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십야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하늘연못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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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에는 <소세키의 다양성>이라는 글이 있다. 고진에 의하면 소세키가 쓰기 시작할 무렵에 일본에는 文이라는 장르가 있었고 마사오카 시키가 제창한 ‘사생문’도 이 ‘文’ 에 속한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文’에서 소세키의 소설이 태어나고 다양한 작품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단편소설이라고 알고 읽고 있는 소세키의 단편들은 소설이 아니라 ‘文’이라는 것이다. 또 그는 노스롭 프라이의 장르론을 예로 들어 픽션을 소설, 로맨스, 고백, 아나토미로 구분하고 이 모든 장르를 다 쓴 소세키의 글의 다양성에 대해 말한다.

『몽십야』는 소세키의 단편을 묶은 것이다. 800여 쪽에 달하는 이 책에는 모두 24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고진의 말에 따른다면 ‘단편소설’이 아니라 ‘문’이라는 글이다. 처음 소세키의 단편을 읽을 때 이것을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고 나는 이것이 소세키가 소설을 쓰기 위해 메모해 둔 것이거나 다양한 소설의 형식을 실험하는 것으로 이해했었다. 『마음』을 읽으면서 고진의 글을 보았으니 그것이 단편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알고 마지막 남은 몇 편의 ‘文’을 읽었다.

<쾨버 선생>, <편지>, <삼산거사>, <쾨버선생의 고별>, <전쟁과 혼란>, <시키의 그림>, <회상>, <이상한 소리>등이 그것이다. ‘文’이라는 형식을 알고 나니 그것을 모르고 단편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읽었을 때의 미심쩍음은 사라졌다. 이것을 어떻게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나 하는 의문이 사라지고 나니까 그의 글이 있는 그대로 전해져왔다. 짧게는 한두 쪽 분량밖에 안 되는 것도 있지만 소세키의 일상이나 일상을 대하는 소세키의 생각을 고스란히 들여다볼 수 있다. 특히 <회상>은 그가 30분 죽음을 경험한 병원 생활을 기록한 것으로 죽음에 대한 소세키의 마음가짐과 죽음의 문턱에서도 펜을 놓지 않았던 작가로서의 치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자기의 병실 바로 옆에 입원했던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하고 유일하게 자기만 살아남은 것에 대해 그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을 느꼈던 듯싶다.

소세키는 <회상>이 ‘평범한 개인의 병상일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부하지만 고풍스러운 멋이 들어가도록 써볼 예정‘이란다. 병상일기는 맞지만 ‘평범한 개인’이라는 말에는 온전히 동의할 수가 없다. 어쨌거나 소세키는 빨리 완성해서 젊은 사람들이나 괴로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옛 향기를 맛보게 하고 싶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글을 썼다. 소세키가 얘기하는 고풍스러운 멋이 무엇인지 나는 정확이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내가 하이쿠와 같은 고풍스런 정취에 취해 있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심정뿐이었다’는 그의 글 속에서 가장 일차적인 힌트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文’과 ‘하이쿠’를 섞어서 쓴 것인데 지금까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식이긴 하다. ‘文’의 내용에 맞는 하이쿠와 시를 적절히 안배해서 사실의 전달과 정서적 울림을 동시에 전달하고 있다.

30분간의 죽음을 체험하고 나서 소세키는 삶과 죽음을 대조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상태가 신문지상에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안부를 전해오자 세상의 관심이 자신을 병에서 서서히 멀어지게 하고 정신적으로 소생하게 만들었다며 병에게 감사한다. 나는 그의 말이 그냥 하는 인사치레로 들리지 않는다. 세상의 따스함을 전혀 모르고 살아온 사내의 진정한 깨달음이 느껴졌고 그가 외치던 ‘나의 개인주의’가 타자로 인해 비로소 완성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으로 ‘文’이라는 형식의 소세키 단편도 모두 읽었으니 소세키의 마지막 미완성 작품 『명암』만이 남았다. 왠지 책장을 넘기기가 싫어서 며칠 째 아직도 다섯 쪽을 읽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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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5-24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웅진에서 나온 <마음>과 함께 실린 <꿈 열흘 밤>으로 단편들을 봤네요. 최근엔 창비세계문학전집 일본편에도 <이상한 소리>가 실려 있어 한 번 더 봤구요.
文을 현대의 갈래로 말하자면 수필이나 교술로 이해하는 게 맞겠죠? 가라타니의 책을 못 봐 짐작만 해봅니다.
보통 일본문학의 주류인 사소설과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은 거리가 꽤 멀다고 하는데 文이라는 갈래를 중간에 놓으면 그의 소설과 사소설과의 거리가 가까워진다는 생각입니다.
고민해 볼 거리네요.

