 듣는다

우산을 펴 비를 부르는 토란잎 아래
생이가래 개구리밥 살갑게 모여드는데
연잎 방석위에 오도마니 앉은 물방울처럼
내 사랑은 다만,
막막할 뿐
막막하고 막막해서
막막함으로 반짝 빛날 뿐

발치에 강이 깊은데 돌미나리 타들어간다
세상의 모든 강가에서 목마른 것이 미나리뿐이랴

우산을 들고도
그대라는 강가에서 나는
맨드라미의 뜨거운 혀처럼
붉은 이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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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31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 어떤 한계상황에 부딪혔을 때만이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듯 합니다. 다만 문제는 그 새로운 시대가 인류를, 아니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타자를 사랑하게 만들것인가의 문제겠습니다만...

영화 좋아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 이 글을 읽다보니 최근 개봉한 영화 중 '트리 오브 라이프'라는 영화를 추천하고 싶네요. 이야기가 간단하면서도,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아마 글에 이야기하신 것들과도 연결되는 영화가 아닌가 싶네요.

반딧불이 2011-11-01 18:20   좋아요 0 | URL
영화 제목부터 뭔가를 생각하게 만드네요. 꼭 챙겨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11-11-02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점점 좋아지는데요. 나중에 한 권으로 묶으셔도 되겠는걸요^^

반딧불이 2011-11-03 10:2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그래도 '국어사전 사랑법'만이야 하려구요.

2011-12-19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9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잭 구디의 역사인류학 강의 - 요리, 사랑, 문자로 플어낸 동서양 문명의 발달사
잭 구디 지음, 김지혜 옮김 / 산책자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잭 구디는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인류학자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프리카의 전장으로 내몰렸고 그곳에서 독일군 포로로 잡혔다. 포로수용소에서 제임스 프레이져의 <황금가지>와 고든 차일드의 <역사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났던가>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우연은 훗날 그의 관심을 문학에서 고고학 및 인류학으로 바꾸어놓았다.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서 현지조사로 인류학자의 첫발을 내디딘 그는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연구 분야를 개척해 나갔다.

그가 관심을 두고 연구했던 것들은 문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 요리, 꽃의 문화, 상속, 가족의 역사 등인데 특히 내게 놀라웠던 것은 요리법의 세분화나 꽃을 심미적 용도로 사용하는 데에 경제적인 계층화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그의 이론이다. 그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꽃 문화가 없으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꽃 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아름답고 향기롭다는 이유만으로 꽃을 받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꽃을 선물하는 것도 좋아하는 나는?? 이미 내 무의식은 계층화 계급화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인가? 아는 게 병이라는 말은 이런데다 쓰는 거라고 자위해본다.

이미 적었지만 잭 구디는 역사학자이면서 인류학자다. 역사학과 인류학의 차이점은 뭘까? 역사학이 문헌으로 연구하는 것이라면 인류학은 현장조사로 연구하는 차이일까? 역사학이 시간성을 전제로 시간 안에 법칙과 리듬을 부여한다면 인류학은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을 연구하는 것인가? 이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역사학이든 인류학이든 언어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다를 바가 없다. 역사학자든 인류학자든 그들은 그들 고유의 언어로 기록을 남기는데 그렇다면 그들의 언어는 그들의 세계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언어의 지시기능뿐만 아니라 세계를 절단하는 기능으로 본다면 이들 학자들의 견해는 세계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절단하는 것이리라.

잭구디가 자신의 언어로 세계를 절단한 것을 보자. 그는 서양 중심주의에 비판의 메스를 대고 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산업화, 근대화라는 말의 배경에 유럽인들에 의해 이러한 발전이 시작되었다는 과장된 주장이 들어있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발전’이라는 말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열등한 것에서 우월한 것으로,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나아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뜻에서 근대화는 곧 서구화를 의미했고 서양=역동적, 동양=정태적, 서양=문명, 동양=야만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널리 통용되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서구는 문명사적으로 동양보다 우위에 있으며 온 힘을 다해 따라가야 할 모델이 된다.

인류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많은 학자들이 관여한 서양 중심주의에는 특히 사회가 원시적 형태에서 고대적 형태 - 봉건적 형태 - 자본주의적 형태로 순차적 발전과정을 거친다는 마르크스는 가장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집단적인 것에서 개인적인 것을 향하여 발전의 순차가 놓여 있다는 것 역시 마르크스 사상의 일부이다. 이에 따르면 농촌사회의 확대가족은 개인주의의 등장과 함께 근대사회의 핵가족으로 이행한 것이 된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다루면서 개인주의라는 낱말을 사용했는데 ‘개인주의는 공동체의 각 구성원들이 동료 집단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고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거리를 갖게 한다.’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의 등장과 근대화, 기업정신에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세계적 팽창에 관한 논의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잉글랜드에서 유럽의 어휘 속에 처음 ‘개인주의’가 등장했을 때 우파는 당시 사회의 원자화를 뜻하는 의미로, 좌파는 사회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사용했다. ‘신과의 관계 속에 있는 개인’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입장이나 사회조직보다 개인의 책임을 우선시한 청교도적인 입장 등 ‘개인주의’를 바라보는 입장은 참으로 다양하다.

