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비어 있는 그 큰 방에 사람이 있으면 보이기도 전에 느껴졌다. 움직이는 소리나 숨소리나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서가 아니었다. 완전히 ‘비어 있지‘ 않고 ‘고독‘이 감돌지 않아서였다. ‘천사의 침대"라는 시적인 이름이 붙은 하얀 침대들은 한눈에 보이도록놓여 있었다. 아무도 자고 있지 않아 모두 비어 있었다. 조심스럽게서랍 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한쪽으로 살짝 비켜서자 늘어진커튼이 시야를 가리지 않아 눈앞이 훤히 보였다. 이제 내 침대와화장대와 그 위에 있는 자물쇠 달린 반짇고리와 잠가둔 서랍장이보였다.

이런, 단정한 숄을 걸치고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나이트캡을 쓴자그마하고 통통하고 어머니 같은 풍채의 누군가가 화장대 앞에서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보이기로는 친절하게도 ‘소지품"을‘정리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반짇고리의 뚜껑과 맨 윗서랍이 열렸다. 그 아래 서랍들도 공평하게 차례차례 열려 있었다. 그 속의 모든 물건들은 꺼내져 펼쳐졌고, 작은 상자마다 모조리 뚜껑이 열리고 종이 한장 한장까지 공개되었다. 그 솜씨는 가히 아름답다고 할만큼 능란했고, 조사를 할 때 보이는 조심성은 가히 모범적이라 할만했다. 베끄 부인은 정말이지 별처럼 "서두르지도 쉬지도 않고 "
일했다. 이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은밀히 기쁨을 느꼈음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내가 남자였다면 베끄 부인은 내 눈에 어린 호감을 보았을 것이다. 그녀는 하는 일마다 아주 솜씨 좋게, 말끔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해냈다. - P182


어떤 사람들의 동작은 서투르고 부정확해짜증이 나지만 그녀의 동작은 깔끔해서 만족스러웠다. 한마디로 나는 매료된 채 서 있었다. 그러나 이 마법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니까, 뒤로 물러나야 했다. 물건을 뒤지던 그녀가 뒤돌아 나를 발견하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그녀와 나는 이 갑작스러운 충돌로 즉시 서로에 대해 완벽하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상투적인 예의는 사라지고 가면이 벗겨졌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눈을, 그녀는 내 눈을 들여다보아야 했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시는 함께 일할 수 없고, 이 세상에서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런 재앙을 일으켜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나는 화가 나지도않았을뿐더러 그녀를 떠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녀만큼 가벼운 멍에를 씌우고 끌기 쉬운 마차를 끌게 하는 고용주도 없었다.
그녀의 원칙을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근본적으로 나는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의 체제가 내게 해를 끼친 것도 없었다. 그녀는 만족할때까지 그 체제로 날 요리하겠지만 나올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화가 나지도 않았을뿐더러‘ 를 읽으며 내가 너무 화가 났는데,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엾은 루시, 그러나 의연한 루시. - P183

교실에 도착해 얼마나 웃었던가. 정원에서 그녀가 존 선생을 본게 확실하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으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의심 많은 사람이 자신의 상상으로 꾸며낸 이야기에 오도되어 벌이는 소동은 정말이지 우스웠다. 그러나 웃음이 사라지자 일종의 분노가 밀려왔고, 그것은 씁쓸함으로 이어졌다. 돌에 맞인 므리바의 물이 분출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날 저녁 약 한시간가량 나를 사로잡았던 내면의 동요만큼 이상하고도 모순된 감정은 처음이었다. 내 마음속에는 쓰라림과 웃음, 불같은 분노와 슬픔이 공존했다.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베끄부인이 나를 불신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녀의 불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복잡하고 불안한 생각이 밀려와 마음의 평화가 깨졌다. 하지만 결국 그런 동요는 가라앉
았고 다음 날 나는 다시 루시 스노우로 되
돌아왔다.

*루시의 쓰라린 분노와 씁쓸함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어 글을 읽으며 함께 울었다.
아아...루시 스노우...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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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딸을 키우다보면 언젠가 세상에 혼자 남겨질지도 모르는 아이에대한 걱정이 찾아올 때가 있다. 안쓰러움과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은짠이가 지금 아이의 모습 그대로 세상에 던져진다고 상상하기 때문일것이다. 그럴 때마다 기차 안에서 만난 어떤 엄마가 딸에게 해주던 말을떠올린다.

"터널이 무섭지. 하지만 그거 알아? 무서워도 용감해져야 해. 그리고그것도 알아? 터널을 다 지나가면 반드시 다시 빛이 나와."