반딧불이 2010-05-24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소세키의 '문'은 수필과 교술과도 다른 것 같아요. 수필이 성찰을 통한 어떤 깨달음이 내재되어 있고 깊이가 있다면 '문'은 있는 그대로를 서술하는 쪽에 더 가깝다고 할까요.

어줍잖은 제 생각이지만 사소설이 소설을 쓰기위한 도구로 일상을 사용 또는 조작하기도 한다면 소세키의 소설은 일상을 있는 그대로 소설로 드러내는 쪽에 더 가깝지 않은가 싶네요. 말이 되는 소린지...원.

파고세운닥나무 2010-05-25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쓰메도 근대의 작가이니까요. 근대의 문학 갈래론을 들이밀 수 밖에 없는 게 후대를 사는 우리들이라는 생각입니다. 文이라는 일본 고유의 갈래가 있다해도 말이죠. 서정-서사-극(헤겔), 서정-서사-극-교술(조동일) 가운데, 혹은 또 다른 무엇을 취하든 그의 글도 틀거리지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찌됐든 그의 단편을 소설로 봅니다. '있는 그대로'라 말씀하셨지만 밀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밀도가 높을 수도 있고 낮을 수도 있죠. 나쓰메는 밀도가 낮아 그 모습이 수필(교술)에 가깝게 보이는 것이구요. <이상한 소리>도 자신의 경험을 소재 삼지만 작가의 머리를 떠나 글로 표현되는 것이 곧 창작이겠죠. 그 안에 허구 혹은 꾸밈이 있을테구요.
중언부언해봅니다.

반딧불이 2010-05-26 00:01   좋아요 0 | URL
음...사실 제게는 소설이든 수필이든 큰 차이가 없습니다. 소세키를 읽고 나서 제게 가장 큰 변화라면 변화라는 것이 이 장르의 문제에 대한 것인데요. 시, 소설, 수필 뭐 이런것들이 그닥 가슴에 와 닿지 않고 있어요. 소세키는 문예라는 말을 즐겨 썼는데 제 식으로 바꾸면 문학이구요. 이 문학을 과연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하는 것이 새로운 고민거리로 등장해버렸어요. 기존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소세키의 '자기본위''개인주의'같은 나만의 언어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희미하게나마 해보게 되었죠.

파고세운닥나무 2010-05-26 10:22   좋아요 0 | URL
일본인 특유의 자기 스타일 고집을 말하면 제겐 부정적으로 다가옵니다. 소통하고, 교류하며 공통점을 찾아내기보단 우리만의, 나만의 것만을 찾아내다보면 결국 고립을 자초하죠. 갈래론을 말씀드린 것도 그런 차원에서였습니다.
나쓰메가 '자기본위'나 '개인주의'를 말할만한 충분한 작가라 생각하지만 자신의 글이 동서양의 어느 갈래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특유한 것이라 말한다면 난감하죠. 비단 그 뿐만 아니라 일본의 작가들이 대체로 그런 모습이구요. 사소설을 비판적으로 이해했던 이유도 같은 맥락이구요. 이론과 연구의 무용함을 주장하는 것으로 연결될 수도 있으니까요.

반딧불이 2010-05-26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나무'님 글을 읽다보니 저는 소세키 작품을 읽으면서 그가 일본인이라는 시각보다는 그저 문학인으로서의 소세키에게 더 주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소세키의 '개인주의'니 '자기본위'니 하는 것도 문학을 하려는 사람의 자기고민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읽었던듯 싶습니다.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본받아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구요.

소세키가 '개인주의'나 '자기본위'를 내세운것은 '동서양의 어느 갈래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특유한 것'이라 말한다거나 '이론과 연구의 무용함을 주장'하기 위해 고민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 스스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었고 근대화가 마구잡이로 진행되는 그 시대의 필연적인 산물이었다는 생각을 해요. 일본인 작가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는 저는 잘 모르겠어요. 냉정한 비판이 전제된 후라면 수용해야할 것은 마땅히 수용해야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라로 2010-06-03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많이 쓰셨네요~.
찬찬히 밑에서부터 읽어올라와야겠어요~.ㅎㅎ
오늘은 그냥 인사만~~.
잘 지내시죠????

