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홍성으로부터 봄이 전송되었다. 은빛 솜털이 후광처럼 빛나는 꽃이다. 이런 빛깔의 봄 앞에서 내 언어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여기저기서 꽃소식이 전해지는데 한편에선 부고가 다투어 세 개나 날아들었다. 겨우 30분 남짓한 시간이었다. 가고 오는 것의 유한함이 사무치는 날이다.  

사람들이 꽃놀이 가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나는 뜬금없이 차를 몰아 과천 미술관 가는 길의 벚꽃그늘을 둘러보거나 하르르 하르르 지는 꽃잎아래서 넋을 놓곤 했다.   

올해는 아주 마음먹고 꽃을 맞으러 가기로 했다. 백련사 동백은 피지도 않은 것이 누군가의 객혈처럼 멍울져 있었다. 봉오리만 점점이 박혀있는 동백을 뒤로 두고 다산의 족적을 따라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오솔길을 걸었다.  

산청의 매화를 보러 가던 날은 찬비가 차창을  심하게 두드렸다. 그 빗줄기가 매화의 꽃모가지를 다 꺾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웠지만  雨中梅花를 생각하면서 기대도 컸다. 산청에는 삼매가 있다. 원정공 하즙의 원정매, 통정공 강회백의 정당매, 남명 조식이 수식한 남명매를 산청삼매라 한다. 남명매가 수령 400년을 넘었고 나머지는 600년을 넘겼다. 


일찍이 청나라 사람 궁몽인은 《독서기수략讀書紀數略》에서 네 가지 매화를 귀히 여기고 있다.
귀함불귀개(貴含不貴開) 꽃망울은 머금고 있는 것을 귀하게 치고 활짝 핀 것은 귀하게 치지 않는다. 귀희불귀번(貴稀不貴繁) 꽃은 드문드문 핀 것을 귀하게 여기고 번잡하게 핀 것은 귀히 여기지 않는다. 귀로불귀눈(貴老不貴嫩) 나무는 늙은 것을 귀히 여기고 어린 것은 귀히 여기지 않는다. 귀수불귀비(貴瘦不貴肥) 가지는 마른 것을 귀히 여기고 살진 것은 귀히 여기지 않는다.  



남명 조식 선생이 심었다는 남명매다. 위의 네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자태다. 그런데 빗물에 매향이 다 녹아 내렸는지 향기가 나지 않았다. 가지를 살며시 흔들면 그야말로 가느다란 향기가 코끝에 닿을듯 말듯 했다. 아쉬운 마음에 고목 주위를 빙 눌러보는데 그런 내가 가여웠던걸까. 남명매는 그 귀한 향기를 희미하게 흘려주었다. 마치 영혼을 긋고 가는 향기의 메스라고 해야할까. 참으로 야릇하게도 이런 때는 갈증이 심하다.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단속사지 뒤쪽에 있는 정당매는 초라했다. 골다공증에 걸린 다리를 씨멘트로 채우고 있어 안타까웠다. 하지만 더 안타까웠던 것은 그 귀함을 초라하게 만드는 나무 아래의 쓰레기들이었다. 남명매와 참으로 비교되는 모습이다. 남명매가 늙었으나 정갈한 마님같다면 정당매는 그 마님의 시중을 들면서 늙은 삼월이 같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는 가운데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는 듯 그 늙고 투박한 등걸에는 분첩같은 꽃을 피웠다. 

원정매는 본가지는 고사하고 옆으로 작은 가지 하나가 삐져나와 홍매를 피웠다. 꽃피우는 일이 난산인듯 보여 오래 보기가 힘겨웠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그루누이처럼 향기에 굶주린 나는 멀찍이 떨어져 핀 어린 가지의  꽃모가지를 기어이 비틀고야 말았다. 봉우리가 벙글지 않은 세 송이를 몽돌을 쥐듯 동그란 주먹 안에 감추고 나와 몰래 흡입했다. 두어 번 흡입을 하고 나니 그제서야 갈증이 좀 가시는 듯 했다. 가방에 있던 책 속에 매화와 향기를 가두어 두었다. 

     

 

이 향기 코끝에 스치면 그대는 내게 물을 것이다.  
어찌 이리 향기로운가라고. 
 

나의 대답은 질문이다.
그것이 단지 향기 때문이겠습니까?  