마르크스의 발전 순차를 따른다면 현대사회는 단자화 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사회복지나 연금 등 사회제도나 투자 자본의 축적을 위한 혈통집단 등에서 보이듯이 오히려 현대사회는 훨씬 더 집단적이다. 이들이 말하는 개인의 의미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입장 등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좀체 합의점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주의라는 개념이 텍스트가 아니라 콘텍스트의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폭넓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성은 문명이나 제도에 대한 논의 이외에 인간의 감정, 특히 사랑의 감정에서 조차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다른 문화에서 보이는 로맨틱한 사랑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욕정이나 욕망이라고 여긴다. 로맨틱한 사랑에 대해서는 사회학적, 정신분석학적, 역사학적 접근이 요약 제시되고 있다.

로맨틱한 사랑은 근대적인 것이고 근대성은 유럽적인 것이므로 사랑은 유럽적이라는 기든스의 입장. ‘반쯤 문명화된 사람들’ 사이에서는 로맨틱한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레이크의 정신분석학적 관점. 사랑을 위한 결혼이 증가한 것은 소설의 소비 증가 때문이라고 말하는 역사학자 스톤은 ‘사랑이 커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 실은 지면 위에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이 커진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는 글을 사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사랑을 구분하면서 은연중에 글을 모르는 사람의 사랑의 감정을 욕정이나 욕망으로 끌어내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 동서양 문학에 나타난 사랑의 감정을 예로 들면서 이에 대한 비교거리를 제공한다. 또 아프리카인의 노래나 관습에도 사랑은 표현되고 있고 심지어 결혼한 여자나 남자의 연인까지도 허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잭 구디는 서구가 자본주의 혹은 근대화를 향한 어떤 특별한 경향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주장을 위해 각 분야의 다양한 이론들을 요약 정리하면서 그에 대한 자료를 제시하는데 많은 부분이 논증이나 제시보다 요약 정리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 또 저자는 서양의 독특성보다 유라시아의 독특성, 특히 아시아가 기여한 부분에 대해 논의하고 아프리카의 문화를 소개한다. 이것은 문자로 하는 일 못지않게 말로 하는 일(구술)의 가치를 재평가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서양/동양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에 아프리카를 위치시킨다.

인류가 생겨난 이래 단 하루도 멈추지 않았을, 또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가장 원초적인 행위의 하나인 먹기와 사랑, 그것을 확장하는데 기여한 문자를 키워드로 문화사를 조망하는 일은 가장 미시사적인 관점으로 거시사를 다루는 효과를 낸다. 한쪽 눈으로만 보던 역사를 비로소 두 눈을 뜨고 보는 것 같았다.

나쓰메 소세키는 문학으로서 문학을 알려고 하는 것은 피로써 피를 씻는 것과 같다고 했다. 역사를 알려고 하는 것 역시 이와 같지 않을까. 역사를 인류학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은 지리적 국경의 개념을 넘고 공간적으로도 우주 밖에서 지구를 조망하는 듯 넓은 시각을 확보하게 해준다. 잭 구디의 언어로 단절한 세계를 통해 내 시각은 새로워 진 셈이다. 그러나 서양의 우월성에 대한 논의도 또 그에 대한 반박도 모두 서양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지켜보면서 학문은 진보하고 있는 것인지 눈꺼풀에 씌운 콩깍지를 벗겨내고 있는 것인지 헛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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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0 0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0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1-10-10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서구중심적인 세계사에 대한 논의들은 읽어보았지만, 역사인류학이라는 것은 또 그것보다 훨씬 방대하고 넓은 세계인 것 같네요. 아마도 이 역사인류학이라는 것이 폭넓게 연구된다면 지금의 어떤 틀에 박힌데다가 유럽중심적인 세계사보다는 훨씬 넓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듯도 싶구요. 유럽중심적인 세계사를 넘어서자는 책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이 책처럼 역사인류학이 아닌) 기존 역사학의 방법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졌으니까요. 또 새로운 것을 배우고 갑니다.

반딧불이 2011-10-11 01:19   좋아요 0 | URL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이 있지요. 저는 특히 벤야민의 관점이 새롭게 보였어요. 역사내부에도 기존역사서술에 대한 비판들이 있구요. 인류학적으로 역사를 보니 시야가 넓어지기도 하지만 뭐랄까..순환론을 생각하게 된다고 해야할까요. 고대세계를 그리워하게 된다고 할까요...맥거핀님께서 살파신 몰락 이후의 세계를 생각해보게되는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