반딧불이 2010-06-04 13:16   좋아요 0 | URL
엉? 나비님 돌아오신거에요? 다시 뵈서 반가워요~
 
- Poetr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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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얼마 전 알라딘에서 영화할인 카드를 구입했다. 영화비 50% 할인에다 일 년 내내 무제한이라고 해서 게으른 나도 최소한 1년에 두 번은 갈 수 있을 테니 밑져야 본전이다 싶었다. 카드는 사 두었는데 별로 보고 싶은 영화가 없어서 한 달 가까이 책상서랍 속에 얌전히 모셔 두었다.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들이 화제다. <하녀>, <시> 등. 본 사람들의 평도 모두 제각각이다. 특히 <시>에 대해서는 나도 한마디 보태야겠다는 의무감(?)이 생겨났다. 화요일엔 씨너스 강남에서 <하녀>를, 수요일엔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시>를 봤다. 내 평생 이틀 연속 영화를 보기는 처음이다. 씨너스 강남은 주차장을 못 찾아 헤매다가 상영시간이 임박해 근처 유료주차장에 차를 넣었더니 주차비가 영화비보다 더 나왔다. 할인카드 가 무슨 소용이람.

코엑스에 갈 때는 아예 차를 두고 버스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일찌감치 정류장에 가서 버스노선을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삼성동 가는 버스가 안 보인다. 옆 사람한테 물어보니 다른 정류장에 가서 타야한다며 버스 번호까지 가르쳐준다. 부지런히 가서 노선표를 확인했다. 안심하고 버스를 탔는데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 기사한테 물어보니 1월부터 노선이 바뀌었단다. 일단 내렸는데 버스노선을 몰라 택시를 타고 그래도 20분전에 도착을 했다. 택시비로 2800원 지불했다. 무비바로로 예약한 예매권을 발권 받으려고 하니 무인발권기에서 전화번호나 생일을 입력하라고 한다. 내 전화번호 생일을 몇 번씩 집어넣어도 잘못된 예매번호라고 나온다. 무인 발권기를 포기하고 창구에 가서 일단 줄은 섰는데 평일 한낮인데도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 도저히 시간 내에 들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다. 할 수 없이 무비바로에 전화를 해서 예약한 사람의 전화번호 뒷자리나 생일을 가르쳐달라고 했더니 사생활보호 어쩌구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댄다.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다가 어찌어찌 발권을 받았다. 돈은 돈대로 쓰고, 시간은 시간대로 버리고, 열은 열대로 받고....... 영화마저 날 실망시키면 카드 잘라 버리려고 했다. <시>가 영화할인카드를 살렸다.
  

물 흐르는 소리로 영화는 시작된다. 화면이 열리면 카메라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기다란 다리가 화면을 가로지르며 가득 채우고 나면 카메라는 천천히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거기 몇몇 사내아이들이 풀밭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그 중의 한 아이는 뭔가를 찾지도 못하고 찾는 일에 그다지 관심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고개를 숙이고 풀숲을 뒤지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아이는 멀리 하늘, 산, 그리고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거기 무언가 희끗한 것이 떠내려 오면서 점점 클로즈업된다. 점점 커져 종아리가 드러난 여자아이의 시체라는 것이 확인될 즈음, 시체의 머리 곁에 ‘시’라는 영화의 제목이 ‘뜬금없이’ 뜬다.  시란 그런 것이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찾고 있는 것에서 한발 비껴나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것. 하늘, 산, 강물 등 스스로 그러한 것들을 바라보다가 물에 떠내려 오는 스스로 그러하지 않은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시다.

주인공 양미자씨는 66세의 알츠하이머(치매) 환자다. 처음에는 명사가 생각이 나지 않다가 차츰 동사까지 잊어버리게 된단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나이를 헛갈려 하고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지갑을 찾으며 지갑이라는 이름을 잊어버린다. 시란 이런 것이다. 모든 것이 계량화 되어 숫자로 표기되는 과학화된 세계, 모든 것의 가치척도로 사용되는 돈. 명사로 표명되는 앎의 세계. 이 모든 것을 깜빡깜빡 잊어버리는 것. 이것이 시다.

미자씨는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씻기고 집안청소를 한다. 그 대가로 받는 수고비(4만 원-시 한편의 고료와 같다)가 그녀의 생활비이고 용돈이다. 가끔 노인은 팁으로 만 원짜리 한 장을 주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미자씨는 말하지 말라는 말까지 다 옮긴다. 그리고 묻지도 않는 이야기를 한다. 한 여학생이 강물에 뛰어들어 투신자살한 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렇다. 이것이 시다. 말하지 말라는 말까지 다 옮길 만큼 거짓되지 않은 것. 돈벌이에 바빠 귀담아 듣는 사람 하나 없는 이야기를 혼자 떠드는 것. 이것이 시다. 

