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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구디의 역사인류학 강의 - 요리, 사랑, 문자로 플어낸 동서양 문명의 발달사
잭 구디 지음, 김지혜 옮김 / 산책자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잭 구디는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인류학자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프리카의 전장으로 내몰렸고 그곳에서 독일군 포로로 잡혔다. 포로수용소에서 제임스 프레이져의 <황금가지>와 고든 차일드의 <역사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났던가>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우연은 훗날 그의 관심을 문학에서 고고학 및 인류학으로 바꾸어놓았다.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서 현지조사로 인류학자의 첫발을 내디딘 그는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연구 분야를 개척해 나갔다.
그가 관심을 두고 연구했던 것들은 문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 요리, 꽃의 문화, 상속, 가족의 역사 등인데 특히 내게 놀라웠던 것은 요리법의 세분화나 꽃을 심미적 용도로 사용하는 데에 경제적인 계층화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그의 이론이다. 그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꽃 문화가 없으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꽃 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아름답고 향기롭다는 이유만으로 꽃을 받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꽃을 선물하는 것도 좋아하는 나는?? 이미 내 무의식은 계층화 계급화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인가? 아는 게 병이라는 말은 이런데다 쓰는 거라고 자위해본다.
이미 적었지만 잭 구디는 역사학자이면서 인류학자다. 역사학과 인류학의 차이점은 뭘까? 역사학이 문헌으로 연구하는 것이라면 인류학은 현장조사로 연구하는 차이일까? 역사학이 시간성을 전제로 시간 안에 법칙과 리듬을 부여한다면 인류학은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을 연구하는 것인가? 이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역사학이든 인류학이든 언어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다를 바가 없다. 역사학자든 인류학자든 그들은 그들 고유의 언어로 기록을 남기는데 그렇다면 그들의 언어는 그들의 세계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언어의 지시기능뿐만 아니라 세계를 절단하는 기능으로 본다면 이들 학자들의 견해는 세계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절단하는 것이리라.
잭구디가 자신의 언어로 세계를 절단한 것을 보자. 그는 서양 중심주의에 비판의 메스를 대고 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산업화, 근대화라는 말의 배경에 유럽인들에 의해 이러한 발전이 시작되었다는 과장된 주장이 들어있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발전’이라는 말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열등한 것에서 우월한 것으로,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나아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뜻에서 근대화는 곧 서구화를 의미했고 서양=역동적, 동양=정태적, 서양=문명, 동양=야만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널리 통용되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서구는 문명사적으로 동양보다 우위에 있으며 온 힘을 다해 따라가야 할 모델이 된다.
인류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많은 학자들이 관여한 서양 중심주의에는 특히 사회가 원시적 형태에서 고대적 형태 - 봉건적 형태 - 자본주의적 형태로 순차적 발전과정을 거친다는 마르크스는 가장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집단적인 것에서 개인적인 것을 향하여 발전의 순차가 놓여 있다는 것 역시 마르크스 사상의 일부이다. 이에 따르면 농촌사회의 확대가족은 개인주의의 등장과 함께 근대사회의 핵가족으로 이행한 것이 된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다루면서 개인주의라는 낱말을 사용했는데 ‘개인주의는 공동체의 각 구성원들이 동료 집단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고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거리를 갖게 한다.’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의 등장과 근대화, 기업정신에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세계적 팽창에 관한 논의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잉글랜드에서 유럽의 어휘 속에 처음 ‘개인주의’가 등장했을 때 우파는 당시 사회의 원자화를 뜻하는 의미로, 좌파는 사회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사용했다. ‘신과의 관계 속에 있는 개인’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입장이나 사회조직보다 개인의 책임을 우선시한 청교도적인 입장 등 ‘개인주의’를 바라보는 입장은 참으로 다양하다.
마르크스의 발전 순차를 따른다면 현대사회는 단자화 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사회복지나 연금 등 사회제도나 투자 자본의 축적을 위한 혈통집단 등에서 보이듯이 오히려 현대사회는 훨씬 더 집단적이다. 이들이 말하는 개인의 의미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입장 등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좀체 합의점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주의라는 개념이 텍스트가 아니라 콘텍스트의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폭넓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성은 문명이나 제도에 대한 논의 이외에 인간의 감정, 특히 사랑의 감정에서 조차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다른 문화에서 보이는 로맨틱한 사랑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욕정이나 욕망이라고 여긴다. 로맨틱한 사랑에 대해서는 사회학적, 정신분석학적, 역사학적 접근이 요약 제시되고 있다.
로맨틱한 사랑은 근대적인 것이고 근대성은 유럽적인 것이므로 사랑은 유럽적이라는 기든스의 입장. ‘반쯤 문명화된 사람들’ 사이에서는 로맨틱한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레이크의 정신분석학적 관점. 사랑을 위한 결혼이 증가한 것은 소설의 소비 증가 때문이라고 말하는 역사학자 스톤은 ‘사랑이 커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 실은 지면 위에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이 커진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는 글을 사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사랑을 구분하면서 은연중에 글을 모르는 사람의 사랑의 감정을 욕정이나 욕망으로 끌어내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 동서양 문학에 나타난 사랑의 감정을 예로 들면서 이에 대한 비교거리를 제공한다. 또 아프리카인의 노래나 관습에도 사랑은 표현되고 있고 심지어 결혼한 여자나 남자의 연인까지도 허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잭 구디는 서구가 자본주의 혹은 근대화를 향한 어떤 특별한 경향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주장을 위해 각 분야의 다양한 이론들을 요약 정리하면서 그에 대한 자료를 제시하는데 많은 부분이 논증이나 제시보다 요약 정리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 또 저자는 서양의 독특성보다 유라시아의 독특성, 특히 아시아가 기여한 부분에 대해 논의하고 아프리카의 문화를 소개한다. 이것은 문자로 하는 일 못지않게 말로 하는 일(구술)의 가치를 재평가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서양/동양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에 아프리카를 위치시킨다.
인류가 생겨난 이래 단 하루도 멈추지 않았을, 또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가장 원초적인 행위의 하나인 먹기와 사랑, 그것을 확장하는데 기여한 문자를 키워드로 문화사를 조망하는 일은 가장 미시사적인 관점으로 거시사를 다루는 효과를 낸다. 한쪽 눈으로만 보던 역사를 비로소 두 눈을 뜨고 보는 것 같았다.
나쓰메 소세키는 문학으로서 문학을 알려고 하는 것은 피로써 피를 씻는 것과 같다고 했다. 역사를 알려고 하는 것 역시 이와 같지 않을까. 역사를 인류학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은 지리적 국경의 개념을 넘고 공간적으로도 우주 밖에서 지구를 조망하는 듯 넓은 시각을 확보하게 해준다. 잭 구디의 언어로 단절한 세계를 통해 내 시각은 새로워 진 셈이다. 그러나 서양의 우월성에 대한 논의도 또 그에 대한 반박도 모두 서양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지켜보면서 학문은 진보하고 있는 것인지 눈꺼풀에 씌운 콩깍지를 벗겨내고 있는 것인지 헛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