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놓고 보니 옛 생각이 난다. 아들이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이게 뭐야? 라는 질문을 하루 종일 입에 달고 살았다. 사물의 이름을 말해주면 고개를 끄덕이며 멈추는 경우가 있고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한겨울 아이와 방안에 갇혀 있을 때였다. 엄마, 무슨 소리야? 야쿠르트 병 굴러가는 소리야. 야쿠르트 병이 왜 굴러가? 바람이 불어서. 바람이 뭐야? ........ 궁색한 나는 아이의 얼굴에 훅~ 입으로 바람을 불어주었다. 녀석은 금방 얼굴에 화색이 돌았지만 곧 이어 바람은 왜 불어? 하고 물어온다. 이에 대한 답은 나는 아직도 궁색하다. 내가 좀 더 현명하고 지혜로웠다면 아들이 지금 물리학자로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에 다니고 있을 때 나와 네 살 차이 나는 남동생이 별이 왜 빛나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별이 왜 빛나느냐니? 빛나니까 별이지. 뭐 이런 식으로 대답했던 것 같다. 초등학생이 아니 내가 대답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 몇 개의 질문에 대답한 뒤였고 질문마다 답이 궁색해지자 나는 발칵 화를 냈던 것 같다. 동생은 그걸 왜 모르느냐고 나보다 더 화를 내면서 베개를 집어던지고 울고불고하는 바람에 하루 종일 싸웠던 기억도 있다. 왜 내게는 당연한 것이 그 아이에게는 숨이 넘어갈 만큼 답답했을까?
만약 아들이나 동생이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어왔다면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 대답을 할 수도 없었고 하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을 생각하니 깜깜하다. 그런 질문을 받지 않았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자. 시간이 무엇이냐에 답하기보다 시간의 시작은 언제인가, 끝이 있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 시간은 흘러간다고 하는데 정말 흘러가는 것일까?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상정하고 시간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미래로부터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런 걸까? 시간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정의들은 일단 접어두고 시간에 대한 과학적 이론들 먼저 살펴보자.
무수한 과학자들이 우주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고자 노력해왔다. 기원전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중심설로부터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거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까지 과학이론들은 수정과 발전을 거듭해왔다. 우주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단일한 이론을 만드는 것이 과학의 궁극적인 목표다. 그들의 접근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우주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알려주는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의 초기 상태에 대한 질문이다. 이 두 가지에 대해 현대과학은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설명한다. 일반상대성 이론은 중력과 우주의 거시적인 구조를 다루고 양자역학은 극도로 미세한 규모의 현상들을 다룬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다. 이것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주의 시작은 아주 작은 덩어리였고 빅뱅이 일어났던 시기가 우주의 시작이 된다. 그러니까 과학에서의 시간의 시작은 빅뱅이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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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는 어떤가? ‘하느님은 세계 창조 이전에 무엇을 하셨는가’라고 깊은 신비를 캐묻는 자에게 어떤 사람은 지옥을 준비해두었다고 답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런 심오한 질문을 한 사람을 비웃지도 말고 오류의 답도 하지 말며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대답하길 바란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마도 내 동생 같은 호기심 많은 동생에게 봉변을 당해보지 않았나보다. 그는 ‘주님은 모든 시대의 창작자이며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바로 주심이 만들지 않으신 무수한 시대가 어디서 와서 지나갈 수 있겠습니까? 또한 주심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시간이 과연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라며 하느님이 시간도 창조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는 시간도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창조의 순간 시간도 시작된 셈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끝은 언제인가? 이 질문에는 늘 종말론이 놓인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공식 E=mc²의 핵심 주장은 E=m, 즉 에너지=질량이라는 것이다. 태초에 에너지가 질량 쪽으로 밀어 넣어져 사물이 생겨났지만 그 끝은 질량이 에너지의 자리로 이동하게 된다. 그것은 10에 0이 99개가 붙을 만큼 먼 시간이지만 그 시간이 종말이다.
스티븐 호킹은 1000년 이내에 핵전쟁이나 지구온난화로 인해 인류가 멸망할 위기가 온다고 했다. 이를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우주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이고 만약 우주인이 지구에 먼저 도착을 하게 될 때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우주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시간’의 개념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우주가 시작되기 전의 시간에 대해 논하는 것은 마치 남극점에서 남쪽이 어디냐를 묻는 것처럼 의미 없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어쨌거나 빅뱅 이후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계속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다.
과학자들이 시간의 비밀을 밝혀낸다고 해도 또 수많은 학자들의 시간관을 섭렵해도 여전히 생물학적 시간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 아닐까. 인간은 ‘시간의 이빨’에 뜯어 먹히는 존재이고 그렇게 다 뜯어 먹히고 나면 다음 세대에게 시공간을 양보해야 하고 사라지는 존재. 어쩌면 인간은 시간이 쏘아버린 화살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겨누고 있는 과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날아가는 화살, 스스로 과녁을 결정할 수도 없는 화살. 어느 시인은 '사수는 두 개의 과녁을 노리지 않는다'고 했다. 시간은 나를 쏘며 무엇을 겨냥했을까?
중심을 쏘다/신용목
사수가 한쪽 눈을 감는 것은 과녁을 떠나는 그 영혼을 보지 않기 위해서다
어떤 형벌이 사수의 눈동자 속에
과녁의 동심원을 그렸을까
한입 어둠을 씹어먹는 허공의 아득한 중심에서
정확히 자신의 죽음을 겨누어 떨어지는, 빗방울
우산은 방패가 아니었다
바람 불 때마다 영혼의 부력으로 뒤집히는 중심의 테두리 그 팽팽한 시간 위에서
빗물이 명중의 제 몸 잠시 허공에 흩어놓을 때
한 발의 생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그리하여 저편
영혼으로 과녁을 치는 무지개,
중심을 산 너머에 숨겼으므로
검은 부리로 날아가는 새가 있다 구름 사이로
누구를 겨누어 저 달은 오늘도, 눈꺼풀 내려 촛점을 잡는 것일까
한쪽 눈을 감을 때마다 보이는
둥글게 갇힌 자신의 영혼 그리고
영원히 외눈인 해와 달,
사수는 두 개의 과녁을 노리지 않는다
덧 : ‘시간의 역사’라는 말이 성립 가능할까? 시간은 역사를 시간적으로 품을 수 있지만 역사는 시간을 시간적으로 품을 수 없고 의미적으로만 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제목은 ‘시간의 역사’라기 보다 ‘시간이라는 개념의 역사’가 더 알맞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