죽은 여학생에 대한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고, 미자씨는 그 사건에 자기의 손자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떻게든 사건을 축소하고 빨리 마무리 지으려는 가해자의 아버지들은 수시로 모이고 거기에 미자씨도 불려간다. 그들과 밥이나 술을 같이하지도 못하고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는 미자씨. 서둘러 밖으로 나와 맨드라미꽃에서 고통의 색을 본다. 이것이 시다.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하려는 자들과 말을 섞지 않는 것. 붉은 꽃을 바라보며 거기에서 고통을 감지하는 것.

위로금으로 할당된 오백만원을 마련해야한다고 추궁당하고 피해자와의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직접 만나 실마리를 찾으라고 떠밀려 혼자서 피해자의 엄마를 찾아간다. 가는 도중에 세상의 풍경은 미자씨의 마음과는 달리 찬란하기만 하다. 햇빛은 눈부시고 그 햇살에 잘 익은 살구는 새로운 생명을 위해 떨어진다. 미자씨는 자신이 왜 이 길을 가는지 목적을 깜빡 잊는다. 그러고는 어김없이 수첩을 꺼내 글귀를 적는다. 밭일하는 여자를 만나서는 이런저런 사적인 이야기를 하며 기쁘기만 하다. 몇 마디 나누고 돌아서서는 자기가 왜 이곳에 왔는지, 그리고 그녀가 누구인지 깨닫고 놀란다. 미자씨는 소나기에 흠뻑 젖어 돌아와서는 노래방으로 가 혼자 노래를 부른다. 무슨 일을 해서든 갚겠다고 돈을 빌리려하지만 거절당한다.

이것이 시다. 돈으로만 모든 일을 해결하려는 사람들과는 달리 피해자의 고통을 마주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 단지 사람을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반갑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것.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고통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는 것. 갑자기 내린 소나기를 피하지 않듯이 타인의 고통에 흠뻑 젖는 것. 그리고 밀폐된 공간에서 홀로 부르는 노래. 이것이 시다. 

미자씨는 결단을 내렸다. 자신이 돌봐주던 노인의 욕망을 채워준다. 나중에 그를 찾아가 합의금으로 주어야할 오백만원을 빼앗아(?)온다. 그리고 피씨방에서 놀고 있는 손자를 데려다 피자를 사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손발톱을 깎아준다. 그리고는 보이지 않는 곳의 때도 깨끗이 닦으라고 도통 하지 않던 잔소리를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배드민턴을 친다. 그때 시낭송회에서 늘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형사가 찾아온다. 형사는 손자가 치던 배드민턴 라켓을 받아 누님과 배드민턴을 치고 함께 온 다른 형사는 손자를 데려간다. 미자씨는 울거나 소리치지 않는다. 시란 이런 것이다. 아름다움만을, 깨끗함을, 진실만을 추구하고 싶지만 욕망 혹은 자본주의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그런 모든 것을 인정하면서도 아프다고 혹은 상처받았다고 비명 지르지 않는 것. 담담하게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시다.

미자씨는 마침내 시 창작 수업의 마지막 날 완성된 시 한 편과 꽃다발을 탁자에 올려놓는다. 미자씨의 목소리로 시작된 시가 자살한 소녀의 목소리로 낭송되면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물소리와 아무 것도 떠내려 오지 않는 강의 얼굴로 가득 찬다. 이것이 시다. 시가 있는 세상의 강물에는 ‘스스로 그러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떠내려 오지 않는다. 영화의 화면 역시 꾸민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지저분하면 지저분한대로 복잡하면 복잡한대로 생긴 그대로를 다 드러내고 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시다.  


강물로 시작되어 강물로 끝나는 영화는 영화를 보고 온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마음속에 범람하고 있다. 영화감독이 쓰는 스크린 시론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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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0-05-22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할인 카드 파는거에요? 얼마전에 책 사니깐 쿨링백이랑 같이 날아오던데 'ㅅ'
무튼, 이 영화 찍는 장면 티비에서 얼핏 본 것 같은데 궁금하네요. 악평이 난무하는 '하녀'도요.

