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역사를 살펴보는 동안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단어가 몇 개 있다. ‘신화적 상상력’ ‘야생의 사고’ ‘대칭성 사회’ ‘유동적 지성’ ‘불교’ 등이다. 학자마다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로 정의하고 있지만 이러한 말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고대인들의 세계관이다. 고대인들은 자연과 인간이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들은 동물과 결혼을 할 만큼 대등한 관계였다. 인간이 도구를 만들어 쓰기 시작하면서 문명의 진보를 이루었고 이것은 점점 더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멀어지게 만들었으며 끝내 자연은 정복해야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원래 자연과 인간은 분리된 것이 아니었기에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오면서 인간이 정복한 것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 그 자체였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우려를 표명하고 그 나름대로의 새로운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 대안 중의 하나로 신화적 상상력이 놓여있다는 것이 거칠지만 내가 짚은 맥락이다. 물론 여기에는 국가의 탄생이나 그와 밀착된 종교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역사, 정치, 이념, 종교 등 거대담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어쩌면 무관하려고 애쓰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즈음에서 지진아처럼 내가 깨닫는 것은 이러한 것으로부터 무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예수의 탄생을 기원으로 하는 서기 2011년의 10월 마지막 주를 살고 있고, 서울 시장 선거를 앞두고 투표권을 행사해야한다. 박원순을 찍으면 나는 소위 말하는 ‘강남좌파’가 되고 만다. 오직 주소지가 강남구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역사의식도 정치의식도 거대한 이데올로기도 가지지 못했다고 믿고 있는 사람 중의 한명이지만 내가 ‘지금, 여기’를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가장 역사적이고 가장 정치적이며 가장 이념적이면서 또한 가장 보잘 것 없는 이 시대의 구성원이고 주인공이다. 야스퍼스의 말을 빌린다면 나는 ‘역사에서 빠져나와 무시간적인 것 속으로 도피 할 수’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이것은 내가 새로 직면한 나의 ‘한계상황’이다.

야스퍼스는 인류가 이런 한계상황에 부딪혔을 때 ‘차축 시대’가 열렸다고 본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인류 곳곳에서 사상가들이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공자, 맹자, 노자가 道를 물었고, 붓다는 번뇌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짜라투스트라와 그리스의 비극도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 이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유하고 있는 근본 범주들은 모두 이때에 생겨난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전체 속에 있는 존재로 알게 되었고, 자기 자신을 참으로 알게 되었으며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었’ 듯이 나 역시 나 자신을 연구대상으로 문제 삼을 때 나의 차축시대가 열릴 수 있을까? 그보다는 우선 내 생의 좌표를 설정하는 것이 우선 아닐까?

‘한계상황’은 고대인들의 ‘겨울’과 다르지 않은 듯싶다. 그들에게 겨울은 단지 사계절의 겨울의 의미를 넘어 공포와 죽음, 초자연적인 힘, 생명 가진 것들의 유한성 등 폭넓은 의미로 범람했을 것이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힘 앞에서 우리는 몇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초자연적인 힘 혹은 절대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걸할 수도 있고 그 힘에 대항하여 주술을 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레미 숲의 사제처럼 스스로 황금가지를 꺾어 나를 죽이고 필요할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법을 강구하기 이전에 요구되는 것은 자신의 한계상황을 적나라하게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겨울로 상징되는 한계상황은 어느 누구라도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도 지났다. 곧 겨울이 잇대어 올 것이다. 겨울은 철이 없다. 한여름에도 겨울은 온다. 내 외로움의 관절이 삐걱이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겨울은 언젠가는 끝난다. 밤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동짓날 밤의 끝자락에서 이미 봄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이 어김없이 진행되듯이 생의 겨울도 인류의 겨울도 예외 없이 진행되어 머지않아 얼음이 풀리고 봄이 올 것을 믿는다. 그러나 막연한 믿음만으로 이 겨울을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야스퍼스를 빌려오자면 ‘나 자신은 어디에 서고자 하며 무엇을 위하여 일하고자 하는가 하는 것을 물을 때다.’ 삶의 좌표, 생각의 좌표를 정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랴.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참작하고 고려하고 끝내는 훔쳐서 ‘사랑’이라는 결론을 내려 본다. ‘은혜’나 ‘자비’는 다분히 종교적이다. 기독당이 어떻고 빤스 목사가 어쩌구 하는 것도 꼴불견이고 국가의 탄생에 대한 견제로서 불교가 탄생했다고 하지만 지금의 불교에서 그런 뜻을 헤아리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랑 또한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울리히 벡이 지적했듯이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인 동시에 『위험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내 사랑은 다시 막막하다. 

이 막막한 사랑 앞에서 내가 찾아든 것은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이었다. 그는 사랑을 ‘미지의 무엇을 지속시키려는 욕망’이고 ‘삶의 재발명’이라고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사랑은 공간과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때로는 매몰차게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사랑에서 가장 첨예하게 맞닥뜨리는 것은 타자와의 차이다. 차이를 가진 타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함께 존재하는 것. 그리고 이것을 창조적인 것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 즉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가능할까? 정 반대의 속성을 가진 것들의 차이는 인식의 단계부터 시작되어야할 것이다. 나와는 전혀 다른 것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나를 무화시켜야 한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 이해를 통해 결국 다다르게 되는 곳은 나 자신이었다. 이전의 나와는 또 다른 ‘나’다. 재발명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재발명 되어야 할 것은 사랑이지 ‘나’가 아니잖은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어쩌면 이해의 폭은 넓어졌는지 모르겠지만 끝내 스스로를 무화 시키는 사랑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건가?
이런 막막함 앞에서는 그저 막막하기만 할 뿐이구나.


 

우산을 들고도
 

 

발치에 강이 깊은데 돌미나리 타들어간다
척박한 땅을 움켜쥐고 헝클어진 뿌리들
오랜 집착을 끊듯 걷어내고
맨드라미 모종하는 호미가 붉다

미나리와 맨드라미의 거리
빗겨가는 생의 거리를 서성이는 동안
칸타타처럼 빗방울 듣는다

우산을 펴 비를 부르는 토란잎 아래
생이가래 개구리밥 살갑게 모여드는데
연잎 방석위에 오도마니 앉은 물방울처럼
내 사랑은 다만,
막막할 뿐
막막하고 막막해서
막막함으로 반짝 빛날 뿐

발치에 강이 깊은데 돌미나리 타들어간다
세상의 모든 강가에서 목마른 것이 미나리뿐이랴

우산을 들고도
그대라는 강가에서 나는
맨드라미의 뜨거운 혀처럼
붉은 이마처럼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맥거핀 2011-10-31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 어떤 한계상황에 부딪혔을 때만이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듯 합니다. 다만 문제는 그 새로운 시대가 인류를, 아니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타자를 사랑하게 만들것인가의 문제겠습니다만...

영화 좋아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 이 글을 읽다보니 최근 개봉한 영화 중 '트리 오브 라이프'라는 영화를 추천하고 싶네요. 이야기가 간단하면서도,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아마 글에 이야기하신 것들과도 연결되는 영화가 아닌가 싶네요.

반딧불이 2011-11-01 18:20   좋아요 0 | URL
영화 제목부터 뭔가를 생각하게 만드네요. 꼭 챙겨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11-11-02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점점 좋아지는데요. 나중에 한 권으로 묶으셔도 되겠는걸요^^

반딧불이 2011-11-03 10:2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그래도 '국어사전 사랑법'만이야 하려구요.

2011-12-19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9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