그리고 나는  시린 내  왼손을 내밀겠다.  
거기 생명선에 못다한 내 말이 고여있을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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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매화가 왔다
    from 파란여우의 뻥 Magazine 2011-04-10 16:19 
     “어리고 성긘 가지(柯枝) 너를 밋지 아녔더니, 눈ㄷ 기약(期約) 능(能)히 직혀 두세 송이 퓌엿고나, 촉(燭)고 갓가이 랑헐 제 암향(暗香) 좃넋 부동(浮動)터라” 조선후기 시인 안민영의‘영매가(咏梅歌)’다.‘매화사(梅花詞)’로 불리기도 한다. 어리고 성긴 가지에서 무슨 꽃이 피겠냐고 했는데 촛불처럼 환한 꽃이 피었다. 비록 두 세 송이 성긴 꽃이지만 그윽한 향기가 퍼진다. 이 시조에서‘암향(暗香)’이란 그윽한 향기라는 뜻으로 주로 매화 향기..
 
 
양철나무꾼 2011-03-29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찬란한 봄도 탐났는데, 초라한 언어도 탐나요.
이런 거 욕심부리면 소박한 욕심이 될 수 있을까요?

저 위의 사진, 무슨 꽃이예요?
전 제주도에서 활짝 핀 동백과 유채를 원없이 보고왔는데,
사진 속의 매화를 보며 님의 글을 접하니 생각이 달라지는걸요~^^

반딧불이 2011-03-30 00:22   좋아요 0 | URL
음..소박한 언어라기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욕심 아닐까요? ㅋㅋ

맨 위의 꽃 말씀이세요? 아직 저걸 모르신다고요? 그렇다면 쉽게 가르쳐드릴 수가 없는데.....

할.....미....꽃이에요~ 끙!

양철나무꾼 2011-03-30 00:27   좋아요 0 | URL
저...컨닝 하지 않았구요.
정말 설총의 화왕계에 나오는 할미꽃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근데, 글에서 매화가 하도 앞다투다 보니...살짝~~~^^

반딧불이 2011-03-30 00:38   좋아요 0 | URL
할미꽃 보기가 귀해서 잘난척 좀 해봤어요.~

비로그인 2011-03-30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정갈하면서도 그윽한 향기가 물씬 풍기는 여행기로군요. 굳이 사진은 필요없었겠다 싶을 정도네요. 반딧불이님의 글만으로도 충분히 향기를 만끽할 수 있으니까요^^

반딧불이 2011-03-30 11:47   좋아요 0 | URL
참으로 신뢰가 가면서도 불끈 힘을 솟게 만드는 댓글이네요. 철저한 텍스트지향주의자도 아니면서 글만 쓰다가 혼자보기 아까워서 사진 몇장을 더해 봤습니다.

감은빛 2011-03-30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와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굳이 사진이 필요없는 글이예요!
덕분에 저게도 매화향기가 나는 듯한 기분이예요!

반딧불이 2011-03-30 23:28   좋아요 0 | URL
매향을 조금이나마 전해드릴 수 있어서 저도 기분이 좋아요. 고맙습니다.

cyrus 2011-03-30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님이 사시는 곳에는 꽃이 활짝 폈네요, 한국에서 제일 따뜻하다는 대구에는
언제 꽃이 필까요,,? ^^;; 제 눈에만 꽃이 안 보이는건가요,, ㅎㅎ;;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사이의 꽃 책갈피라,, 은근히 잘 어울립니다. ^^

반딧불이 2011-03-30 23:29   좋아요 0 | URL
저는 서울에 살아요. 꽃을 보러 강진으로 산청으로 먼길을 갔었답니다. 사이러스님 눈에는 사람꽃이 보이시겠지요.

쉽싸리 2011-03-30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화꽃 잘 보았습니다. 꽃보다 글이 더 좋긴 합니다. ^^
냄새를 잘 맡지 못하는 제게도 매화향기가 솔솔 나는거 같습니다.
예전에 산청군 단성면에 있는 매실밭에 종종 가곤 했지요. 참 원없이 꽃 구경?하는 일 이었지요. 매화구경 다음엔 복숭아,배,사과, 포도, 포도도 꽃이 펴요. 다른꽃들 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기후영향인지 올 해 매화꽃 피는게 영 부실하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사는 동네는 매화가 거의 없어요. 그래서 노란 산수유를 제일 처음 보게 되지요. 저번주에 마침 보았어요. 올 해 처음본 꽃이죠. 그리고 여기서 매화를 보게 되네요.
홍성엔 할미꽃이 벌써 피었나 보지요? 허리가 휘어 그렇지 매우 아름다운 꽃 이죠. ㅎㅎ 뿌리는 약으로도 쓴다고 하더라구요.

반딧불이 2011-03-30 23:33   좋아요 0 | URL
홍성의 할미꽃은 사진으로 전송되어왔어요. 정말 예쁘죠? 자줏빛 벨벳에 금구슬을 박아놓은듯해요. 보내주신 분의 마음도 그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보니 저는 아직 포도꽃을 보지 못했네요. 언제쯤 피는지 눈여겨 봐야겠습니다.

blanca 2011-03-30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르르 하르르 지는 꽃. 이 말이 너무 좋네요. 저도 운전해서 꽃구경 갈 여유가 올까요? 그리고 이런 아름다운 페이퍼도 함께.