반딧불이 2010-05-23 10:22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저는 6900원인가 주고 샀어요. <시>는 수수하고 잔잔한 화면이지만 할말이 많은 영화에요. <하녀>는 글쎄요... 취향이 다르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비로그인 2010-05-23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있는 세상의 강물에는 ‘스스로 그러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떠내려 오지 않는다"는 문장이 이 영화를 집약적으로 설명해주고 있군요. 다른 말이 필요없네요. 저도 감명 깊게 봤습니다^^

반딧불이 2010-05-23 15:34   좋아요 0 | URL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기뻐요.

넙치 2010-05-27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윤정희씨의 네츄럴한 얼굴이 너무 좋더라구요. 한국에서는 나이를 감추기위해 부자연스러움을 택하는데 윤정희씨는 고스란히 세월의 흔적들이 묻어있는 게 곱디곱게 보였어요. 시란보톡스 도움을 받은 부자연스런 얼굴이라은 안 어울렸을 거에요.ㅎㅎ

반딧불이 2010-05-27 14:36   좋아요 0 | URL
안녕하셨어요?
감독이 윤정희씨를 택한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거에요.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이요. 얼굴에 비해서 몸은 어찌나 탄력있던지 저는 감탄했지 뭐에요.^.^

프레이야 2010-06-07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아직 리뷰 쓰지 못하고 머금고 있어요.
한 번 더 보고 싶어서요.
리뷰 참 좋아요, 반딧불이님.^^

반딧불이 2010-06-07 20:05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보고 나서 며칠간 말문이 막히더라구요. 그리고 쓰려고 보니 제대로 생각도 안나고요. 저도 더 보고싶긴 한데 그냥 씨디 나오면 하나사서 오래오래 보려구요. 고마워요. 프레이야님.

라로 2010-06-09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볼때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영화를 보고 님의 리뷰를 읽게 되어 다행이에요!!!ㅎㅎㅎ
안그랬으면 보고싶어 미칠것 같았을테니까요,,
멋진 리뷰에요,,,뒤늦은 제 추천을 더합니다.

반딧불이 2010-06-09 10:11   좋아요 0 | URL
나비님. 세번이나 보셨다는 페이퍼 읽었어요. 이창동 감독이 감동했을거에요. 어제는 일본여성들 몇분과 조조할인으로 시를 봤는데 일본에서 상영하면 또 보겠다고 하면서 좋아들 하더라구요. 이창동의 영화는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일본사람들이 더 좋아하는듯해요. 고맙습니다.
 
나의 개인주의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0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훈 옮김 / 책세상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개인주의>는 소세키가 일본 귀족자재들만 다닌다는 학습원에서 한 연설이다. 국가주의를 학습시키는 학습원에서 개인주의를 얘기한다는 건 소세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일년동안 뼈를 깎는 노력을 했지만 영문학은 고사하고 문학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소세키. 문학에 대한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 그는 '자기본위'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는 이 말을 논리적 뼈대를 삼아 평생동안 자기의 문학론을 펼쳐나갔다.   

아래 글은 소세키의 <나의 개인주의>를 있는 그대로 요약 정리한 것이다. 문장의 연결관계를 고려해서 서너개 접속사를 고친것 말고는 모두 소세키의 말 그대로이다. 


대학시절 영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영문학은 제쳐두더라도 제일 먼저 문학이란 어떤 것인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상태로 졸업을 하고 교사가 되고 유학길에 올랐다. 1 년 동안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여전히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비로소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그리고 자력으로 만들어내는 방법 외에는 나를 구할 길이 없다고 자각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입각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아니 새롭게 건설하기 위해서 문예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말해 자기본위라는 네 글자를 간신히 생각해내어 이 ‘자기본위’를 입증하기 위해서 과학적인 연구라든가 철학적인 사색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자기본위’라는 네 글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지침으로 주어졌고 이 네 글자로부터 새롭게 시작했다. 불안은 사라졌고 어떤 방향에서 분명히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발견하게 된 기분이었다. 가능한 한 많은 자료를 정리해서 귀국 후 훌륭하게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귀국하자마자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녀야했다. 고등학교에도 대학교에도 사립학교에도 나가서 돈벌이를 해야 했고 신경쇠약에 걸렸을 뿐만 아니라 시시한 창작품을 잡지에 게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형편이 나빠졌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내가 기획했던 사업을 중도에서 중지할 수밖에 없었으니 내가 저술한 『문학론』은 그 기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실패의 유해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기형아의 시체일 뿐이었다. 혹은 멋지게 건설되지도 않은 채 지진으로 무너져버린 미완성 시가의 폐허와 같은 것이었다. 저작의 사업은 실패로 끝났을지 모르지만 그때 확실히 포착했던 자기 자신이 주인이고, 다른 사람은 손님이라는 신념은 오늘날의 나에게조차 특별한 자신감과 안정감을 부여해 주고 있다.

