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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 열여섯 소년, 거장 보르헤스와 함께 책을 읽다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산책자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2012년 첫 책으로 읽었다. 읽기 위해서 읽은 것은 아니다. 보르헤스가 시간을 어떻게 다루는지 궁금해 『픽션들』을 찾다가 보르헤스에 관한 책들을 모두 꺼내놓고 보니 이 책이 있었다. 찾아야할 책은 찾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새로 주문을 하고-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어쩌다 손에 잡혔는데 읽다보니 어느새 끝나 있었다.
리뷰를 써야한다는 부담감이 없으니 완독에 대한 부담도 없다. 그러다보니 이 책 저 책 손에 잡히는 대로 들여다본다. 쫓기지 않아 좋긴 한데 집구석이 엉망이다. 언제는 엉망이 아니었느냐마는 며칠 게으름을 피우다보면 책 폭탄을 맞은 집 같다. 소파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나면 까놓은 귤껍질처럼 소파위에 책이 쌓여있다. 꺼내온 곳에 다시 꽂아 넣는 일은 만만찮은 일이다. 해결방법은 하나. 그냥 마구잡이로 쌓아놓는다.
보르헤스는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왜 저런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우연과 무질서의 법칙에 대한 믿음’이 보르헤스의 서재에는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내게도 저런 믿음이 있을까? 글쎄다. 읽었던 책을 다시 찾을 때 어디쯤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을 보면 무질서의 법칙이 내게도 있기는 한건가? 되는대로 책을 쌓아놓는 데서 생기는 가장 창조적인 기능은 계통도 맥락도 없이 쌓아 놓은 책의 제목을 훑으면서 책제목만으로 시를 한 편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은 온통 책에 관한 이야기다. 세계적인 독서가로 알려진 알베르토 망구엘이 움직이는 도서관으로 알려진 보르헤스에 관해 쓴 글이니 오죽하랴.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보르헤스가 서점에서 일하던 망구엘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한 것은 망구엘의 나이 열여섯 살 때이다. 보르헤스는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고 망구엘은 학교에서 보르헤스의 시와 문장으로 공부를 하는 나이였다.
“문장을 해체해보면 그의 작품이 얼마나 단순하고 명쾌한지, 동사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명사와 어우러지고 구문과 구문이 맞아 떨어지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빈도가 떨어진 형용사와 부사의 사용은 일상적인 단어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 해냈지만, 새로움보다 더 놀라운 건 정확함이었다.”
나도 이런 공부 해보고 싶다. 그래서 놀라고 감탄하고 싶다. 최근 영어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부럽기 짝이 없다.
보르헤스가 폭력배나 불한당을 높이 평가한 것은 그의 책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보르헤스는 워낙 책을 좋아해서 책의 표지를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책을 골라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세계를 한 권의 책으로 알았고 친구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책을 읽듯 독자의 입장을 취했다고 한다. 나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건 지난한해를 돌이켜보면서 내가 읽었던 모든 책들이 결국은 사람에 대한 이해로 귀결이 되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환상문학에도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영역에 종교와 철학과 고등수학을 포함시켰다고 한다.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나는 그와 친해지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찾다가 찾다가 결국 못 찾아 새로 주문한 책 『픽션들』에서 이것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나는 정말 아는 바도 없고 관심도 없는 분야다. 아무래도 올해는 환상문학이나 SF 소설 등에 관심을 두어야 할 듯싶다. 일 때문이었지만 지난해 후반기 로맨스소설을 읽어야 했다. 도무지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인지 로맨스소설이 내게는 낯설기 짝이 없었다. 세 번을 읽어야 했던 책도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몇 번을 읽어도 여전히 재미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맨스 소설을 읽는 일이 내게는 전혀 로맨틱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사정과 맞물려 삶이 나를 농락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곤혹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결국 ‘일이니까’라는 말로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섣달그믐에 하는 일이 향후 몇 달 동안의 활동이 된다고 하는 말을 친구로부터 들은 보르헤스는 이 충고를 충실하게 지켰다고 한다. 섣달그믐날 나는 산에 다녀왔고 공들여 메일을 한통 썼고 시집을 읽었다. 그리고 ‘성전’이니 ‘대행자’니 ‘소드 마스터’니 하는 이상한 용어들이 난무하는 판타지 소설을 읽어야했다. 이쯤 되면 새해 몇 달 동안의 내 앞날은 이미 정해 진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