*이러한 생각은 ... 흠..
자식이 여럿이어도 마찬가지일듯하다.
용감하게 잘 헤쳐나가길 바라며, 늘 지켜보고 있다!
이러면 엄마가 더 무서워! 할까봐 안보는 척해본다.
- P145

돌이켜보면 파콘의 가족들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 며느리에게좋은 곳을 보여주고 맛있는 것을 먹여주기 위해 여기저기 많이도돌아다녔다. 한국으로 돌아와 태국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똠얌꿍과 쏨땀, 그리고 파타야와 닉쿤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들은 태국을 친근하게 느끼면서도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몇 가지관광지로서의 이미지와 생활 다큐 속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 외엔 사실상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기에, 내가 가족의 일원으로 태국을 방문했던이야기를 들려주면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했다.


*상상초월 더위로 고생스런 기억이 많이 남은 방콕과 파타야 여행~~~
저렴하게 실컷 먹을수 있는 과일과 거부감없이 맛있었던 음식.... 그리고 뾰족번쩍했던 사원들...
지나고보니 그 기억들도 그립고 소중하다. 엄마 칠순여행이었기 때문에 더욱 의미있었다. - P259

<내 이름은 깐야짠>

‘짠이‘라는 애칭은 ‘예쁜 달‘이라는 뜻의 태국 이름 ‘깐야짠‘에서 따온것으로 파콘의 할머니가 지어주셨다. 파콘이 한국에서 외국인 사위이고내가 태국에서 외국인 며느리인 것과 달리, 짠이는 양쪽 나라에서 모두
‘우리 손주‘였다. - P283

국제결혼의 시작은 도전이고 사랑이었지만, 이렇게 긴 시간 인생의행로가 바뀔 줄은 몰랐다. 어떤 상황들은 나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에 딸려오는 상황들은 나의 의지와 관계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결혼을 앞두고 타지에서 살면 겪게 될지 모르는 어려움과 외로움이엄습해, 문득 잠에서 벌떡 깨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결혼 직전 쿤퍼가파콘을 통해 내게 전해준 메시지는 내 마음을 온기로 채워주었다.

"우리가 유진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사랑하듯이유진의 가족도 파콘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 P288

당분간 나는 한국에서 엄마 아빠의 시간들을 기록하며 함께 지낼것이다. 함께 지내는 동안 많이 추억하고 기록하고 싶다. 그리고 또언젠가는 태국에서 지내며 태국 가족들과의 시간을 이야기할 날이올 것이다. 만남과 이별은 늘 나를 찾아왔고, 살아 있는 한 이야기는계속되었으므로,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계속 응원할게요 ~~~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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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를 예로 들어보자. 아가시는 이 순간 헛간 교실 바로 밖에서 헤엄치고 있는 모든 물고기, 그중 한 마리를 바다에서 건져올려 껍질을 벗겨보면 신이 보낸 아주 분명한 메시지를 발견하게될 거라고 했다. "인간의 육체적 본성이..… 어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 인간이 얼마나 낮은 곳까지 내려갈 수 있고 도덕적으로 얼마나 졸렬해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가시가 충격적이라고 느낄 만큼 인간과 유사한 어류의 골격 구조(작은 머리, 척추골, 갈비뼈를 닮은 돌출 가시)는 ‘인간‘에 대한 경고였다. 어류는 인간이 자신의 저열한 충동들에 저항하지 못하면 어디까지 미
끄러져 내려갈 수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비늘 덮인 존재였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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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것>

한때 인생이 시트콤 같다고 생각한 적 있어. 스스로 떠올린 생각은 아니고 내가 겪었던 일을 하소연하듯 몇 차례 들려주었더니친구가 네 인생은 꼭 시트콤 같네, 라고 말했던 것이다. 네가 경험했다는 일들, 웃으면 안 될 것 같은 경우도 더러 있는데 솔직히 좀재밌고 기막혀. 전반적으로 기구한 느낌? 그리고 왠지 끝맛이 씁쓸해 뭔가를 영영 잃어버리거나 망한 것 같은 엔딩이라서.
내가 한 이야기들이 그렇다고?
응, 그리고 듣다보니 네가 상황을 그렇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해.
상황을 그렇게 들려주는 것 같기도 하고. - P213

이후로 나는 억울하거나 원통한 처지에 놓일 때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짜고짜 우는소리를하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어. 그러면 친구는 킥킥 웃거나 아이고, 어쩜 좋니 하는 탄식을 번갈아 내뱉으며 귀기울여주었다.
순전히 듣기만 한 것은 아니고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널거나 쪼그려앉아 발톱을 깎거나 어쨌든 자기 할일을 하면서 맞장구를 쳐주었어. 기나긴 넋두리 끝에 내가 시무룩하게 가라앉으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제 좀 후련해? 하고 물었고 내가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하면 그래, 다 지나갈 거야, 그런 게 인생이야, 하고 말했다.
그런 게 인생이야?
그런 게 인생이야.
그렇게 말해주던 친구는 이제 내 곁에 없다. 서울이 아닌 이국의 도시로 멀리 떠났다거나 세상을 등진 것은 아니고 어느 날부터인가 내 전화는 물론이고 메시지에도 일절 응답을 하지 않았지. - P214