권력이라는 것은 자신의 개성을 타인의 머리 위에 무리하게 강요할 수 있는 도구이거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이기이다. 금력 역시 개성을 확장하기 위해서 타인에게 유혹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지극히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남용하여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거나 돈을 유혹의 도구로 사용하여 그 유혹의 힘으로 타인을 자신의 마음에 들도록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위험하다.

나는 평소에 사람은 자신의 개성이 발전할 수 있는 장소에 자리를 잡아야 하고 자신과 딱 들어맞는 직무를 발견하기까지 매진하지 않으면 일생의 불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그만큼 개성을 존중할 수 있도록 사회로부터 허락되어 있다면, 타인에 대해서도 그의 개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경향을 존중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정리해보면 자기 개성의 발전을 완수하려고 생각한다면 동시에 타인의 개성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권력을 사용하려고 한다면 그것에 부수되는 의무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 그리고 자기의 금력을 나타내려고 한다면 그것에 동반되는 책임을 중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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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6-03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시마 유코를 참 좋아합니다. '반딧불이'님이 꼭 읽어보셨으면 해서요^^ 이미 읽으셨는지도 모르겠네요.
다자이 오사무의 딸인데 아버지와는 꽤 다른 소설 세계를 갖는 분이에요.
<불의 산>이란 소설을 읽고 한동안 멍했습니다. 다른 소설들도 챙겨봐야겠다는 생각도 아울러 했구요.
일본 여성작가들을 잘 알지 못했는데, 이 분의 소설을 대하니 꽤 풍성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반딧불이 2010-06-04 13:19   좋아요 0 | URL
아니요 읽기는커녕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걸요. 두권으로 나와있네요. 요즈음 목이 말을 안들어서 책을 못보고 있어요. 나아지는대로 꼭 챙겨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6-04 22:08   좋아요 0 | URL
속히 나아지시길 기원합니다.
저도 가끔 목이 아프거든요. 일전엔 목을 돌리면 소리가 계속 나길래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아봤는데 괜찮다고 하더군요. 저는 불편한데 말이죠. 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목과 어깨가 아프더라구요.
건강하세요~
 
[수입] 알프레드 브렌델 : 작품집 [35CD]
루드비히 판 베토벤 외, 브렌델 (Alfred Brendel) / Brilliant Classics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교향곡이 클래식의 황제라고 하지만 나는 아직 교향곡 보다는 소나타나 콘체르토가 더 듣기 편하다. 여러악기들의 하모니를 즐기지도 못하거니와 한가지 악기를 따라가다 놓치고 나면 짜증도 난다. 이래저래 내 귀는 황제와는 거리가 먼 시녀급이다. 

지난 겨울부터 지금까지 베에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만을 들었다.   

 

베에토벤의 월광이나 비창은 여기 저기 다른 씨디에 들어있었지만 알프레드 브렌델의 연주는 이상하게 나를 집중하게 만들었다. 자동차에도 아이팟에도 컴퓨터에도 온통 브렌델이 연주하는 베에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인데 들을 때마다 새롭다.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클래식을 듣는 무식한 나를 이렇게까지 끌어들이는 것이 대체 브렌델인가 베이토벤인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바이올리니스트 모리스 하송처럼 브렌델이 내게 오직 한 사람의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살짝 걱정된다. 

그래도 저질렀다. 브렌델 연주의 씨디가 35개나 들어있다. 더구나 몽땅 내가 좋아하는 소나타 아니면 콘체르토다. 거기다 베에토벤 소나타 전곡이란다. 183000원짜리를 72% 할인에 5000원 할인쿠폰까지 있어서 47000원이다. 후회하지 않을까 내심 불안했지만 아직까지는 아무 불만 없다. 모짜르트를 들으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베에토벤을 들으면 편안해지는게 이상하다. 하이든은 콘체르토라는 말의 의미, 경쟁과 협력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카덴차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드는 것도 하이든이다. 소세키의 단편 <회상>에는 하이든이 사람들로부터 두번 죽은 사람으로 유명하다는 말이 나온다. 첫 번째 죽음은 조시(弔詩)까지 만들어졌었다고 한다. 소세키의 뜬금없는 이야기 때문에 하이든을 다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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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지 2010-05-30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운드가 어떤가요? 초창기 녹음이어서 음질이 좀 걱정이네요... 길레스, 코간, 로스트로포비치 트리오의 도레미 레코딩을 듣고 있는데, 사운드 때문인지 생각보다 감동이 덜 와서 아쉬워 하고 있거든요..