반딧불이 2011-03-30 23:38   좋아요 0 | URL
필 때보다 질 때 더 아름다운꽃은 벚꽃 뿐이 것 같아요. 동백은 섬뜩하고 목련은 지고난 자리가 추하죠. 지금 연습중이시니 엄두가 안나시겠지만 1년쯤 지나면 내 몸이 차인지 차가 내몸인지 구별이 잘 안되실걸요. 사람의 마음을 허무는데는 꽃이 제일 인 듯합니다. 때때로 꽃그늘 아래서 허물어지는 블랑카님을 상상할께요.

노이에자이트 2011-03-31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명 조식...어떤 아저씨가 남인계열 향교에 가서 남명을 칭찬하는 이야기를 했다가 쫓겨나왔다는 일화가 있었죠.그러고 보면 북인계열은 멸종되었나 봐요.

반딧불이 2011-03-31 00:44   좋아요 0 | URL
남명이라 남인으로 알았던건가요?

노이에자이트 2011-03-31 16:37   좋아요 0 | URL
책 내용으로 보면 작심하고 그랬던 것 같기도 하구요.

반딧불이 2011-04-01 11:11   좋아요 0 | URL
노자님. 보신 책이 어떤 책인지 저도 좀 알 수 있을까요?

노이에자이트 2011-04-01 16:50   좋아요 0 | URL
조여항<정인홍과 광해군>. 그다지 학술적인 책은 아닙니다.북인을 칭찬하는 책이라서 읽어봤지요.한때 조선사 서술이 당파에 따라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어서 이것 저것 읽어봤네요.

반딧불이 2011-04-02 11:5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시간의안그림자 2011-04-0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문학을 정말로 사랑하고 깊이가 너무 넘쳐 흐르는 것이 느껴집니다. 문학의 깊이를 좋아 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의미들을 정말 오랜 만에 내음으로 받아 들여 봅니다. 한자 글귀들을 마주 대하고 있으니까 정말로 시간의 피드백이란 것이 있지 않나 보입니다. 과거가 잊혀져 갈 때 그 과거의 흔적을 생각나게 해 주는 그 무언가가 어느날, 문득 소리없이 장황하게 눈 앞에 신기루 같이 뿌려져 있을 때 그 느낌 같은 것을 말이죠^^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겠지만, 매화 꽃이랑 글을 마주 대하니 신기생뎐에 출연하는 캐릭터 단 사란이 떠 올라집니다. 배우로써의 임 수향이 아니라 단 사란이란 이미지의 모습과 자테가 연결이 되어 집니다. 양반들의 힘과 여인네들의 한이 서린 듯한 그 느낌 같은 것 말이죠^^ 아마도 산청이 양반네들의 자존감이 강해던 곳이라 그런 생각을 더 해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문학도란 것이 천직이란 것이 글 속에도 들어 앉아 있다는 것도 느껴 봅니다. 본인의 느낌이지만 국문학과 선생님을 만약 하게 되신다면 학생들한테 좋은 뿌리를 지닌 나무를 정신적으로 심어 주실 수 있는 선생님 같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언어의 유희와 어휘의 맛이 너무 담겨 있습니다. 로쟈의 서평 속에도 그것들이 제대로 담겨 있엇고요^^ 정말로 좋은 글 많이 듣고 나갑니다. 글 속에서 좋은 행복 많이 찾으세요^^

반딧불이 2011-04-01 11:1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반이법님. 여러가지 과찬의 말씀 고맙습니다. 신기생뎐을 저는 아직 보지 못했는데 '단사란'이라는 이름이 예사롭지 않네요. 한자로는 어떻게 쓰는지도 궁금하구요.
종종 뵙겠습니다. 이 봄 어김없이 찾아드는 꽃처럼 환한 날들되시기 바랍니다.

루쉰P 2011-04-04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분들을 따라 오다보니 이런 좋은 꽃도 보고 글 향기도 느끼고 가네요. ^^ <도스토예프스키 평전>은 저도 읽고 있는데 리뷰 써 주시면 참고가 많이 될 듯 하네요. 지하에서 봄이 온 지도 모르고 햇빛으로 그냥 감만 잡고 있는데 글과 꽃이 향기를 전해주네요. 근데 국문학에 있어서 포스가 남다르신 듯...만나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 자주 올께요.

반딧불이 2011-04-04 22:01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루쉬P님. 도스토예프스키 평전은 신간 평가단 도서였어요. 이 글 아래아래에 리뷰가 있습니다. 마감에 쫓겨 급히 쓴 글이라 도움이 되실지는 알 수 없지만요. 번역에 좀 문제가 있긴 했지만 평전이 비평전 전기라면 그에 가장 근접한 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종종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