삼년전 나는 수형과 친구에게 거의 동시에 절교를 당했다고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이 아주 가까워졌고, 내게거리를 두기로 어떤 협약 같은 걸 맺었으리라 여겼다. 망할 놈들. - P217

 한번은 삼일교 근처 바위에 나란히 앉아 쉴 때였다. 그날 내가 반년 넘게 붙들고 있던 장편소설을아무래도 포기해야겠다며 울먹이자 수형은 내 어깨를 감싸안고등을 토닥여주었다.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기도, 그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문지르기도 했지. 그렇게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둘이서 일렁이는 물결만 바라다보던 날들. 그러다가 나는 이따금수형이 친구라고 언급하는 이가 내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하다는사실을 알게 되었다.
와, 세상 좁네. 둘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 P221

그런 상태로 삼 년이나 흐른 지금, 둘에게 실제로 벌어진 일을들었을 때 나는 내심 당황했다. 대체 친구는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끊어냈던 것일까. 곰곰이 되짚어봐도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수형에게도 말했다시피 친구와 나의 우정은 알고 지낸 세월에 비해 그리 깊은 편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고등학생 시절 내내 같은 무리에 속해 있었으나 거의 성소수자 동아리 같은 모임이었다.
가장 교류가 적은 축에 속했다. 내게 친구는 언제나 친한 친구의친구일 뿐이었고 친구에게 나 역시도 그랬다.  - P223

그렇지만 수형이 모르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아, 이걸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친구는 재작년 여름에 프랑스에서 불의의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스크립터 겸 조감독으로 참여한 영화 촬영현장에서였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친구는 스태프들의 만류에도불구하고 산책을 나갔다가 발을 헛디뎌 에트르타의 절벽 아래로굴러떨어졌다. 날이갠뒤 해양경찰대가 몇날 며칠을 수색했으나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고.빈관의 덮개를 어루만지며 친구의 어머니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고 한다. 가까운 친인척들만 참석한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고. 나는 이런 소식을 장례가 끝나고 반년이 지나서야 듣게 되었다.
이걸 말해야 할까.
왠지 모르게 망설여졌다. 나만 입을 다물면 수형이 친구의 죽음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으니까.  - P225

또 시작이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생각했다. 눈을 반짝이며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는 수형을 바라보며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형은 예전부터 자신이 친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내게 이런 식으로 털어놓곤 했다. 열렬히 고백하다시피 했지. 누가물어보기나 했어? 그동안 잊고 지냈는데 너도 참 한결같구나…………그러면서 나는 수형에게 친구의 죽음을 털어놓기가 이제 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당초 말해줄 작정도 아니었지만 그것이자의가 아니라 타의의 영역으로 넘어갔다는 기분에 목덜미가 뻐근해졌다. 친구에 대한 수형의 애정이 변함없다는 것을-혹은 더 깊어졌는
지도 모른다는 것을-알게 된 지금, 내가 친
구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건 그저 수형을 난
데없이 상처입히는 일, 충격과 비탄에 빠뜨
리는 일, 울부짖게 만드는 일, 그 외에 어떤
의미도 아닌 듯했으니까. - P235

모르는 게 약이야, 수형아.
속뜻은 달라졌지만 나는 친구의 죽음을 함구하기로 다시 한번마음먹었다. 그러면서 수형이 들려준 이야기 중 친구가 시지프관해 한 말을 떠올렸다. ‘형벌 속에서 영원토록 사느니 벼랑에 몸을 던지겠다‘는 말. 폭우 속에서 에트르타의 절벽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 친구의 모습이 절로 연상되는 대목이었다. 혹시사고가 아닐 수도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친구가 자살을 할 만한결정적 이유를 나는 알지 못했다.  - P236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면서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앞만 보며 걸었고 수형도 그리했으리라 여겼다. 헤어지기 직전에우리는 손을 흔들면서 잘 가라고,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란다고, 그런 말만 했다. - P241

 전부 듣고 나서는 후련하냐고 묻거나 그런 게 인생이니뭐니 같은 충고는하지 않았고, 대체로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럴 때 친구의 미소는 꼭 이 세상 것이 아닌듯했는데 그래, 이 세상 것은 아니지. 아니고말고, 하면서 나는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내가 이렇게 보고 있는데, 느낄 수 있는데, 나를 위로하는
데, 어찌하여 이 세상 것이 아닌가. 이 세상 것이지.하게 되었다. 갈수록 그리 믿게 되었다. 그러자 수형에게도 친구는 이와 비슷한 존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한 존재가 비단 우리에게만 주어진 은총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END.