반딧불이 2010-05-30 14:07   좋아요 0 | URL
apouge님, 음질로 감동을 느낄만큼 제 귀가 훌륭하질 못해요. 제가 요즈음 듣는데 사용하는 기기가 Bang & olufsen 이어폰인데요. 별다른 거스름없이 담백하고 깨끗하긴해요.

아포지 2010-05-30 17:52   좋아요 0 | URL
뱅 앤 울프슨도 좋은 제품을 만드는 회사인데, 어떤 제품을 사용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혹시 이어폰 가격이 5만원 이하의 제품이라면, SHURE SRH 440 같은 10만원 초반의 헤드폰을 사용해 보시는 것도 좋은 경험이 아닐까 합니다. 클래식 듣기에 좋은 것 같아요..

반딧불이 2010-05-30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어폰 A8이에요. 몇년 되었는데 기내에서 십 몇만원 주고 샀던 것 같아요. 커널형, 오픈형 모두 저는 불편한데 이 제품이 귀도 안아프고 바깥 소리도 적당히 들을 수 있어서 편하게 사용하는 편이에요. 추천해주신 제품은 헤드밴드형이네요. 참고할께요. 고맙습니다.
 
나츠메 소세키 문명론
나쓰메 소세키 지음, 황지헌 옮김 / 소명출판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강연록을 모았고 2부에는 아사히신문 입사의 변을 비롯해서 평론 등을 모아 시론(時論)이라는 제목으로 묶었다. 강연록은 1911년 6월부터 1914년 11월까지의 총 8편을 실었다. 1910년 위장병으로 대량의 토혈을 한 후 다음해 2월까지 병상생활을 한 후이다.

2월에는 문부성의 문학박사학위 수여를 거부했고 8월에 관서지방에서 개최된 아사히신문사 주최 강연회에 참석했다. 아사히신문사 주최 강연회였으므로 반드시 소세키가 강연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던 듯싶다. 강연을 할 때마다 나오고 싶지 않았다는 말을 되풀이 하지만 아카시에서의 <도락과 직업)>, 와카야마에서의 <현대 일본의 개화>, 사카이에서의 <내용과 형식>, 오사카에서의 <문예와 도덕> 등은 강연이 순차적으로 진행될수록 내용상으로 점점 진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제1고등학교에서의 <모방과 독립>, 동경고등공업학교에서의 <무제>, 이 모든 내용들은 학술원 보인회에서 한 강연 <나의 개인주의>라는 열매를 위한 밑거름이었다. 동경고등공업학교에서의 강연은 공업학교라는 특색을 감안해서인지 기술과 예술을 비교 설명하는 방식인데 다른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고 내용 또한 쉽고 간단하다.

2부의 時論에는 <아사히신문 입사의 변>과 수여를 거부한 <박사문제의 전말>, 전쟁과 군국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 <점두록>등 총 11편이 실렸다. 선생이라는 직업에 대한 소세키의 생각은 그의 작품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아사히신문 입사의 변>에는 노골적으로 나타나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나는 내 강의가 항상 개가 짖는 것처럼 생각되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내 강의가 형편없었던 것은 거의 반쯤은 이 개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던 소세키에게 신문사 쪽에서 제의가 왔다. 출근할 필요도 없고 매일 서재에서 용무를 보면 그것으로 그만이고 생활비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 급료를 준다는 것이었다. 다만 교사로서의 돈벌이만 금지했다. 소세키는 신이 나서 학교를 그만두고는 산으로 들로 쏘다녔다고 한다. 입사의 변에 실린 마지막 말은 죽는 날까지 글쓰기를 계속했던 소세키의 성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람은 명예나 영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의 따뜻한 마음씨에 감동되어 일한다는 말이 있다. 괴짜와 같은 나를 괴짜에 가장 알맞은 처지에서 일하게 해준 아사히신문을 위해서, 별난 인종으로서 될 수 있는 한 모든 힘을 다하는 것은 나의 즐거운 의무일 것이다.”