*마지막편이어서 그런건지 알수 없지만
기억에 오래 남을거 같다. 나머지 단편들도 다 좋았다. 퀴어소설이라는 인식을 거의 하지않고 자연스럽게 읽혀서,
그래서 한 편, 한 편 놀라운 작품이었다고 ..
박선우 작가 앞으로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나게 될 것같은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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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기다리기>

신년을 맞아 해돋이를 보러 가자.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네가12월 31일 오후에 서울을 떠나 부산에서 이틀을 묵고 돌아오자제안했을 때,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가 일출이었으니까. 저멀리 수평선 위로 진홍색 불덩이처럼 떠오르는 해, 잿빛구름 사이로 어지러이 활공하는 갈매기들, 일정한 간격으로 귓가에 밀려들고 부서지는 해조음,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감고 올리는 기도, 새 인생,
새 출발 뭐 그런 것들.
그러나 아니었지. - P177

우리가 사귄 지도 어느덧 팔백 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달콤한애정에 눈이 멀어 서로의 새치나 뾰루지마저 어여쁘게 여기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만날 때마다 뇌리를 스치는 의구심이랄까 의아함을-얘는 왜 이러는 거지? -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단계에 이른 것이다.  - P179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렇지만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새해랍시고 아침 댓바람부터 너를 끌고 나가 해돋이를 보는 일 따위가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지. 나는 그저 네가 원하는 일을 했으면 했다. 원하지 않는 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내게 말해주었으면 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솔직했으면 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연인일 테니까. 그렇지만네가 일출 따위 눈곱만큼도 관심 없다고, 귀찮으니 형이나 보러가라고 내게 가감 없이 털어놓았을때과연내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수 있느냐를 묻는다면… 그건 또 자신 없었다. 틀림없이 실망하겠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사람도 변했니, 하면서 주접을 떨게 될지도. 하, 그럼 이제 나는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 - P180

그즈음 나는 몇시에 잠자리에 들든 세 시간쯤 후에는 반드시 깨어나 동틀 무렵까지 불면에 시달리는 증세를 앓고 있었다. 눈이떠지면 다시금 잠을 청해도 십오 분에서 이십 분 간격으로 재차깨어나기 일쑤였고, 심할 적에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나는 짤막한 분량의 비연속적 꿈인지 망상인지 모를것에 사로잡히곤 했는데, 그 속에서 나-실제의 ‘나‘라기보다 내가 바라볼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나‘-는 언제나 사력을 다해
도망다니고 있었다. - P181

장난처럼 유야무야 덮긴 했지만 사실 그즈음 나는 너의 보금자리 마련에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법적으로 묶이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너에게 주택 마련을 위한 현금을 증여하거나 함께 빚을 갚아나가기로 약조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좀... 사랑을 압도하는 지점이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돈을 빌려주면서 차용증을 요구하기도뭣하고...…. 어째서 나는 이렇게도 속물일까. 사랑한다면,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연인에게 그냥 전 재산을 내어줄 수도 있어야 하는것 아닐까.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혹시 나는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해서 이렇게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대는 것일까. 내 안위를 가늠하고, 파국을 넘겨짚고, 골치 아픈 문
제들을 외면하고자 우스갯소리만 늘어놓
는 것일까.
돌이켜보면 나는 이러한 속내를 네게 한번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 P201

관두자.
비로소 마음먹었을 때였다.
난 말이야. 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뭐가 됐든 형이 내키는 대로 했으면 좋겠어. 내가 정말로 바라는 건 그뿐이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네 쪽을 건너다보았다. 마냥 떠넘기는구나.
뒷짐지고 물러서는구나. 연하는 원래 다 이런가 싶었는데 실은무엇이든 함께해줄 심산이었구나. 내가 원하는 것을 너는 기꺼이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구나.
그날 나는 팔을 뻗어 말없이 너를 끌어안았다. 두 눈을 감은 채네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왜 이래, 간지럽게. 너는 핀잔을 주다가이내 나를 꼭 안아주었다. 네 체온은 내 살갗 위로 뭉근히 번져왔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너의 몸. 그렇게 네 가슴에 한쪽 귀를 얹고 있으니 심장박동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쿵쿵, 쿵쿵.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나른한 감각이 엷은 베일처럼 우리 몸 위로살며시 내려앉는 듯했다. 그대로 가라앉히는 듯했다. 나는 설핏한잠결 속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내가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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