<박사문제의 전말>은 박사학위를 주겠다는 문부성 국장이 보내온 편지와 그 편지에 대한 소세키의 답장이 실려 있는데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박사에 대한 소세키의 생각은 <도락과 직업>의 강연 내용 중에도 나온다. “여러분들은 박사라고 하면 세상의 모든 사정과 인간과 관련된 일체의 일을 포함하여 천지우주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은 완전히 그와 반대여서 불구 중에서도 가장 불구적으로 발달한 사람이 바로 박사라는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박사는 미리 사양해 두는 바입니다.” 강연장에 참석한 사람들을 웃기려고 한 이야기이겠지만 소세키의 생각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바는 아니다. 거기다가 너도 나도 박사학위를 받게 되면 박사가 아니면 학자가 아닌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게 될 폐해에 대해서 언급해두었다.

 <점두록>은 1916년 1월에 쓴 글이다. “다시 정월이 돌아왔다”로 시작되는 이 글은 자신에게 한 해의 시간이 더 주어졌다는 것을 고마워하면서 과거를 회상하고 하늘이 허락하는 한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자 함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제1차 세계대전을 바라보는 자신의 입장 표명이다. 소세키는 이번 전쟁이 ‘내면적 배경’ 도 피비린내에 비례하는 정도의 ‘근거’도 없는 ‘천박한 활동사진이나 경박하고 선정적인 소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 그는 1차 세계대전을 ‘인도(人道)를 위한 싸움’도 아니고 ‘신앙을 위한 투쟁’도 아니며 ‘의미 있는 문명을 위한 충돌’로도 평가하기 어려우며 단지 ‘군국주의의 발현’으로 해석한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평론가는 니체, 헤겔, 비스마르크 등을 들먹이며 이번 전쟁의 배후에 사상가나 학자들의 이론이 주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간주하고 싶어 하지만, 헤겔 같은 순수 철학자를 군인정치가와 연결시키는 것을 못마땅해 하면서 학자들은 그 정도로 실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소세키의 견해다. 현대 일본도 정치는 어디까지나 정치일 뿐이고, 사상 또한 사상일 뿐 상호간에 어떤 이해도 교섭도 없다고 단언한다. 소세키는 군국주의, 애국주의를 제창했던 트라이치케와 비스마르크의 관계조차도 ‘우연의 일치’라고 말하는 편이 적당하다고 한다. 전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면서 그가 <점두록>의 마지막에 한 말은 새겨 읽어야 할 듯싶다. “트라이치케는 독일이 전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정복하기까지 그의 군국주의, 국가주의를 관철하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인류가 모두 독일에 정복당했을 때, 우리들은 그 보답으로서 독일로부터 과연 무엇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독일과 트라이치케는 우선 이 점부터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독일 대신 일본으로 바꿔 읽어도 소세키의 질문은 유효할까?

『문명론』은 강연록에 8편, 시론에 11편의 글이 실려 있고, 『나의 개인주의』에는 소세키의 간사이 지방 강연 4편과 ‘문학론 서’, ‘점두록’이 실려 있다. 그리고 요코하마 시립대학 명예교수 이즈 도시히코의 ‘소세키의 자기본위’라는 해제와 더 읽어야할 자료들을 덧붙여 두었다. 『문명론』은 하드카버에 8쪽 분량의 사진과 소세키 연보까지 합쳐 381쪽 분량이고 『나의 개인주의』는 문고판으로 사진 없이 234쪽이다. 『문명론』에서 오탈자가 12개 나왔고 『나의 개인주의』에서는 못 봤다. 전작읽기가 아니었으면 나는 『나의 개인주의』만을 읽었겠지만 어쩔 수 없이 두 권을 다 읽어야했다. 책세상 문고판 『나의 개인주의』에서는 '문학론 서', '나의 개인주의', '현대 일본의 개화', '내용과 형식', '문예와 도덕', '점두록'의 순으로 실려있다. 강연한 날짜 순으로 실었으면 소세키의 개인주의가 어떤 경로로 완결에 이르는지 이해하기가 훨씬 편했을 것이다. '나의 개인주의'를 먼저 읽고 다른 것을 읽으면 마치 같은 이야기가 계속 반복되는 듯한 느낌을 전해준다. 내용상 다른 이야기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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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6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쓰메 소세키의 모든 책을 찾아 읽으시는군요. 앞으로 따문따문 읽어볼 예정인데 반딧불이님의 리뷰가 좋은 안내가 되겠네요^^

반딧불이 2010-05-16 23:02   좋아요 0 | URL
이제 제일 두꺼운 <명암> 한권 남았습니다.헉헉...

후와님 쓰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어보니 뭐 2년에 걸쳐 읽은 저보다 더 나으시던걸요. 번역본에 따라 좀 차이가 있는듯 하니 그것만 참고하시면 좋으실듯 해요. 따문따문 읽으시고 느낌을 교환할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